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건국과정은 양당서에 기술된 발해전에 불과해 그 정확한 전말을 알기 어렵다. 발해건국의 기폭제가 된 것은 거란 이진충의 난인데 당시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영주에 있었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이 두 사람이 이진충의 난이 발생하였을 때 모종의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저자가 이진충의 난을 분석한 글들을 읽어 보았으나 대부분 양당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을 바탕으로 사건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여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이진충의 난을 시간 경과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이들의 행적을 찾고자 하였다.
1. 이진충의 난 - 초기의 기록
먼저 구당서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하면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손만영이 매부 이진충(李盡忠)과 함께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진멸은 무상가한(無上可汗)으로 자칭하고 손만참을 대장으로 하여 전진하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켜 10일만에 병사가 수만명으로 불어나 단주(檀州)까지 육박하였다. 우금오대장군(右金吾大將軍) 장현우(張玄遇), 사농소경(司農少卿) 마인절(麻仁節)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러 나섰으나. 서협석곡(西硤石谷)에서 대패하고 장현우와 마인절은 사로잡혔다.
다음 신당서의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진충과 손만영이 군사를 일으켜 조문홰를 살해하고 영주를 도적질하여 반란하였다. 진충은 무상가한이 되어 만영을 장수로 삼아 수만의 무리를 10만이라 말하며 숭주(崇州)를 공격하여 토격부사 허흠적을 사로잡았다. 응양장군 조인사, 금오대장군 장현우, 우무위장군 이다조, 사농소경 마인절 등 28명의 장군에게 그를 치게 하였으며, 양왕 무삼사를 유관도안무대사로 삼았다. 여러 장수들이 서협석 황장곡에서 싸움을 치렀는데, 패하고 현우와 인절 등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 거란이 진격하여 평주(平州)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단주(檀州)를 습격하였으나 청변도부총관 장구절에게 패하였다.
지금까지의 사건을 자치통감과 같이 비교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96년 5월 12일(壬子): 이진충과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켜 조문훼를 죽임.
12-25일 사이: 숭주(崇州)에 주둔하던 용산군토격부사(龍山軍討擊副使) 허흠적(許欽寂)을 사로잡음.
696년 5월 25일(乙丑): 조인사, 장현우, 이다조, 마인절 등 28명의 장군으로 거란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림. (고성문-고자 부자도 이 때 출전함)
696년 7월 11일(辛亥): 양왕 무삼사를 유관도안무대사로 삼아 승주(勝州)에 주둔시켜 거란의 서쪽을 방비함.
696년 8월 28일(丁酉): 당군이 협석곡(硤石穀)에서 대패함.
696년 9월 1일(庚子): 건안왕(建安王) 무유의(武攸宜)를 청변도행군대총관(充任清邊道行軍大總管)을 삼음.
이후 - 9월 23일(이진충의 사망)까지: 거란이 평주(鄒保英妻奚氏)와 단주(청변도부총관 장구절)에서 당군에게 패함.
696년 9월 18일(丁巳): 돌궐이 양주(涼州)를 침입해 도독 허흠명(許欽明)을 포로로 잡아감. 이 무렵 5월 승주에서 포로가 된 허흠명의 형인 허흠적이 안동도호부를 포위한 거란에 의해 사망함.
이진충의 사망일을 구당서에서는 9월 23일(庚申)이라하고, 자치통감에서는 10월 22일(辛卯)라고 하면서 이어 기주의 함락과 자사 육보적의 사망을 같은 기사에 실었는데, 저자는 구당서의 기록이 옳다고 본다. 그 이유는 신당서에서는 10월 22일(辛卯)에 거란이 기주를 함락하여 자사 육보적을 죽였다하고, 구당서에서는 10월에 손만영이 기주를 함락하여 자사 육보적을 죽였다고 하였다. 사건의 전개과정은 이진충의 죽음-돌궐이 거란을 침입하여 이진충, 손만영의 가족을 잡아감.-손만영 집권-기주공격의 순이다. 10월 22일은 기주가 함락되고 자사 육보적이 죽은 날인 것은 세 사서가 모두 동일하므로, 위에 언급한 일련의 사건이 발생한 시간경과를 고려할 때 이진충의 사망일은 구당서에 언급된 9월 23일(庚申)임이 분명한 것 같다.
이진충의 사망일은 발해건국집단의 행동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8월 28일 거란은 서협석곡에서 두 차례에 걸쳐 당군을 괴멸시켰는데 첫 번째는 조인사, 장현우, 마인절 등의 패배이고, 두 번째는 연비석(燕匪石), 종회창(宗懷昌)의 패배이다. 이 승리이후 거란은 평주와 단주를 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 중 단주를 공격하였을 때 당나라의 장군 장구절의 직책이 청변도부총관임으로 이는 9월 1일 이후에 벌어진 사건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거란이 안동도호부에서 다른 전쟁을 벌이고 있었음을 허흠적의 일화에서 알 수 있다. 거란이 안동도호부를 포위한 시간은 분명치 않으나 허흠명이 돌궐에 포로(9월 18일)가 된 무렵이라고 하고, 이진충의 사망(9월 23일)이전의 사건으로 신당서와 자치통감 모두에서 기술하였음으로 9월 중순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후 청변도행군대총관 무유의(武攸宜)가 요동도독 고구수(高仇須)(爲建安王與遼東書)와 안동제번장에게 보낸 서신(爲建安王與安東諸軍州書, 전당문)에서 안동도호부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698년 9월 설눌(薛訥)이 안동도경략(安東道經略)으로 임명되는 점으로 볼 때, 안동도호부는 이 때 거란에 함락되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8월 28일부터 9월 20일 무렵까지 거란은 남쪽의 평주와 단주, 그리고 동쪽의 안동도호부에서 양면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근거지 영주를 지킬 병사까지 고려할 경우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운용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 거란의 군대가 수만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해되지 않는 군사작전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첫째, 서협석곡 전투 당시 거란의 전 병력이 동원되어 승리를 거둔 후 일부 군사가 안동도호부로 이동하였을 가능성, 둘째, 처음부터 군사를 둘로 나누어 협석곡과 안동도호부로 진격하였을 가능성이다. 그런데 전당문의 上軍國機要事(진자양-무유의)에서 “또 적이 처음 승리하고도 곧바로 서쪽으로 침략하지 않은 것은 포위되는 것이 매우 두려워 安東을 공략하여 스스로 안전케 하려는 계책입니다.”(又賊初勝, 不即西侵者, 深恐圍略安東, 以自全計)라는 문구로 보아 거란은 협석곡에서의 승리이후 잠시 공격을 중단했던 것을 알 수 있고, 안동도호부에 대한 공격 시점이 9월 중순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첫 번째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된다.
첫댓글 오! 청골님의 새로운 시도군요.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