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1.
왕하9:27-37
겉보기에 화려했으나 영적으로 암흑기였던 오므리 왕조(오므리-아합-아하시야-요람)가 예후에 의해 끝을 맺었다.
유다 왕 아하시야는 삼촌인 아합의 아들 요람을 방문했다가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가 죽은 이유는 그가 아합의 딸 아달랴의 아들로 오므리 왕조에 속했기 때문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육의 몸을 입은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육을 입고 이 땅을 살며 삶의 방향과 목적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그 죽음 이후 혹은 죽음의 순간이 달라진다. 아무리 화려한 공주와 왕으로 살더라도 그의 끝은 이세벨이나 요람 혹은 아하시야처럼 황망하거나 처참할 수 있다. 그러나 육을 떠난 후가 더 비참해진다는 진리의 말씀에 더 귀기울여야 한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누가복음16장에 소개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를 더 실감나게 전해준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부자)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2-26)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한 말씀은 천국에 이르기 위해 이 땅에서 도덕적, 행위적 착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은 이미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기에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선한 일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며 함께 사는 그것이 선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회복된 그것이 착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가 선(善)이며 그곳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니 이 땅을 살면서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땅의 것 즉 건강과 장수 혹은 재물과 성공이나 권력이 아니라 위 엣 것을 찾아 목말라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주님!
이세벨이 처참한 죽임을 당한 것은 그녀가 하나님 아닌 이방신을 섬김으로 자기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한 죄 때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한 여자요 인간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자기 일을 행했는데 결국은 개들이 자기 살을 먹어 땅의 거름더미로 남는 존재, 거기서 완전히 끝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이 없었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무함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나를 이끄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알게 하시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내어 맡기게 하신 이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