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 단풍 들것네
시월이 가는 마지막은 토요일이다. 설악산에서부터 불붙어 내려오는 단풍은 한반도 허리를 접수하고 바짓단까지 수를 놓으려는 즈음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그랬지만 나에게 단풍 구경은 사치다. 그저 내가 사는 동네 근처까지 왔을 때 비로소 ‘아, 이제 가을이 정녕 가는구나!’고 마음속으로 받아들였다. 설악산이나 내장산 단풍 실경은 감상하지 못해도 남도 단풍 명소는 알고 있다.
지리산 칠선계곡이나 피아골 단풍은 너무 알려졌다. 내가 사는 생활권에서 아름다운 단풍은 해인사다. 홍류동은 솔숲을 지나다 맞은편 청량사를 품은 매화산 단풍이 무척 고왔다. 남산 제일봉이라고 하는데 해인사 뒤 가야산보다 더 아름다웠다. 섬진강 건너 송광사와 선암사가 자리한 조계산 단풍도 잊을 수 없다. 용화사를 품은 통영 미륵산이나 범어사에서 오르는 금정산도 있다.
지난 주말과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 마산역으로 나갔다. 광장으로 오르는 노점에는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여러 과일과 푸성귀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역 광장 농어촌버스 출발지에서 이번에는 진전 둔덕으로 가는 76번을 탔다. 마산 시가지를 벗어나 진동 환승장에 들렸다가 오서에서 양촌과 일암을 거쳐 대정에서 둔덕으로 드니 승객은 내 혼자뿐이었다. 옥방에서 한참 기다렸다.
골옥방 어귀는 밀양 박 씨네 선산 명품 도래솔을 도 지정 기념물이다. 골옥방은 밀양 박 씨 집성촌으로 출향 인사 가운데 의류 업계에서 우뚝한 ‘인디언’ 사장 박순호가 세운 ‘여양재’가 덩그랬다.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마산으로 나가 부산에서 사업 근거지를 마련 ‘세정그룹’ 회장이 되었다. 현 경남교육감 박종훈 부모도 골옥방에서 바깥 마을 대정으로 나가 방앗간을 운영했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마을 어귀 높이 자란 감나무에 조랑조랑 달린 감이 눈길을 끌었다. 버스는 골옥방에서 나와 둔덕에 들렀을 때 내가 내리니 기사는 텅 빈 차로 돌아나갔다. 둔덕골로 들어 여항산을 쳐다보니 엷은 단풍이 물드는 기색이었다. 대기는 청정하고 하늘은 파랬다. 군북으로 넘는 오곡재로 향했다. 오실골 어귀 당산 고목 느티나무와 굴참나무들도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오곡재는 지난봄 벗과 머위와 취나물을 뜯느라 다녀간 걸음이 있었다. 여름에 나 혼자 미산령을 넘었고 이번 가을에도 야생화 탐방을 다녀간 산자락이다. 지난번에는 길섶에 물봉선이 피운 선홍색 꽃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 모두 저물었다. 엷은 보라색 쑥부쟁이도 끝물이고 노란 산국이 이 계절을 대표했다. 산국은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이어 산야를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야생화였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오르다가 오곡재와 방향이 다른 미산령으로 들었다. 우거진 적송이 자라는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곡차를 비우며 잠시 쉬었다. 길섶에는 산국 말고 꽃향유를 볼 수 있었다. 산중에 깊어가는 가을 풍경을 폰에 담은 사진을 몇몇 지기들에게 보내면서 안부를 전했다. 배낭을 추슬러 자리에서 일어나 임도를 따라 걸었다. 지천으로 핀 산국 향기를 계속 이어졌다.
미산령 산마루 미산정에 오르니 여항산이 더 가까웠다. 산등선 바위구간이 험해 나는 바라보기만 했지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산이다. 정상부터 단풍이 제법 물들어 갔다. 둔덕에서 뻗쳐간 산세는 V자 골짜기를 이루며 진동만으로 나갔다. 바다는 섬에 가려 보이질 않고 거제 일대 산봉우리들만 보일 뿐이었다. 정자에서 가져간 도시락을 비우고 고갯마루 북사면 함안 파수로 내려섰다.
당국에서는 길섶에 우거진 풀들과 나뭇가지를 단정하게 잘라 놓았다. 잘라둔 나무 가운데 내가 필요로 하는 두릅나무가 보였다. 봄날에 두릅 순은 좋은 산나물이지만 나무토막은 약재로도 쓰인다. 혈당을 낮추어주는 효험이 있다. 배낭에 넣어간 톱으로 말라가는 두릅나무를 토막 내 배낭에 채웠더니 묵직했다. 골짜기를 빠져나간 미산마을은 곶감 산지 감을 따는 일손이 무척 바빴다. 20.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