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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 코너 스크랩 수필 인연
황종원(중앙대) 추천 0 조회 26 11.10.26 10: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0월 24일, 아내와 인연이 시작한 날이다.

이런 날에 아내는 초연하나 나는 추억한다.

하다 못해 동네 식당에 가자.

아내는 기억해 둔 콩나물 국밥 집에 가자고 한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말한다.

" 그대를 보면 첫 만남의 모습이 떠오르오. "

" 에고 닭살 돋는 말 마소. "

나이 먹을수록 남자는 순정의 남자다.

 

 

옷깃이 스쳐도 인연인 세상사, 한 평생 30여 년 삶이 어찌 편하랴.

나는 해마다 그 만남과 슬픔이 교차되던 때을 반추한다.

물기 어린 시선에 떠오르는 시간들...

그 때.

그 날이 오면 뭔가 가슴이 따스하다.

그 날이 오면 빈말이나마 밥 한 그릇 하자는 말을 한다.

우리 입이 호사하기 보다 소박한 음식으로 자축한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걷다가 눈에 뛴 식당에 간다.

 

 

 

 

 

전주 콩나물 국밥이 과연 여기서도 전주 맛이 날까.

 

사람들이 앉아 있는 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대기 어려워서 빈자리만 찍는다.

손님이 많은 집이다.

 

가격과 먹는 요령이 있다.

 

 

짭?름 밑반찬들... 무심코 자주 손이 가다가 나중엔 속이 짜서 혼났다.

 

전주 남부 시장식 콩나물 국밥

덜 뜨겁다.

 

 

펄펄 끓여 나오는 끓이는 식 콩나물 국밥

 

이렇게 라고 이 날을 기억한다.

그 기억의 날....

 

 가을빛이 단풍을 발갛게 물들이던 그 날은 국경일이었으니 바쁠 일이 있을 턱이 없어 점심때가 다 되도록 나는 늘어지게 자고 있다.

내 꼴을 보다 못한 아버지께서 기세가 대단하시다.
“선 보러 갈 놈이 잠만 자냐?”
“아버지, 무슨 선이에요. 안 볼 랍니다. 여자가 스물일곱 살이라는 데.”
“이 녀석아, 네 나이가 서른이야, 서른!”

검정색 양복에다 조끼까지 껴입고, 잠이 덜 깬 얼굴 그대로 수염은 꺼칠하니 도살장 가는 소꼴로 끌려간 곳이 미아 삼거리 복다방이었다.
(복다방? 서울 복판 이름 좋고 시설 좋은 찻집을 두고…….이 변두리까지.)

심훈의 <상록수> 여주인공을 좋아하든 아버지는 당신의 틀에다 아들의 색싯감을 맞추는 일이 이번에도 여전하시니 한낮의 악몽이었다.

그 동안 맞선으로 한 번은 복슬복슬 아가씨, 한 번은 결혼 약속한 애인이 있으나 애인과 싸우고 홧김에 왔던 은행 아가씨(그러고는 나중에는 그 남자와 결혼했다), 한 번은 산 좋고 물 좋은 영덕까지 가서 만났던 아가씨(영화를 보는 동안 더울까봐 부채질해주던 착한 시골처녀)를 만났다.

내가 당하기도 하고 내가 싫다고도 했더니 지치고 피곤했다. 이번에는 복다방이라고? 명동의 몽셀통통이나 호텔 다방은 뒀다 뭐한데?

시간은 자꾸 가면서 안절부절못하던 참에 중매쟁이가 나타나는데, 아버지 친구의 따님이다.
오래 전에 아버지는 그 따님을 며느릿감으로 점찍었는데, 그만 다른 누구에게 눈 맞아 시집 가버리고, 이번에는 친구를 소개합네 하고 나섰다.

중매쟁이의 뒤를 따라 나타나는 노인이 계셨는데, 선 볼 주인공의 아버지가 되심 직하다. 또 누군가가 나타나서 보니, 설마, 설마! 아니, 그 설마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바로 너, 너야!
어찌 이런 일이. 고등학교시절이나 대학 시절에 나는 일기를 줄 곳 써왔고 일기장에는 어쩌다가 내게 올 내 색시의 모습을 가볍게 스케치를 했었는데, 그림 속의 여자가 내 앞에 있다니.

놀라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면도 안 한 턱수염과 물만 대강 대강 칠한 새둥지 머리의 내 꼬락서니가 깔끔하게 단장한 그네의 완벽한 자세에 마주하니 한심하고 소름이 다 끼칠 정도로 미안하고 송구스롭기까지 하다.

맞선 볼 때 늘 그렇듯 가족들은 웅얼웅얼 사라지고, 두 사람만 남았다. 내가 이 말 저 말 하다 보니, 이런 세상에! 두 사람은 회사는 다르지만 충무로의 같은 빌딩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나는 3층이고, 그네는 8층이다. 어떻게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도 못 만났을까?
나는 3층이라 걸어 다녀야 하나, 그네는 엘리베이터를 타니 매일 스쳤어도 무심하게 지나치다가 여기서 만나다니.

할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중매쟁이 친구의 집이 이 근처라서 가까운 다방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등.
회사가 있는 대연각 빌딩 뒷문에 있는 오징어 집의 맛이 먹을 만 하다는 등 옆에 있는 팜파스 다방이 단골이라는 등.
상대는 조용하고 나만 시끄럽다. 다른 맞선 때는 커피 한 잔 하고 떠나보내려고 골똘했는데, 이번엔 어떻게 함께 더 있을까 하는 궁리뿐이다.

면목 동에서 <샘터>라는 경양식 집을 하는 친구가 있다. 주머니가 비어도 외상이 되니, 함께 가자하니 마다하지 않았다.

친구는 반가워하고, 음악을 우리 취향대로 팍팍 틀어주었다.
플래터스(Platters) 의 온리유(Only you)가 내 마음인 척, 그러다가 폴앙카(Paul Anka)의 유아마이 데스트니(You are my destiny /당신은 나의 운명)에 공연히 심각한 체 한다.

밤은 깊어 가고, 통금시간이 걱정이다.
그 때는 통금이 있을 때였으니까.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며 슬쩍 손을 잡았다.
가만히 있다. 내게 맘이 있구나. 자신이 딱 선다.

시작은 쉬웠어도 그 뒤가 만만하지 않았다.
그 날 내게 손을 잡혀도 빼지 않았던 것은 내가 쑥스러워할까 애써 참아 낸 그네의 착한 마음이었지. 나의 박력에 홀린 것이 전혀 아니었다고 했다.
머리는 까치둥지요, 눈은 캥하지요, 볼은 패였지요. 사실 그때 내게는 볼 게 없더란다.
나중에 그 말을 들으니 충격이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니 내가 무슨 항의를 할 수 없다.
그네는 이 사람을 택하여야 하나하고 갈등이 생기더라고 했다. 그네는 그 날 나와 헤어진 뒤, 맞선을 세 번이나 더 보았다니.
나도 두 번을 더 보았다고 없던 일이었지만 지기 싫어 맞불을 놓았다.

여러 번을 더 만나고 마지막이라고 만나던 날, 내 뒷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여 그네의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그네에게 선택! 받아 맞선 본 지 여섯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신접살림을 남가좌동 명지대학교 앞 문간방에 차렸다.

새벽잠이 깨면, 한 여인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도록 행복했다. 이토록 고운 색시가 어떻게 내게 왔을까.
출근길에 아내가 챙겨주는 도시락을 들고, 용돈 500원을 받아들고 나서면 걸음이 부자가 부럽지 않았다.
500원이면 담배 한 갑과 커피 한 잔 값이었다.
한여름 문간방 부엌문을 꼭 잠그고 서로 물 뿌려주며 등 밀어주고, 끼니 끓일 때 석유풍로의 연기가 매워도 즐거웠고 16인치 흑백 TV의 사치가 호사스로웠다.

결혼 10년째 되던 해.
12월에서 다음해 2월까지 아내는 봉급만 가지고 살기 힘들어 재봉틀이라도 돌려보겠다며 고덕동의 기술학교에서 홈패션을 배웠다.

아내가 부업을 생각하는 마음이 반갑고 미안했다.
밤 9시가 넘어 수업이 끝나면 아내는 아파트 사이의 어둡고 좁은 길을 따라 집으로 온다. 나는 아내가 올 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서 동동 떨며 기다렸다.
아내가 나오면 추위에 약한 아내의 손을 내 손에 감싸 비벼주곤 했다. 맞선 볼 때 생각이 났다.

바람이 심하게 불기도 했고 눈이 퍼붓듯 오든 날이 있었다. 연수원 일을 이야기를 하며 아내는 어찌나 밝고 명랑했던지.
3달 과정의 교육이 끝나 가고 있었고, 이틀만 있으면 자격증 시험을 볼 참이었다.

"어머니가 급하게 나를 불러요. 목소리가 아주 안 좋으셨어요. 문제가 있나 봐요. 내가 지금 바로 어머니께 갈 테니 자기도 바로 와줘요."
아내가 출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충무로 3가 직장에서 잠실의 부모님 댁에 가서 몸 불편하다는 어머니와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아내는 오지를 않았다.

회사의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 사모님이 과장 아버님 댁으로 택시를 타고 가시다가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병원에서 사무실로 연락이 왔습니다. 가벼운 사고 같아요. 너무 걱정 마시고요."
회사의 직원이었다.
나는 이제 금세 큰 병이라도 난 듯하다지만 와서 보니 상태가 좋아진 어머니를 뵙고 마음이 놓였는데.
아니, 이게 무슨 .

놀랜 표정의 나를 보고 어머니나 아버지도 깜짝 놀라셨다.
병원에 가보니 아내는 아주 심각한 중상이었다.
아내는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타고 가던 중에 사고를 당해 응급실로 실려 갔다.
내게 회사에 잘 다녀오라 손 흔들고 두 시간도 채 안 돼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황색 신호를 보고 달린 가해자는 멀쩡하고 왜, 왜, 내 아내가 ? 내가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가니 박박 깎인 아내의 머리에 구멍을 내고 볼링공만한 크기의 추를 매달아 놓았다.

연락처가 어디 에요 하고 간호사가 묻자 회사의 전화번호와 내 이름을 말한 아내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내가 기억났다니.

중환자실에서 아내는 의식은 있어서 눈 빼줘, 눈 빼줘 하지만, 간호사는 못 알아듣는다.

내가 소리친다.
"환자의 눈에서 콘택즈 렌즈 좀 빼줘요."
간호사가 지키는 병상에서도 처리가 이렇게 허술했다.

의사는 환자의 상태로 보아 사망에 이를 수도 있고, 잘 돼야 전신 마비라고 한다. 출근길 헤어저서 두 시간도 채 안되어 이게 현실인가, 꿈인가?

 

 

 

 머리에 구멍을 내서 추를 매달고 있는

 아내에게 내린 의사의 진단은 사망 아니면 전신 마비라고 할 때...

중년의 인생에 하고 싶은 일이 많던 아내는 죽기아니면 불구를 면하지 못할 치명적이었다.

 

 

사망 아니면 전신마비라고 의사가 진단한 아내를 지켜 보며 갓 마흔된 나는 소망한다.

아내여, 일어나라. 다시 옛 모습을 보자꾸나.  

8살 아들 6살 딸이 당신을 기다리오.

 

 

 

 

나는 어머니 옆에서 저절로 무릎이 꺾였다.
(어찌 별일도 아니면서 며느리를 불러내어 이 지경을 만드셨오. 죽어간다는 아내보다도 내가 먼저 가야겠오.)
나는 입으로는 말 못하고 오열하고 병원 바닥에 딩글었다.

나는 이 일이 내게 생긴 일인지 남의 일을 보러온 방관자인가 자신을 가눌 수가 없다.

대낮 도깨비에 홀린 듯 얼이 빠져나갔다.
내가 아니면 누가 아내를 지킬 것인가. 겨우 나는 몸을 가누었다.

몰려온 가족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여긴 교통사고 전담 병원이니 치료가 신통치 않다. 그러니 영동 세브란스병원으로 가라. 중앙병원으로 가라. 어디로 가라. 보호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 원무과에 가서 병원을 옮기겠다고 하니 반응이 차갑다.
"가실 수는 있습니다만, 추를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병원 것이니까요. 행여 추를 달고 간다 해도 차체가 흔들리면 위급하고, 안전에 저희는 책임을 못 집니다. "
주위는 물을 뿌린 듯 조용하고, 내 얼굴만 쳐다본다.

아내의 삶과 죽음에 대한 나는 절체절명의 선택에 너무 고통스로웠다.
위험을 무릅쓰고 병원을 옮길 수가 없다.
아내를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다.

중환자실의 간호사들에게 나는 매달렸다.
"간호사님, 수간호사님! 제발 신경 좀 써 줘요. 내 아내가 거기 있답니다. 제발!"
아내가 좋아하던 시집 <접시꽃 당신>을 중환자 실 간호사에게 주었다. 그녀의 눈매가 따뜻해진다.

내 마음이 그 시집 안에 적혀 있으니…….

 

자기 나 죽음 시 써줘
아내의 말에
웃었던 날이 있었는데
아내는
지금
병원 침상에 있습니다.
결혼 열 해
삼천 육백 오십 일
서로의 체온이 내 것이었고요
어제 그제
출근길 배웅하던 손길이 새롭고요
꽃바람 찬 서리 나날 입맞춤 뒤
일터로 갔던 대로
아내에게 다시 입 맞추니
아내에 대한 눈물입니다.
나의 사랑입니다.

 

 


이제 아내는 목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한 손 한 발을 못 쓰며 몸의 근육이 굳어 아프건만 남편이라고는 생각날 때만 굳은살을 만져주거나 무슨 날에 장미꽃 몇 송이로 아픔을 지워주려 하지만, 아내 자신은 장미꽃보다 더 밝다.

장미여! 너는 가시라도 있지만 내 아내는 향기만 있구나!
흑단 같던 머리칼 사이사이에 흰머리가 자욱하게 솟아나니 내 무릎에 머리를 뉘고 집게로 하나씩 뽑노라면 세월이 한꺼번에 다가온 듯한 놀람과 이제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 더 살까 하는 아득한 기분이다.

이제 살아온 세월의 고통보다 다가올 고통이 어떻다손 쳐도 내가 아내의 다리가 되고, 손이 되는 세월을 살참이다.
한 사내의 아내로서 생사의 갈림을 굳센 정신력으로 버틴 아내에게 나는 겉으로 침묵하여도 나의 진정은 아직껏 입밖에 못 해본 당신이라는 말과 함께.

"당신은 내 빛이요, 당신의 그림자 되고, 당신의 영혼이고 싶소."
우리는 아직도 쑥스로워 여보, 당신 소리도 못하는 신혼 30년째이다.

이런 감회가 해마다 온다.

다시 이 뒤로 세월이 또 흐른다.

 

 

 

의지의 힘으로 일어선 아내가 내 곁에 있다. 

함께 있어 행복한  

                                                                        50대 초반 세월도 후딱 지나 갔다.

 

해마다 나는 이 맞선 본 날에 유정하다.

 

어느  또 다른 해는 이런 글을 썼다.

 

 

결혼 10년쯤 지나면 진정 사랑 때문에 사는 부부가 몇 이나 될까. 사랑은 그 긴 세월을 가는 동안 몸과 마음을 태워 재만 남기나, 진한 사랑은 잠깐이고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서로 다독 대며 살아갈 따름. 청춘의 사랑으로는 너무 버겁다. 사랑은 주고 받는다지만 주고 받기도 힘들게 마련이다.

어쩌면 미운 정 고운 정이 사랑 보다 더 강한 접착력을 가졌다. 사랑은 불이 되어 서로를 불사르나 정이란 그냥 서로를 안고 보듬는 존재가 있기에 덤덤하면서도 반가운 것이리라.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기억이 없다. 가슴에만 담아놓았다.

맞선을 보고 청혼을 하였을 때도 "나하고 살자. "했지 " 너 없이 못살 만큼 사랑한다. " 하고 말하지 않았다.

아가씨 시절의 아내 역시 " 자기 정말 정말 사랑해. "하고 깜찍하게 말한 일이 없다.

만남 처럼 부부의 인연도 운명이었다.

 

그렇듯 운명의 시작은 맞선이었다.

내게는 몇 번 째 보는 선이었고, 당하기도 하고 퇴짜를 놓기도 하였다.

내게 마지막 선은 아내였으나 아내에게는 내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선을 보는 순간, 아내의 모습은 꿈 속에 그리던 여인의 모습이었으나 내 모습이 아내에게는 꿈꾸던 말 탄 기사가 아니었을 것이다.그러기에 또 다른 선을 보았으나 여인을 위하여 점심 갈비 한 대 살 돈 하나 변변히 없던 나를 택하였던 것은, 아내가 지나치게 눈높이를 낮추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때때로 마음속 통곡하는 내 마음은 내게 시집을 오지 않고 다른 데로 시집을 갔다면 지금처럼 교통 사고로 장애자가 되지 않고 튼튼한 두 손 두 발로 자기 할 일 다하고 가고 싶은 데 다 가며 행복하지 않았을까. 달리 생각하면 영화<타임 마신>처럼 죽은 연인을 살리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r게 팔자인가 보다.

누구에게 시집가든 아니든 그 팔자 그 운명이라면, 지금과 같은 형편이라면 나는 기꺼이 함께 걸어가야 한다.

 

맞선을 본 뒤 26년 동안 세월은 꿈 같았다. 결혼한 지 10년 동안 아내는 건강하였고, 그 뒤 나머지 장애의 세월은 악몽과 희망의 줄다리기였다.

아내는 불행에서 결코 굴하지 않았고 퇴원 후 누워서 보낸 일은 단 하루도 없었다. 자상한 어머니며, 따뜻한 아내요, 더할 나위 없이 착한 며느리 착한 딸이였다.

그러니 맞선을 본 날이 되면 내 감정이 남달라 진다. 결혼 기념일이 중요하다지만 첫만남이 있던 날은 더 중요하다. 그 날이 없다면 결혼 기념일이 있을 턱이 없다.

 

결혼 기념일에는 밥 한 그릇 밖에 나가 먹고 꽃 몇 송이를 아내에게 건네면서 나는 맞선 보았던 날을 매년 그냥 놓친다.

이번에는 아내가 잡아냈다.

" 자기 뭔가를 해야 되는 것 아냐?"

뭔가에 무력한 나를 아는 아내이니 숨겨놓은 비상금이라도 털어 돌솥 밥이라도 먹자는 애교임을 안다.

아내와 함께 밖으로 나간다.

외식이랍시고 동네 지하 상가 스낵 집에 가서 자장면으로 점심 삼아 맞선 자축을 한다.

초라한 상을 아내는 밝은 웃음으로 받는다.

" 이게 26년 기념 회식이야?"

아니다. 부족한 나와 더불어 산 아내를 위해 이 밤 목청껏 노래불러야한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애모, 요즘 유행하는 애처가 메들리로.

그리고 아내의 뺨에 입을 맞추며 " 고마웠오. 정말." 하고 진정으로 꼭 말하여야 한다.

 

 

 

 


이 뒤로 시간이 다시 지났다.

40대 이후에 우리 부부가 무릎베고 일요일 마다 새치를 뽑은 덕에 나는 머리에 속알 머리가 다 빠져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로 사이가 나빠서 데면 데면 하였다면 머리칼이라도 소북 할 것을.

어쩌랴. 이제와서.

대머리 영감이 되도 내 팔자인 것을.

내게 와서 인연의 모진 연분으로 상처만 남은 아내를.

아직 내 마음의 청춘이 아내에게 입술을 내밀면

"에고 나이 값이나 해요. 이 나이에 이게 무슨 짓이요."

아내는 손사래치니 나는 가슴에 안기던 먼 예전  젊은 아내에게 아득하게 입맞춤을 한다.

그럴 것이다. 장애를 갖고 살기 벅찬 판에 엎친데 덮친다고 3년 전엔 고관절이 부러졌다.

장애에 장애가 보태졌다.

고관절이 부러지기 전에는 혼자 걸음으로 친구를 만나러 나갈 정도로 걸을만 하다가 지금은 내가 늘 동행을 하여야 움직인다.

아내가 힘들면 나는 편한가.

한쪽이 장애면 다른 쪽도 또한 그렇다.

오죽 힘들면 언제 죽어도 겁날 게 없다고 아내는 말하는가.

 

여인은 현실에 살고, 남자는 추억에 산다.

인연의 밧줄에 꽁꽁 묶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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