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한 달 뒤에 설정된 서해 북방한계선(NLL)이 한국군과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던 일부 섬들을 북측에 양보한 것임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공개됐다.
본지(本紙)는 3일 북한 황해도 해안에서 불과 1.5㎞ 떨어진 오작도 등지에서 공산군과 유격전을 벌였던 특수부대인 8240부대원들이 정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5월 활동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 24장을 최일도 목사로부터 단독 입수했다. 오작도는 현재 NLL 북쪽 해상에 있어 북한 영토로 돼 있으며, 지난 3월 김정은이 방문해 "명령만 내리면 적들을 모조리 불도가니에 쓸어 넣으라"고 지시했던 백령도 인근 월내도와 가깝다. 최 목사는 백령도 등 서해상 섬에서 유격전을 벌였던 8240부대 동키4부대 부부대장 출신이었던 아버지 최희화씨가 작고한 뒤 사진들을 보관해오다 정전협정 60주년을 앞두고 이날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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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 이북 섬들도 유엔군이 점령이날 공개된 사진들은 NLL이 오히려 북한을 배려해 설정됐음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의 하나로 평가된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당시 제공권(制空權)은 물론 제해권(制海權)도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서해상 섬들도 대부분 한국군 해병대와 유격부대 등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6·25전쟁 발발 이전 우리나라가 관할하고 있던 백령도·연평도 등 38도선 이남의 섬들은 물론, 북한이 관할했던 석도, 용도, 초도 등 38선 이북의 섬들도 유엔군이 관할하고 있었다.
- 미 극동군사령부 산하 특수 유격부대인 8240부대원들이 오작도(烏鵲島)를 사수하기 위해 참호를 파고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채 경계를 서고 있다.‘ (단기)4286.5.27.’이라는 표시는 1953년 7월 정전협정 두 달 전에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뜻한다. 오작도는 북한 본토에서 1.5㎞ 떨어진 섬이다. 사진 뒤쪽에 북한 황해도 해안이 보인다. /최일도 목사 제공
정전협정 발효 시 육지의 경우 유엔군과 공산군 점령지역을 기준으로 DMZ(비무장지대) 경계선이 설정됐던 원칙을 바다에도 적용하면 오작도 등도 우리 영토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53년 8월 30일 남북 간의 우발적 무력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NLL을 설정하면서 백령도 등 서북 5개 도서와 북한지역의 중간선으로 결정했다.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폭 3해리 영해 원칙에 따라 서북 도서와 북한 지역의 대략적인 중간선을 기준으로 하고, 한강 하구로부터 백령도 서북쪽까지 12개 좌표를 연결해 설정한 것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클라크 사령관은 유엔군이 점령했던 섬들을 모두 고수할 경우 북한지역 항구들이 봉쇄될 수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해 유엔군이 관할했던 일부 섬들을 북측에 양보했던 것이고 오작도도 그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당시 해군력이 궤멸돼 거의 전무(全無)한 상태에 있었던 북한으로선 NLL이 울타리가 돼 유엔군 측의 해상봉쇄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8240부대는 정전협정에 즈음해 유엔군 지시에 따라 현재의 서해 5도를 제외한 나머지 섬에서 모두 철수했다. 북한은 NLL 설정에 따라 NLL 이북의 섬들과 해역을 얻을 수 있었다. 이 해역에서 해군 함정과 민간 선박의 자유로운 항해 및 어로활동을 보장받게 됐던 것도 북한이 얻은 실리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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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20년 동안 NLL 이의제기 안 해북한은 NLL이 설정된 뒤 20년 동안 아무런 이의제기도 하지 않다가 1973년부터 NLL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1959년 북한 조선통신사가 공식 발간한 ‘조선중앙연감’은 NLL을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해 이를 인정하기까지 했다.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지난 3월 11일 서해 월내도 방어대를 시찰한 뒤 목선을 타고 떠나는 모습. 월내도는 8240부대가 정전협정 전까지 전초기지로 삼았던 섬이다. /조선중앙통신
1963년 5월 개최된 군사정전위 회담에서 북한 간첩선의 침투 및 격퇴 위치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을 때 북한 측은 “북한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넘어간 적이 없다”고 언급해 NLL을 사실상 인정했다. 1984년 여름 발생한 우리의 홍수 피해에 대해 북측이 수해 복구 물자를 지원해줄 때도 양측 호송단이 백령도 및 연평도 인근 NLL 선상에서 상봉해 수송 선박을 각각 인계·인수, NLL을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2년 체결·발효된 남북 기본합의서 불가침 부속합의서에서도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해 NLL이 해상 불가침 경계선임을 확인한 적도 있다.
하지만 북한은 1973년 10월부터 11월까지 43차례에 걸쳐 NLL을 의도적으로 침범하는 ‘서해사태’를 일으킨 뒤 NLL 무력화 공세를 계속해 오고 있다. 남북 군사실무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문성묵 전 국방부 군비통제 차장은 “NLL은 우리와 유엔군이 북한에 양보한 것이고 당시 북한으로선 고마웠던 해상 경계선이라는 것이 다시 한 번 입증됐다는 데 오작도 사진 공개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停戰 60주년 기획] 서해섬 용사들, NLL 아래로 내려오라 하자 "피로 지킨 곳을…" 통곡
입력 : 2013.07.04 03:00 | 수정 : 2013.07.04 03:25
[6·25때 서해섬을 거점으로 유격戰 펼쳤던 '8240부대' 부부대장 故 최희화씨 스토리]
황해도서 태어나 反共투사로… 중공군 개입후 섬에 전투 기지, 가족들도 데려와 함께 살아
공식 군번 없는 군인으로 北 내륙 코앞에서 적진 교란… 낙하산 타고 北으로 침투도
국방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는 최근 미국 측으로부터 6·25전쟁 당시 극동군사령부 산하 유격부대인 8240부대 관련 작전명령서를 입수했다. 이 중 '최희화를 부산에 보내니 교통편을 제공하라'는 내용의 문서가 나왔다. 군번이 없고 북한 말투를 쓰는 유격대원을 아군이 의심할까 봐 일종의 '통행 증서'를 발급한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최희화씨의 아들 최일도 목사는 "전사(戰史)에 기록이 없어 아버지 친구 분들로부터 말로만 듣던 아버지 참전 사실을 이렇게 확인하게 되다니 꿈만 같다"고 했다.
- 停戰 두 달 앞두고 오작도에서… 최일도 목사의 아버지 최희화씨가 정전 2개월을 앞두고 북한 황해도 근처 오작도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당시 미군 측이 컬러 사진을 찍어 최씨에게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사진은 대남 선전용 웹사이트인‘우리민족끼리’가 트위터 계정에 공개한 오작도 모습. /최일도 목사 제공·우리민족끼리 트위터 사진
최희화씨는 1922년 2월 5일 황해도 장연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씨는 일곱 살 어린 현순옥씨와 1948년 5월 5일 결혼했다. 현씨는 황해도 송화군 대지주의 딸이었다고 한다. 84세인 현씨는 본지 인터뷰에서 "북한군이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빠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탄광으로 보내 모두 행방불명이 됐다"고 말했다.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6·25전쟁이 터진 1950년 10월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평양까지 진격하자 최씨 등 장연 지역 반공 청년들은 자체 치안대를 조직해 북한군 토벌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1951년 1월 중공군이 개입해 유엔군이 서울 이남까지 후퇴하자 장연 치안대는 백령도로 철수했고, 그해 3월 8240부대 소속 동키 4부대(일명 백호부대)가 됐다. 최씨는 이 부대의 부부대장이 됐다. 동키부대원들은 대부분 북한 출신으로 섬에 가족들을 데려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동키 4부대는 황해도 지역 섬인 월내도·육도·마합도·초도 등에 기지를 두고 활동했다. 내륙에서 1.4㎞ 떨어진 육도를 전초기지 삼아 유격전을 펼쳤다. 1952년 1~11월 적 1832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1951년 9월 월내도 서남쪽 해상에 추락한 영국 전투기의 조종사를 구출하기도 했다.
- 北에 4번이상 침투한 대원에 '휘장'… 8240부대원 수백명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일부 부대원들이 단상 앞에서 가슴에 휘장을 달고 꽃다발을 들고 서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8240부대는 적진에 침투해 유격전과 첩보작전을 수행했다”며“워낙 전사자와 실종자가 많다 보니 네 번 이상 침투해 생존한 대원에게 미군 측에서 휘장을 달아줬다”고 말했다. 이 사진은 1952년 3월 월내도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최일도 목사 제공
최씨는 서해 지역뿐만 아니라 낙하산을 타고 적진에 침투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최 목사가 어릴 때 국군의 날 행사에서 군인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을 TV로 보고 "우와" 했더니 최씨는 "나는 저런 거 북한 하늘에서 스무 번은 넘게 했다"며 웃었다고 한다.
부인 현씨는 "남편에게 들은 무용담 중 딱 하나만 기억난다"고 했다. "전투 중 인해전술로 나오는 중공(중국)군을 당할 수 없어 한 번은 죽은 척 누워 있었대요. 그랬더니 중공군이 시체들을 밟으며 살았나 죽었나 확인하더래. 자기도 많이 밟혔는데 감쪽같이 속이고 살아남았다는 거야."
전사에 따르면 동키 4부대는 휴전을 한 달여 앞두고 유엔군 지시에 따라 월내도, 육도 등에서 대청도로 철수했다. 최씨는 "8240부대원들은 당시 전우들의 피로 사수한 섬들을 이렇게 그냥 내줄 수 없다며 통곡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씨는 "전쟁이 끝나면 민간인 신분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자신의 약속대로 정전 이후 8240부대에서 나왔다. 최 목사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71년 7월 10일 최씨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최씨는 가족에게 "맥아더 사령관에게 상으로 받았다"는 권총 한자루를 남겼다. 부인 현씨는 "남편 사망 직후 불법 무기류를 자진 신고해야 한다고 하길래 권총을 명동파출소에 맡겼다"고 했다. 최 목사는 "아버지 권총을 꼭 되찾아 영전에 바치고 싶다"고 했다.
☞8240부대
6·25전쟁 당시인 1951년 1월 창설돼 서해 도서 지역과 황해도 내륙, 동해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던 유격부대다. 1948년 만들어진 대북 첩보부대인 켈로부대도 1951년 11월 이 부대로 흡수됐다. 미 극동군사령부 지휘를 받았으며, 부대 특성상 공식 계급과 군번이 없는 부대였다. 부대 인원이 최대 3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부대원 20%는 여성으로 북한에 침투해 첩보전을
[停戰 60주년 기획] "아버지는 총상을 아름다운 흔적이라고 자랑… 이름없이 피 흘린 분들 기억하는 계기됐으면"
입력 : 2013.07.04 03:00
아버지 사진 공개 최일도 목사
최일도(56·
사진 왼쪽) 목사는 3일 본지 인터뷰에서 "아버지(최희화씨)가 보관하고 있던 사진이 그렇게 중요한 줄 몰랐다"고 했다. "사진에 기록된 '오작도'가 서해 북방한계선(NLL) 아래 있는 5개 섬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 (사진 오른쪽)최일도 목사의 아버지 최희화씨가 큰딸 순열씨를 안고 웃고 있다. 8240부대 동키4부대 부부대장이었던 최씨는 북한 고향에 남아 있던 부인 현순옥씨와 갓난아기였던 큰딸을 섬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최일도 목사 제공
노숙인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오래 해 '밥퍼목사'로 불리는 최 목사는 "미국 측에서 8240부대 사진을 찍어 부부대장이었던 아버지에게 전달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그는 "1971년 7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40년 동안 잘 보관해 왔다가 2년 전 이사할 때 잃어버렸는데, 최근 어머니 다락방에서 다시 찾았다"고 말했다.
최씨는 "아버지 오른쪽 종아리에 엄지손가락만 한 총상이 있었는데 아버지께선 '흉터'가 아니라 '아름다운 흔적'이라고 자랑하시곤 했다"며 "이번 사진 공개가 알아주는 이 없어도 명예롭게 싸운 8240부대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