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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 27:27-37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마 27:27-37 / [가시관을 쓰시다;막15:16-20,요19:2-5] 총독의 병사들은 예수를 총독 관저로 끌고 들어가서 온 부대원을 그 앞에 소집시켰다. 28) 그리고 예수의 옷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입힌 다음 29) 가시로 왕관을 만들어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 갈대 하나를 홀처럼 오른손에 들리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고함을 치며 조롱하였다. 30) 그들은 또 예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렸다. 31) 이렇게 조롱한 후에 주홍색 옷을 벗기고 예수의 옷을 다시 입혀서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32) [십자가에 못박히시다;막15:21-32,눅23:26-43,요19:17-27] 그들은 사형 집행장으로 가는 길에 구레네 사람 시몬을 만나자 그에게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33) 병사들은 `해골산'이란 뜻의 골고다에 닿자 34)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께 마시라고 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을 맛보고 마시기를 거절하셨다. 35) 병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고 나서 주사위를 던져 ㄱ)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ㄱ. 시22:18) 36) 거기 앉아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지키고 있었다. 37) 예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붙어 있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게 됩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27-30)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이 선언되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관정 안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 곳에서 엄청난 수난과 박해를 받으십니다. 당시 빌라도는 가이사랴에 유월절 민란에 대비하여 6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핍박을 받으시고, 갖은 조롱을 당하십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왕관처럼 씌우고, 갈대를 왕의 지팡이처럼 들려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합니다(29).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31-37) 로마 병정들은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며 입힌 홍포를 벗기고 모진 고문으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예수님의 옷을 다시 입혀 끌고 나갑니다(31).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죄수는 자신이 매달리게 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백부장이 말을 타고 군대들과 함께 길을 인도하며 뒤따르는 전령들은 죄수의 죄명을 계속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구부러진 길을 따라 도시의 거리를 오르내리며 다녀야 했습니다. 로마제국을 향한 반역죄는 결코 묵과될 수 없다는 경고를 주기 위해 이렇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잔혹한 고문으로 피를 많이 흘리셨고, 여러 시간 잠도 못 주무신 채로 체력적인 한계에 다다르셨습니다. 당시에 로마 군인들은 어떤 짐을 운반할 필요가 있을 때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불러 세워서 일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골고다의 길을 가다 만나게 된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불러서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32). 그러다 해골의 장소라는 뜻의 골고다로 데리고 갑니다(33). 골고다는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 의한 죽음은 매우 느리게 진행됩니다. 고통 중에 죽어가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 과정에서 로마병정들의 조롱은 계속됩니다. 예수님께 쓸개 탄 포도주를 먹이려 하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 쓴 죄패를 붙였습니다.
적용: 주님은 당신을 구원하시려 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각오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모두 사해졌습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의지하여 회개하고 나아갈 때 우리는 죄와 죄의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지은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서 정결함을 입을 때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설 교 >
대속의 고난
마 27:27-54 / 박덕기목사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인데,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도 하고, 주님께서 이번 주 금요일에 십자가 못 박혀 죽게 되심으로 이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하며, 오늘은 고난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최후 만찬 석상에서 성찬식을 제정하신 후, 곧 체포당하여 야간 심문을 당하시게 됩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하신 대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합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는 자들을 가리켜 무신론자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 자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이론적인 무신론자가 있는데, 이론적인 무신론자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없다든지, 세상에서 불의한 자가 득세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없다든지 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실제적인 무신론자가 있는데, 실제적인 무신론자란 입술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실제 그 행위로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딛 1:16절에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라고 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말과 입술로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서도 예수님을 시인하는 성도들이 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 주님께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너무도 잘 안다.”고 시인해주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금요일에 당하신 십자가의 수난을 상고해 보면서 ‘대속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미국의 Ford라는 목사님이 농장을 경영하는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부인은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집사였지만, 남편은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유인즉 “예수가 나를 위하여 죽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면서, 전혀 믿어지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심방을 가니까, 그날따라 남편이 전에 없이 목사님을 반기면서 “목사님, 오늘 저는 참 희한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리 와서 이 닭 좀 보세요.” 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보니까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는 어미 닭이 있고, 주위에는 노란 새끼 병아리 10여 마리가 삐악거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농부의 말에 의하면, 아침에 일찍 농장 정리를 위하여 나와 보니, 어미 닭이 꼼짝 않고 있어서 건드려 보았더니 푹 쓰러지는데, 날개 아래에 병아리 새끼들을 품은 채로, 목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더란 것입니다. 지난밤에 족제비가 병아리를 잡아먹으려고 들어왔다가,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완강히 버티니까, 어미 닭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피를 다 빨아먹고 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미 닭이 병아리 새끼들을 버리고 도망갔으면 살 수 있었겠지만, 새끼들을 위하여 대신 피를 흘리고 생명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마침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한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이 어미 닭처럼 예수께서 우리와 당신의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대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목사님,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라고 하더니, 그 다음 주일부터 열심히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여,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려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신 것입니다. 代贖이란 말은 Redemption 혹은 Atonement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뜻은 ‘대신하여 갚아 준다.’ ‘값을 주고 되찾아 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속의 고난이란, 죄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죄 값을 치러 주시고, 마귀와 사망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당하신 조롱과 멸시,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이 매우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반역죄, 전쟁터에서 이탈한 죄, 해적, 암살, 반역 소요죄 등을 범한 자들을 벌하는 사형 틀입니다. 십자가형이 선고되면, 먼저 죄수에게 채찍질을 하고, 죄수로 하여금 사형장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 후, 형장에 이르면 죄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굶어 죽기까지 내버려두던가, 못을 박아 죽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특히 유대 나라처럼 날씨가 더운 지역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열대 지방의 열기와, 못 박힌 상처에서의 출혈로 온 몸에 열이 나는데, 몸의 당김과 갈증으로 열은 더 심해 간다고 합니다. 거친 못에 찔린 상처는 부풀어 오르고, 찢어진 힘줄과 신경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더해 간다는 것입니다. 머리와 위장의 동맥은 출혈되어 무서운 두통이 따르며, 정신은 극도의 공포로 혼미해지고, 온 몸에 일어나는 경련은 상처를 더 크게 찢어 놓아서, 실제로 죽기 전에 벌써 여러 차례 죽음의 고통을 맛보다가, 마지막에는 피와 물이 다 쏟아져 기운이 진하여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 형벌은커녕,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쳤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이 결정되자, 빌라도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인간이 발가벗김을 당한다는 것은 최대의 모욕과 수치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난 날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저질러졌던 악랄한 범죄 가운데 하나가 소위 ‘성 고문’이라는 것이었는데, 이성 앞에서 발가벗기는 극도의 수치감을 통하여, 억지로 범죄 사실을 자백하게 한 못된 고문 방법이었습니다. 이렇듯 발가벗기는 것은 최대의 수치와 모욕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많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를 덮고 가리어 주시려고, 자신이 벌거벗음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입혀 줄 성결한 ‘흰 옷’을 위하여, 자신이 발가벗기는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흰옷’은 물론 ‘의의 옷’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죄 씻음을 받은 사람만 입을 수 있는 옷을 말합니다. 이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려고, 주님 자신은 모멸과 수치의 벌거벗김을 당하신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었습니다. 마가복음 15:17이나 요한복음 19:2에는 ‘자색 옷’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포는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옷입니다. 총독 빌라도와 헤롯왕도 이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낡은 주홍색 홍포를 입게 한 것은, 왕으로서 입게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왕이라고 하신 데 대하여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주홍과 같이 붉고 진홍과 같이 붉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입은 홍포는 그의 피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눈과 같이, 양털 같이 희고 정결케 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채찍질을 하는 것은 십자가형에 의례히 수반되는 형벌이었습니다. 그 채찍질은 실로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보통 길다란 가죽 끝에 납이나 못을 달아 채찍질함으로, 도중에 죽는 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한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군병들은 우리 주님의 거룩하신 머리에, 억지로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면류관은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병들은 주님께 금 면류관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고, 예수님을 왕으로 가장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른 손에 갈대를 들리어 주었습니다. 갈대는 왕권을 상징한 홀을 대신한 것으로서, 이 역시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 거룩하신 주님의 얼굴에 더러운 침을 뱉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무서운 모욕이었습니다. 인간의 불신앙은 거룩하신 주님께 이토록 참람한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끄러운 죄악과 수치를 덮으시고, 영원한 제사장으로써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이러한 모욕과 수모를 받으신 것입니다.
45-50절은 예수님의 최후에 대한 기록으로서, 인류의 죄와 저주를 한 몸에 짊어지고, 죽어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후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6시부터 9시까지, 즉 우리 시간으로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그 뜨거운 팔레스틴의 태양이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엄습했습니다. 이 같은 어두움은 천추만대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였습니다. 당시의 놀라운 어두움에 대하여, 아드리안 황제의 윤허를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던 노예 출신 후레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던 그 시간과 동시에 태양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처럼 완전하고 무섭고 기이한 완전 일식은 세상에서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인 제 9시가 가까워지자, 매우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셨습니다. 이 말은 아람어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 외침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습니까? 인류의 모든 고통과 질고와 죄와 형벌과 죽음의 전부를 한 몸에 걸머지고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나님을 불러가며, 고뇌 속에서 절규하는 주님의 처절한 모습, 이 모습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과연 누구를 위한 고난이고 아픔이며, 누구를 위해서 흘리는 피였습니까?
루터는 주님의 고난 전체 과정 속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감동적인 이 부분 곧“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중에, 오랫동안 음식도 먹지 않은 채, 같은 자세로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에 놀라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셨다!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F. W 크룸마허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신 주님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나는 그 고난의 잴 수 없는 깊이를 접근한다는 생각이 날 때, 오히려 두려울 뿐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소리에 대하여 글을 쓰거나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긴 침묵을 지킨 체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을 따름이다!”고 하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이 절규하건만,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일언반구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위로의 말씀 한 마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사고를 내고 고생하는 아들의 고통을 차마 볼 수 없어 가슴 아파 하는 어머니도 있고, 건강치 못하여 몸이 축난 아들을 보고 안쓰러워서 견딜 수 없어 하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수두로 앓고 있는 어린 자식의 고통을 보면서, 며칠 씩 밤을 새웠다는 부모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울부짖을 때, 과연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의 피 흘리는 모습,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쓰리고 아프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절규하는 독생자를 외면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십자가 속에 들어 있는 이 같은 하나님의 고뇌하시는 아픔을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짊어지셨던 십자가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치신 후,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셨습니다. 주님의 영혼은 그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실제로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일어났던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은 첫 아담의 범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찾아 온 것이었으므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삯인 인간의 죽음을 대신해야 했으며, 그것을 통해 인류의 죄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죽으심을 그저 슬프게 감상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죄인의 생명을 구속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음을 깨닫고 확신해야만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고난 주일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십자가 위에서, 말과 글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고 죽어 가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부르짖었던, 주님의 고뇌에 찬 저 절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독생자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면서도, 끝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외면하셨던, 하나님의 그 저미는 아픈 마음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십자가상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난 후, 거기 둘러서서 구경하는 군중 틈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못 박았다. 나는 그 일에 동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수난 주간을 보내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그 모진 채찍질과, 그 부끄러움과 수욕을 다 겪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시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는 다짐이, 우리 모두의 고백과 결심이 되시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시 면류관
마 27:27-31 / 류영모목사
I. 말씀을 향하여
근간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가적인 사태를 바라보면서 뜻있는 사람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의 주장들이 극단으로 치닫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국민간 편가르기는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남북 동서간의 분열도 모자라 세대간의 분열과 보수진보간의 극한 분열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가시를 온유함으로 품은 예수님의 성품이 그리운 때입니다. 이럴때 일수록 서로가 가시돋힌 언어들을 자제하고 잠시 침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왜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여당도 야당도, 청와대도 국회도 서로 상처를 주는 가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시에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고 온국민도 찔렸습니다. 서로 아프다고만 합니다. 찌른 놈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저주의 가시관을 구원의 면류관으로, 상처의 가시관을 치유의 면류관으로 패배의 가시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셨습니다. 때문에 이 시간 "가시 면류관"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마는 지금은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 절기입니다.
일찍이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나르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빼고 설교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챨스 스펄젼은 그의 임종시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나의 평생의 설교와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저도 설교를 하는 목사로서 한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복음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닌게며, 예수의 보혈이 없는 설교는 설교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설교를 하려면 못내 자신감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설교만큼은 하면 할수록 내게는 무한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II. 당하신 고난의 의미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예수께서 로마 군병들로부터 희롱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한 성서학자는 "이 희롱의 순간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심리적으로는 더 아프고 힘든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을 총독의 관저로 끌고 들어갑니다. 거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님을 부서진 의자에 앉혀놓고 옷을 벗기고 낡은 홍포를 입힙니다. 머리에는 지독한 가시, 팔레스타인 아카시아 나무와 싯딤나무 그리고 잔가시가 많은 스피나 크리스티 나무를 엮어 만든 관을 씌우고 손에는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끓고 "유대인의 왕 만세"를 떠들며 조롱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그 조롱은 비열하고 또 한편 잔인했습니다. 이들의 희롱은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엔 깊은 계시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그 한토막도 의미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1.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감은 창세기 3장 선악과를 따먹은 죄와 더불어 왔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며 곧 모멸입니다.
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감추시기 위해, 벌거벗기움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② 주님께서는 내가 당할 수치와 창피를 덮으시기 위해 당신이 친히 수치를 감당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당신의 옷이 벗겨지시므로 장차 우리가 입게 될 흰옷 - 영광의 옷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④ 옷을 벗기움 당했다고 하는 것은 신분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여주시기 위하여 잠시나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을 만왕의 왕되신 신분을 박탈당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홍포를 입으셨습니다.
곧 자색 옷입니다. 이는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옷입니다. 예수님의 홍포는 왕의 홍포가 아니라 죄인의 홍포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1:18).
예수님께서는 주홍도포에 진홍 피를 흘려 주홍같고 진홍같은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죄의 무거운 짐으로 괴로워하며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정죄의식에 시달리시는 분 계십니까? 영혼의 진통을 안고 이곳까지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주님 앞으로 달려오십시요. 당신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눈처럼 깨끗케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채찍을 맞았습니다.
십자가 형을 지는 죄인은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납과 못, 짐승의 뼈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을 맞았습니다.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몸이 약한 죄수들은 채찍을 맞는 중에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잔인한 망나니를 만나면 물 묻은 가죽 채찍을 옆구리 쪽으로 휘감아 내리쳤고 그러면 창자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엎드려 채찍을 맞으면 등에 고랑이 패여 피 고랑을 만든다 라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바로 이 말씀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 류영모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김집사 이권사 당신이 나음을 얻었도다. 아멘!
4. 그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워 주었습니다.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놀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반드시 그들을 아니 모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그분을 재판하던 재판관들도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조롱하던 자들도 그를 찌른자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도, 나도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5. 또한 예수님의 머리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금 면류관 대신 우리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이 시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슴 졸이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받으며 조롱받으며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침 뱉음을 당하신 그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습니까?
① 천군 천사들이 흠모하는 얼굴이 아닙니까?
②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으나 결국은 보지를 못했던 그 영광스러운 얼굴이 아니었습니까?
③ 모든 나라와 권세가 경배하고 천사들이 수중들던 왕중의 왕이 아니셨습니까?
④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그 얼굴에 야만인들의 침이 튀겨야 했더란 말입니까?
III. 가시 면류관
이 수없는 고난의 모습 가운데서도 오늘 아침 우리는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쪽박도 왕이 쓰면 왕의 밥그릇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 거기엔 크고도 분명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므로 저주의 면류관이 속죄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부귀, 영화, 존귀를 자랑합니다. 그 대신 저주와 고통과 아픔을 백성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왕 -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저주의 관을 쓰시고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백성들에겐 구원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갈3:13)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저주를 받은바 되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저주가 되었다" "저주 덩어리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내려진 저주요 우리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는 어떤 것입니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5-19)
이것이 율법의 저주입니다. 이 저주의 가시관이 우리 주님 머리에 씌워졌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박힌 이 가시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까? 이 가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표징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18).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가시는 인간의 영혼을 짓밟고 말았습니다. 여기 가시 면류관은 곧 저주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가시관을 쓰시므로 이제부터 이것은 속죄의 면류관, 구속의 면류관, 용서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아픈 가시관을 쓰셨고 내게는 속죄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저주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용서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고통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사랑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2. 주님의 머리에 상처를 주던 그 면류관이 이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은 크고 작고 굵고 가는 가시로 만들어져 그것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병정들이 막대기로 면류관을 내리치자 가시들은 더 깊숙이 찔러 들어갔습니다. 바로 주님을 찌른 이 가시가 우리를 치료하는 가시가 될 줄이야. 당신의 크고 작은 상처, 나의 굵고 아픈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아무리 큰 상처도 혼자 움켜쥐고 있지 마십시요. 주님 앞에 상처를 드러내십시오. 우리 주님, 그 상처를 지금 이 시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피 묻은 손으로, 못 자국난 손으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정에도 직장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가시가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경험, 지울 수 없는 쓴뿌리의 아픈 상처들, 용서받지 못했다는 정죄의식들이 가시가 되어 매일같이 나를 찌릅니다. 사랑의 상처, 배신의 상처, 말 한마디, 눈짓 한번도 가시가 되어 서로를 찔러 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상처를 받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가도 목회를 하다가도 가시에 찔려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일을 하다가도 찔릴 수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불만과 근심, 내적갈등도 가시가 되어 내영혼과 마음을 찔러 피나게 합니다. 인간들은 저마다 가시에 찔린 상처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너 혼자 아픈 것 아닙니다.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습니다.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모두가 상처투성이, 이게 세상사요 인간사 아니었습니까?
이 상처들은 어떻게 고침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우리의 찢기고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흘리신 예수의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가 가시에 찔림으로 우리의 아픔을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 주님께 위로가 있고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울며 도망가려 하지 마십시오. 울며 울며 달려나와 주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구세주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영원한 승리의 보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예수님 머리에 상처를 준 가시는 신비의 수술도구와 명약이 되어서 인생의 상처를 치료한다"라고 했습니다.
치료하시는 그 주님 앞으로 나아 오십시다!
오 예수님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주님 손과 발 못 박혔고 머리엔 가시관 박히셨네
내 모든 죄와 허물 위해 말없이 피 흘려 주셨네
오 예수님 나의 손 잡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3. 가시 면류관이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죽으셨습니다. 마치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찌르고 도전해 오는 고난이 반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가 오는 것을 막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가시를 허락하신 분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엮도록 하신 것입니다.
은혜의 동산에 가면 그룹별로 이름을 짓습니다. 저는 아가페 TD 1기를 경험했는데 저희반 이름이 쓰레기통입니다. 언젠가 엿장수방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쓰레기통과도 같으신 분이라는 거지요. 우리의 저주, 근심, 걱정, 문제의 쓰레기들을 하나님께 가져가면 하나님은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다 받아 주시고 맡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엿장수 같으신 분이라는 거지요. 옛날엔 떨어진 고무신, 찌그러진 양재기, 심지어 머리카락 짜른 것들을 가져가면 엿장수 아저씨는 울릉도 호박엿을 뚝뚝 짤라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물을 호박엿으로 바꿔 주시듯 예수님은 저주의 면류관, 실패의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엿장수 같은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고물과 폐품 쓰레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무거운 죄 보따리 한숨 고통 눈물을 그 어떤 예물보다 귀하게 받으셔서 용서 자유 기쁨 행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고통, 눈물, 근심보따리를 십자가 앞으로 가지고 오길 원하십니다. 주위에는 자신의 고통과 죄와 한숨을 그냥 담아두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따리째 그걸 주님께 가져가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IV. 우리도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자
오늘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시가 괴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바라보고 그 가시로 승리의 면류관을 함께 엮어 가십시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은 이름 그대로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성경에서 종종 성도의 모델로 제시되는 사도 바울은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 불렀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 육체의 가시를 칼빈은 "영적인 갈등"이라고 했고 루터는 "바울이 받았던 핍박", 토마스 아퀴나스는 "독신생활에서 오는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했습니다. 또 터툴리안은 "이유없는 두통" 혹자들은 "외모에서 오는 콤플렉스" 혹은 "안질"이었다고 말하며, 라이트 후프 같은 이는 "간질병"이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 괴로워 세 번씩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가시의 고통을 받으면 모르겠거니와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바쳐 헌신한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지 왜 이런 가시의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가 부귀영화 만사형통은 없다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그가 육체의 가시를 지녔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허락한 모든 은혜가 천국의 면류관이 되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도다." 그가 이 땅에서의 보상을 기대했더라면 그는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땅의 보상보다 하늘의 면류관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다음의 영광스런 부활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어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십니까? 그 십자가가 너무나 무겁습니까? 당신의 면류관도 그만큼 더 클 것입니다.
어느 구두회사의 사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고급 구두일수록 더 많이 두들겨 맞는다." 다이아 몬드도 cutting이 많이 된 것일수록 더욱 빛나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본 차이나는 뼈를 부서뜨려서 분가루처럼 고운 가루를 만든 다음에야 귀한 도자기가 됩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귀한 그릇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크게 쓰시려고 강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모세를 귀하게 쓰시려고 완전 밑바닥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다윗을 고귀한 인물로 쓰시려고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바울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드시려고 육체의 가시까지 주신 것입니다.
V. 맺으며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여러분!
지금 당신의 가시가 무엇입니까? 그 가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봅니다. 주님을 붙잡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봅니다.
·당신이 고난의 가시에 찔려 울고 있을때 주님은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나도 통곡하고 울었다"
·당신이 가난하고 배가 고플때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40일을 금식했다."
·입을 것 없어 부끄러울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발가벗기움을 당했다."
·당신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죄없는 나도 흉악범으로 취급 받았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 쓰러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상처난 어깨로 십자가를 졌느니라."
여러분, 주님 날 위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위해 가시 면류관 기쁨으로 쓰고 가십시다. 우리 주님 내 삶의 아픈 가시를 바꾸어 구속의 면류관, 치유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삼아 주십니다.
금세기 위대한 신학자였던 Bowman 박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선교할 때 한 노파가 길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과 한 동네의 친구였던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이 노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가 믿는 힌두교의 많은 남신과 여신들로 만족할 수 없었는가?" 노인은 대답합니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심판대의 변호사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마 27:27-31 / 김남준목사
들어가는 말
본문의 배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기 전에 관장에서 그 흉악한 심문을 당하시는 과정입니다.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했다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어떻게 낮아지셨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쓰는 인사말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폐하 만수 무강하옵소서" 하는 그런 정도의 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라하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고난을 받으실 때 사람들은 이렇게 장난을 하며 그리스도를 희롱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의 혈통에서 나셨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한 선택받은 백성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은 자에게도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왕이신 것을 세상은 알 수 없습니다. 각기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자기의 사리와 사욕을 따라 살아가는 이 죄로 가득한 세상은 아무리 눈을 뚫어지게 직시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세상의 왕이고 또한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임금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속에 왕이 되실 때에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그 하나님은 믿는 자녀들 가운데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분이 그 자신의 통치권을 단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나 교회에 한정시키실 수 없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렇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 세상을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는 일들을 보기를 사모하는 모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왕이 되시고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의 왕이 되심을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며 무릎을 꿇고 조롱하는 말로 유대인의 왕이여 만수 무강하옵소서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이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자들이 이렇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상관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높이게 될 미래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포와 가시 면류관
이 사람들은 희롱하기 위해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고 경배하는 마음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 홍포를 입히고 멸시하는 이름으로 가시 면류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인 동시에 또한 앞으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던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으실 위대한 일들을 우리에게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은 이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고 예수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수치와 치욕 가운데서 홍포를 입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갈대를 손에 두고 모든 사람들 앞에 웃음거리가 되는 그 모든 잘못된 모습들이 바로 우리의 자유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구속하기 위한 주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곳에서는 이렇게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높이는 일들이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단 한 분 구속의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들이 비록 무릎을 꿇고 입술로 주님을 경배했다고 하나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한 행동만 하나님께 사용되었습니다. 장난이나 농담이나 그리스도를 희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고 삶으로 무릎을 꿇고 신앙으로 무릎을 꿇은 사람들은 얼마나 복됩니까?
십자가 지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희롱을 받으시면서 드디어 골고다언덕으로 끌려 가야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침 뱉었습니다. 침 뱉는다는 것은 바로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인간들이 침을 뱉는 것은 모두 저주받는 것들에 대한 욕설이고 또 저주가 임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행동하는 표시입니다. 치욕과 멸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침 뱉으면서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그 길은 저주의 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고 잠시 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한번도 떨어져 본 일이 없는 아버지로부터 인간의 죄를 위해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멸시를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저주와 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길은 철저한 고독의 길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세상부귀 안일함과 명성을 원하여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은 외로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버려지지 않고 이렇게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뒤를 따라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들은 기필코 세상 속에서 외로워지는 일들을 경험할 것입니다.
즐겁게 지고 가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즐겁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거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십자가를 졌다는 이유 때문에 남다른 대우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쉬운 길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가면 고난보다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와 고통을 능가하는 큰 기쁨과 시련을 능가하는 자유로움이 이렇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의미이지 십자가의 고통이 사라지거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기 전에 이렇게 침 뱉음을 당함으로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하고 외로워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세상의 대접이요 대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멸시와 천대와 절대적인 고독에 직면하면서도 여기에서 멈추거나 아니면 이것 때문에 좌절하거나 자기의 가던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관정에서 이렇게 심한 모욕과 멸시와 시련을 당하시면서도 참으시는 이유는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되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시면서 채찍을 맞는 순간까지만 참으셨다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옷을 벗기우시고 가시 면류관으로 머리에 씌움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는 멸시의 순간까지만 참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심령이 이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을 듣게 되었으면 그 십자가를 지고 그 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것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그 많은 수고와 인내를 참고 견딤을 지불하면서 여기까지 걸어 왔으니 우리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고 성취하며 마지막에 우리에게 매인 그 십자가를 지고 승리할 그때에만 우리가 걸어 온 모든 인내와 고난과 수고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한때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성령과 눈물로 자신의 사명의 길을 출발했지만 마지막까지 인내하고 하나님의 의의 십자가를 지고 이루기까지 성취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 많은 수고와 고통과 고난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신 이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렇게 침 뱉음을 당하시고 고통을 당하시며 참는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에 있는 십자가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될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죽음의 십자가를 지나고 나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상급을 그리스도 예수는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예수를 믿으며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의 진정한 목표와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또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고달프고, 신앙을 이어가기 어려운 유혹과 시련이 가득한 세상에서 눈물을 머금으며 참고 잠시 실패하면서도 다시 허리를 동여매고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대로 살려는 우리는 과연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의로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침 뱉음을 당하여 철저한 멸시를 받으셔도 기꺼이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견딜만한 가치 있는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는 그 십자가 속에서 자신의 죽음 속에서 태어나는 수많은 새 생명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이래 목마르게 기다리던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지는 그 거룩한 날을 꿈꾸고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의 푯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구원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에 이전에는 군병과 같은 악랄한 유대인들이 무릎을 꿇고 장난을 치며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했지만 이제는 장난이나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예수 앞에 무릎을 끓고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주는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하여 산다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대치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견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치욕과 외로움을 견디면서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의의 아들이시면서도 불의한 재판에 말없이 승복하시면서 오히려 침묵하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신 것은 신앙적인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길을 가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태어난 이유를 분명히 깨닫는 것입니다. 처절할 정도로 깨달아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 내 인생의 그 목표를 성취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에 갈대를 드셨습니다. 임금들은 금으로 만든 홀을 들었는데 그 홀은 뻗쳐서 지시하기도 하는 지시봉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팔레스타인 시궁창 같은데서 나는 갈대였습니다.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을 들고 계셨는데 사람들은 그것마저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때렸는데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계셨습니다. 두드릴 때마다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마를 더 깊이 찔렀을 것입니다. 희롱을 다한 다음에는 다시 홍포를 벗겼습니다. 다시 그 이전의 평복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 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치욕을 당하시고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그 손, 하늘의 높은 보좌 위에서 손을 펴서 온 세상을 다스리던 그 손에 갈대가 웬 말입니까? 고귀하신 머리에 가시면류관이 가당키나 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고귀하신 몸에 솔로몬의 입은 홍포를 둘러도 어울리지 않을 터인데 사람들에게서 취한 헌옷 같은 누더기를 둘렀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침 뱉고 모욕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고통보다도 더 커다란 마음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는 이 땅이 누구의 땅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앞에 홍포를 입히고 옷을 벗기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고 있는 이 사람들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이 치욕과 수치를 당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그대로 인내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 지는 사람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에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못난 사람을 들어 지게 하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도록 예수님이 허락해 주신 사람이 아니면 십자가를 질 사람이 없고 십자가를 지도록 허락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명예와 권세를 누리도록 받는 것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각오로 살았던 사람만이 예수를 위해서 정말 죽을 기회가 허락되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 갈 자격이 되는가하고 시험에 자꾸 떨어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제사로 드려졌던 수많은 제물들을 보십시오. 그것은 엄격한 검사에 합격한 흠 없는 것들이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처럼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지만 우리의 인생을 통해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고 이리저리 회피하고 도피하면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지연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눈을 들어 우리의 가정과 주위에서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깊이 묵상하고 나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주위를 깊이 관찰하면서 바라본다면 어느덧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중심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태도가 변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나는 죽어도 어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나는 망해도 하나님의 뜻이 흥하여야 하리라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사모함이 없을 때 하나님의 계획은 보이지 않습니다.
자존심 다 세우고 자기체면 다 살리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길에서 계속 낙방할 것입니다. 고달픈 인생을 살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못나서 당한 고난이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 번 예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이런 삶은 거의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을 마친다면 정말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선택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이렇게 비참하게 모욕을 당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가끔 살아 생전에도 유대인에게 박해를 받고 욕을 먹었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인격적으로 파산 받은 자처럼 유린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갈 때 그 때까지 예수님은 한마디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그 모든 말도 안 되는 송사와 그 치욕을 다 당하고 침묵했던 것입니다. 할 말 다하고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누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기에 합당한가? 그 사람 앞에는 쓰라린 가시밭길 고난의 발자국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그 거룩한 뜻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아무 것도 개의치 않고 그 십자가를 내게 지어 주실 때까지 참고 견디고 수치를 이기고 입을 봉하며 침묵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러 가기에 합당한 사람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어 주십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는 그 고난 가운데서도 그 고난을 고난이라고 느끼지 않는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능가하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 그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기에 합격 받으시기까지 그 모든 장시간의 희롱과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견디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을 해야 할 때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때를 잘 분별하셨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맺음말
만약 우리가 내 가정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하지 않겠는가? 내가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하지 않겠는가? 나 아니면 우리 집안을 위해 누가 십자가를 지겠는가? 나 아니면 누가 저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 가는 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질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고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그런 부담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럴 때 부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치욕 속에서 인내하심으로 합격 증서를 받고 십자가를 어깨에 매신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를 매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졌다
마 27:27-37 / 최건호목사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대조적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명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활동의 모든 일에 중요한 책임을 맡고 예수님을 마지막까지 따르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삼십에 예수를 팔아버린 가룟 유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다 자기가 생각지도 않던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고통과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갔던 시몬이라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동행 할 수 있었을 까요?
첫째, 그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갈6:17).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시는 길을 마지막까지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이 제자가 될 때부터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가룟 유다는 수없이 들었지만 들었던 말씀과 주님의 부탁과는 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이런 말을 듣지 못했던 시몬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십자가를 메게 되었고 자기의 생각과 계획과는 엉뚱한 자기와는 상관없었던 그분 가는 길을 말없이 따라가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에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시몬은 고난의 길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의 길을 따라 갔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과 고통스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는 영광과 기적의 자리가 아닌 고통과 고난이 있는 예수님의 형집행 장소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함께 가며 고통과 수치를 같이 느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의 아픔도 맛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레네 시몬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메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둘째,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메었지만 십자가를 벗어 던지지 않았습니다(마27:32). 그는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고 자기가 있는 힘을 다해, 자기가 갈 수 있는 자리까지 최선을 다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십자가를 져야하는 의무도 책임도 없습니다. 하지만 로마병정이 예수님의 어깨에서 받아서 그의 어깨에 둘러 메어 줄 때에 그는 그 십자가를 거부하지도 않았고 기피하지 않고 애매한 고난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다하지 않고 십자가를 메고 갔습니다. 이것은 통해 시몬은 주님과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을 좀 더 새롭게 가지고 있어야 되겠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구레네 시몬과 같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을 오해하는 말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 모두가 죄값을 치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억지 십자가를 지면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억울한 십자가의 고난의 주인공들을 한번 생각하고 나도 그런 고난의 짐을 질 때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시몬의 십자가와 같은 십자가를 보고 위로받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영광과 기쁨을 함께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없는 영광, 희생 없는 대가, 수고하지 않는 칭찬만을 기대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교훈을 잊지 말고 고난의 십자가를 마지막까지 짊어지려고 하는 성숙한 신앙의 자세를 갖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
마 27:27-37 / 박기완목사
십자가(cross)는 라틴어 '크룩스(crux)'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고문대(拷問臺)'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라는 용어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말로서 기독교의 중심적 교리의 내용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에스라 6:11절에는 파사의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리는데 자기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 매어 죽이라고 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신명기 21:23절에 보면 구약시대에도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고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이미 통용되어 왔던 사형법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그가 점령한 지역에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즐겨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드로 사람 일천 명을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했습니다.
로마제국때에 와서는 노예만을 십자가에 죽였으나 때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도 중죄를 범한 경우 이를 적용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사형법은 너무도 참혹했기 때문에 로마 본국 내에서는 가급적 십자가형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티 황제가 십자가 형벌 금지령을 내렸고, 그 후에 이 사형법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십자가를 지는 형벌은 아주 부끄럽고 치욕적이며 저주스러운 형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신 데도.. 이 치욕의 십자가를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처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빌2:6-7).
당시 종교 지도자나 유대인들은 강도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사람에게는 먼저 옷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기둥에 묶어 놓은 다음 가죽 채찍으로 때립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뼈나 쇠붙이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채찍에 맞으면 온 몸을 휘감으면서 채찍 끝에 있는 뼈나 쇠붙이가 살을 파고들어 살조각이 떨어지고 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예수님은 무려 39번이나 맞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60∼70kg 정도의 아카시아 나무로 된 그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예루살렘 거리를 걸어서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신 것입니다.
온갖 배신감과 멸시와 천대... 야유와 모욕, 수치, 조소, 연민, 질투, 시기 등등.... 많은 눈초리를 받아 가시면서..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고 14번이나 쓰러지시면서 섭씨 40도의 햇빛이 내려쬐는 사막과 같은 갈보리산 언덕 위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650년 전에 벌써 예언하기를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했습니다(사53:5).
1. 십자가의 길
그 당시는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 각처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성인 남자들은 전부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멀리 외국에서라도 유대인들은 유월절에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 당시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는 약 200∼250만의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거리거리 골목골목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때 정치적인 죄목을 가지고 십자가형을 언도 받았던 예수님과 두 명의 강도들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루살렘 거리를 통과해서 골고다를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날에 밤늦게 기도하시다가 체포되었고... 이곳 저곳으로 끌려 다니며 재판을 받으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그 지친 몸으로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가다가 쓰러지고, 또 일어나서 가다가 쓰러지고 하면서 예수님은 로마 병정의 채찍을 맞아가며 골고다의 언덕을 향해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 쓰러지고 일어나고 하기를 5번 반복했을 때... 로마 병사가 생각하기를 도저히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섰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거리에 나와 구경하고 있던 많은 구경꾼들 가운데 한 사람을 끌어내었습니다.
"야, 너 이리 나와!"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을 불러내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구레네 시몬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짊어지셔야 될 십자가를 대신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짊어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 사람은 우연히.... 예수님이 지고 가는 십자가의 그 길목에 섰다가.... 속된말로 재수 없이 끌려 나와서 십자가를 지게 된 것입니다.
"야, 거 참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은 대개 재수 없는 사람이구만!"
"그 날 일진이 안 좋을려니까 길거리에 얼쩡거리고 서 있다가 괜히 욕봤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겠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이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진 이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주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우연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불신자들은 우연이니 운수니 재수니 하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고, 입히시며, 사람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시는 하나님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연이라는게 없어요...
이스라엘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알려진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하여 그와 그의 아들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봇이 죽은 것처럼 너도 비참하게 죽을 것이요, 개들이 너의 피를 햝게 되리라!" 그랬습니다(왕상21:19). 결국 그 예언의 말씀대로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아합 왕이 전쟁에 나가서 싸우게 되었는데, 워낙 전세가 불리하고..... 적군들은 기어이 왕을 생포하거나 죽이려고 하니까, 아합 왕은 여호사밧과 옷을 바꾸어 입고 변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거 보세요... 한 병사가 우연히 활을 쏘았는데, 왕이 입은 갑옷의 틈새를 정확히 명중시켰습니다(왕상22:34). 기록에 의하면 상체를 막는 방패와 하체에 입은 갑옷의 중간 부분인 복부를 명중시켰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은 많은 피를 흘리고 저녁에 이르러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왕이 죽어서 사마리아에 장사를 지냈는데 개들이 그 피를 햝으므로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왕상22:38).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이었지만 우연이 아니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길목에.... 이 구레네 시몬이 서 있게 된 것도...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게된 것도.. 우연인 것 같았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신지도 모르고 온 인류를 대속하시는 십자가인 것도 그는 몰랐습니다. 정말이지 구레네 시몬은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억지로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이 자리가 억지로 서 있는 자리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연히...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우연히 직분을 받게 되었다고... 어떻게 하다보니까 우연히... 지금 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우연히 내가 이 직장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가정의 주부들은 우연히 내가 이 집에 시집와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연인 것 같지만.... 내 삶의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오늘 내가 지금의 이 자리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십자가를 외면한 사람들
구레네 시몬을 보세요....
그곳에 우연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레네 시몬을 인도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길목에 서 있게 하셨고, 로마 병사에 의해서 지목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억지로'라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구레네 시몬은 자원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억지로, 마지못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왕에 짊어질 십자가라면 자원해서 기쁨으로 그 십자가를 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말 자원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졌어야 될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12제자들은 어디로 다 숨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전날 밤에....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 베드로가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모든 제자들도 복창하면서... "우리도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마26:35).
얼마나 믿음직스럽습니까?...
그러나 이 말을 한지 불과 몇 시간이 안되어서.... 이들은 전부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은혜를 입었고 수 많은 체험을 했던 이 사람들이 다 도망가버렸습니다.
수제자라고 하던 베드로조차도 뒤에서 멀찍이 예수를 쫓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올라오는 길목에서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했던 야고보와 요한도.... 정작 주님이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구름 떼처럼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떡을 얻어먹었던 사람들... 병고침을 입었던 수많은 사람들...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이들이야말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져야 될 사람들인데.... 그 자리에는 오직 주님만 홀로 덩그러니 남아서... 지치고 상한 몸을 가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지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던 것입니다.
"제가 그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하고 나섰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3.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
주님이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하실 때.... 도저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로마 병사는 그 연도에 늘어서 있는 구경꾼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내었습니다.
로마 병사는 구레네 시몬을 지명하며 "야!, 너 이리 나와! 네가 십자가를 짊어져!" 하고 외쳤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Tripoli) 근처에 '구레네'라는 지역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마도 흑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피부가 검고 기골이 장대하여 힘 꽤나 쓰게 생겼던 모양입니다.
로마 병사가 많은 사람들을 돌아봤을 때.... 허약하고 도무지 힘을 쓸 수 없는 사람 같았으면 그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도록 불러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힘 꽤나 써 보이는 사람이니까... "너 이리 나와!" 이렇게 해서 십자가를 지게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맡기실 때는 일을 할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그 일을 맡기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도 형편없고 능력도 없고 가능성도 도무지 없는 사람에게는... 그 짐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 짐이 무겁고... 억지로 짊어지는 것이라도.... 그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셨다면.... "아∼, 나에게 그 짐을 짊어질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시는구나!" 이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일을 맡기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을 할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할만한 능력도 넉넉히 주십니다.
이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의 의미도 잘 몰랐습니다.
"아, 한 사람이 십자가에 처형되는구나!" 그러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정말 애처롭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이 사람은 여기에 처형되어 죽기도 하는데 이 고생이야 뭐.. 불쌍한 사람 돕는 셈치고 대신 짊어지지 뭐...." 그러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며 십자가를 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이 바로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이며 그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요, 구속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기쁘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졌겠습니까?... 몰랐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억지로 진 것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졌던 그 십자가가 결국은 그에게 놀라운 축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기쁨으로 살고... 언제나 순종하면서 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힘이 들 때가 있어요... 피곤하고, 좀 쉬고 싶을 어떤 날은.... 교회 오기가 너무 싫은 날도 있을 거예요...
"아휴! 오늘 하루는 좀 쉬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와서.... 나의 자리를 지킬 때.... 때로는 그 억지로 온 그 날이 더 은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는 날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직분을 맡고 억지로 졌던 사람도... 그 직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깨닫고 더 감사하고.... 그 신앙이 완전히 변화되는....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그런 경우들도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분명히 억지로 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순간부터 억세게 재수 없는 사나이가 아니라 억세게 축복 받은 놀라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4.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의 복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그 후 부활의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간 사건을 통하여 에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만 믿은 것이 아니고 온 가족이 다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21절에 보면 시몬을 초대교회 당시에 잘 믿는 교인중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로마서 16:13절에서 "주안에서 택함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내, 루포의 어머니를 향하여... 내 어머니와 같다고 한 것은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따라서 온 가족이 구원받게 된 구레네 시몬의 가정은....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는 놀라운 은총의 십자가였습니다.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과 가문까지도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억지로...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뒷 자리에 앉아 예배 한시간 때우고 갈 때도 있고.... 억지로 교회에서 하자고 하니까... 새벽 기도회도 나와서 앉아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때로는 나에게 엄청난 축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싱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눈이 잔뜩 덮힌 어느 날, 한 나그네가 히말라야산 건너편에 있는 사원에 가기 위하여 눈보라를 헤치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다보니까 어떤 사람이 눈 속에 파묻혀서 얼어죽을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어물어물하다가는 나도 얼어죽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얼마 후에 그 길을 어느 한 사람이 또 지나가게 되었는데 거의 얼어죽게 된 그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얼른 그를 업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갔는데.... 이 사람이 바로 썬다싱이었습니다.
사람을 짊어지고 가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가다 보니까.. 길가에 쓰러져 얼어죽은 시체를 하나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썬다싱보다 앞서서 출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혼자서만 살겠다고 먼저 가버렸던 바로 그 여행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그를 업고 갔던 썬다싱은... 그를 업었던 탓으로 자신의 체온을 높이고, 그로 인해 등에 업힌 사람까지 살려내어서.. 결국 두 사람 다 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귀찮은 일이요,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로 인해서 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미국이 낳은 유명한 육상 선수 '칼 루이스' 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는데, 그 오토바이를 도적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녔는데 또 도적을 맞았습니다. 화가 난 그는 "내 다리만큼은 도적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왕복 24km을 매일같이 억지로 참고 달리며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세계적인 육상 선수가 되었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이 있죠... 화가 변하여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날마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연습을 하고 훈련을 해야만 됩니다.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면 더 좋겠지만 억지로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순종하지 못하면 복종이라도 하세요...
순종이 뭡니까?.... 순종은 이해가 되고 납득이 가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복종은 이해가 안되고 납득이 안가도 무조건 따르는게 복종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쳐서 주의 말씀에 복종케 했다고 했습니다(고전 9:27).
에베소서 5:21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랬고,
빌립보서 2:12절에서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랬습니다.
순종이 안되면 복종이라도 하세요....
필경 그 십자가로 인하여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밑 군중의 모습
마 27:27-44 / 이필재목사
지금은 계속해서 사순절 기간인데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각하며 지내는 부활주일 전 40일간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형법의 정신은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줌으로써 그것이 또 다른 사람의 죄를 방지한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대로만 된다면 그와 같이 고마운 제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불법이라는 것에 있어 죄가 없는데도 가혹한 벌을 받는 일이 간혹 생겨집니다. 인과응보의 법이나 혹은 일반적 법철학의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실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큰상을 받으셔야 됩니다. 지금 우리 세상에는 매우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두 가지의 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템플턴상’이라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벨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경직 목사님과 김대중 前대통령께서 각각 그 상을 타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두 가지 상을 다 받으셔야 되는 분입니다. 절대 불치의 환자들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으니 노벨 의학상감입니다. 오늘날의 의료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문둥병자, 간질병자, 시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중풍병자 이런 사람들을 현장에서 깨끗하게 치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말로는 다 그런 게 낫는다고 말들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없습니다. 제가 소록도를 여러 번 다니면서 그곳에서 10년 이상 목회하신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곳에서 오랫동안 목회하시면서 이곳에 나환자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치료가 되어서 정상인으로 나간 사람이 있나요?”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현장치료를 다 해주셨으니까 볼 것도 없이 노벨상 후보가 됩니다. 또, 예수님은 노벨 물리학상도 받으셔야 됩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낸 사람이 세상에 예수님 밖에 어디 있습니까? 공간을 초월해서 나타나시고 물위를 걸어가시고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물리학상 넉넉히 받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노벨 평화상 후보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일하셨고 우리가 항상 말하기 좋아하는 비폭력 부저항을 예수님이 얼마나 열심히 실천하셨습니까?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참 진리를 선포하셨으니 최대의 교육자요, 가난하고 병든 인간들에게 즐거운 친구가 되셨으니 최대의 자선가요, 한번 설교하는데 수천 명, 수만 명씩 모였으니 최대의 설교자요, 무소유로 사셨으니 최대의 청빈자요, 애국자요, 효자요, 노동자이십니다. 또, 어린이 헌장의 선언자이셨으며 여성해방 운동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안 하신 게 없으십니다. 정말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인류의 후원자를 높이 받들고 상을 드려야 할 터인데 오늘 말씀의 결과는 정반대로 가장 추악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받으신 고통의 마지막 순간에 현장 모습을 생생하게, 마치 우리가 중계방송을 보는 듯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순 절기에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을 한번 재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순서를 네 대목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 먼저 홍포를 입으신 예수의 모습을 조명할 수 있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수들의 옷은 언제나 유니폼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통 푸른 수의를 입히기도 했고, 또 죄의 종류에 따라서 색깔 구별하는 나라도 많이 있습니다. 얼룩말 같은 줄기가 있는 죄수복을 입힌 역사도 있었고 가능한대로 안 입힌 역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입으신 홍포는 본래 죄수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홍포는 그 사회에서 누구든지 한번 입어보고 싶어 하는 영광의 상징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옷은 어깨 위에 걸치는 망토 식으로 되어 있는데 주로 로마의 군인이 장교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걸치고 다니는 옷으로 자주색깔로 되어 있습니다. 그 옷은 권위의 상징으로 임금님의 옷 색깔입니다. 로얄 칼라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자주색 옷 입은 사람을 보면 모두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에스겔 23장 6절에 보면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방백과 감독이요 준수한 소년 말 타는 자들이라” 이렇게 그 옷 입은 사람들의 권위를 나타냈고, 누가복음 16장 9절에 보면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임금님이나 부자들이나 특별 부류의 사람들이 입는 색깔입니다. 로마 장교들이 망토를 만들어 걸친 것은 로마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려고 임금님의 허락으로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에게 그 옷을 입혔는가 말입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희롱을 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여기 31절을 보시면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네 말대로 왕이 되어 보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는 홍포를 입어야 한다. 왕들이 입는 로얄 칼라를 입어라!” 조롱을 하기 위해서, 희롱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그 옷을 입힌 것입니다. 차라리 이때 그 사회의 죄수복을 입혔더라면 예수님에게는 정신적 부담이 적었을 것입니다. 장난감의 재료를 만들기 위해서 홍포를 입혔습니다. 예수님에게 이것은 더욱 치욕적이었을 것입니다. 저 같은 이런 목사나 신부 같은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합시다. 다른 죄수들과 똑같은 죄수복을 입고 재판을 받으면 아무 부담이 없습니다. 죄 지은 대로 재판을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희롱한 것처럼 법정에서 신부 가운이나 목사 가운을 다 입혀놓고 “신부님이시여! 예배 강론을 하시려고? 목사님이시여! 오늘 무슨 주제로 설교를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했을 때와 똑같은 것입니다. 어릿광대에게 이상한 옷을 입혀놓고 노리갯감으로 삼아 웃고 즐기는 소비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갈대를 오른 손에 들리우고”, 30절에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손에다 갈대를 들려주었는가? 그것을 도로 빼앗아서 예수님의 머리를 때렸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 갈대도 희롱을 하기 위해서 쥐어준 것입니다. 임금님들은 로얄 칼라의 옷을 입고 그 다음에 손에는 반드시 왕의 홀을 들어야 합니다. 그 홀의 동작에 따라서 사람이 죽고 삽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임금님을 만나러 왔을 때 임금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일 경우 그 홀을 아래로 내려버리면 끌어다 죽이라는 뜻이고 홀을 들으면 들어오라는 뜻입니다. 그 홀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그 희롱하는 사람들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홀을 들어야 할 거 아니냐?”라고 갈대 하나를 꺾어다가 “자, 여기 홀이 있다! 이거 들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해봐라!” 이렇게 희롱을 한 것입니다. “네가 왕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왕의 손에 들려준 홀이 여기 있다.” 그 다음에 “왕이 어찌 왕관을 쓰지 아니했느냐?” 가시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우고 이렇게 온갖 희롱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희롱이라는 말은 조롱보다도 더 심한 놀림의 뜻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그랬습니다.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선언할 때까지 십자가 처형 방법은 그대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죄를 처단하는 방법으로 세상에서 많은 종류의 사형 집행이 실시되어 왔습니다. 목을 칼로 쳐서 사형시키는 단두형이 있고, 목을 끈으로 매서 매달아서 숨이 끊어지게 하는 교수형이 있고,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이 있었고, 때려서 죽게 하는 타살형이 있었고, 요즘에는 총이 나왔기 때문에 총으로 쏴 죽이는 총살형이 있고, 선진국에서는 전기 의자형이 있고, 지금은 죽는 사람도 인간의 권리가 있으니 너무 참혹하게 죽이지 말자고 해서 미국에서는 약물투입을 해서 조용히 잠들어 죽게 하는 약물처형방법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사형법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이것은 손과 발에 못을 박는, 그리고 그곳으로 피가 다 흘러나오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사람이 금방 죽지 않습니다. 우리가 간단한 의학 상식으로 볼 때 우리 몸에 상처가 나면 피가 나오게 되어 있는데 심장에서는 그곳에 피가 모자란다고 판단을 해서 피 흐르는 쪽으로 계속해서 피를 보내주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이 큰 것입니다. 우리 손과 발은 심장에서 가장 먼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심장의 피가 그리로 빠져나갈 때까지 죽지 않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은 십자가에서 며칠동안 있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의 경우는 6시간동안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형 방법이 십자가형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형인가? 이것은 그 사회에서 가장 흉악범에게 사용되는 사형법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럼, 그 사회에서 누가 가장 흉악범인가? 강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강도들은 단순 강도는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일 만한 죄가 있어서 끌고 왔으니까 사형 강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들을 예수님과 동일한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한 것은 똑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의식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 형법은 생명이 죽는 것보다도 더 괴로운 일이 명예적 고통입니다. 오늘 십자가 밑에 있는 군중들은 모두 지나가면서 머리를 흔들었다고 그랬습니다. 예수를 모욕하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이 십자가에 죽는 죄수는 절대 동정하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십자가 밑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그도 똑같은 명예적 손실이 오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그것을 아는 제자들이 그 현장에 하나도 없습니다. 잘못하면 자기도 그렇게 될까봐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타난 특징은 최고의 낮은 자리입니다. 마구간 출생, 나사렛 주민, 식민지 백성, 말단 노동자, 십자가 처형! 또,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세리 출신, 어부 출신, 문둥병자, 중풍병자,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창녀 출신 이런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 사회에서 최고의 흉악범이던 강도들과 나란히 취급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기 때문에 꼼짝없이 중앙 죄수가 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그림을 보면 예수님이 옷을 다 벗으시고 오직 조그만 옷자락 하나로 수치의 부분만을 가리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화가들의 결정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발가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수치의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최대한의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군중들은 예수님을 무능자로 만드는 작업을 합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못 내려오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무능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때 군중들의 요청은 합리성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권위를 이때 발휘해서 십자가를 날려 보내고 자기를 저주하는 십자가 밑에 저 많은 빌라도의 군졸들, 그리고 대제사장, 바리새인, 욕하고 조롱하는 무리들을 다 진멸해버리면 문제가 간단히 끝나는 것을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저렇게 수치스럽게 벌거벗겨서 고통을 받으면서 매달려서 죽어가고 있느냐?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당신은 무능자가 아니냐?” 우리 신앙생활에도 똑같은 문제가 항상 등장합니다. 바로 십자가 밑의 군중들과 똑같은 합리성 주장을 내세우면서 하나님께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이야기를 합니다. 그 소원은 돼도 좋고 안돼도 좋은 소원이 아니고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소원을 하나님께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면 좋은 일이고 그것이 성취되면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기도를 하면서 단언을 합니다. “이것은 이쪽저쪽으로 갈 수 있는 지리산맥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는 사건입니다. 만약 이렇게 기도했는데 이것이 안 될 때에는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면 하나님 안 믿겠습니다.” 이렇게 단언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쯤 되어 가지고 내 소원이 크다고 해야 기침 한번 하시면 되는 일인데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하나님도 더 잘 섬기고 나도 좋고 이웃도 좋고 다 좋고 평화스러운데 왜 하나님은 안 들어주시는 것이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십자가 밑에 군중들이 예수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에 대한 구속사적 사건인 것을 우리가 어느 때는 잊어버리고 사욕에 가득 찬 파렴치한 인간들의 얄팍한 요구에 응답의 성취자로 예수를 바라봤을 때 실망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얄팍한 인간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인류 구원의 십자가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나를 보아야 하는데 오늘 당장 내 앞에 어떤 필요가 하나님의 존재를 판가름하는 것과 같은 얄팍한 마음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무당 종교만도 못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무능자로 만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정말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그들은 모두 진노의 자식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십자가 위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그리고 구원의 소리를 발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채워줄 때 하나님이 계시고 그 성취 욕구가 무시당할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논리나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내려오면 믿겠노라.”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은 한때는 갈등이 계셨음이 겟세마네에서 나타납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런데 그 갈등은 그 자리에서 해결이 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내 뜻을 취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내 뜻과 결정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은 오늘 십자가 밑의 군중들과 똑같은 논리의 신앙입니다. 이 사순절에는 다른 때보다도 더 많이 주님의 고난을 기리기 위해서 내 뜻을 죽이는 괴로움을 겪자고 지키는 기간입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아픔과 같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하나님 아들됨의 능력과 권위를 우리 눈에 보이게 행사하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보라! 너는 무능자가 아니냐? 하나님의 아들이면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을 터인데….”
이제 예수님은 명예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자리에 떨어지셨습니다. 민중의 시선 앞에 벌거벗긴 몸이 공중에 매달려 말할 수 없는 수치감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상처의 아픔이 현기증을 일으켜서 인내의 한계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때 누군가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아름다운 행사를 하나하는데 당시 마취제로 사용했던 쓸개 탄 포도주 한잔을 선사해 줍니다. 그것을 마시면 고통은 잠시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참혹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질 때는 아플 때는 아파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내가 지금 이 술 한잔을 받아먹고 내가 그 평안을 얻어야 되겠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고난의 깊이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통한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진리의 입증을 위해서 아플 때는 우리가 지독스럽게 견딜 수 없게 아파야 하나님의 역사는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 진리를 이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한국 영화가 미국에서 한인들이 아닌 미국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상영된 것이 ‘춘향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미국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 내용의 초점이 뭐냐 하면, 고난을 당하는 한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내가 왕권을 가지고 올 지도 모른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춘향이는 그 말을 믿었기 때문에 온갖 핍박을 당하게 되지 않습니까? 자기가 사랑했던 이 도령의 약속을 지키려면 그 지독한 아픔을 견뎌야 했고 견뎌 냅니다. 그 아픔을 아파야 할 때는 다 견딥니다. 나중에 이 도령이 암행어사라고 하는 왕권의 마패를 들고 나타나서 고난 받는 춘향이를 신부로 맞이했다는 아픔을 견딘 사랑의 성취를 중심으로 해서 미국 사람들 시장에 내어놓았는데 이해를 잘 못했다고 평가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과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로 왕권을 가지고 올 것이니 참고 기다리라.” 우리 성도들은 그 약속 하나를 믿고 세상의 온갖 핍박을 견뎌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왕권을 가지고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러 오실 것입니다. 춘향전과 기독교의 사랑의 성취는 아플 때는 아파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플 때는 아파야 합니다.
광주의 오포고개를 넘어서 조금만 가면 정몽주 선생의 묘지가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거기에 소풍을 많이 갔습니다. 그래서 그 역사를 잘 알고 있는데, 지금도 선죽교 다리는 비가 오는 날이면 정몽주 선생이 흘린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그러잖아요? 비바람에도 지워지지 않고 지금도 그대로 있는 의인의 피 흔적!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흔적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 흔적은 아플 때 그 아픔을 견뎠기 때문에 인류 구원의 피 흔적으로 남은 것이란 말입니다. 쓸개 탄 포도주 한잔의 위로는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 거절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 정도의 아픔은 내가 참을 수 있어야지!” 이것이 오늘의 진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도 질 것이다. 쓰러져 죽게 되면 죽으리라!’ 사순절 기간 동안에 어느 때보다도 주님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나의 아픔을 견디고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질 때는 아픔이 있는데 세상적인 쓸개 탄 포도주 한 잔은 거절해야, 아플 때는 아파야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진리를 십자가 사건에서 저희들이 발견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는가? 그 진리를 저희들이 깨달아서 사순절 기간 동안에 주님의 뜻을 성취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 27:27-50 / 정영도목사
▣ 도 입 / <성도를 향한 영혼육의 축복>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흠도, 점도 없이 거룩하고 온전하시며, 완전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육신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때에 모습은 참으로 참담하고, 처참하셨다. 주님이 받으신 그 고통과 상처를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종류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주님이 받으셨다. 주님께서 당하신 모든 고통을 짧은 시간에 다 말할 수가 없이 많으나, 그것을 몇 가지로 정리하여 생각하면 쉽다.
첫째, 육체의 고통을 당하셨다.
둘째, 정신적인 고통/인간관계 속에서 오는 아픔이다.
셋째, 영적인 고통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다.
전인적인 고통을 당하셨다.
죄인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주님이 의인으로서 죄인이 되셨다. 죄인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 형벌을 주님이 가감없이 액면 그대로 다 당하셨는데, 그 고통이 바로 사망 그 자체, 지옥의 고통이었다.
왜 주님이 이런 고통을 당하셨는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를 모든 고통과 슬픔과 저주 가운데서 구원해주시려고 그가 대신 죄 때문에 고난받으신 것이다.
1.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인간의 고통-사망
우리 모든 사람의 죄와 고통의 뿌리를 아담에게서 찾아야 한다. "죄를 범하면 정녕 죽으리라" -
1)첫째, 영적인 죽음-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나, 더 이상 사랑의 친밀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피하고 숨어버렸던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2)둘째, 정신적인 고통-사망의 고통/ 관계 단절
이제는 서로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고, 원망과 불평과 미움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서로 맞지 않아서 못살겠다고 싸우는 것이다.
하나가 되어야 할 대상이 자신과 하나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통이 너무나 크다. 사랑해야 할 대상과 싸워야 하는 고통과 슬픔이 우리에게 있다.
3)셋째, 마침내, 육체적인 죽음까지 찾아왔다.
아담 할아버지 몇 살인가? 930년이나 살았다. 고통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장수가 축복인가? 오래 사는 것이?
이런 영적 죽음, 혼적인 죽음, 육체의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려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우리가 당해야 할 온갖 고통과 저주를 주님이 대신 당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망의 고통>이다. 오늘은 바로 이런 사망의 고통을 몸소 당하시려고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신 날이다. 이 때에 주를 믿는 자들이 주님을 영접할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하여 종려주일이라 한다.
2.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당하신 사망의 고통
이러한 주님의 고난이 있을 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 오시기 600여년 전에 예언하였는데, 그 말씀이 이사야 53장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주에 읽고 묵상하기를 바란다. 이사야 53장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1) 주님이 당하신 육체의 고통 / 본문 중심으로 찾아보자. 4가지
①26절>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극악무도한 죄수를 다루는 채찍으로 주님을 때렸다. -살이 찟어지고, 유혈이 낭자한 주님의 모습이 보인다.
②29절> 가시 면류관을 엮어 주님의 머리에 씌웠다. 탱자나무 가시처럼 큰 가시로 둥그렇게 엮어 주님의 머리에 씌웠으니 상상해보라. 머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③32절> 굶주려 허기진 주님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웠다. 그러기에, 주님이 몇 번씩이나 쓰러졌고, 더 이상 넘어진 후에는 주님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일어나지 못하자, 주위를 살피던 로마 백부장은 덩치큰 구레네 시몬을 지목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④38절> 마침내 육체의 고통의 절정인 십자가에 양손 양발에 못박았다. 제일 끔찍스런 소름끼치는 고통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이다.
2) 정신적인 고통/ 인간에게 당하는 모든 정신적인 고통을 주님이 당하셨다. 4가지
①첫째, 옷 벗김을 당하시다 (28절) 수치를 당하시다.
죄수를 취급하는 방법이 중에 하나가 옷 벗어라는 것이다.
벗겼다, 입혔다 (31절)
②둘째, 홍포를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씌우는 것은 모욕이다.
"네가 왕이 아니냐? 그러니 홍포를 입고, 면류관을 써 보라"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고?? - 왕권을 상징하는 왕의 홀(지팡이) 대신에 갈대 홀을 들려주는 것은 극도의 모욕이다.
③셋째,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0절)
④넷째,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도 조롱을 당하시다(39-40, 절)
*지나가는 사람들(39절)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41)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44절)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가시면류관을 엮어 억지로 머리 씌운 장본인? 억지로 십자가 나무를 주님의 어깨에 매게 한 사람?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에서 양손 양발에 못박은 사람이 누구인가? 물론 로마 사람이겠죠?
주님을 조롱하고, 온갖 욕설로 주님을 모욕한 사람이 누구인가? 물론 유대인들이겠죠?
영적인 원리는 바로 내가 그 장본인이라는 사실이다.
♪♬ 주님 가신 길
주님가신길 십자가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길
골고다의 거친언덕길 지치신 주님의 모습
오나의 주님 용서하소서 죄인위해 고난받으셨네
이세상에 생명주시길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3) 영적인 고통/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주님(45-46절)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성경에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주님을 향하여 "어찌 나를 버리시냐?"고 그런데 주님은 그런 종들을 단한 번도, 단 한 시간도 버린 적이 없으시다. 영적이 사람들이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자신의 마음을 주장하지 않을 때에 오는 엄청난 영적인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다.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고통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이다. 3일 동안, 이 때에 주님은 음부에 내려갔다. 음부-지옥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우리 인간에게서 당하는 가장 큰 정신적인 아픔은? 버림받은 아픔이다. 일반적인 잘못은 거의 다 용서가 되는데, 용서 안 되는 것은 버림받은 것이다.
주님이 당하신 전인적인 육체의 고통, 정신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은 하마디로 말하면 지옥의 고통 그 자체이었다. 이렇게 십자가 모진 고난을 나를 위하여 대신 담당하시므로, 나를 지옥을 고통에서 구원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3. 주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보답
이런 놀라운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입은 성도는 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고, 깨달으며,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다. 수난 절기를 지키는 것이다.
2)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을 모욕하고, 배반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3) 나도 주를 위해 내게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주를 위하여 사는 삶이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
마 27:27-54 / 박덕기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주님께서 당하신 조롱과 수욕,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이 매우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있습니다.
십자가는 반역죄, 전쟁터에서 이탈한 죄, 해적, 암살, 소요죄 등을 범한 자들을 벌하는 사형 틀입니다. 십자가형이 선고되면, 먼저 죄수에게 채찍질을 하고, 죄수로 하여금 형장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 후, 형장에 이르면 죄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굶어 죽기까지 내버려두던가, 못을 박아 죽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특히 유대 나라처럼 날씨가 더운 지방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열대 지방의 열기와, 못 박힌 상처에서의 출혈로 온 몸에 열이 나는데, 몸의 당김과 갈증으로 열은 더 심해 간다고 합니다. 거친 못에 찔린 상처는 부풀어오르고, 찢어진 힘줄과 신경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더해 간다고 합니다. 머리와 위장의 동맥은 출혈되어 무서운 두통이 따르며, 정신은 공포로 혼미해지고, 온 몸에 일어나는 경련은 상처를 더 크게 찢어 놓으니, 실제로 죽기 전에 벌써 여러 차례 죽음을 맛보다가, 마지막에는 피와 물이 다 쏟아져 기운이 진하여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 형벌은커녕, '십자가'라는 단어까지도 그들의 생각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이 결정되자, 빌라도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인간이 발가벗김을 당한다는 것은 최대의 모욕과 수치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난 날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저질러졌던 악랄한 범죄 가운데 하나가 소위 '성 고문'이라는 것이었는데, 이성 앞에서 발가벗기는 극도의 수치감을 통하여, 억지로 범죄 사실을 자백하게 한 못된 고문 방법이었습니다. 이렇듯 발가벗기는 것은 최대의 수치와 모욕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많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를 덮고 가리워 주시려고, 자신이 벌거벗음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입혀 줄 성결한 '흰 옷'을 위하여 자신이 벌거벗기우는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흰옷'은 물론 '의의 옷'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죄 씻음을 받은 사람만 입을 수 있는 옷을 뜻합니다. 이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려고, 주님 자신은 모멸과 수치의 벌거벗김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자색 옷, 홍포를 입히었습니다. 홍포는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옷입니다. 빌라도와 헤롯도 이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낡은 주홍색 홍포를 입게 한 것은, 왕으로서 입게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왕이라고 하신 데 대하여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주홍과 같이 붉고 진홍과 같이 붉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입은 홍포는 그의 피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눈과 같이, 양털 같이 희고 정결케 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채찍질을 하는 것은 십자가형에 의례히 수반되는 형벌이었습니다. 그 채찍질은 실로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보통 길다란 가죽 끝에 납이나 못을 달아 채찍질함으로 도중에 죽는 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한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거룩하신 머리에 억지로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면류관은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병들은 주님께 금면류관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고, 예수님을 왕으로 가장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른 손에 갈대를 들리어 주었습니다. 갈대는 왕권을 상징한 홀을 대신한 것으로서, 이 역시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며, 그 거룩하신 주님의 얼굴에 더러운 침을 뱉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무서운 모욕이었습니다. 인간의 불신앙은 거룩하신 주님께 이토록 참람한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끄러운 죄악과 수치를 덮으시고, 영원한 제사장으로써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이러한 모욕과 수모를 받으신 것입니다.
32-44은 세 개의 십자가, 곧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주님의 좌우 편에 함께 달린, 두 사람 강도의 십자가를 보여 줍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1)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최고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것입니다.
2)주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구원이 성취된 십자가입니다. 인간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광야에서 세워 놓았던 구리 뱀을 쳐다본 자들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골고다의 십자가는 그를 믿는 우리를 구원하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3)주님의 십자가는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우 편에 강도들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한편 강도는 구원받았고, 또 다른 편 강도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4)주님의 십자가는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한 강도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용서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자복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는, 한없는 용서와 긍휼을 베푸시는 십자가입니다.
5)주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성취했습니다. 그는 불의와 불법을 이기셨습니다. 모든 죄악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승리하신 것입니다.
2. 회개함으로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1)강도의 십자가는 회개하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 자신처럼 악한 자들과 똑같은 죄인으로 취급되어 나란히 십자가에 처형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황송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형벌을 자신이 행한 일에 마땅한 보응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자기 죄를 깊이 참회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2)낙원으로 초청된 십자가였습니다.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한 것은, 한량없는 긍휼을 주님께 구하는 최후의 기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그를 초청하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늘 나라는 참회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지라, 회개하는 자의 과거는 더 이상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현재 마음이 변화되어 있다면, 그 모습 그대로 낙원으로 영접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한 강도가 낙원에 들어갔다는 것은, 어떠한 절망적인 죄가운데 있는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3. 자기 죄로 심판 받은 강도의 십자가
한편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했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하면서 예수님을 욕하고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1)이 강도의 십자가는 자기 죄로 보응받은 십자가였습니다. 저는 죽는 마당에서까지도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고, 참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신앙의 안목으로 볼 때, 이 강도의 희롱은 얼마나 가소로운 것입니까? 그는 자기 죄에 합당한 십자가를 진 것이고, 죄의 대가를 보응받는 것이니, 자기 악행에 대한 당연한 고통이었으며, 그는 결국 죽음의 십자가를 걸머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2)심판 받은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죄에 대하여 끝까지 회개할 줄 몰랐던 이 강도에게, 주님은 시종 침묵으로 대하셨습니다. 이 침묵은 무서운 심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부정한 이 강도의 십자가는, 그대로 멸망과 죽음의 십자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십자가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45-50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록한 것으로서, 인류의 죄와 저주를 한 몸에 짊어지고, 죽어 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십자가상에서 겪으셨던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후 '제 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그 뜨거운 팔레스틴의 태양이 빛을 잃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어두움은 천추만대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였습니다. 당시의 놀라운 어두움에 대하여, 아드리안 황제의 윤허를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던 노예 출신 후레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던 그 시간과 동시에 태양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처럼 완전하고 무섭고 기이한 완전 일식은 세상에서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이었던 제 9시가 가까워지자, 매우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 말은 아람어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입니다. 이 외침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소리입니까? 인류의 모든 고통과 질고와 죄와 형벌과 죽음의 전부를 한 몸에 걸머지고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하나님을 불러가며, 고뇌속에서 절규하는 주님의 처절한 모습, 이 모습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과연 누구를 위한 고난이고 아픔이며, 누구를 위해서 흘리는 피였습니까?
루터는 주님의 고난 과정 속에서, 가장 의미 심장하고 감동적인 이 부분 '곧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중에, 오랫동안 음식도 먹지 않은 채, 같은 자세로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에 놀라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셨다!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F.W 크룸마허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치신 주님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나는 그 고난의 잴 수 없는 깊이를 접근한다는 생각이 날 때, 오히려 두려울 뿐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소리에 대하여 글을 쓰거나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긴 침묵을 지킨 체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을 따름이다!'고 하였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이 절규하건만,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일언반구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위로의 말씀 한 마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사고를 내고 고생하는 아들의 고통을 차마 볼 수 없어 가슴아파 하는 어머니도 있고, 건강치 못하여 몸이 축난 아들을 보고, 안쓰러워서 견딜 수 없어 하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수두로 앓고 있는 어린 자식의 고통을 보면서, 며칠씩 밤을 새웠다는 부모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울부짖을 때, 과연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의 피흘리는 모습,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쓰리고 아프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끝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절규하는 독생자를 외면하셨습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십자가 속에 들어 있는 이 같은 하나님의 고뇌하시는 아픔을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짊어지셨던 십자가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치신 후,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셨습니다. 주님의 영혼은 그의 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실제로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게 일어났던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은 그 자체가 첫 언약을 파기한 결과로 찾아오게 된 것이었으므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죽음을 대신해야 했으며, 그것을 통해 인류의 죄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죽으심을 그저 슬프게 감상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죄인의 생명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죽음이었음을 깨닫고 확신해야만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고난 주일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부르짖었던 주님의 고뇌에 찬 저 절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독생자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면서도, 끝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외면하셨던, 하나님의 그 저미는 아픈 마음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십자가상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난 후, 거기 둘러서서 구경하는 군중 틈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못박았다. 나는 그 일에 동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수난 주간을 보내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그 모진 채찍질과, 그 부끄러움과 수욕을 다 겪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시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는 다짐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구레네 시몬이 받은 축복
마 27:32-37 / 김정호목사
어렸을적 기억되는 재미난 사건이다. 어느 국민하교 학생이 술을 빼고난 찌꺼기를 많이 먹고 술에 취하게 되었다. 이 아이가 얼굴이 빨개지고, 비틀비틀 거리며 혀가 말리면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동네에 80이 넘으신 노인이 지나가니깐... "너 누구야... 인사성이 없어..., 너 몇살이야... 어린것이 까부러.." 라고 주정을 하자 노인은 아무런 대꾸도 안하고 그 자리를 피하였고 모였던 사람들은 웃음 바다를 이룬적이 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사건인가? 누가 인사성이 없는가? 누가 어린가? 누가 까불고 있는가? 술취해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고, 어른도 몰라보는 보이는대로, 입에서 나오는대로 떠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슬이 깨고 나면 부끄러움을 안다. 창피할 것이다.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이라고 때리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인들의 모습이 술을 먹고 정신없이 떠들고 행동하는 어린의 모습이라 생각된다. 로마 군병들이 에수님께 무거운 십자가 형틀을 지운 다음 성문 밖으로 나섰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안에 여러차례나 쓰러지셨다. 전날밤 너무나 많은 시달림과 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가 그만큼 지독하고 무거웠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형편에서 도중에 느닷없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 로마 군병들에게 붙들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사형장으로 가야만 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진 시몬이 어떤 면에서 축복을 받았는가를 생각해 보자.
1. 쓰임 받는 축복을 받았다.
시몬은 북아프카 변방 도시인 구레네에 살고 있던 사람이다. 워낙 예루살렘까지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유월절 절기 기간에 도착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거리에서 예수님을 끌고 나오는 군병들과 마주치게 되었고, 이들에게 느닷없이 붙들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남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일은 운수사나운, 재수없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시몬은 어쩌면 얼굴이 검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만만해 보인다는 이유로...
어리석어 보인다는 이유로...
힘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순진해 보인다는 이유로... 반갑지 않은 십자가를 대신지게 되었으나 그 일을 묵묵히 수행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잠시라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에수님이 사랑하고, 고마와하는 사람이 된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세를 졌으나 오히려 예수님께 도움을 주고 신세를 지게하는 가장 가치있는 순간이 된 것이다. 인간적인 약점들이 오히려 큰 축복의 무기, 장점이 된 것이다. 흑인이었고, 어리석게 보았기 때문에 큰 축복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약하고 어리석은자를 들어서 강하고 지혜로운 자로 들어 쓰시는 것이다. 별볼일 없는 흙덩이도 훌륭한 도예가 손에 쥐어지면 아름다운 화병이 되고 고가의 물건이 된다. 흔해빠진 종이라도 시인의 손에 쥐어지면 멋진 시가 된다. 화가의 손에 쥐어지면 멋진 그림이 된다. 보잘것 없는 보리떡과 물고기라도 주님 손에 쥐어지니깐 5000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존번연을 잠시 소개한다. 번연은 국민학교도 졸업못했다. 극빈자 가정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로부터 땜쟁이 일을 배웠을 뿐이다. 그는 거칠었고 나쁜것을 많이 해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그러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전도하는 집사가 되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구교(성공회)의 모함으로 인해서 그는 감옥에 갖히게 되었다. 온기없는 불결한 짚바닥, 음산한 공기, 어둡고 초라한 감옥안에서 그가 읽는 책이라고는 성경과 한권의 신앙서적 `순교자'밖에 없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영감을 받아 글을 썼다. 지구상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지는 불후의 명작 "천로역정"을 써서 수많은 영혼을 구하고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무식하고, 거칠고, 가난한 땜쟁이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며 은혜를 받으면 가장 크고 가치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게서는 검고 어리석어 보이는 시몬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시며 십자가를 지는 큰 축복을 바로 그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는 늘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한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과 행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늘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억지로라도 교회에 오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 예배드리라. "
" 기도하라.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 순종하라.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신다.
" 사랑하라. 하나님이 행복케 하신다.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진 시몬을 잊지 아니하시고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수고를 잊지 아니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2. 사랑의 축복을 받았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서 애써 골고다 꼭대기까지 오르는 동안 얼마나 원망하였겠는가? 그런 일은 사형수 다음으로 지게 되는 고통이다. 아무런 죄없이 참혹하게 죽어 가시던 처참한 예수님의 모습, 그러면서도 조금도 누구를 원망하는 일 없이 도리어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운명하시던 그토록 거룩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시몬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운명직전에 하셨던 일곱마디의 말씀들까지도 빠짐없이 들었다.(46절)
모함을 받았으나 묵묵한 모습
가장 고통의 순간에도 평안한 모습
원수를 용서하는 모습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
이런 모습은 예수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3년동안 주님을 따랐던 큰소리치던 제자들은 다 도망하여 주님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으나,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만이 예수님의 죽음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대상을 닮는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특성을 "적대자와의 동일시 현상"이라고 말한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저 사람은 죽일 놈이지"라고 계속 그 사람을 미워하고 주야로 그 사람만 생각하고 있으면, 곧 그사람과 비슷하게 되어 버린다.
시어머니에게 학대를 받은 며느리가 '내가 시어머니가 되면 나는 절대로 우리 시어머니처럼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가 시어머니가 되면 옛날의 시어머니처럼 며느리를 학대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본것이 그것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상을 닮는다.
" 많이본 "
" 함께 일했던 "
싸우는 모습을 많이 본 사람은 가정과 교회에서 싸운다.
불평하는 " 불평한다.
사랑하는 " 사랑한다.
기도하는 " 기도한다.
봉사하는 " 봉사한다.
찬송하는 " 찬송한다.
섬기는 " 섬긴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남에게 영향을 끼치며, 자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성도와 자녀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 주었는가? 게으른 모습, 성난모습, 소리지르는 모습, 불평하고 흉보는모습, 세속적인 모습 ...
과연 기도하고, 찬송하고,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앞에서 보여주었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의 순간에 "사랑과 용서"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시몬의 가슴에 영원히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는 억울하다" "너희는 저주를 받으라, 두고보자"라고 하였다면 그분의 삶과 십자가는 아무런 힘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나 죽으나 "사랑의 모습"만 보여주고 실천 하는 성도가 되자. 사랑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3. 가족을 구원하는 축복을 받았다.
예수님을 만난 시몬이 변화가 되자, 시몬을 통해서 그의 가족들이 변화되고 새로와졌다. 시몬은 분명히 골고다에서 목도했던 일들을 자기 가족에게 즉시 전하였고, 그 결과로 온 가족까지 신자들이 되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였고(막15:21), 사도 바울에 의하면 루포의 어머니, 곧 시몬의 아내는 사도 바울로부터 '그 어머니는 내 어머니이라'라는 말을 들을 만큼 훌륭한 신자가 되었던 여인이었다. (롬16:13)
먼저 믿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온 가족을 구원하였다면 참으로 귀한 일을 한것이다. 하나님의 상금이 크다.
아직 나의 가족을 주 앞으로 인도하지 못하신 분은 더욱 더 기도하라 분명 머지 않은 날에 다 예수님을 믿을 것을 확신하라, 눈물의 기도는 큰 응답이 있다. 눈물의 기도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나 혼자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그런 고백을 한다. "온가족이 함께 교회에 가는 모습을 보면 제일 부럽고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이처럼 아름다운 것은 지상에 없는 것이다. 여러분의 가족들이 어려도 구원받아야 한다. 공부하는 자녀도 구원받아야 한다. 직장 생활이 어떻든 구원받아야 한다. 사업이 바빠도 구원받아야 한다. 피곤해도 구원받아야 한다. 구원은 무엇보다 먼저이고 중요한다.
어느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남편을 전도하고 싶었다. 남편과 함께 주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 예배 드리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한 마음으로 집사님은 남편의 양말을 성경책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어느날 이 마음을 알게 된 남편이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소원이요... 그렇게도.. 당신이 원하니 한번 믿어보" 그래서 교회에 다닉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전도 잘하는 한사람이 큰 회사의 사장을 전도하기로 결심하고 찾아갔다. 처음에는 반갑게 맞아 주더니 그 다음에는 바쁘다고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엽서에 성경귀절을 적어 보내었다. 사장은 엽서를 받자마자 읽지도 않고 빈 서랍에 쳐 넣곤 하였다. 드디어 98장까지 보맸는데도 아무 응답이 없었다. 낙심이 되어 그만 둘가 하다가 엽서 100장이나 채우고 그만 두려고 또 한장 써 보냈다. 그때쯤 이 회사가 큰 위기에 직면하고 흔들흔들하게 되자 큰 고민과 근심이 생겼다. 근 너무 무겁고 답답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때에 100번째 엽서를 받게 되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라는 성경 귀절을 읽고 크게 감동되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열성과 사랑을 가지고 전도하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게 된다. 특별히 가족을 전도하는 것은 가장 기본이고 중요한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 이번 주는 고난주간이다. 우리 모두 구레네 시몬처럼 십자가를 지자. 십자가를 지는 가운데 주시는 쓰임받은 축복, 사랑의 축복, 가족 구원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