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개인이라는 거시적인 이야기로 풀기에 한일전은 지나치게 복잡한 테두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 사람’과 ‘축구’라는 문맥에 대입하면 누구나 잠시 입심 좋은 ‘이야기꾼’이 된다. 작가 이기호가 그 미묘한 간극을 재치 있게 포착했다. 아버지의 한일전과 아들의 한일전은 이렇게나 달랐다.
#1 킥오프 한국 vs 일본 v 아버지 vs 아들
어쩌자고 그랬는지 몰라도 그날 그때, 나는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TV로 중계되는 한일전을 보고 말았다. 그러니까 97년 9월, 모두의 기억 속에 ‘도쿄대첩’으로 각인된,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경기였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아 함께 차디찬 맥주를 들이키며, 가끔 농담도 하면서 경기를 즐겼으면 좋았겠지만…….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일요일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출근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TV 앞에 함께 앉게 된 것이었다.
사실 아버지가 내 옆에 앉는 것을 보고, 나는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게 옳았다. 그 해 2월, 대학을 졸업한 나는, 9월이 다 지나도록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는 열심히 써서 이 회사 저 회사에 보내봤지만,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는 단 한 통도 받지 못했다. 뭐,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학점은 선동열 방어율과 진배없었고, 토익이나 토플 따윈 무슨 발암물질 바라보듯 멀리했으니, 입사담당자의 입장에서 보면 ‘거 괜히 우표값만 날린’ 지원자에 속했던 것이었다. 그런 세월이 한 달, 두 달 계속 되다 보니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 또한 점점 선동열을 바라보는 타자의 그것으로 변해갔다. 뭐,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머리는 늘 감지 않아 한 달 내내 까치집이 튼실하게 지어져 있었고,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밥 먹고 TV보고,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것이 전부였으니,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 또한 그리 편치만은 않았을 터(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나와 함께 병원 좀 갔다오라고 여러 번 얘기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와 함께 축구경기를 본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보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끝내 일어나지 못한 이유는, 딱히 어디 갈 만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축구는 보고 싶고, 지갑에 돈은 없고, 친구들은 모두 떠나갔고…. 그러니, 그냥 아버지 옆에 주저앉고 만 것이었다.
우리 때는 말이다, 일본한테 축구를 지면 그냥 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고 오라고 했어. 아버지는, TV해설자가 일본의 전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는 멘트를 날리자마자, 곧장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다 정신력 싸움이야. 전력은 무슨……. 아버지는 그러면서 요즘 젊은 것들은 나약한 게 문제라고, 그런 정신상태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고, 한참 동안 설교를 늘어놓았다. 다 배를 곯아보지 않아서 그렇다며, 세 끼만 굶어보면 눈빛이 달라질 것이라며,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얘기했다. 나는 계속 TV화면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시합은 분명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우리 집 거실에서도 만만치 않은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솔직히 시합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그저 경기를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당시 내가 ‘좋아라’ 하던 최용수 선수가 또 다시 골을 넣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 오직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아버지에게 한일전 축구시합은 단순한 경기가 아닌, 전쟁이었고 복수였으며, 젊은이들의 투지와 투혼을 가늠할 수 있는 시험무대였다.
#2 선제골 아버지, 고정운(아들)의 정신력을 논하다
전반전은 다행히 우리 쪽에서 주도권을 잡아 그런대로 조용히, 아버지의 별 다른 성토 없이 끝마칠 수 있었다. 한데, 문제는 후반전에 일어났다. 조금 지친 듯한 고정운이 골문 앞에서 어정쩡한 드리블을 하다가 상대편에게 가로채기를 당했고, 그것이 곧장 일본의 선취점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경기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그러니까 일순 패색이 짙어진 것이었다.
저런, 저 어이없는 놈을 봤나! 아버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화를 냈다. 그러곤 예의 또 그 정신력 이야기를 꺼냈다. 정신상태가 흐리멍텅하니까 저런 실수를 하지. 하여간 요즘 젊은 놈들이란! 아버지는 좀처럼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고, 그 여파는 곧장 애꿎은 나에게까지 이어졌다.
너는 언제까지 그러고 지낼 건데? 응! 아버지는 그동안 많이 참아왔다는 듯, 내게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말들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아버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TV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으니, 리모콘으로 ‘팟’ 전원도 꺼버리고, 담배까지 꺼내 피우면서 목청을 높인 것이었다. 나라면 공사판에 나가서 자재라도 나르겠다, 도대체 대학은 왜 다닌 거냐, 그렇게 TV만 보고 있으니 남들 다 하는 취직도 못하는 거 아니냐, 운운.
아아, 그때처럼 고정운 선수가 원망스러웠을 때가 또 있었을까. 나는 계속 검게 변해버린 브라운관을 바라보며, 후반 30분 이후의 상황들에 대해 상상했다. 한 골을 더 먹었을 수도 있었고, 그대로 경기가 끝났을지도 모르고, 동점골을 넣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 내게 있어 정신력이란, 그저 상상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말한대로 정신력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이겨내고 극복한다는 것은, 현실이 그만큼 단순했을 때 가능한 일이었고(그러니까 ‘모 아니면 도’가 가능했던 시절의 이야기), 또 현실을 왜곡하고 은폐할 때나 쓰는 말처럼 들렸다.
설령 정신력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현실은 언제나 뒤로 숨지 않고 앞으로 튀어나오는 법. 나에겐 도무지 일본의 인구수와 우리의 인구수, 일본의 축구 인프라와 우리의 맨 땅 그라운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승패만을 강요하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마치 나처럼 토익과 토플을 멀리한 친구가, 대학 4년 내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친구보다 먼저 입사에 성공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정신력 하나로 역전시킨다는 것은 너무 부당한 처사가 아니던가. 고정운 선수가 드리블 미스를 한 것은 어쩌면 단순한 실수가 아닌, 우리 그라운드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 결과물일지도 몰랐다.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아버지 세대는 팍팍한 현실을 늘 그렇게 정신력으로 잊고 이겨낸 세대이니, 그게 단순히 아버지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억울하기만 했다. 후에 스포츠 뉴스를 통해 최용수 선수의 어시스트 덕분에 서정원 선수가 동점골을 넣고, 기대하지 않았던 이민성 선수가 역전골까지 성공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그저 더 억울하기만 했다. 왠지 모르게 나에겐 그런 역전의 기회마저 봉쇄당한 듯한 기분이 들어, 한동안 아버지와는 말도 나누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축구 때문에 부자지간에 이 무슨 일이냐, 며 어머니가 탄식했지만, 나는 쉽게 화를 풀지 않았다.
#3 역전승 도쿄대첩 이후
그리고 그해 12월, 우리나라는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고, 아버지는 실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난생처음 취직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실직한 지 한 달 후의 일이었다. 당연, 내 힘으로라도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했으니까.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은 ‘도쿄대첩’ 이후 참석한 프랑스 월드컵에서 연전연패, ‘오대영’이라는 별명을 안고 남들보다 일찍 귀국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보다 체계적인 축구 인프라가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이후부터였다.
현실은 언제나 은폐되지 않고 찾아오는 법. 한일전은 언제나 우리에게 현실을 잊게 만든다. 그게 우리의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 트라우마에서 이제 좀 벗어날 때도 된 듯한데, 이번 WBC 야구시합을 보니,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다. 될 수 있으면 자주 만나고, 자주 시합도 해야 한다(누군가 주창했듯, 프로리그를 통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 상처는 상처로, 정공법으로 치유할 때 아문다. 어쩌면 그게 정석 플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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