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게 걸었다
숱한 표정이 묻어 있는
뒷모습을 숨기고 싶어서
소심하게 걸었다
육교만 남고
고무줄과 단추를 파는 노인의 얼굴을
지나칠 때마다
춥게 걸었다
뒷모습을 들키지 않은 채
수많은 육교를 건넜다
사유상 뒷모습에서
흘러내리는 숨을 들이마셨던 날
춥게 걸었던 날이 깨어나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먼 데를 바라보았다
뒷모습이 끌고 가는 길고 긴 곡선의 길에
당신이 풀 수 없는 망망한 것들의 목록
먼 데는 멀어지고 있었다
소나기
꽃도 종탑도 없는 성당
긴 의자에 세 사람이 남았다
냉담한 사람을 탓하지 않는
기다란 십자가 아래
합창 중에 독창을 하던 사람도
그늘처럼 갔다
내가 준비했던 초는 켤 때를 놓쳤지만
신기하게도 꺼지지 않아서
끊어진 줄 알았던 끈이
이어지는
그런 날이 올 때가 있었다
나의 기도는
참으로 이기적이었지만
작열하는 태양을 비껴갔다
입김 없는 창가의 기도는
얼어붙은 문을 열게 하였고
기도는 민낯이어서
돌아가도 멀지 않았다
호박마차 타고 급히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여름
지난 계절이
다음 계절을 데려왔다
투구게
푸른 피를 갖기로 했다 너의 몸에 대롱을 꽂아 투명한 유리병에 푸른 피를 뽑아냈다 유리병에 푸른 피가 떨어질 때 병을 붙잡고 있던 붉은 피를 가진 나의 손이 저릿했지만 네 핏속 헤모시아닌으로 백신을 만들어 심장이 펄떡이는 사람을 살렸다 결박한 너의 등을 풀어 바다로 돌려보내고 나는 푸른 피로 푸른 잉크를 만들어 편지를 쓴다 산란지인 델라웨어만에서 이제는 전처럼 널 볼 수 없다는 소식 들었지만 실험실을 떠나지는 못했다 눈을 감으면 투구를 쓴 내가 붉은 피를 흘렸다
시집 『 춥게 걸었다』 시와 소금, 202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