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분황사
분황사는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서 멀지 않는 곳이다. 바로 이웃하여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가깝다. 기차 통학을 했던 나는 토요일 오후는 차를 기다리느라 학교에 머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 분황사를 찾아간 일이 더러 있었다.
분황사는 산지가람이 아니고 평지가람이다. 경주시내에서 감포로 가는 도로의, 지금의 보문단지로 가는 길의 곁에 있다. 학교의 교문을 나서서 조금만 걸으면 분황사이다. 여름날의 절마당은 나무 그늘에 덮여 있다. 시원하기 이를데 없다. 그늘이 진 흙마당에 신을 벗어 자릿대 삼아 깔고 앉으면, 땅에서 올라오는 찬기운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에 다닐 때 시골마을의 골목에서이든, 학교의 푸라타나스 나무의 그늘에서든 어렸을 때의 친구들과 그렇게 둘러앉아 시간을 보냈다. 분황사라면 모전석탑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지금은 절 마당의 그늘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던 일도 더 많이 생각난다.
경주를 떠난 후에도 고적 답사팀을 따라 다니면서 분황사는 셀 수 없이 자주 지나쳤다. 분황사 주차장에 버스를 세우면 답사팀은 우 몰려서 황룡사로 갔다. 황룡사 절 터와 바로 이웃한 분황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입장료를 받으면서부터 나는 절 안으로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절의 내부를 너무 훤히 알고 있으므로 왠지 돈을 내는 것이 아까웠다. 일행이 절을 둘러보고 나올 동안 바깥에서 기다리거나, 절문 틈새로 모전석탑만 훔쳐보듯이 바라보곤 했다.
그것도 이제는 오래 전의 일이 되어 버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절 자리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前佛시대의 7가람 터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곳은 불교 이전의 토속신앙에서도 성지였으리라.
선덕여왕 3년(634)에 절을 지어 王芬寺라 했고, 자장율사가 주재했다. 자장율사는 황룡사 구층탑의 건립에 관여하신 분이다. 이때의 불교를 호국불교라고 말하므로, 자장율사가 주재했다는 것은 호국사상과 관계있는 절이었으리라고 본다. 왜냐면 후대의 일이지만 분황사의 우물에는 호국용이 산다는 전설이 있다.(三龍變魚井)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지(527) 100여 년이나 흘렀다. 불교문화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을 무렵이다. 그러나 이때 최초로 여왕(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므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귀족의 반란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이 비담의 반란이다. 정치적 안정이 필요했고, 백제와 고구려의 침입을 막으면서 나라를 지켜야 할 절박한 시기에 창건한 절이었다. 분황사의 가호 덕인지는 몰라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
통일을 이룬 시기에 원효가 이 절의 주지였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왜냐면 원효는 자장과는 다른 불교사상을 가졌고, 호국이라는 거창한 의미보다는 대중을 위한다는 대승사상이 강한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또 자장처럼 왕족도 아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유명하였다고 하였다.
이후로 불상 조상에 관한 여러 기록들이 남아있다. 관음보살상, 약사여래 상 등의 기록이 있다. 이들은 백성들이 현세에 겪는 고통을 보듬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호국신앙의 불교에서 백성들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대승불교로 바뀌어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런 이유로 원효대사가 주지가 되었으리라. 어쨌거나 신라 불교에서 초기 사찰이고, 황룡사와 인접하여 북쪽에 있다.
경주 동국대학교에서 발굴하여 발굴 보고서를 발표하였지만, 우리는 그런 전문적인 것까지 알 필요는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삼국유사에는 분황사를 무대로 한 불교설화를 전해준다. 대표적인 것이 광덕과 염장의 설화가 유명하다. 분황사에서 열심히 불법을 믿고 지켰더니 죽어서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극락세계로 갔다는 이야기이다. 극락왕생은 불교의 대표적인 기복사상이다. 황복사나 불국사의 설화에서 보듯이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불교가 기복신앙으로 흘러갔다. 분황사 설화도 그런 내용을 보여준다.
분황사는 원효대사와 관계가 깊다. 살아서 이 절에 계셨고, 마지막으로 고선사에서 죽음을 맞이한 기록이 남아있다.
원효는 신분도, 사상도 자장율사와는 다르다. 두 스님 모두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두 스님이 주지로 계셨다는 것은 신라 시대에 이 절의 위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리라.
나는 경주를 떠난 이후에도 분황사를 수없이 방문했다. 새삼스레 이 절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방문 하지는 않았다. 이 절을 굳이 방문하지 않아도 이 절의 곁을 지나쳐다니는 일이 많았다.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어느 하루의 방문기를 쓰지 않고, 이렇게 뭉뚱거려서 써 보았다.
나는 입장료 아끼려 분황사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분황사를 방문하실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들어가서 모전석탑도 보고, 원효대사의 가르침도 한 번 더 새겨보면 입장료 따위야 아까울리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