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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북 출신으로 북방정서를 노래한 가수 유종섭
유종섭 씨의 가수시절 사진=
이동순 자료 제공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국문학 박사]
우리 국토개념은
일반적으로 분단이전의 상태,
즉 남북한이 하나로 통합된 상태의 영역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
상고시대의 우리나라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북녘 삼천리,
남녘 삼천리,
도합 육천리가 한민족의 강토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저 유명한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의
주장이기도 하지요.
지금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는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옛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습니다.
심지어 흑룡강 너머
연해주의 상당한 부분도
우리 민족이 말달리며
활을 쏘던 고토(故土)였던 것입니다.
그곳 유적에서
유물이 줄곧 발굴되는 것을 보면
그러한 사실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민족의
현재모습은 어떠합니까?
백두산 이남의 땅마저도
온전히 지니지 못하고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로
분단의 깊은 한을 품고서
불완전한 삶을 살아갑니다.
원래 우리가 지녔던 백두산 북쪽
삼천리강토에 대한 기억은
잊혀진지 오래입니다.
분단현실에서도
우리는 지역 간의 불화와 갈등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조상님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리하여 현재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잃어버린 고토에 대한 정서,
즉 북방정서의 회복이 아닐까 합니다.
과거 식민지시절에 문학을 통하여
이를 일깨워준 문학인들이 있었으니
김소월(金素月),
이용악(李庸岳),
백석(白石) 등이 그들입니다.
가요라는 대중문화 쪽에서도
북방정서를 적극적으로 담아
열창했던 가수가 있었으니
채규엽, 유종섭, 송달협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다루고자 하는 가수
유종섭(劉鍾燮, 1916∼?)은
두만강 물소리가 들리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유재구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회령지역에서
‘창덕상회’라는 이름의
물산 위탁업을 대규모로 운영하던
사업가였습니다.
각종 해산물, 약재, 피혁, 곡물, 과일 등을
생산자에게 위탁받아
조선은 물론 남북만주와 연해주 일대까지
직접 찾아다니며 판매하던 일이었지요.
유종섭은 소년시절부터
이런 아버지를 따라
두만강 너머 만주와
연해주까지 다녔습니다.
아들이 가업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부친의 요청으로
회령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북간도로 건너가서
연길의 금융조합에 취직해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꿈은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성악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지요.
회령상업 2학년 재학 중에
항시 성악연습으로 목청을 다듬었습니다.
후리후리 큰 신장에
외모도 서구풍 미남형으로 준수해서
특별히 멋스러운 귀공자느낌마저
들었다고 합니다.
유종섭이 가장 존경하고 사모했던 가수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테너가수
티토 스키파(Tito Schipa, 1889∼1965)였습니다.
그의 깃털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벨칸토창법의
목소리를 닮고 싶어
늘 모창으로 기량을 연마했습니다.
유종섭이 가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콜럼비아 악극단의 회령공연 때문입니다.
가수가 되고 싶다며 찾아온
회령청년 유종섭의 꿈을 알게 된
콜럼비아 직원은 바로 작곡가를 통해
그의 기량을 테스트했고,
여기서 가능성을 인정받아
서울로 함께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부친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아들 고집을 꺾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1936년 잡지 '삼천리' 11월호에 실린
콜럼비아레코드사 문예부장
이하윤(異河潤)의 회고를 보면
유종섭의 가수발탁 배경을
더듬어볼 수 있습니다.
1930년대 함경북도 회령시
= 이동순 자료 제공
유종섭 성음의 특징은
티토 스키파를 연상케 하는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 속에
슬픈 여운이 실안개처럼 감도는
느낌이라 할까요.
한번 듣고 나면
그 애잔한 울림의 파장이
다시 듣고 싶어지는 효과가 느껴집니다.
유종섭은 드디어 그토록 소망하던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되어서
1936년 5월
여성가수 장옥조(蔣玉祚)와 함께 부른
'아리랑'을 첫 음반으로 선보입니다.
이후 1939년 7월에 취입한
마지막 곡인 '정열의 수평선'까지
약 37곡을 발표합니다.
그러니까 가수로서의 활동기간은
3년 동안에 불과합니다.
유종섭과 장옥조가
혼성 듀엣으로 부른 아리랑
=이동순 자료 제공
한해에 평균 12곡의 음반을 발표한 셈인데,
유종섭이 불렀던 음반을 살펴보면
상당수가 유랑, 방랑 테마입니다.
그것은 '광야의 달밤',
'내 갈 길이 어듸메냐',
'방랑애곡', '단장애곡', '유랑의 곡예사',
'방랑의 일야몽', '광야행 마차',
'눈물의 황포차', '상해로 가자', '눈물의 연락선',
'우리는 풍운아' 등
제목에서도 확인됩니다.
데뷔했던 해인 1936년에 6편,
1937년에 14편,
1938년에 10편,
1939년에 7편을 발표했으니,
가장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는 1937년입니다.
끝없는 광야의 지평선에서
갈밭 속을 불어오는 깊은 가을 찬바람
광야에 달이 뜨면은 눈물만 흘러
가고저 하는 그린 내 고향은 육로 이천리
지나간 그 시절 하도 그리워
오늘밤도 홀로 누워 옛 노래를 부르네
광야에 달이 뜨면은 꿈길을 밟아
가고저 하던 그린 내 고향을 다녀오는 몸
-'광야의 달밤'(이하윤 작사, 탁성록 작곡,
콜럼비아 40703) 전문
유종섭이 가요작품을 발표한 시기는
식민지농민들이 유랑의 신세가 되어
가족들과 아무런 대책이 없이
암담한 가슴을 부여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눈물에 젖어
넘어갔던 때입니다.
연표를 통해 확인해보면
1936년 9월30일
경남군수회의는
낙동강 연안지역 주민 1,600호의
만주이주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일제의 대표적 착취기관이었던
선만척식회사(鮮滿拓植會社)에서는
충남 일대에서 약 3,000명가량의
이른바 만주개척민을 모집하여
만주국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일제에 의한
강제적, 계획적 이주였던 것입니다.
이밖에도 철도와 도로,
정거장, 공공기관건설 따위의 명분으로
터전을 쫓겨난 식민지백성들이
무작정 떠나갈 곳은
두만강 너머 만주벌판뿐이었습니다.
유종섭이 부른 노래들은
이러한 당시 현실을 반영하면서
유랑민들의 답답한 가슴과
울분을 쓰다 듬고 위로해주는
격려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유종섭 음반에 노랫말을 제공했던 작사가는
시인 이하윤이 16편으로 가장 많습니다.
다음으로는 7편의 김다인,
5편의 박영호가 있습니다.
여기서 김다인은
조명암으로 추정이 됩니다.
기타 김안서, 현우, 김백조, 고마부,
김익균, 이선희 등도
유종섭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작곡가로는
탁성록이 8편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6편의 이용준,
5편의 김송규(김해송),
이영근, 전기현, 정진규, 이재호 등과도
함께 힘을 보탰습니다.
특이한 것은 일본인 작곡가
레이몬드복부, 죽강신행, 지전불이남 등도
유종섭의 음반에 곡을 주었습니다.
작곡자 표시가 따로 없이
문예부편곡으로 표시된 음반은
필시 일본가요의 번안곡(飜案曲)으로
짐작이 됩니다.
유종섭이 부른 노래를 작사한
시인 이하윤
=이동순 자료 제공
유종섭이 가요계에서 활동했던
3년 동안의 경과를 두루 살펴보면
첫해는 '아리랑', '수부의 꿈', '광야의 달밤',
'내 갈 길이 어듸메냐', '방랑애곡', '이 마음 실고' 등
6편을 발매했지만
'광야의 달밤' 이외에는
뚜렷한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해 12월,
매일신보에 추문으로 가득한
악의적 보도에 휘말리는
불운까지 겹쳤습니다.
1937년에는
14편의 가요곡을 발표하는데
이 가운데서 '단장애곡'과
'유랑의 곡예사' 등
두 곡이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서
그나마 체면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음반으로 유종섭 노래를 들어보면
차분하고 안정된 창법은
그런대로 들을만한데
특별히 내세울 수 있는 깊이와 울림,
뚜렷한 개성의 작용은 없는 편이었지요.
챗죽에 말 달린다 등불도 돈다
이국 하늘 저무러 별빛 희미한데
고향 그린 무리들 눈물만 흘리고
밤 깊은 이 거리 노래만 처량쿠나
팔다리 피곤하다 이슬도 차다
흘러가는 신세라 한숨 무거운데
고향 그린 무리들 눈물만 흘리고
밤 깊은 이 거리 노래만 처량쿠나
갈 곳이 아득하다 꿈길도 멀다
불러보는 어머니 가슴 답답한데
고향그린 무리들 눈물만 흘리고
밤 깊은 이 거리 노래만 처량쿠나
바람이 구슬프다 천막도 운다
기울어진 저 달빛 더욱 가여운데
고향 그린 무리들 눈물만 흘리고
밤 깊은 이 거리 노래만 처량쿠나
-'유랑의 곡예사'
(이하윤 작사, 탁성록 작곡, 콜럼비아 40767) 전문
1937년 8월 4일
서울 부민관에서는
매일신보 주최로 열린
'만담 및 가요의 밤'이 열렸습니다.
유종섭은 이 무대에 출연하여
신불출, 황재경, 유추강, 장명호,
선우일선, 운건영, 박단마,
안옥경, 최남용 등과 함께 공연했습니다.
이날 수익금은 전액
일본군부대위문 및
소위 국방헌금으로 보내졌습니다.
1938년은
가수 유종섭에게 몹시 바쁜 한 해였습니다.
10곡 가량의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각종 무대공연과 방송출연
요청이 밀려들었습니다.
1938년 2월 22일
부민관에서 열린
'대중연예의 밤'에
유종섭은 표봉천, 장옥조, 박향림,
임옥매, 김해송, 김인숙,
박단마, 장일타홍, 선우일선, 조영심 등과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날 가수의 프로필을 알리는 신문기사는
유종섭을 ‘스마트 뽀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문에 소개된 유종섭 인터뷰
=이동순 자료 제공
그해 여름, 서울 종로구 익선동
115번지에 주소를 둔
S.M.C밴드가
단성사에서 제1회 공연을 개최할 때
유종섭을 비롯하여 이영욱, 김인숙,
신회춘, 남일연, 박향림 등이
콜럼비아레코드 전속예술가 자격으로
특별출연했습니다.
경성방송국(JODK) 제2방송에도
3회 이상 출연했는데,
주로 저녁시간의 가요곡 프로에서
'광야의 달밤', '단장애곡', '두 사람의 사랑',
'비에 젖는 정화', '불사의 장미', '눈물의 황포차',
'신혼 아까스끼' 등을 불렀습니다.
같은 콜럼비아 전속 여성가수
장옥조, 김인숙, 박향림이 함께
동반가수로 출연했습니다.
1938년 잡지 '삼천리' 8월호에서
이서구(李瑞求)는
'유행가수 금석(今昔) 회상'을 통해
가수 유종섭이 처음 데뷔할 당시
빅타와 시에론레코드사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다툼까지 있었다는
일화를 들려줍니다.
유종섭의 외모가 워낙 서양적 마스크의
미남이어서
이서구는 그를 미국의 헐리웃배우
라몬 나바로와 로버트 테일러를 합친 듯한
미남형으로 평하고 있네요.
1939년 1월에 발간된 잡지
'신세기' 9월호의
‘레코드가수인물론’이란 글을 보면
서울의 5대 음반회사 전속가수 중
27명에 대한 짤막한 인상기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유종섭은
콜럼비아레코드사 소속 가수
김해송, 김영춘, 강남주, 남일연 등과 함께
대표가수로 거명됩니다.
유종섭이 불렀던 가요곡 중에
'뚱보의 서울'이란 만요(漫謠)가 있었는데
이 노래와 관련해서
1938년 8월 일제가 발간한
'조선출판경찰월보' 제120호의 기록은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줍니다.
고마부 작사, 정진규 작곡의 이 음반은
풍속괴란, 치안방해 등의 이유로
일제당국에 의해
출판금지 처분이 내려집니다.
콜럼비아사에서는 이후 뜬금없이
'뚱딴지 서울'로 제목과 가사를 일부
수정해서 다시 발표합니다.
유종섭과 함영애가
듀엣으로 부른 노래인
'이러케 되었답니다'
=이동순 자료 제공
이 무렵 함경북도 회령에서
사업에 종사하던 부친은
아들이 하루 빨리 돌아와
가업을 이어받기를 재촉하는
전화와 편지를 줄곧 보내왔습니다.
유종섭도 서울 가수생활 3년에
그렇게 만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뛰어난 히트곡도 내지 못했고,
그에 따라 레코드회사에서의 위치도
점점 뒷전으로 밀리는 것을 눈치 챈
유종섭은 어느 날 서울생활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미련 없이
고향으로 떠나갔습니다.
대중들의 인기와 반응을 먹고 살아가는
가수로서 그것의 빈약함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가요계에 엉거주춤 남아있는 모습이란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 것일까요?
1939년 4월 25일에 실린
동아일보 특집기사는
가수 유종섭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의
소식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약진 회령의 전모”란 제목의 이 기사는
당시 26세의 유종섭이 가수활동을 중단하고
부친의 물산위탁업체인
창덕상회를 이어받아
사업규모를 확장하는 일에
전심전력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그토록 소망하던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나 환경이
유종섭으로 하여금 가수로서의
인기와 명망을 유지시켜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종섭은 재빨리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업가로 변신했습니다.
아들의 이런 결정에
가장 흐뭇하고 기뻐했던 사람은
부친이었을 것입니다.
분단 이후 유종섭의 소재나
근황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북에 남아있었다면
김일성정권하에서
틀림없이 반동부르주아 계급,
악질적 지주자본가로 분류되어
즉시 처형되었거나
무자비한 숙청의 회오리 속에서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강제이주열차> 등 18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매몰시인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시인을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60권 발간.
신동엽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충북대학교,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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