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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1)
마 27:11-19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 설 교 >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마 27:11-26 / 김철현목사
미국의 위대한 경제 대통령하면[프랭클린 루즈벨트]를 주저 없이 꼽습니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경제 대공황을 극복한 대통령>으로 기억하지 그가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악성[베토벤]은 청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베토벤을 청각장애인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작곡가 중의 작곡가로 기억할 뿐입니다. [링컨]전 미국대통령도 그를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무학자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노예를 해방한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할 뿐입니다. [존 번연]하면 <천로역정>을 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감옥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으로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이외에도[아인슈타인]을 지진아로[에디슨]을 무학자로 기억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만 최고의 과학자와 발명가로 기억할 뿐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남다른 위기를 겪으면서 그 역경을 이겨낸 인간승리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이 처럼 인생에는 위기가 오고 그것을 새로운 기회로 만드는 turning point즉<전환점>으로 삼아 극복한 사람들은 훌륭한 삶의 자취를 남기지만 그 위기에 굴복하고 만 사람들은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래리 엘 맥스웨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겪는 위기에는 대략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첫째는<신체적 위기>입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병에 걸린다든가 혹은 죽음에 직면했다든가 하는 육체적인 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자아의 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 의식의 상실입니다.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스스로를 생각하면서 왜사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괴멸감에 빠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허탈해지면서 매사에 자꾸만 절망으로 치닫는 삶의 위기를 자아의 위기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위기는<인간관계의 위기>가 있습니다. 대인 관계가 단절되면서 오는 고독입니다. 내가 잘못해서이든지 아니면 상대방의 잘못이 크든지 어떠한 이유로든지 인간관계에 금이 가서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경우가 있는데 이를 곧 인간관계의 위기라 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 번째의 위기를 겪고 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환경적 위기>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요새 우리가 아는 대로 공해라든가 자연 파괴라든가 하는 것으로 오는 환경적 위기입니다. 오존층이 파괴 되었다고 합니다. 황사가 불어온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환경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결정적으로 가장 무서운 위기는<영적인 위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지러질 때, 이것은 마지막입니다. 신앙의 관계, 믿음의 관계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 때는 바로 총체적 위기입니다. 이 신앙의 위기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영적 위기 속에서 올바른 선택으로 신령한 것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잘못 선택하여 악한 것들로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신체적 위기가 있고 자아의 위기도 오고, 인간관계의 위기도 반드시 있고, 환경적 위기 속에 산다고 하지만 그때마다 현명하게 잘 선택하여서 이것들로 인하여 영적인 위기까지 이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실패입니다.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선택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만 가룟 유다는 자신의 욕망을 위한 길을 택하므로 악한 길로 갔던 사람입니다. 또한[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습니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 곁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따랐었는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기만 해도 힘이 되련만 제자들은 모두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는 구경꾼들 틈에 끼여서 붙들려가는 예수님을 멀찍이서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3년 동안 예수님을 좇으면서 예수님의 행동도 지켜보았습니다. 가르침도 다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한선택으로 주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영적 위기 앞에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는 한 인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 베드로는<예수님을 부인한 제자>라는 낙인을 후세에까지 떨쳐 버리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회개는 했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제자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았겠습니까? 위기 앞에서 그의 선택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위기의 상황이든, 고난의 순간이든,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또한 그럼으로써 애석하게도 다른 어느 한쪽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위기가 곧 선택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숯과 다이아몬드는 그 원소가 똑같은 탄소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탄소라는 그 똑같은 원소가 하나는 아름다움의 상징인 다이아몬드가 되고 다른 하나는 보기에 보잘 것 없는 검은 숯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이라는 원소가 있습니다. 그 원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것을 다이아몬드로 만드느냐 숯으로 만드느냐는 각각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인생은 다이아몬드라는 아름다움을 통째로 선물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가꾸는 사람에 따라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고 숯이 될 수도 있는 그 씨앗을 선물할 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선택이 나 자신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 생명을 버리는 큰 희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나를 희생한 것이라면 더 가치가 있는 인생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아름다운 선택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도 보면 선택에 대한 역사가 무수히 많습니다. 가나안에서[아브라함]과 조카[롯]사이에도 선택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야곱]과[에서]의 경우도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이들의 장래가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르다]와[마리아]자매가 선택의 문제를 겪었습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훌쩍 떠나버렸던[데마]가 그랬고, 갈라디아로 떠난[그레스게]가 그랬고, 달마디아로 떠난[디도]가 그랬습니다.(딤후4:10) 선택에는"어떤 것이 좋으냐?"하는 가치 판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그 가치를 무엇에다 두느냐 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영적 위기 앞에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은 불신앙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로마군대에 잡히셔서 빌라도 앞에 심문을 당하시는 장면입니다. 때는 유월절 명절이었고 법이라기보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로마정부의 정책으로 전례에 따라 명절특사로 죄수 하나를 석방해 주는 날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백성들에게[예수님]과 죄수[바라바]중 누구를 석방시키기를 원하느냐고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하나 같이[바라바]를 석방해야 된다고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한 목소리로 외쳐대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오판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오판 앞에 가부간(可否間)에 결정해야 할 순간이 얼마든지 많은 우리들을 생각해야합니다. 특별히 신앙적인 선택, 즉 영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십자가냐? 세상이야?>,<복음이냐? 현실이냐?>의 문제 앞에 늘 갈등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신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연약한 예수 그리스도냐? 아니면 큰소리치며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한 세상과 나 자신을 위한 일을 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실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을 또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저지르고 말 것입니다. 오늘 영적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본문에서 그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의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우리는 그 일에 동참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먼저는 감정에 의존한 선택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까지 오게 된 과정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게 되면"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그랬습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고발했습니까? 시기심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대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다툼이 일어났던 것도 아닙니다. 종교적인 문제 그 이전에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가 이런 고발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면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진리 앞에 삶이 변화되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지금까지 자기들이 그렇게 외치고 가르쳐도 보지 못했던 변화입니다. 사실이지 이미 그들은 그럴만한 인격도 잃었고 존경을 잃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느 백성이 그들을 따르겠습니까? 이렇게 자기들의 위치가 형편없이 추락한위기 앞에서 한다는 짓이 예수님이 백성들을 선동한다고 중상모략하고 예수님의 죽음에 결정적인 동조를 하는 패거리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 자기의 인격적 결함이나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를 먼저 생각하지 못하고 남들을 욕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기도하지 아니한 감정과, 기도하지 아니한 상황의 선택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기도할 일입니다. 그래야 내 인격도 올바로 되고, 그래야 존경도 받는 것이고 그래야 영적 위기 앞에 신앙적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생존경쟁에 살다보면 나보다 앞서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열심을 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아서 완악한 마음과 인격으로 무조건 비난하고 모함하는 저질적인 속성을 가지고는 사실선택에 있어서 분별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정에 의존한 순간의 선택은 곧 후회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일이 되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사실은 무지에 의한 선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유대백성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얼마나 세뇌를 당했는지 보세요. 21절에"둘 중에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한결같이"바라바로소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어"그러면 예수는 내가 어떻게 하랴?"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한 목소리로"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리라"고 마치 짜 놓은 각본을 합창하듯이 거침없이 대답합니다. 23절에는 더욱 소리 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건 <구호>입니다. 입을 맞추어 함께 소리 내는 것을 구호라고하지 않습니까? 철저히 선동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이성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직전까지 예수님 곁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무지해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야말로 <무지의 선택>입니다.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예수를 모르고 신앙생활 합니다."예수를 안다면 저런 말을 하지 않을텐데...","예수를 안다면 저런 행동은 감히 할 수 없을텐데...","정말 저 사람의 생각과 행동 속에 예수가 있는 것일까?"싶을 정도로 무지하면서도 그걸 몰라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예수를 보지 못하고, 뜬 구름만 잡으면서 망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없고, 예수가 없는데 무슨 신앙생활을 한다고 큰소리칩니까? 이건 망조입니다. 오늘 이 유대백성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아 알아야했습니다. 자기들을 위하여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위에서"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기도하신 예수가 자기들의 가슴속에 있음을 한번만이라도 확인했어야 했습니다.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에 놀아 날 것이 아니라 숱한 채찍과 조롱과 멸시 속에 피를 쏟으시며"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애타게 부르짖는 그 예수님의 음성을 미리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지했습니다. 신앙에 무지하면 선동당합니다. 그럴싸한 언변이나 감정을 자극하는 한 마디에 홀딱 속아 넘어가서 똑 같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찬양은 합니다."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그러나 정말 왜 주님이 갈보리로 가야하셨는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아십니까? 신앙에 무지하고 내 자신에게만 민감했던 나 때문에 갈보리로 가셨습니다. 믿음이 없이 세월만 보내면서 조금의 변화도 없이 여전히 감정적으로만 살아가는 나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을 여러분은 다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또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무지의 선택, 감정의 선택으로 순간순간을 위기로 몰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주간입니다. 그 옛날 제자들은 영적위기 앞에 하나같이 주님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와 세상을 선택하여 주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십자가와 현실 앞에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신앙과 나 자신 앞에 어떤 선택을 하며 나아가겠습니까? 바라건대 가치 없는 인간의 감정에 의존하지 말고 주님 십자가지심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가치 있는 것에 여러분의 영적선택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최악의 선택
마 27:11-26 / 홍문수목사
우리 인생은 선택과 그 결과로 만들어져 갑니다. 물론 우리 인생에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부모, 성별, 인종, ... 그러나 그 외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닥치는 것들은 얼마든지 우리가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의식주 문제, 진학 문제, 취직 문제, 결혼 문제, 심지어는 신앙 문제조차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문제들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선택의 문제들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 앞에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됩니다. 선택은 우리의 권리인 동시에 책임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기회와 자유 의지를 부여받았다는 점에서는 권리이고, 그 결과를 떠안아야 된다는 점에서는 책임입니다. 이 선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택의 과정이 말처럼 그리 쉽지 않습니다. 특히 예상치 못한 문제가 갑자기 닥쳐오면 난감해지기도 하고, 얼떨결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사소한 문제라면 잘못된 선택을 해도 대수롭지 않겠지만, 중요한 문제의 경우라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에 불이 났답니다. 그 집 여주인이 겁에 질려 혼자 뛰쳐나왔다가 갑자기 불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귀금속이 든 상자를 안고 나옵니다. “휴, 이제 살았다. 귀고리, 목걸이, 팔찌, 보석을 다 찾았다. 천만다행이네.” 그런데 얼마 뒤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여보세요! 저기 창가에 아이들이 있어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여주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그 아이들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순간 올바른 선택으로 아이들을 구했다면 평생 가슴의 상처를 안고 후회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큰일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역사 상 가장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 그리고 유대인들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최악의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큰 비극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오늘 이 시간 그들의 잘못된 선택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우리 인생길에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선택으로 인해 늘 승리와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최악의 선택을 한 사람들 : 빌라도와 유대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특별히 이스라엘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거부 하고 배척하고 핍박하였습니다.
① 잘못된 선택 :
예수님이 말씀을 전파하시고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자 일반 대중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대인 중에서 특히 기득권을 가진 대제사장과 장로 등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고 시기합니다. 그런 나쁜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심을 합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 국회에 해당되는 산헤드린 공회를 밤중에 급히 소집합니다. 물론 불법이죠. 그리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사칭했다며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결의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어느 정도 자치권을 보장받기는 했지만, 사형 선고권과 사형 집행권은 갖지 못했습니다. 고민하던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부리나케 예수님을 이끌고 빌라도에게 갑니다. 그리고 사형시켜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그들이 덮어씌운 죄목을 바꿨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로마 법 상으로 신성모독죄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활하게도 사형죄에 해당하는 국가반역죄로 죄목을 바꾸게 된 겁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아무리 예수님을 심문해 봐도 죄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석방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군중들을 충동질시켜 빌라도에게 항의합니다. 총독으로서는 식민지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면 골치 아픕니다. 잘못되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고, 심한 경우 총독 자리에서 파면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는 타협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합니다. 그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을 잘 보면, 빌라도가 석방하려고 자기 나름대로는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무죄한 사람을 유죄로 선고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유대인들과 타협하고 맙니다. 그 과정을 잠시 살펴봅니다.
15절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사면하려고 합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의 명절 때 백성들이 요구하는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이용해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라는 죄수를 내세웁니다. 바라바는 열심당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로마에 반역행위를 하고 살인죄를 지어 십자가 사형에 선고된 악명 높은 인물입니다. 빌라도는 내심 유대인들이 설마 그런 바라바를 사면시키라고 요구하지는 못하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사면시키라고 요구합니다.
한편 19절을 보면,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시켜 메시지를 전합니다.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이 의인이니까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겁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 부인은 클라우디아 프로크라라는 여인인데, 예루살렘에 온 이후 유대교로 개종하였고, 은밀하게 예수님을 믿던 여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전승의 신빙성이 확실치 않더라도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죄 없는 분임을 그 여인도 잘 알고 증거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가 타협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계속 예수를 못 박으라고 난리를 칩니다. 22절~23절 보면, 소란이 점점 커져서 이제는 아예 민란 직전의 상황까지 갔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슬그머니 타협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24절 보면, 손을 씻으며 자신은 전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제스처는 유대인의 관습으로 자신은 죄가 없고, 아무 책임도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책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자기가 재판관인데 책임을 모면할 수 있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천추에 씻을 수 없는 큰 죄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유대인들의 태도입니다. 빌라도가 이렇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자 유대인들은 얼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할 욕심으로 무서운 말을 내뱉습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 ” 기가 막힌 말입니다. 자신들과 후손들이 책임질 테니까 빨리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나 하라는 겁니다. 말이 싸가 되는데 그렇게 함부로 말한 겁니다. 빌라도도, 유대인들도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쳐 놓고 살인강도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② 선택의 결과 :
빌라도는 제 딴에는 아무 죄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결코 그 책임을 모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무서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수년 후 로마 중앙 정부의 소환 명령을 받고 고민하다가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보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는 자살로써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무섭게 뒤쫓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눈앞에서 직접 뵐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심문하면서 예수님이 죄가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기이한 분임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영접했다면, 최소한 타협하지 않고 공의를 지켰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다른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셨겠죠. 어쨌든 너무 안타깝게도 그는 자살함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역사 상 두고두고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앞으로 인류 역사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의 죄악이 만천하에 정죄될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 ” 이렇게 그와 그의 후손들은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말대로 됐습니다. AD 70년 디도(Titus) 장군의 로마 군대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당시 명절에 모인 유대인 들 중 110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그 숫자면 대도시인데, 그 고대에 그렇게 많은 수가 학살당한 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그 후 그들은 오랜 세월 각 나라에 흩어져 유랑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근세에는 나치 독일에 의해 6백만 명이나 학살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은 역사 상 가장 비참한 일을 당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는 돌아오겠지만 아직도 강퍅하게 버티고 있는 그들은 여전히 고난 중에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세계의 대표적인 분쟁 지역이요 화약고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은 그 중요한 순간에 최악의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두고두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경적, 역사적 진리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근신해야 합니다.
[2] 최선의 선택 : 믿음의 선진들과 우리들의 모습
빌라도와 유대인들의 최악의 선택은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됩니다. 우리는 최악이 선택이 아닌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① 세상보다 예수님을 선택하기 :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은 일생일대에 최선의 선택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영생과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둘로 나눕니다. 십자가를 믿는 자는 천국 백성, 십자가를 거부하는 자는 지옥 백성이 됩니다. 요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적 선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 인생의 영원한 운명이 갈라집니다. 영영 만날 수 없는 길로 갈라지게 됩니다. 백두산 꼭대기에 천지가 있습니다. 물이 하나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동쪽으로, 서쪽으로 갈라져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동쪽은 두만강을 거쳐 동해로 흘러갑니다. 서쪽은 압록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갑니다. 똑같은 곳에 있던 물이 이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각각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을 선택함으로 영생과 천국을 얻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순간의 이익보다 영원한 가치를 선택하기 :
사람들은 육적인 존재이므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이익만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영원한 것, 육신의 것보다 영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사실을 명심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됩니다. 고후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③ 불의한 이익보다 의로운 고난을 선택하기 :
우리는 연약한 존재인지라 고난 받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편하자고 이익을 보겠다고 불의를 행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장은 이익을 보는 것 같지만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요 크게 손해 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를 위한 고난을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늘의 상을 받는 지름길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마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④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선택하기 :
사람들에게는 군중 심리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무조건 거기에 뭐가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넓은 길이라도 무조건 바른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성경에 이런 선택으로 승리한 믿음의 선진들이 수두룩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 얼마든지 십자가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죽음이었지만 그 후에 부활이 있었고, 승천과 하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존재가 그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주(主)로 고백하게 된 것은 최고의 승리입니다.(빌2:5~11 참조)
모세는 애굽 궁궐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광야의 고난을 선택했습니다.(히11:24~25) 그러나 그것은 역시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모세는 구약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고, 아마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의 영광에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자 사자 굴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대제국의 1등 총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풀무 불을 선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좋은 조건들을 배설물처럼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아는 복음의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러한 선택에 주님께서 반드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셨음을 확신했습니다.(딤후4:7~8 참조)
성경 외에도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간증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본래 누드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전시회를 열었는데, 한 그림 앞에서 청년들이 킬킬거리며 음담패설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예술을 한다며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누드화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림만 그리기로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돈을 포기하는 선택이었습니다. 그의 부인도 적극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는 빈곤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역사에 남는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선택이 위대한 인생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석유 왕 록펠러를 아시죠? 그의 인생에 관한 미담이 많이 있지만, 한 마디로 표현하면 기적의 생애였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대표적인 3대 기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가난했던 사람이 가장 큰 부자가 된 것, 가장 많은 돈을 남에게 나눠준 것, 그리고 98세까지 건강 장수한 것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들은 그의 신앙적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주일은 철저하게 지킬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 등으로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결을 지킬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술과 담배를 일절 입에 대지 않았고, 춤 방에 드나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성경 읽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말년에 눈의 피로를 느끼자 심지어 성경 읽어주는 비서를 채용할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역시 위대한 선택이 위대한 인생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의 오늘의 삶은 어제까지 나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오늘 내 모습이 만족스럽다면 좋은 선택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혹 내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잘못된 선택을 하며 살아온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나의 내일의 모습이 어떻게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매 순간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이 사순절에 십자가를 묵상하시고, 그 가운데 지혜로운 선택의 비결을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늘 최선의 선택으로 최선의 미래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선택은 위대한 인생을 만든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악한 세상
마 27:11-31 / 최영기목사
보통 때 설교에서는 본문을 읽고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을 찾아서 하나 둘 셋 번호를 먹여 상고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재판 받는 사건은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 무엇인가 마땅치가 않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훈을 찾기보다 주님께서 겪으신 재판의 사건을 같이 경험하는 것을 설교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당시의 사건의 배경 등을 먼저 살펴보고 그 사건을 영상으로 보는 것을 반복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짤막한 교훈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불경죄를 지었다고 얽어 묶어서 죽여야 마땅하다고 판결을 내렸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사형권이 없었습니다. 사형권은 로마 총독이 쥐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총독 앞에 데리고 가서 사형 선고를 내리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을 시저에 저항하는 반란범으로 몰아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왕이라고 했다고 죄목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보기에도 예수님은 반란의 주동범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제가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다시 앞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네가 그리스도이냐고 물었을 때에 사용했던 같은 표현을 써서 답하십니다. 왕은 왕이지만 네가 생각하는 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재판장이니까 답을 했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의 고발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어라고 대답하든지 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어떤 수를 써서든 지 죽일 방법을 찾을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형 죄로 몰려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살아나려고 자신을 극력 변호하는데 이처럼 침묵하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는 무척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당시 명절에는 죄인 하나를 특사하는 관례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유대인 지도자들의 시기에 의하여 무고를 당하고 있음을 눈치 채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풀어줄 방도를 강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역사상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빌라도는 아주 난폭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총독이 부임할 때에는 당시에 깃발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를 상징하는 독수리 형상을 깎아만든 것을 장대에 달고 그 위에 총독을 상징하는 조각을 붙여서 행진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를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전 총독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우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조각이 붙은 장대는 성밖에 놓고 입성을 하는데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그냥 들고 들어와서 부임 초기부터 큰 소란이 있었던 것을 역사책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던 것은 의협심보다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괘씸하고 골탕을 먹이기 위해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말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새벽 일찍부터 사무를 시작합니다. 빌라도가 출근한 후에 아내가 흉한 꿈을 꾼 모양입니다. 상황이 긴급하다고 생각되어서 보통 그러는 법이 없는데 재판 도중에 말을 넣어서 예수님과는 상관을 하지 말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명절에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관습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였던 것은 분위기를 잘못 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이처럼 두려워하여 죽이기 원하는 사람이고 더구나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 국민들의 많은 지지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강도인 바라바를 놓아줄까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를 놓아줄까 선택을 주면 군중들이 예수님을 선택할 것이라고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오판을 했던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지금은 이른 아침입니다. 바라바는 흉악법이었지만 현재로 말하자면 정치 테러범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일반 예루살렘 시민들이 아니라 바라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6절에서 바라바를 '그들에게' 놓아주었다고 하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군중들이 바라바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빌라도는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바라바를 놓아준다는 의미는 예수님은 처형을 당한다는 의미인데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싶어서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할까?"고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빌라도의 오판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장로들은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처형하도록 말하도록 구슬렀습니다(20절). 압제 정권의 우두머리는 예수님을 풀어주자고 하고 유대 지도자들은 바라바를 풀어주자고 할 때에 유대 군중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군중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빌라도는 더 이상 도리가 없는 것을 알고 물을 갖고 손을 씻으면서 무고한 사람이 죽는 것은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영어 표현에 washing my hands라는 표현이 있는데 손을 뗀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 시작된 표현입니다. 그때에 군중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피 값을 치르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말은 막 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요구한대로 이스라엘은 40년 후에 로마의 공격을 받아서 나라는 없어졌고 민족은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졌고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라고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기 전에 채찍질을 합니다. 그러나 이 채찍은 보통 채찍이 아니고 가죽끈에 뾰죽뾰죽한 짐승 이빨이나 납덩어리는 달아서 등을 치면 등이 쫙 찢어지는 채찍입니다. 십자가에 단 후에 속히 죽도록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인 것 같은데 이 매를 맞고 나면 살이 다 찢어져서 뼈까지 드러나고 이 매를 맞다가 죽는 사람도 허다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매를 맞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준비하는 동안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데리고 놀았습니다. 악의가 있어서보다 무료하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 왕들은 보라색 망토를 입었습니다. 장로들이 걸치는 망토 색깔이 비슷하니까 어디에선가 낡은 것을 갖다 입히고 면류관 대신에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우고 왕권을 상징하는 홀 대신에 갈대를 쥐이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Ⅰ. 세상은 악하다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세상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죽여버리려는 유대인 지도자들이나, 무죄인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는 빌라도나, 예수님이 무죄인 것을 짐작을 했을텐데도 강도인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외치는 군중이나,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을 기다리는 예수님을 데리고 노는 군인들이나 다 악합니다. 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이러한 일이 2000년 전에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연수도 오신 김정명 목사님은 맑은 분입니다. 이웃이 신장이 나쁘다고 했을 때에 끼고 있던 장갑 한 짝을 손시려 하는 사람에게 주듯이 신장을 기증하였습니다. 누가 아기를 낳아서 교회 앞에 갖다 버렸을 때에 고아원에 갖다주는 대신에 입양시켜서 아들로 키우는 분입니다. 이분이 순복음 교단이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교단을 정화시켜 교단을 살려보자는 의도로 작년데 총회장 후보로 출마를 하였습니다. 보통 출마한 사람들이 하읏이 선거 운동을 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는데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작년 기도를 하나님이 금년에 들어주셨는데 생각지도 않았는데 다시 총회장 후보로 출마할 기회가 생겼고 작년처럼 기도와 금식에 의존했는데 당선이 되었습니다. 김 목사님의 개혁을 두려워하는 수구 세력은 힘을 합쳐 총회장 당선을 저지하려했지만 개혁을 원하는 목회자님들이 많아서 당선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 세력은 포기하기 아니하고 교단 선거위원회의 힘을 빌어서 부정 선거 운동을 했다는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아서 총회장 권한 해제를 선언했다가 하루만에 번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포기하기 아니하고 총회장 직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가진 방해 공작을 다 벌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에게서 예수님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처형하려는 악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 유죄 판결을 내린 빌라도 같이 악한 사람도 현재 많이 있습니다. 대한 민국 군사 정권 때에 정부의 시종이 되어 대통령 눈에 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투옥시키기도 하고 죄 없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한 법관들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학대한 로마 군인과 같이 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 군대 신병 훈련소에 입대하거나 끝내고 새 부대에 입대했을 때에 엎드려 뻗쳐 를 시키고 몽둥이질을 해대는 고참들이 모습에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학대하던 군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인간은 악하고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1. 핍박을 각오해야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들은 핍박받을 것을 각오해야합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경고를 하셨습니다(요 15:18). 예수님을 핍박한 세상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냥 둘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핍박을 당하면 기뻐해야 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는 천국에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마 5:11-12). 또 한가지 이유는 이러한 핍박이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요 15:19).
2. 핍박은 영광이다
하나님 백성의 아름다운 모습은 평상시에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은 핍박 가운데에 빛이 납니다. 여러분들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손양원 목사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분은 6.25 때에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있었을 때에 공산게릴라에 동조하는 학생들에 의하여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순천 경찰서 뒤에서 무수하게 매질을 맞고 총살을 당한 것입니다. 국군에 의하여 여수 순천 지역이 회복되고 주모자들이 체포되었을 때에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사형 형장에서 수양 아들로 삼겠다고 선언하여서 목숨을 건져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손 목사님의 사랑은 아들을 잃었다는 비극 가운데에서 아름답게 빛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역경을 허락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두움과 역경 가운데에 빛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목회자 코너에 언급했던 구자신 형제.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북미주 유학생 수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도록 중보기도로 섬기기 위하여 운전하고 오다가 하이웨이에서 차가 몇 번을 뒤집어져서 자신이 발을 다치고 아내는 혼수 상태에 빠지고 막내 아들이 중태에 빠졌습니다. 그러한 역경 가운데에서 구 형제는 자신과 아들을 치료해주는 병원을 축복하여 두 병원에 영적 각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자 아들의 장기를 기증하여서 두세 어린이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구 형제의 헌신과 사랑은 차 사고라는 역경 속에서 아름답게 빛났던 것입니다.
반짝이는 다이어 반지는 까만 벨벳 위에 놓였을 때에 더 찬란하게 빛나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핍박과 역경이라는 어두움을 배경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있고 이유 없는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낼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역경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Ⅱ. 단호해야 한다
오늘의 사건을 읽으면 느끼는 것은 사람은 단호할 때에는 단호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방면시키고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으로 역사 기록에 남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사도 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그의 이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으로 거론됩니다. "그 외아들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보통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를 보십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으로 충분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단호해야합니다. 일제 치하에서 신사 참배를 강요당했을 때에 많은 목회자들이 이를 거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고 순교하기도 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단호하지 못하고 신사 참배를 하여서 더러운 이름을 남긴 목회자도 많았습니다.
단호할 때에 단호하면 사실 신앙 생활이 쉬워집니다. 한국에서는 술을 먹지 않으면 직장 생활도 사업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에 가신 우리 교회 집사님들을 비롯하여서 몇몇 분들은 단호하게 술 마시는 것을 거부합니다. 단호하게 하니까 이상 더 권하지 아니하고 생업을 영위하는 데에 별 지장을 받지 않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단호할 때에는 단호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를 믿게 되면 제사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돕는 것이야 가족으로서 해야하지만 절하는 것만은 거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친척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사업하면서도 가짜 물건을 팔아보라는 권유가 들어오면 단호하게 거부해야합니다. 작은 부정을 허용하면 더 큰 부정에 대한 빠질 수 있습니다. 부정한 장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이 오래가는 것도 못 보았고 그 자녀들이 잘 되는 것도 못 보았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에 악령의 공격을 받는 사람들은 단호하지 않아서 그런 수가 있습니다. 엉거주춤하게 예수를 믿으니까 악령이 가능성을 보고서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하여 단호한 자세를 취하고 아무리 공격을 해도 편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면 집적대지를 않습니다(약 4:7). 중요한 순간에, 죄에 관하여 단호함을 보여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
마 27:12-14, 사 53:7 / 이동원목사
수년전 이정향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국산 명화 ‘집으로’를 ‘침묵’이라는 관점에서 성찰한 영화 평론가가 있었습니다. 주인공 상우라는 아이는 수많은 소음과 말에 둘러싸여 살아가던 도시 아이였습니다. 상우에게 침묵은 무엇보다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엄마와 떨어져 사는 것은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엄마가 말하듯 상우는 장사에 바쁜 엄마가 늘 돌봐 주지 않아도 혼자서 잘 하는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상우에게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TV도 인터넷도 되지 않는 침묵의 산골에서 온 종일 침묵하는 벙어리 할머니와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처음 상우는 산골 생활의 초기에 온 종일 오락기기가 내는 그 익숙한 전자음으로 위안을 얻고자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 변화 없는 위안거리에 싫증을 느낀 그는 이제 로봇 그림엽서를 보며 혼자 말을 하는 것으로 침묵을 몰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이 애절하고 안타까운 어린 상우의 모습은 어쩌면 온갖 소음의 도구에 휩쓸려 살면서도 위로를 얻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요 곧 여러분과 저의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일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 ‘집으로’가 보여주는 놀라운 하나의 변화는 이런 어린 상우가 침묵을 배우면서 행복한 아이가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의 바램의 하나는 현대인들이 침묵의 미학을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침묵의 중요성을 몸으로 가르치고자 하신 분이 예수님이셨던 것을 아십니까? 침묵은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이사야에서 선지자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침묵으로 받아드리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그리고 그 예언은 오늘의 또 하나의 본문인 마태 27:12-14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시면서 한마디도 대답을 안 하시는 그의 침묵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전 생애는 우리의 본을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2:21에서“---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고난 속에서의 침묵도 우리를 위한 모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께서 침묵의 본을 실천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1. 침묵은 창조적인 지혜를 모색하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침묵을 하셨다고 해서 일체의 말을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되도록 말을 아끼셨고, 보다 많은 경우에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마태27장에서도 대제사장들에게 고발 당하시기에 앞서서 마태 26:62에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읽어 보실까요?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이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그 다음 63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침묵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그는 마침내 침묵을 깨시고 64절에서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는 결정적인 때에도 대답을 회피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해야 할 때에는 분명히 해야 할 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꼭 필요했던 말은 그의 침묵 속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성 괴테는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막스 피카르트는 그의 명저 “침묵의 세계”라는 책에서 “침묵은 말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를 가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위대한 말, 필요한 말, 참으로 깊이 있는 말은 침묵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일까요? 침묵은 우리에게 창조적인 지혜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침묵은 창조적인 하늘의 지혜를 공급받으시는 기도의 시간이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율법은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침묵 속에 허리를 굽히시고 땅에 글을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일어나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8:7)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지혜로운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침묵의 은총인 것입니다. 지혜가 필요 하십니까? 예수님처럼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기독교 심리학자 웨인 오츠 박사는 그의 명저 “침묵의 영성”에서 침묵이 제공하는 창조적 에너지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침묵의 영성-그것은 우리의 마음보다 큰 마음을 지니신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몸과 마음의 진정한 쉼을 제공한다. 바로 이 침묵의 영성 속에서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 안에 창조적인 사역을 베풀어 가신다. 만일 우리가 이 침묵의 영성을 잃어버리면 성령의 감동은 소멸되고 우리는 삶의 창조적 에너지를 다 잃어버린 채 차갑고 지친 모습으로 혼자 외로이 남게 될 것이다.”
2. 침묵은 인간적인 실수를 예방하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인간적인 실수들이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던진 말들 때문에 저질러졌습니까?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3:2)고 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언어의 실수에 관한 한 예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니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은 지나치게 말씀을 강조하다 보니까 말에 책임을 못 지는 실수의 굴레에 우리 스스로 빠지는 일들이 너무나 비일 비재하지 않았습니까? 오죽하면 이런 유머가 생겨났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서 자기 목사님을 찾아보았더니 목사님은 안보이고 목사님 혀(주둥이)만 둥둥 떠 있고, 자기 동료 교인들을 찾았더니 친구 교인들은 안보이고 그들의 귀만 둥둥 떠다니더라는 것입니다.
지혜의 책 잠언의 가장 중요한 교훈의 초점이 바로 우리의 언어생활에 집중하고 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잠18장은 특히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한 예리한 경고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잠18:7입니다.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18:13은 얼마나 우리 자주 실수하는 부분들입니까?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21절의 말씀도 기억하십니까?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제가 군대에 가서 미군 부대에 잠시 통역요원으로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밤마다 술에 취하여 내무반에 들어와 자기가 아는 유일한 영어로 “shut-up!(입 닥쳐)”라고 소리치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날 밤 그 친구가 또 소리를 치는데 미군 장교가 마침 그 꼴을 보더니 "너 shut-up이라는 소리 shut-up!"하라고 소리치면서 그에게 그 한 주간 동안 저녁 시간에 내무반에서 말 안하고 살도록 벌을 주었습니다. 그 한 주간 내무반은 천국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편기자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아야 합니다. 시141:3의 기도를 기억하십시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우리 모두 예수님의 침묵의 습관을 배운다면 얼마나 많은 인간적 실수들을 예방할 수 있겠습니까?
3. 침묵은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특별히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십자가를 지심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이를 침묵으로 수용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변명한들 방어한들 그것이 사태의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실 많은 경우 우리가 구차한 변명과 방어를 포기하고 침묵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황을 상황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강력한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53:7에서 주께서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침묵하신 이유는 바로 다음에 따라오는 10절에서 해명되고 있습니다.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그렇습니다. 그의 침묵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주의 뜻을 수용하시는 아멘의 침묵이었던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마태 27:12-14 본문에 보면 대제사장 앞에서도 빌라도 앞에서도 주께서는 침묵을 지키신 것입니다. 몇 마디의 변명만 하면 예수를 풀어 줄 생각을 했던 빌라도 총독에게 이런 예수님의 침묵은 기이한 침묵이었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마태27;14)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놀라실 필요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에게 침묵은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는 방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침묵의 실천이 필요하지 않은가요?
저는 오늘의 설교를 시작하면서 영화 집으로의 주인공 상우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상우가 정말 힘들어했던 것은 엄마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에 대한 적응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산골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변신하게 됩니까? 침묵은 천천히 상우의 친구가 되어 갑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상우가 철이라는 친구에게 ‘미친 소가 온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우가 ‘미안하다’는 진심을 전달하면서 그는 이제 벙어리 할머니에게 배운 침묵의 몸짓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상우가 훗날 할머니와의 재회를 약속하는 상징도 아무 글도 없는 백지의 편지였습니다. 할머니와 헤어지는 순간에도 상우는 말없이 내미는 엽서와 할머니에게 배운 몸짓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상우는 마침내 백 마디의 말보다도 더 감동 있는 커뮤니케이숀은 침묵의 몸짓인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침묵만으로 이 영화는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끄러운 소음의 시대에서 저와 여러분도 다시 배워야 할 예수님의 몸짓-바로 그분의 침묵의 습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그만 떠들고 좀 침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더욱 우리가 지금 그분의 임재 앞에 서 있다면 말입니다. 가스펠의 작사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초청합니다. “주의 임재 앞에 잠잠해 주 여기 계시네--주의 영광 앞에 잠잠해 주의 빛 비치네--주의 능력 앞에 잠잠해 주 역사 하시네” 이제 구차한 변명도, 화풀이도, 고발도, 원망도 그만 하시고 그분의 임재,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며 잠잠히 살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잠잠하면 그분이 친히 일하실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 모두 이제 입을 다물어 보십시다. 지금은 우리 모두 침묵을 연습 할 때입니다. 시인 유안진의 ‘그리운 말 한마디’라는 시를 선물해 드리고 싶습니다.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비게 하는가?/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내 안에 설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더욱 지긋히 채워 두면서/향기로운 포도주로/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침묵하는 연습/비록 내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무시해 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연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빌라도의 사순절
마 27:15-26 / 이필재목사
지금도 이태리 사람들은 우리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대목을 삭제하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성을 선언하고 될 수 있으면 석방하려고 노력하였는데 포악스러운 유대 백성의 아우성 때문에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성경의 기록으로 보아도 그런 주장에 타당성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빌라도는 참으로 불운의 정치가였습니다. 로마의 집정관으로 유대 나라 총독으로 발령 받아 AD 26~36년 10년 동안 일했는데 바로 이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발생함으로 피할 수 없는 예수 재판을 하게 되었고 그의 이름은 지구의 종말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남았습니다. 아마 지금 빌라도의 후손들은 참으로 억울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 중에는 빌라도의 종교성이 하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24절에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라고 말합니다. 그의 마음에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일 경우 그 피 값이 자신에게 돌아와 재앙을 겪게 된다는 종교적 심리 때문에 이런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25절에 백성들이 응답합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라고 대답합니다. 역사 신학자들의 본문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로 찬반론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유대 백성들이 외친 피 값으로 유대인 자손들에게 돌아간 재앙적 사건이 바로 히틀러의 아우슈비츄 사건이다. 그래서 그 피 값이 600만 학살 사건으로 연결된 것이다.”라는 해석을 많이 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해석입니다. 아마 이런 해석은 각자 신앙방향에 맡기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빌라도 역할을 어떤 때는 증오적 감정이나 어떤 때는 동정적 감정을 가지고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과연 그렇게 밖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는가? 오늘 성경말씀에 빌라도가 맞이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순절 행적은 무엇인가를 정리해 보면서 우리 마음을 조명하겠습니다.
여기 나타난 내용으로 봐서 분명한 것은 그에게는 정의감도, 종교성도 넉넉하게 가지고 있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몇 번이나 군중들 앞에 나가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예수의 무죄성을 선언했다는 것이 법을 전공한 행정관의 정의감입니다. 로마의 특징 가운데는 가장 권위 있던 것이 법이었습니다. 지금 빌라도는 이 사건을 절대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정당한 법처리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죄 값의 후처리를 말했다는 것은 이 사건 이후에는 분명히 엄청난 죄 값이 주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라도와 유대인들의 법 논리가 완전 딴 방향이었던 이유를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지금 로마법으로 예수를 재판할 때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알지 못하는 율법의 잣대로 예수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법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부분을 로마인들이 볼 때는 예수가 아니라 누구든지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볼 때는 ‘신성모독죄’가 되기 때문에 사형에 해당하는 차이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이 일이 너무나도 무서워 물에다 손을 씻고 재앙을 피해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비해서 유대백성들은 그 재앙을 우리에게 내려달라고, 우리 자식들에게 내려줘도 괜찮다고 소리칩니다. 율법과 로마법의 개념의 차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확실하게 큰 재앙을 불러오는 죄라고 판단한데 비해 유대 백성은 절대 죄가 아니라 의로운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빌라도는 영원한 죄인으로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의 신앙 고백 속에 기록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에게는 그렇게 되지 아니할 기회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는가? 충분하게 있었습니다. 그 주어진 선택의 기회를 훌륭하게 처리하지 못한 우매함이 오늘날 사도신경의 빌라도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지금 빌라도에게는 절대 권한이 주어져 있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 문화 속에 있는 고로 중대한 법의 결정은 유대인들만이 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사형집행에 관해서는 로마의 허락을 반드시 얻어야만 집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총독이 바로 로마의 절대 권한의 대행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빌라도 자신이 예수님에게 그것을 밝혔습니다. “내가 너를 놓아줄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또,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나는 관계하고 싶지 아니하니 너희 마음대로 하라.” 그때 유대인들이 대답한 말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이 없나이다. 그것은 당신의 고유 권한입니다.” 아주 확실해 졌습니다. 이 문제는 빌라도 총독에게 부여된 절대 권한입니다. 그러면 이제 빌라도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가 없는 예수를 그 자리에서 무죄석방 선언하면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행정 집행관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을 놓고 자기가 확인한 일을 그냥 하면 됩니다. 자기 말로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아무 죄도 찾지 못한 선량한 시민을 사형시킨다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지는 일이며 이러한 처사는 로마법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절대 권한을 그냥 행사해 버리면 끝이 납니다.
여기서 대제사장이 예수를 재판할 때 다룬 죄의 문제와 빌라도가 다루는 예수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의 메시야성 발언에 대한 죄를 집중적으로 추궁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율법으로서 죄목을 잡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에게 집중 질문한 것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질문입니다. 지금 유대 나라는 로마가 인정한 왕이 있습니다. 헤롯이 그 사람입니다. 헤롯이 죽은 후 그의 세 아들이 지역 하나씩 맡아 분봉왕으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찾아내려는 예수의 죄목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을 때 로마가 인정한 왕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 대답에 따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쪽으로 몰고 가는 겁니다. 어떤 죄목이라도 만들어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네 말대로 내가 유대인의 왕이니라.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런 말씀을 빌라도에게 하셨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내가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될 것인가? 죄 없는 사람을 내 권한으로 죽여야 하는가, 아니면 살려야 하는가?’ 그런데 판결은 그의 마음에 이미 나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죄석방입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빌라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세 가지 소리가 귀에 들려왔습니다.
첫째는, 수많은 군중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소리는 매우 크게 들려 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 소리입니다. “로마의 충신으로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총독의 영광을 계속 누리지 못합니다.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로마가 여기 유대 총독으로 보낸 것은 이런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하라고 보낸 것 아닙니까? 그러면 민중의 이 소원을 당신이 들어서 빨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언하십시오.” 이렇게 지금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가 크면 어떤 경우 효과를 보는 때가 있다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 발전한 문화가 데모 문화입니다. 자, 우리가 나가보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투쟁!! 단결!!” 구호를 달고 꽹과리를 치면서 마이크에 대고 수천 명이 목소리를 크게 함으로 자신들의 권익 보호에 나서는 소리를 듣습니다. 또, 국가의 어떤 방향이 결정되면 반대하는 목소리가 반드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쌀 개방에는 농민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반대하지 않습니까? 새만금 사업에는 어민들이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살란 말이냐?” 목소리가 나옵니다. 등록금 인상에는 학생들이 목소리를 내고, 철도파업, 항공파업, 의사들 파업, 약사들 파업 등 다 모여서 목소리를 크게 내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4·19 때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정부도 점복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큰소리를 치기 위해 저마다 노력을 합니다. 큰 소리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빌라도의 귀에는 절대 권력도 흔들릴 만큼의 큰 무리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큰 소리를 무시했다가는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날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노력해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인데 나사렛 촌놈하나를 살리려다 집안 망하지 않을까? 저 무리의 큰 소리를 내가 어떻게 거절하나? 만약 내가 이 소리를 거절하면 조금 후에는 “총독 물러가라! 총독 물러가라!”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손만 씻으면 돼! 죄 값은 저 놈들이 받을 거야!’ “물 떠와!” 손을 씻어 버렸습니다. 그는 큰 무리의 소리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그의 귀에 들려온 소리는 1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꿈의 소리도 절대 무시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도 꿈의 지시는 절대적 권위가 있었던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 과정에도 꿈의 지시가 나타났고, 요셉은 꿈이 현실로 나타난 대표적 인물이었고, 여러분도 저도 이 부분에 대한 믿음은 날마다 무시하지 못하고 인정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영적 존재입니다. 좋은 꿈을 꾸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때로 좋은 일을 만나고, 흉악한 꿈을 꾸고 나면 기분이 나쁘고 또 흉악한 일도 만나는 경우를 충분히 경험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빌라도의 아내는 꿈을 꾸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남편 구하기 긴급 작전’을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재판석 대법관 자리에서 피고를 앞에 놓고 수천수만의 방청객이 지켜보는 국가적 중대한 법정 진행 자리에 긴급 정보를 들여보낼 만큼 빌라도의 아내는 꿈의 내용을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재앙적 꿈이다.’ 그래서 사람을 들여보냈습니다. “빌라도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라. 내 남편을 구해야 되겠다. 당신은 예수에 대해서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잘못 건드렸다가는 재앙이 올 것 같습니다.” 그러면 빌라도는 왜 그 소리를 전해 듣고도 무시했는가? 그 소리는 매우 작은 소리였습니다. 아내가 들여보낸 전달자가 빌라도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을 뿐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진실한 소리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사람만 무시하면 별로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계산을 했습니다.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경우는 우리들 삶의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내가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큰 소리를 들을 것인가, 진실된 작은 소리를 들을 것인가? 거짓된 소리를 들을 것인가, 옳은 소리를 들을 것인가? 이해 타산적 계산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진리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우리도 항상 경험합니다.
성경 속의 여러 인물들을 우리가 볼 수 있는데, 모세가 호렙산 기슭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서 있을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조용히 나직한 목소리로 “네 발에 신을 벗으라.”라고 들려왔습니다. 산철에서 모세 혼자 들은 소리입니다. 아주 작은 소리로 모세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평안하게 살고 있는 모세로 하여금 민족 이동이라는 험난한 사명의 시작되는 소리입니다. 사실 못들은 체 해버려도 아무 지장이 없는, 누구도 보지 아니한, 그의 귀에만 들리는 그런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모세는 가슴에 품고 40년 여생을 민족 지도자로 대 과업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세벨의 핍박을 피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 앞에 몇 가지 상황이 벌어지는데, 산을 흔드는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땅을 흔드는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로 하나님의 소리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성경말씀에는 아주 작은 세밀한 소리가 들려왔다고 했습니다. 엘리야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 위해 새롭게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광야 40일 금식 기도 후에 그에게는 그럴듯한 유혹의 요란한 음성이 세 번이나 들려왔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먹고 배고픈 군중에게 나누어주라. 그것이 복음이다.” 그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기적 창출을 보여주라. 너는 세계의 인기인이 될 것이다.” 그 요란한 소리도 듣지 않았습니다. “천하만국 권세를 가지라. 너는 최대의 권력자와 성공자가 될 것이다.” 그 큰 소리도 예수는 안 들었습니다. 예수는 그 요란한 유혹의 소리를 물리치고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인간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시게 됩니다. 빌라도는 자기 아내로부터 전달된 진리의 작은 소리를 무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로 빌라도에게 들려온 소리가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아예 소리가 없는 소리입니다. 큰 소리와 작은 소리 그리고 소리가 없는 소리 세 가지가 지금 빌라도의 귀에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 양심을 때리는 소리 없는 소리는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아무 죄가 없도다. 빨리 무죄석방을 선언하라!” 이것이 그의 양심선언입니다. 이제 빌라도가 해야 할 일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로마의 집정관으로서 무죄 석방, 자유하게 하면 끝납니다. 우리는 간혹 다른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아름다운 칭찬이나 존경의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국가적인 표창을 받을 때도 있고, 박수를 받는 때도 있습니다. “아! 당신은 우리 사회의 훌륭한 사람입니다. 모범 시민이요,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요, 정직한 지도자요, 만인의 칭송을 받으실 분입니다.” 박수 속에 찬양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외부적인 모든 찬양의 소리는 내 양심이 나를 도와줄 때 행복한 것입니다. 외부에서 아무리 훌륭하다고 말해도 내 양심이 나를 인정하지 아니할 때는 그 요란한 소리는 나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당신은 죽일 놈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라! 죽어라!” 외쳐도 내 속에는 소리 없는 소리, 양심의 소리가 나를 도와주고 있을 때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어느 날 바울 선생은 자기 양심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매우 실망스럽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괴로운 자리에서 나를 구원해 낼 것인가?” 이런 자기 인격 파멸의 양심적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수천 명의 데모대의 고함소리보다 또 가장 가까운 이웃이 전해주는 진실된 소리보다도 더 무섭고 정확한 소리는 소리 없는 양심의 소리입니다.
이제 빌라도는 이 세 가지 들려오는 소리 중에 어떤 한 소리를 선택해야 합니다. 종류가 똑같지는 않아도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늘 결정과 선택을 해야 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 어느 날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한 집에서 살다가 생활권이 커지면서 피차 갈라서야 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목축업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그들에게는 양떼를 방목할 수 있는 풀밭과 물의 근원이 가장 중요한데 유대 땅의 그러한 환경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제한적 축산지에서 누군가 한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 떠나야 되는 일이 찾아왔기 때문에 이 문제가 등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주지 않습니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니까 네가 먼저 우선권을 결정하라.” 이때 롯의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죠? 지금까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키워주시고 길러주신 늙은 아브라함에게 이 좋은 것을 다 드리고 젊은 자기는 양떼를 몰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사막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양심에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좋은 것을 자기가 다 차지해 버리고 늙은 삼촌을 사막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 당장은 성공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영원한 심판의 대명사가 되어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말을 이 땅에 남겼고, 그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고, 나중에 큰 딸과 동침하여 모압 족속, 작은 딸과 동침하여 암몬 족속을 번식하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어서 지금도 그 후손들은 조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때 빌라도가 소리 없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 예수의 무죄성을 선포하고 이에 따르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였다면 오늘날 사도신경에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하는 말이 “빌라도에게 도움을 입으사” 이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공한 정치 지도자 빌라도는 영원한 기독교의 존경인물이 될 기회를 눈앞의 계산 때문에 놓치는, 최악의 악명 높은 이름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큰 소리에 눌려 계산적 판결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빌라도의 사순절! 그 그릇된 판결은 변명 없이 받아드리고 골고다 행진을 결심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순절에 우리 영혼의 선택에 오늘의 말씀이 도움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 때로 선택과 결정이 어려울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조용히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결정하는 지혜와 믿음의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요즘은 저희들이 사순절 기간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저희들이 생각하면서 동참할 수 있는 지혜로운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바라바냐 그리스도냐
마 27:16-26 / 박지온목사
지난주간에 가룟 유다의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면에서 베드로와 똑같은 범죄유형이지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귀한 그릇으로 축복을 받았고 가룟 유다는 열심히 충성했으나 영원한 저주로 멸망을 받았던 그 더 큰 죄가 뭐냐?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한마디로 말한다 그러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안 믿고, 하나님의 뜻을 안 믿고,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의 어떤 뉘우침! 그래서 자기 중심으로 하게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뭐냐하면, 절망입니다.
그래서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에 빠져서 결국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하게 되는 이런 일이 가룟 유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더 큰 죄다!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불신앙이다! 불신앙의 따라오는 것은 전부 실망이거든요. 허무가 따라오고, 실망이 따라오고, 낙심이 따라오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도 모르게 가룟 유다식 어떤 교회의 헌신, 교회를 향한 그런 어떤 봉사들이 많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왜, 가룟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은30에 팔았느냐? 가룟 유다는 우리가 잘 아는 데로, 회계를 맡았고 돈을 사랑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름대로 이용해서 돈을 챙기려고 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게 된 배경 속에는 한가지, 가룟 유다 속에 어떤 생각이 있었느냐 하면, '예수를 대 제사장들에게 팔고 그렇게 해도 예수님은 결코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럽니다. 왜? 능력이 많으시니까! 대 제사장들과 싸워서 결국은 우리 예수님이 승리하시고 이기실 것이니까! 자기는 은30만 챙기면 되고, 예수님은 안 죽고 십자가에서 살아날 것이라!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았다! 그렇게 변호를 해 주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가룟 유다는 분명한 것이, 예수를 메시아로, 성경에 약속한 말씀에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바로 가룟 유다의 약점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모르게 되면 자연적으로 뭐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에 중요한 핵을 놓쳐 버립니다. 어디로 빠지느냐? 메시아를 모르면, 성경 전체에 구약에 계속해서 예언된 메시아 예언, 이걸 모르면 종교에 빠집니다. 그리고 신약에 메시아를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면 역시 종교생활에 빠집니다. 그러니 메시아를 모른다는 사실은 무슨 말이냐 하면, 사단의 역사를 모르고, 귀신의 역사를 모르고, 죄, 원죄 오늘 우리 장로님이 기도할 때 말씀했습니다 만은, 원죄! 우리가 어디로 소속되어 있는가? 이걸 모르게 되면 결국은 사단을 섬기게 되고, 귀신에 종노릇을 하게 되는 이런 결과에 빠져 버리게 되는 겁니다.
어저께 핵심 속에서도 중요한 설명을 했었죠. 입다의 봉사가 자기도 모르게 종교적인 봉사였다! 그랬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떤 종교적인 그런 일들이 몸에 베였기 때문에,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왔을 때에 제일 먼저 마중 나온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그래서 자기 딸이 제일 먼저 마중 나왔습니다. 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그건 이방종교에서 하는 일이지 여호와는 섬기는 그런 어떤 종교에서도 그렇게 안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르게 이 죄와 사단과 귀신의 역사를 모르게 되고, 또 그 사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복음에 뿌리를 못 내리면 나도 모르게 우리 속에 깊이 깔려있는, 이미 자리잡고 있는 종교로, 교회에서 헌신할 수가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배경이 오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구원 주로 보내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이 민족적인 종교, 그 민족적인 종교에 헌신하기 위해서, 그 민족적인 어떤 유일신, 유대교에 헌신하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충성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뭔가 성경을 쭉 보면서 유대인들이,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를 그렇게 핍박하고, 예수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느냐? 그 배경 속에는 뭐냐하면, 예수를 죽여 없애는 것이 유대교에 충성하는 것으로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종교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그래서 이 가룟 유다 이후에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의 손에 넘겨지고, 유대인들은 로마에 속국이 되어있기 때문에 사형에 권세가 없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라는 로마 총독에 힘을 빌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시키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빌라도를 빌리는 것이죠. 이래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를 통해서 예수를 넘겨 준 줄을 생각하고, 그 유대인들의 양심에다가 지금 호소를 하는 겁니다. 그 유월절에는 그들이 빌라도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를 한사람 놓아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특사라 그러죠. 요즘 대통령이 하는 명절에 성탄절도 그렇고, 뭐 광복절도 그렇고, 죄수들을 풀어주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건 이유가 없죠.
이것을 이용해서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주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선행을 알기 때문에 반대로 아주 악한 바라바를 대체시켰습니다. 그 바라바는 본문에 표현한 대로 살인자고, 아주 무서운 범법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빌라도가 그 양심대로 예수를 풀어 줘버리면 되는데, 권한으로 되는데, 민심을 얻기 위해서 야합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바를 풀어주길 원하느냐? 예수를 풀어주길 원하느냐? 너희들이 결정하라!' 이러니까 대제사장들이 모두다 미리 작업을 해 가지고 군중들을 폭도들을 시켜서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바라바를 선택하는 거죠. 순 천하에 도적놈, 살인자, 사기꾼을 택하는 겁니다. 참, 이것이 무서운 일 아닙니까!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어떻게 할까?'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달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빌라도가 그들의 요구를 따라서 타협을 하려고 그러다가 타협을 못하게 되니까,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지만 예수를 사형언도 내리게 되죠. 그러면서 양심에 남아있는 이 일이 있으니까,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 사형 언도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그러면서 물을 대아에 떠오라고 하고, 그 군중들 앞에서 그 대아에다가 '나는 이 일에는 죄가 없다!' 그러면서 손을 씻잖아요. 손 씻는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데, 이제 자기의 어떤 그 양심에 그렇게 한 행동이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주 놀라운 말이 있습니다. 27장 24절에 보면,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그랬을 때에 25절에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 한마디가 간단한 것이 아니고, 그 위에 예수를 팔아버리고, 예수를 사형언도 내리고, 메시아를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라바를 선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역사의 심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잖아요. 그래서 복음이 이때부터 그들이 말한 것처럼, 복음이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서 이방인에게로 넘어오게 되는 이런 엄청난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마디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이 뭐냐하면요. 메시아를 바로 알지 못하는 부모는, 어버이는 후손들에게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신앙에, 말하자면 복음에 뿌리를 바로 내리지 못한 부모나 복음에 뿌리를 바로 내리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내 후손이나 자식들에게 오히려 뭡니까?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엄청난 죄악에 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일로 통해서 이스라엘에 후손들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 빠졌습니까!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깨닫고 메시아를 바로 붙들었더라면, 이는 놀라운 역사를 후손들에게 남겨줄 것인데, 이것이 안되니까 엄청난 죽음과 멸망과 재앙과 고통을 후손들에게 남겨주게 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붙잡고 좀 기도하고 바라봐야 될 것이, 가정에 모든 문제가 일어나고 사건이 일어나게 될 때에 뭐 자꾸 나변의 문제로 돌아가지 마시고, 우리가 어디로 돌아가야 되느냐 하면, 메시아, 그리스도, 근본 문제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메시아를 깨닫지 못하고 메시아를 선택하지 못한, 쉽게 말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구나!' 이것이 안된 나에게 문제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와 연결되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이 문제가 생길 때에, '아, 오직 그리스도가 안된 나 때문에 오는 문제구나!' 남편에게 문제가 나온다! '오직 그리스도가 안된 나 때문이구나!'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올 때에, 근본 문제로 돌아가게 되면 거기서 문제 해결이 나온다는 정도가 아니고, 모든 문제 해결에 역사와 축복이 비로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 오늘 이 말씀을 이렇게 보면서 뭔가 여러 가지 많은 신앙생활에 할 이야기가 있지만 다른 할 이야기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문제가 나오고 사건이 나올수록, 묵묵해야 될 수밖에 없어요. 왜? 모든 문제가 다른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오늘까지 오는 모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알지 못했던, '메시아의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돌릴지어다!' 여기서 다 터져 나온 문제거든요. 이것이 바로 깨달아 졌다 그러면 문제 될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 속에서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유대인들, 빌라도는 말할 것도 없고, 모두가 나온 문제가, '왜, 이 땅에 메시아가 와야 되느냐? 왜, 이 땅에 그리스도가 와야 되느냐?'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무식함 속에서 나오는 결과일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우리 생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사건들은 나의 무식에 결과일 뿐이지,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문제가 터져 나왔을 때에 근본문제로 빨리 돌아가는 것! 이것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걸 알고 있는데도 왜 안 되느냐? 이것이 조금 전에 언급을 했습니다 만은, 입다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어디에 빠져 있느냐 하면, 종교에 빠져 있거든요. 우리도 모르게 우리 사상이 이방 종교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복음을 알고 있다고 그러지만 이것이 뿌리를 못 내렸기 때문에 뭐든지 문제나 사건을 당하면 어디로 돌아가느냐?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근본문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꾸만 다른 데로 돌아갑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여러분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로, 어떤 면에서 저는 가룟 유다를 보면서 여러분과 저의 영적 문제가, 한마디로 말하면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 문제다! 가문의 영적 문제다!' 그러면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불신앙입니다. 그러니 영적 문제라 그럴 때에, 우리도 모르게 영적 문제의 큰 배경은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깔려 있는 종교적인 배경입니다. 이런 배경!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가 뭘 자꾸 일을 처리하려고 그럽니다. 내가 뭘 자꾸만 노력을 하려고 그러고, 그리고 또 우리가 이 '다락방을 하라!' 그러면 뭐냐하면, 내가 뭔가 완벽하게 준비를 하고, 내가 뭘 할 수 있도록 되어야 나가려고 그럽니다. 그게 뭔가 메시아를 알고는 있지만, 체질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능력을 의지하고 신앙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나도 모르게 그 배경에는 종교적인 배경이 깔려있거든요. 그러니 '내가 뭔가 할 수 있다! 내가 일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그 가룟 유다도 가만히 보면, 자기 책임을 위해서 충실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일을 충실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어떤 문제에 부닥쳤을 때에 메시아의 능력! 이것이 안되니까 결국은 뭐냐하면, 사단의 지배 속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결국은 불 신앙이 되었거든요. 빠져서 불신앙의 결국은 뭐가 오느냐 하면, 종교의 결과죠. 메시아를 알지 못하는 종교의 결과는 오는 것이 뭐냐하면, 결국 실망과 낙심과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경우가 그렇잖아요. 어떤 문제나 어떤 사건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이 뭐냐하면, 나는 낙심하지만, 나는 안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 해결 자다! 그래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못 가지게 되는 배경이 뭐냐하면, 여러분도 저도 모르게 이것이 흑암에 빠져 있습니다. 사단의 세력이 역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뭐냐? 원죄라 그럽니다. 그러니 원죄에 빠져있는 한 우리는 안되게 되어 있어요. 어떤 문제도 해결이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잘 될 수 있는 것 같아도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일단 여기에서 빠져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여러분과 제가 먼저 알아야 될 것이, '예수님은 모든 문제 해결 자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사실을 실제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누가 오셨어요? 성령께서 오셔서 여러분과 제게 일을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루어 나가고 있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흑암에 역사입니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믿고 있었고 알고 있어도, 여기에 구체적으로 복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문제나 사건이 부닥치게 되면, 헌신하고 노력한다고 하는 배경이 종교적인 배경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모르게 오늘 장로님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해 달라고 그랬는데, 긍정적인 생각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어디로 빠지느냐? 나도 모르게 내가 뭘 하려고 하기 때문에 낙심 속에 빠집니다. 종교적인 배경 속에, 열심히 하는데 그렇게 빠집니다. 저는 이 건강문제 때문에 늘 고심을 하다보니까, 하나님 앞에 뭔가 이렇게, 뭐 내 힘으로 안되니까! 극단적인 어떤 문제에 부닥치게 되면, 막 하나님 앞에 몸부림 칠 때가 있어요. 그때에 그럴수록 더 절망하게 될 수 있습니다. 더 낙심하게 되고...
그러다가 나는 빌립보서에 나오는 말씀에서 참 평안함을 얻었던 배경이 뭐냐하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무슨 문제냐 하면, 어떤 일이나 사건이 왔을 때에 염려하지 말라! 그리고 '오직'이라고 그랬습니다. 오직 기도하고 간구 했느냐? 끝났다! 기도하고 간구 했느냐? 끝났다! 왜? 하나님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기도하고 간구 해놓고 내가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 배경에서 뭐가 안 떠나느냐? 염려와 걱정이 안 떠납니다. 불안과 의심이 안 떠납니다. 그러니 결국 뭐냐? 불신앙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배경 속에서 뿌리가 내려져 있기 때문에 이게 잘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뿌리를 내려라! 그런데 '복음에 뿌리를 내려라!'그러는데, 그게 잘 안 되느냐? 이 종교적인 배경이 먼저 뿌리를 내려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 지금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이 훈련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꾸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 저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금년도에는 좀 훈련을 강화할 그런 계획을 가지고 우리 신봉준 목사님을 교육 부서에서 일하던 것을 빼내어서 훈련 부서를 전담을 하고, 훈련 프로그램을 좀 계획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그 팀 사역을 갔다오고, 합숙 갔다오고, 이런 사람들을 우리 교회에서 팀 사역과 합숙을 우리 교회 나름대로 좀 해야 되겠다! 갔다와서도 잊어버리니까 안되거든요. 갔다와서 우리 교회 자체에서 구체적으로 실행을 해 가지고, 우리 교회에서 진행을 시켜 나가야 되겠다. 그래서 앞으로 이 뭔가 전도 합숙이라는 것을 이런 어떤 패턴으로 말고, 앞으로 기관이라든지 이걸 한두 번하고 난 후에 어떤 패턴으로 하느냐 하면, 팀 사역 갔다온 사람들, 그 다음에 합숙 갔다온 사람들, 다시 이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우리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훈련을 좀 시켜야 되겠다! 그래야 뭐냐? 이 종교 껍질을 벗길 수 있어요.
저는 지난 시간에 제 나름대로 40일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을 했던 배경이 뭐냐하면, 내가 뭘 이루려고 애를 썼거든요. 막 그냥 굶어가면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 나름대로 와요. 40일 금식하고 성경 보니까! 성경이 살아있고, 글자가 왔다갔다하고, 뭐 움직이는 것 같고 그렇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결국은 뭐냐하면, 나도 모르게 아직까지 이 배경이 안 떠나니까! 그래도 우리가 이제 교회 안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애를 쓰지만 뭐냐하면, 자아의식으로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존심을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뭔가 이 내가 뭘 하려고 하는 이런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뿌리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문제요, 나의 영적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 문제라고 그럴 때에, 다른 것보다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러면 내가 뭘 한다고 그러지만 내가 뭘 하는 게 아니고 아직까지 뭡니까? '완전히 원죄와 흑암과 사단의 손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래서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뿐이구나!' 이게 안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니 무슨 문제가 닥치면 여기서 완전히 해방 받았다! 그러면 내가 애쓸 필요가 없어요. 왜? '모든 일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뭐해요?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아뢰라!' 그러면 끝났어요.
여러분이 기도해놓고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막 또 노력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기를 믿고 노력합니다. 노력하는데 그 노력자체도 내가 합니까? 누가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제 안에 임하신 성령으로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교회 안에서 열심히, 지금 기관, 기관 속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쓰고 있는데,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큰 부담을 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종교 뿌리입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면 평안해져 버려야 됩니다. 잊어버려야 됩니다. 기도하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구했습니다. 감사함으로 구했습니다. 감사함으로 했으면 끝난 것 아닙니까! 감사함으로 구했다면 이루어질 줄 믿고 감사하는 거죠. 다 해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 끝난 겁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우리가 믿어지지 않거든요. 이게 영적 뿌리입니다. 영적 문제예요.
그래서 여러분 가정과 가문에 문제, 뿌리가 다른 게 아닙니다. 내 영적 문제가 뭐냐? 자의식, 자기 생각하는 것, 자기 욕심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기도해놓고 안 믿는 겁니다. 기도해놓고 염려하는 겁니다. 모든 사건과 일들을 예수 이름으로 구해놓고도, 모든 문제 해결 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 놓고도, 내가 염려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을 내가 못 믿으니까 염려하는 겁니다.
여러분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유대인들, 다른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로,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근본 고통과 죄악과 재앙과 저주 속에 있는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셨다는 이 사실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위해서 십자가 지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종종 그렇게 말씀했죠. 예수님께서 '내가 열두 영 더되는 하늘의 천군 천사를 불러서 대제사장들, 그 군대를 멸절 시킬 수 없는 줄 아느냐?' 그렇다 그러면 '메시아로 나를 보내서 십자가에서 대속 하시고, 흑암 권세를 꺾으실 언약과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느냐?' 그 이야기거든요.
그 다음에 오늘도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했죠. 27장에도 은30에 팔았던 그 문제 가지고도, 가룟 유다에게 행했던 이 은30에 팔았던 문제도, 이미 선지자를 통해서 예수께서 이렇게 팔리실 것이 약속되어 있는데, 메시아로 오셔야 되니까! 십자가를 지셔야 되니까! 이걸 어떻게 알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27장 9절에 보면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마 27: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이미 이렇게 될 것을 다 예언하시고, 십자가 지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이 사실을 대 제사장과 유대인들이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그러니까 이 축복된 역사와 은혜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불신앙을 유산으로 후손들에게 남겼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유대인들의 고통과 괴로움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말씀 속에서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 내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일들, 모든 문제들 이미 하나님께서 언약 속에 여러분과 저로 그리스도를 깨닫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순간 사단에 세력을 꺾으시고, 재앙을 완전히 해결하시고, 흑암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이 일을 이루신 사건을 확인하는 순간에 우리는 염려와 걱정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모든 사건을 맡기는 순간부터 해결되었다는 사건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완벽하게 우리 하나님이 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이 '선교해야 된다! 뭘 해야 된다!' 이건 감사함으로 지금 여러분들이 교회 위해서 '뭘 어떻게 한다! 헌신한다!' 특별히 저는 교회 건축해서 뭔가 헌금한다! 그래서 막 부담스럽다! 이건 벌써 우리가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집 내 몸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감격이 와야됩니다. 여기서 진짜 축복과 역사와 은혜가 우리가 메시아의 능력을 알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다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해야된다! 그럴 때는 세계 복음화 그럴 때에, 생명 걸고 해야 된다! 그건 분명히 여러분 언약 속에 들어가 있으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언약이 뭡니까? 그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 승천하셨다가 다시 누구로? 재림 주로 오실 약속 안에 여러분과 저를 세워 놓았습니다. 잠시후면 우리 주님께서 천군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재림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축복된 역사 속에, 그 순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로 들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축복을 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세계 복음화의 반열에 세운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렇다 그러면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뭘 '이것 한다! 저것 한다!' 그런 게 아닙니다. 감격해서, '어째서 우리가 이런 축복과 은혜의 자리에 세웠습니까!' 그러면 이 축복과 은혜의 자리에 세운 그때부터 뭐냐?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한번 받아합시다. "이제부터 모든 염려와 걱정은 끝이다!" 누구로? '예수 그 이름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끝났습니다. 그 다음에는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어떤 언약 속에 세웠습니까? 주님이 오실 때에 영원한 그 나라의 영광 속에 여러분과 저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재림의 언약 속에 세우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재림의 언약이 없어지게 되면, 언약을 가졌다 할지라도 체질이 안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재림의 언약이 없으면 항상 내가 가룟 유다처럼 먹는 것, 마시는 것, 은30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시면 모든 것 다 놓고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축복과 은혜를 바로 이해하게 되면, 그때 다 놓고 가는 것 빨리 일찍이 놓는 것이 편합니다. 연연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뜻과 계획이 뭐냐? 우리가 붙잡고 그 언약 속에 확신과 감사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붙잡고, '메시아 해방 받았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과 저를 해방시켰느냐? 재림의 언약 속에 포함시켜 주셨습니다. 주님 부르실 때에, '아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 주님 앞에 갈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생애를 한도 없이 주님 앞에 기쁨으로 드릴 것뿐입니다. 영원한 축복과 언약 속에 우리를 세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헌신할 것뿐입니다. 감사함으로... 염려할 것 없고,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맡아 주셨습니다. 기쁨으로 우리 남은 생애, 2004년도 진짜 헌신하는 영광의 삶이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
마 27:20-31 / 박조준 목사
지난 두 주간 동안 미국과 유럽의 전도 집회를 은혜중에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께서 부 족한 저를 위해서 계속 기도로 도와주신 데 대해서 중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 성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시다가 여리고로 오셨고, 여리고에서 다시 험한 산골짜 기 길을 올라 거슬러 가서 베다니 마을에 이르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벳바게라고 하는 마을에 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두 제자를 보내서 맞은편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구하여 오도록 한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벳바게라고 하는 마을에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입성하신 것입 니다. 그때는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때였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넘으 셔서 겟세마네 동산 기슭으로 내려가며 기드론 시내쯤에 가시게 되셨을 때는 따르는 무리들이 훨씬 더 많아졌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다시 시온산 언덕으로 올라가시면서 예루살렘 성 가까이로 나아가게 되셨습니다. 그 때 함께 가던 여러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꺽어 땅에 펴며 옷을 벗어 땅에 깔고 어 린아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 는 왕이여 하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는 것을 대대적으로 환영한 것입니다. 지금도 해마다 종려 주일에는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곳에서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면서 감람산을 넘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행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골고다가 있는 곳, 예수님의 시체를 모셨던 곳에 세워 진 기념 예배당이 있는데 거기까지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풍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사복음서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승리적인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광경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자들을 꾸짖으세요.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잠잠하면 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가 있 습니다.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이 왕을 통해서 이 세상의 혼란과 죄악된 인간의 문 제를 해결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미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신데도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서 버린바 되셨고, 간고를 많이 겪으셨으며 질고를 아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머 리에는 금면류관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 씌워졌는데 이것은 멸시를 나타낸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낮아지셨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세요. 그는 하늘에서 사랑을 받으시고 지상에서는 왕이 되 시는 분이신데 이제 고통스러운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시고 계십니다. 그는 마음과 육신에 상 처를 입으시고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의 왕다운 얼굴은 쉴새 없이 흐르는 피의 상처로 창백해지고 기력 없이 이즈러져 버립니다. 이 시간 우리는 심령의 눈을 들어 나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시고 고난 당하시고 계시 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고난 당하시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가 마구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죄 때문에 질고를 당하시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예수님의 머리를 상하 게 하며 피를 흘리고 아픔을 주었으며 그 수치는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 번역 성경에 보면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총독의 사병들이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고 들어가서 온 부대를 다 그의 앞에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옷을 벗긴 다음에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우고 나서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했습니다. 그리 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외치면서 희롱했습니다. 또 예수에게 침을 뱉 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낮아지셨습니까? 저희들이 예수님을 조롱할 때 주님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열두 명의 천사를 발동시 킬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멸시와 천대, 희롱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아버지의 궁정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영광스러운 권위를 그대로 간직한 채 어 엿이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나사렛의 소박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주님이 원하시면 그의 불꽃같은 눈초리로 단숨에 로마 병정들을 없애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침묵을 지키 시던 그의 입술에서 한 마디가 나오는 날이면 빌라도의 궁전을 송두리채 흔들어 버릴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우유부단한 통치자와 악당들을 산 채로 땅 속에 매장시킬 수 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동정어린 마음으로 가슴 아프게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질고를 당하시는 주님과 더욱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 다. 이제 우리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나와 어떤 상관이 있나 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 기를 원합니다. 1.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너무 슬픈 장면입니다. 사랑과 인자가 한없이 많으신 주님이, 우리 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주님이 그처럼 냉대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생명의 왕이시요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이 악한 군인들에게 희롱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평범한 옷을 입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왕 이라니까 자색 옷을 입으라는 식의 조롱하는 행위였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 소란을 피 웠다 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멸시를 퍼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자가 아니시나 우리 때문에 연약한 자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하여 보좌를 버리시고 내려오셨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는 자칭 왕이라 한다 고 조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한 의미에서 왕이십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왕이 아니셨다면 그는 일개의 사기꾼으로 조롱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셨기 때문에 그의 모든 말씀이 그의 왕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주님의 주장이 거부되 고 인격이 모독을 받게 될 때, 상처를 입고 비난을 받으며 멸시를 받는 그의 마음은 슬프기 이 를 데 없었을 것입니다. 찬양을 받으셔야 마땅할 하나님의 아들이 이처럼 모욕을 당하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조롱만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예수님을 조롱하 려고만 했다면 짚으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웠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주님을 괴롭 게 하려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님께 씌웠습니다. 저들은 주님에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으셨습니다. 게다가 머리마저 아픔을 당하셔야만 했습니 다. 정말 괴롭습니다. 우리의 머리와 마음이 아프고 피로해지는 것 같습니다. 왜요? 주님은 온전 히 우리 때문에 이런 멸시와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고통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도 이 고통스러운 정황을 그리라면 아마 포기하고 물러섰을 것입니다. 천 사장이라도 우리의 죄 때문에 수욕 당하시는 주님의 슬픔을 다 노래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귀로 들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명상해야 합니다. 제 말을 주 의해 들으시기보다 여러분이 앉으신 자리에서 사랑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원합니다. 2.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엄숙한 경고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주님에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는 것이 옛날 로마 군병들 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의 뜻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죄를 범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에도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가시를 모아 가지고 가시 면류관을 만드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인격과 교리에 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 중에서 비합리적인 내용을 찾아내는 일에 전력을 다하 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이 생각한 과학적인 발견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에게 씌울 가시 면류관을 만드느라고 손이 상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인류의 참 소망이신 그리스도에게 씌우기 위하여 어떤 모양으로든지 가시 면류관을 만드는 무익 하고 사악한 일에서 손을 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노예를 해방하고 압제받는 사람을 풀어주십니다. 그의 복음은 자유의 헌장이며, 폭군을 징벌하는 것이며 제사장의 무익함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가장 진실하신 친구이십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로 알았다면 진주보다 더 값진 존경과 사랑의 금 강석으로 왕관을 만들어 씌워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라서 가 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님에게 씌우고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남을 비평하고 트집잡는 일은 나쁜 일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영혼을 해치는 일입니다. 그런 일에서 손을 떼시고, 그런 일에 동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지한 군병들은 주님의 머리 위에 관을 씌웠지만 저들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들이 주님의 손 에 홀을 들여드렸지만 그것은 진정한 왕권을 인정하는 상아로 만든 홀이 아니라 갈대로 만든 것 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 아닐 때 그것은 주님을 조롱하는 행위가 되 기 쉽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봉사를 한다고 하면서도 실 상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워드리고 그 손에 갈대 홀을 들여드려 조롱하는 셈이 된 결과를 초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예수님을 주님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불경건한 거짓 고백 을 추궁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면 그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왕 이시라면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정직하게 그에게 면류관을 씌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명목상의 선심과 거짓된 존경심과 충성 의 구실로 또다시 주님을 욕되게 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 자신을 한 번 살펴보 십시다. 우리가 위선자는 아닙니까? 지금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주님께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슬픈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으나 실상은 미움과 조롱의 가시 면류관을 씌워드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께 순종한다고 자부했으나 실상은 불순종의 가시면류관을 씌워 드렸기 때 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가슴 아파하시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엄 숙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3.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승리의 고통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정복당할 수가 없으며, 가장 큰 수치에서까지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고통을 당하실 때 회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의 대가는 고통과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공의의 쓴 잔을 주님께서 대신 마시셨습니다. 주님은 처음에 쓸개에 탄 쓴 잔을 마시게 될 때 그의 입술을 갖다 대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 마시고 나니 잠시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것을 느끼 셨습니다. 그의 영혼은 너무 고통스러워 견디기가 어려우셨습니다. 그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미친 사람같이 머리를 흔드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기도하신 모습을 기억하시지요? 내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은 인간으로서 이러한 고통과 싸울 때 전력을 다하여 세 번씩이 나 기도하셨습니다. 그의 영혼은 피곤해졌고 그의 몸은 피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고통과 분노의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이 쓴 잔을 우리 주님께서 마심으로써 그의 백성을 위하여 영원한 멸망을 없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 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으로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주님은 이런 모욕을 당하셨을 때 겁내지 아니하시고 정해진 목적을 이탈하지 아니하셨습 니다. 우리 주님은 그의 임무를 완성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당할 수 없는 고통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나 주님이 당하신 조롱을 당한다면 그냥 있을 사람이 없을 것입 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왕다운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인내의 모습은 아마도 무지한 병사들에게까지도 감동을 주었으리라 믿습 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목격 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말한 백부장이었는지 도 모르겠습니다. 알 수는 없지만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은 목격자에 의해서 전해진 것만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고초를 당하실 때 인내로 참으시고 견디신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조금도 이 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그러한 인내는 인간 이상의 신비스러운 능력을 알게 하여 줍니다. 뿐만 아니라 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님이 우리의 구주요 왕이신 것을 알게 하여 줍니다. 우리가 예수를 위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기 원한다면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핍박할 때 불평과 복수심을 가지지 말고 참을 수 있다면 가장 잔혹한 사람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으면서까지 강퍅하던 사울이 바울이 되게 영향을 미친 사실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4.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치료의 도구입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통회의 눈물 없이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로 당하는 수치와 손해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견디는 데 큰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훌륭한 사람도 가장 악한 말을 듣습니다. 악한 세상은 거룩한 생활에 대 해서 비난합니다. 왜요? 자기는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맛있는 과일이 새들에게 쪼이고, 가장 높은 산이 폭풍우에 가장 많이 시달립니다. 따라서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는 세상에서 많은 공격을 받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을 위해 살아보려고 애쓰는 데도 어려움을 당하십니까? 견디기가 어렵습니까? 가시로 만든 면류관 쓰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우리의 불만과 고민을 치료해 줍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수치는 우리와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예일대학의 헨리 나운스 박사는 목회자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Wounded healers 라는 말 을 썼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람들의 심령이 다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목사는 그 심령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목사 자신 이 깊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상처받은 이를 치료해 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상 처받은 치료자 라는 말입니다. 외국에 이민 가서 모이는 교회에 가보면 이것이 눈에 띄게 나타납니다. 이민생활은 고됩니다. 더구나 요사이는 경제 사정이 어려워서 회사에서 해고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언어가 잘 통하 지 않는 답답한 마음, 억울한 일 당해도 풀 데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한국 사람들끼리 모이는 교회에 나오면 이것이 터지는데 목회자는 이것을 다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교인은 목회자를 엉뚱하게 대해서 목회자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생깁니다. 이때 가시 면류관 쓰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이 고통을 참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은 외국만 아니고 한국도 그렇고 지금만 아니고 옛날에도 그랬습니다. 전에 평양 성문 밖에 큰 고목이 서 있었는데 그 나무 속이 거의 썩었었다고 합니다. 어느 목 사님이 그 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속이 썩은 나무를 보며 하신 말씀이 아니, 너는 목회도 안 하 는데 왜 속이 그렇게 썩었니?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이 상처를 치료 받을 길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입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우리의 불평도, 근심도, 허영도, 욕심 도, 불만도 다 치료해 줍니다. 이 가시 면류관 잘 쓰면 마지막엔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립니다. 우리 몫의 태인 가시관 잘 써서 마지막에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쓰게 되 시기를 축원합니다.
대속의 고난
마 27:27-54 / 박덕기목사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인데,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도 하고, 주님께서 이번 주 금요일에 십자가 못 박혀 죽게 되심으로 이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하며, 오늘은 고난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최후 만찬 석상에서 성찬식을 제정하신 후, 곧 체포당하여 야간 심문을 당하시게 됩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하신 대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합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는 자들을 가리켜 무신론자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 자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이론적인 무신론자가 있는데, 이론적인 무신론자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없다든지, 세상에서 불의한 자가 득세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없다든지 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실제적인 무신론자가 있는데, 실제적인 무신론자란 입술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실제 그 행위로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딛 1:16절에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라고 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말과 입술로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서도 예수님을 시인하는 성도들이 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 주님께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너무도 잘 안다.”고 시인해주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금요일에 당하신 십자가의 수난을 상고해 보면서 ‘대속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미국의 Ford라는 목사님이 농장을 경영하는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부인은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집사였지만, 남편은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유인즉 “예수가 나를 위하여 죽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면서, 전혀 믿어지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심방을 가니까, 그날따라 남편이 전에 없이 목사님을 반기면서 “목사님, 오늘 저는 참 희한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리 와서 이 닭 좀 보세요.” 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보니까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는 어미 닭이 있고, 주위에는 노란 새끼 병아리 10여 마리가 삐악거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농부의 말에 의하면, 아침에 일찍 농장 정리를 위하여 나와 보니, 어미 닭이 꼼짝 않고 있어서 건드려 보았더니 푹 쓰러지는데, 날개 아래에 병아리 새끼들을 품은 채로, 목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더란 것입니다. 지난밤에 족제비가 병아리를 잡아먹으려고 들어왔다가,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완강히 버티니까, 어미 닭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피를 다 빨아먹고 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미 닭이 병아리 새끼들을 버리고 도망갔으면 살 수 있었겠지만, 새끼들을 위하여 대신 피를 흘리고 생명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마침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한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이 어미 닭처럼 예수께서 우리와 당신의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대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목사님,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라고 하더니, 그 다음 주일부터 열심히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여,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신 것입니다. 代贖이란 말은 Redemption 혹은 Atonement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뜻은 ‘대신하여 갚아 준다.’ ‘값을 주고 되찾아 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속의 고난이란, 죄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죄 값을 치러 주시고, 마귀와 사망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당하신 조롱과 멸시,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이 매우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반역죄, 전쟁터에서 이탈한 죄, 해적, 암살, 반역 소요죄 등을 범한 자들을 벌하는 사형 틀입니다. 십자가형이 선고되면, 먼저 죄수에게 채찍질을 하고, 죄수로 하여금 사형장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 후, 형장에 이르면 죄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굶어 죽기까지 내버려두던가, 못을 박아 죽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특히 유대 나라처럼 날씨가 더운 지역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열대 지방의 열기와, 못 박힌 상처에서의 출혈로 온 몸에 열이 나는데, 몸의 당김과 갈증으로 열은 더 심해 간다고 합니다. 거친 못에 찔린 상처는 부풀어 오르고, 찢어진 힘줄과 신경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더해 간다는 것입니다. 머리와 위장의 동맥은 출혈되어 무서운 두통이 따르며, 정신은 극도의 공포로 혼미해지고, 온 몸에 일어나는 경련은 상처를 더 크게 찢어 놓아서, 실제로 죽기 전에 벌써 여러 차례 죽음의 고통을 맛보다가, 마지막에는 피와 물이 다 쏟아져 기운이 진하여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 형벌은커녕,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쳤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이 결정되자, 빌라도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인간이 발가벗김을 당한다는 것은 최대의 모욕과 수치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난 날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저질러졌던 악랄한 범죄 가운데 하나가 소위 ‘성 고문’이라는 것이었는데, 이성 앞에서 발가벗기는 극도의 수치감을 통하여, 억지로 범죄 사실을 자백하게 한 못된 고문 방법이었습니다. 이렇듯 발가벗기는 것은 최대의 수치와 모욕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많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를 덮고 가리어 주시려고, 자신이 벌거벗음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입혀 줄 성결한 ‘흰 옷’을 위하여, 자신이 발가벗기는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흰옷’은 물론 ‘의의 옷’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죄 씻음을 받은 사람만 입을 수 있는 옷을 말합니다. 이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려고, 주님 자신은 모멸과 수치의 벌거벗김을 당하신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었습니다. 마가복음 15:17이나 요한복음 19:2에는 ‘자색 옷’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포는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옷입니다. 총독 빌라도와 헤롯왕도 이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낡은 주홍색 홍포를 입게 한 것은, 왕으로서 입게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왕이라고 하신 데 대하여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주홍과 같이 붉고 진홍과 같이 붉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입은 홍포는 그의 피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눈과 같이, 양털 같이 희고 정결케 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채찍질을 하는 것은 십자가형에 의례히 수반되는 형벌이었습니다. 그 채찍질은 실로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보통 길다란 가죽 끝에 납이나 못을 달아 채찍질함으로, 도중에 죽는 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한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군병들은 우리 주님의 거룩하신 머리에, 억지로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면류관은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병들은 주님께 금 면류관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고, 예수님을 왕으로 가장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른 손에 갈대를 들리어 주었습니다. 갈대는 왕권을 상징한 홀을 대신한 것으로서, 이 역시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 거룩하신 주님의 얼굴에 더러운 침을 뱉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무서운 모욕이었습니다. 인간의 불신앙은 거룩하신 주님께 이토록 참람한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끄러운 죄악과 수치를 덮으시고, 영원한 제사장으로써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이러한 모욕과 수모를 받으신 것입니다.
45-50절은 예수님의 최후에 대한 기록으로서, 인류의 죄와 저주를 한 몸에 짊어지고, 죽어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후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6시부터 9시까지, 즉 우리 시간으로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그 뜨거운 팔레스틴의 태양이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엄습했습니다. 이 같은 어두움은 천추만대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였습니다. 당시의 놀라운 어두움에 대하여, 아드리안 황제의 윤허를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던 노예 출신 후레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던 그 시간과 동시에 태양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처럼 완전하고 무섭고 기이한 완전 일식은 세상에서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인 제 9시가 가까워지자, 매우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셨습니다. 이 말은 아람어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 외침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습니까? 인류의 모든 고통과 질고와 죄와 형벌과 죽음의 전부를 한 몸에 걸머지고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나님을 불러가며, 고뇌 속에서 절규하는 주님의 처절한 모습, 이 모습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과연 누구를 위한 고난이고 아픔이며, 누구를 위해서 흘리는 피였습니까?
루터는 주님의 고난 전체 과정 속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감동적인 이 부분 곧“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중에, 오랫동안 음식도 먹지 않은 채, 같은 자세로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에 놀라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셨다!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F. W 크룸마허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신 주님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나는 그 고난의 잴 수 없는 깊이를 접근한다는 생각이 날 때, 오히려 두려울 뿐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소리에 대하여 글을 쓰거나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긴 침묵을 지킨 체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을 따름이다!”고 하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이 절규하건만,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일언반구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위로의 말씀 한 마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사고를 내고 고생하는 아들의 고통을 차마 볼 수 없어 가슴 아파 하는 어머니도 있고, 건강치 못하여 몸이 축난 아들을 보고 안쓰러워서 견딜 수 없어 하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수두로 앓고 있는 어린 자식의 고통을 보면서, 며칠 씩 밤을 새웠다는 부모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울부짖을 때, 과연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의 피 흘리는 모습,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쓰리고 아프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절규하는 독생자를 외면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십자가 속에 들어 있는 이 같은 하나님의 고뇌하시는 아픔을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짊어지셨던 십자가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치신 후,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셨습니다. 주님의 영혼은 그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실제로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일어났던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은 첫 아담의 범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찾아 온 것이었으므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삯인 인간의 죽음을 대신해야 했으며, 그것을 통해 인류의 죄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죽으심을 그저 슬프게 감상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죄인의 생명을 구속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음을 깨닫고 확신해야만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고난 주일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십자가 위에서, 말과 글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고 죽어 가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부르짖었던, 주님의 고뇌에 찬 저 절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독생자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면서도, 끝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외면하셨던, 하나님의 그 저미는 아픈 마음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십자가상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난 후, 거기 둘러서서 구경하는 군중 틈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못 박았다. 나는 그 일에 동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수난 주간을 보내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그 모진 채찍질과, 그 부끄러움과 수욕을 다 겪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시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는 다짐이, 우리 모두의 고백과 결심이 되시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시 면류관
마 27:27-31 / 류영모목사
I. 말씀을 향하여
근간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가적인 사태를 바라보면서 뜻있는 사람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의 주장들이 극단으로 치닫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국민간 편가르기는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남북 동서간의 분열도 모자라 세대간의 분열과 보수진보간의 극한 분열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가시를 온유함으로 품은 예수님의 성품이 그리운 때입니다. 이럴때 일수록 서로가 가시돋힌 언어들을 자제하고 잠시 침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왜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여당도 야당도, 청와대도 국회도 서로 상처를 주는 가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시에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고 온국민도 찔렸습니다. 서로 아프다고만 합니다. 찌른 놈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저주의 가시관을 구원의 면류관으로, 상처의 가시관을 치유의 면류관으로 패배의 가시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셨습니다. 때문에 이 시간 "가시 면류관"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마는 지금은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 절기입니다.
일찍이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나르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빼고 설교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챨스 스펄젼은 그의 임종시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나의 평생의 설교와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저도 설교를 하는 목사로서 한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복음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닌게며, 예수의 보혈이 없는 설교는 설교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설교를 하려면 못내 자신감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설교만큼은 하면 할수록 내게는 무한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II. 당하신 고난의 의미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예수께서 로마 군병들로부터 희롱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한 성서학자는 "이 희롱의 순간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심리적으로는 더 아프고 힘든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을 총독의 관저로 끌고 들어갑니다. 거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님을 부서진 의자에 앉혀놓고 옷을 벗기고 낡은 홍포를 입힙니다. 머리에는 지독한 가시, 팔레스타인 아카시아 나무와 싯딤나무 그리고 잔가시가 많은 스피나 크리스티 나무를 엮어 만든 관을 씌우고 손에는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끓고 "유대인의 왕 만세"를 떠들며 조롱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그 조롱은 비열하고 또 한편 잔인했습니다. 이들의 희롱은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엔 깊은 계시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그 한토막도 의미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1.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감은 창세기 3장 선악과를 따먹은 죄와 더불어 왔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며 곧 모멸입니다.
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감추시기 위해, 벌거벗기움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② 주님께서는 내가 당할 수치와 창피를 덮으시기 위해 당신이 친히 수치를 감당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당신의 옷이 벗겨지시므로 장차 우리가 입게 될 흰옷 - 영광의 옷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④ 옷을 벗기움 당했다고 하는 것은 신분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여주시기 위하여 잠시나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을 만왕의 왕되신 신분을 박탈당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홍포를 입으셨습니다.
곧 자색 옷입니다. 이는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옷입니다. 예수님의 홍포는 왕의 홍포가 아니라 죄인의 홍포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1:18).
예수님께서는 주홍도포에 진홍 피를 흘려 주홍같고 진홍같은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죄의 무거운 짐으로 괴로워하며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정죄의식에 시달리시는 분 계십니까? 영혼의 진통을 안고 이곳까지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주님 앞으로 달려오십시요. 당신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눈처럼 깨끗케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채찍을 맞았습니다.
십자가 형을 지는 죄인은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납과 못, 짐승의 뼈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을 맞았습니다.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몸이 약한 죄수들은 채찍을 맞는 중에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잔인한 망나니를 만나면 물 묻은 가죽 채찍을 옆구리 쪽으로 휘감아 내리쳤고 그러면 창자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엎드려 채찍을 맞으면 등에 고랑이 패여 피 고랑을 만든다 라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바로 이 말씀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 류영모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김집사 이권사 당신이 나음을 얻었도다. 아멘!
4. 그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워 주었습니다.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놀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반드시 그들을 아니 모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그분을 재판하던 재판관들도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조롱하던 자들도 그를 찌른자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도, 나도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5. 또한 예수님의 머리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금 면류관 대신 우리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이 시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슴 졸이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받으며 조롱받으며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침 뱉음을 당하신 그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습니까?
① 천군 천사들이 흠모하는 얼굴이 아닙니까?
②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으나 결국은 보지를 못했던 그 영광스러운 얼굴이 아니었습니까?
③ 모든 나라와 권세가 경배하고 천사들이 수중들던 왕중의 왕이 아니셨습니까?
④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그 얼굴에 야만인들의 침이 튀겨야 했더란 말입니까?
III. 가시 면류관
이 수없는 고난의 모습 가운데서도 오늘 아침 우리는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쪽박도 왕이 쓰면 왕의 밥그릇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 거기엔 크고도 분명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므로 저주의 면류관이 속죄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부귀, 영화, 존귀를 자랑합니다. 그 대신 저주와 고통과 아픔을 백성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왕 -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저주의 관을 쓰시고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백성들에겐 구원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갈3:13)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저주를 받은바 되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저주가 되었다" "저주 덩어리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내려진 저주요 우리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는 어떤 것입니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5-19)
이것이 율법의 저주입니다. 이 저주의 가시관이 우리 주님 머리에 씌워졌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박힌 이 가시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까? 이 가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표징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18).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가시는 인간의 영혼을 짓밟고 말았습니다. 여기 가시 면류관은 곧 저주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가시관을 쓰시므로 이제부터 이것은 속죄의 면류관, 구속의 면류관, 용서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아픈 가시관을 쓰셨고 내게는 속죄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저주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용서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고통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사랑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2. 주님의 머리에 상처를 주던 그 면류관이 이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은 크고 작고 굵고 가는 가시로 만들어져 그것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병정들이 막대기로 면류관을 내리치자 가시들은 더 깊숙이 찔러 들어갔습니다. 바로 주님을 찌른 이 가시가 우리를 치료하는 가시가 될 줄이야. 당신의 크고 작은 상처, 나의 굵고 아픈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아무리 큰 상처도 혼자 움켜쥐고 있지 마십시요. 주님 앞에 상처를 드러내십시오. 우리 주님, 그 상처를 지금 이 시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피 묻은 손으로, 못 자국난 손으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정에도 직장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가시가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경험, 지울 수 없는 쓴뿌리의 아픈 상처들, 용서받지 못했다는 정죄의식들이 가시가 되어 매일같이 나를 찌릅니다. 사랑의 상처, 배신의 상처, 말 한마디, 눈짓 한번도 가시가 되어 서로를 찔러 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상처를 받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가도 목회를 하다가도 가시에 찔려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일을 하다가도 찔릴 수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불만과 근심, 내적갈등도 가시가 되어 내영혼과 마음을 찔러 피나게 합니다. 인간들은 저마다 가시에 찔린 상처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너 혼자 아픈 것 아닙니다.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습니다.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모두가 상처투성이, 이게 세상사요 인간사 아니었습니까?
이 상처들은 어떻게 고침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우리의 찢기고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흘리신 예수의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가 가시에 찔림으로 우리의 아픔을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 주님께 위로가 있고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울며 도망가려 하지 마십시오. 울며 울며 달려나와 주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구세주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영원한 승리의 보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예수님 머리에 상처를 준 가시는 신비의 수술도구와 명약이 되어서 인생의 상처를 치료한다"라고 했습니다.
치료하시는 그 주님 앞으로 나아 오십시다!
오 예수님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주님 손과 발 못 박혔고 머리엔 가시관 박히셨네
내 모든 죄와 허물 위해 말없이 피 흘려 주셨네
오 예수님 나의 손 잡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3. 가시 면류관이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죽으셨습니다. 마치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찌르고 도전해 오는 고난이 반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가 오는 것을 막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가시를 허락하신 분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엮도록 하신 것입니다.
은혜의 동산에 가면 그룹별로 이름을 짓습니다. 저는 아가페 TD 1기를 경험했는데 저희반 이름이 쓰레기통입니다. 언젠가 엿장수방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쓰레기통과도 같으신 분이라는 거지요. 우리의 저주, 근심, 걱정, 문제의 쓰레기들을 하나님께 가져가면 하나님은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다 받아 주시고 맡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엿장수 같으신 분이라는 거지요. 옛날엔 떨어진 고무신, 찌그러진 양재기, 심지어 머리카락 짜른 것들을 가져가면 엿장수 아저씨는 울릉도 호박엿을 뚝뚝 짤라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물을 호박엿으로 바꿔 주시듯 예수님은 저주의 면류관, 실패의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엿장수 같은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고물과 폐품 쓰레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무거운 죄 보따리 한숨 고통 눈물을 그 어떤 예물보다 귀하게 받으셔서 용서 자유 기쁨 행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고통, 눈물, 근심보따리를 십자가 앞으로 가지고 오길 원하십니다. 주위에는 자신의 고통과 죄와 한숨을 그냥 담아두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따리째 그걸 주님께 가져가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IV. 우리도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자
오늘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시가 괴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바라보고 그 가시로 승리의 면류관을 함께 엮어 가십시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은 이름 그대로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성경에서 종종 성도의 모델로 제시되는 사도 바울은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 불렀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 육체의 가시를 칼빈은 "영적인 갈등"이라고 했고 루터는 "바울이 받았던 핍박", 토마스 아퀴나스는 "독신생활에서 오는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했습니다. 또 터툴리안은 "이유없는 두통" 혹자들은 "외모에서 오는 콤플렉스" 혹은 "안질"이었다고 말하며, 라이트 후프 같은 이는 "간질병"이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 괴로워 세 번씩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가시의 고통을 받으면 모르겠거니와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바쳐 헌신한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지 왜 이런 가시의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가 부귀영화 만사형통은 없다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그가 육체의 가시를 지녔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허락한 모든 은혜가 천국의 면류관이 되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도다." 그가 이 땅에서의 보상을 기대했더라면 그는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땅의 보상보다 하늘의 면류관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다음의 영광스런 부활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어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십니까? 그 십자가가 너무나 무겁습니까? 당신의 면류관도 그만큼 더 클 것입니다.
어느 구두회사의 사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고급 구두일수록 더 많이 두들겨 맞는다." 다이아 몬드도 cutting이 많이 된 것일수록 더욱 빛나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본 차이나는 뼈를 부서뜨려서 분가루처럼 고운 가루를 만든 다음에야 귀한 도자기가 됩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귀한 그릇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크게 쓰시려고 강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모세를 귀하게 쓰시려고 완전 밑바닥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다윗을 고귀한 인물로 쓰시려고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바울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드시려고 육체의 가시까지 주신 것입니다.
V. 맺으며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여러분!
지금 당신의 가시가 무엇입니까? 그 가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봅니다. 주님을 붙잡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봅니다.
·당신이 고난의 가시에 찔려 울고 있을때 주님은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나도 통곡하고 울었다"
·당신이 가난하고 배가 고플때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40일을 금식했다."
·입을 것 없어 부끄러울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발가벗기움을 당했다."
·당신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죄없는 나도 흉악범으로 취급 받았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 쓰러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상처난 어깨로 십자가를 졌느니라."
여러분, 주님 날 위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위해 가시 면류관 기쁨으로 쓰고 가십시다. 우리 주님 내 삶의 아픈 가시를 바꾸어 구속의 면류관, 치유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삼아 주십니다.
금세기 위대한 신학자였던 Bowman 박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선교할 때 한 노파가 길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과 한 동네의 친구였던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이 노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가 믿는 힌두교의 많은 남신과 여신들로 만족할 수 없었는가?" 노인은 대답합니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심판대의 변호사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