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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군자가 즐거움으로 여기는 세 가지 일 중 하나로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시는 일을 들었다.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에 인간의 평균 수명은
불과 30~40세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되풀이되는 대규모의 전란과 역병 그리고 자연재해와 기근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요인이었으며
이러한 악조건을 견디고 살아남아 자연 수명을 다 누리는 일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자 축복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고령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비록 수명은 크게 늘어났어도 치매나 중풍 등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요즘
오래 사는 것이 마냥 축복받을 일만은 아닌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한 인기 그룹 소속 가수의 아버지가 할아버지 · 할머니와 함께
자택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어 세상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사건 현장에서는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간다라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경찰은 아들 박 씨가 치매를 앓던 노부모를 모시다가 지친 나머지
부모를 목 졸라 살해하고 본인도 뒤따라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 씨는 약 15년 전부터
부모님의 병시중을 해오면서 비록 극진하기는 했지만
무척 힘들어했으며 심한 절망감과 우울증을 호소해왔다고 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이 사건을 자식이 부모를 살해한
반인륜적 범죄 행위로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각도에서는
안락사의 한 사례로 간주하는 일도 가능하다고 보인다.
안락사는 좋은 죽음 또는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한 죽임을 뜻한다.
회복 불가능한 불치의 병으로 신음하는 환자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위해 간접적으로 환자의 죽음을 유발하거나
직접적으로 죽음에 이르도록 처치하는 행위를 말한다.
안락사에는 처치 방법의 차이 구분에 따라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해 환자에게 치사량의 약물을 주입하는 것처럼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수단을 사용할 경우
이러한 시술은 자비로운 죽임에 해당하는 것으로
안락사라기보다 안락살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와 달리, 회복 가망성이 거의 없는 불치병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연명 치료를 중단하거나
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하여 자연사에 이르도록 하는 경우에는
죽게 놓아둠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박 씨 사건의 경우 노부모의 고통을 끝내주기 위한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일이기는 했지만
목 조름이라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존속 살해라는 세속 윤리의 금계를 피할 수 없었다.
부모를 죽인 자가 그 죄를 짊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외에 별다른 속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보는 사람 모두를 숙연하게 만든다.
자식에게 목이 졸려 생을 마감하는 것도 끔찍한 일이지만
부모의 목을 졸라 저세상으로 모시는 일 또한
자식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사자가 아닌 우리로서는 박 씨가 아내나 형제들의 도움도 없이
그 오랜 기간 동안 홀로 걸머져야 했던 짐의 무게를 알기도 어렵거니와
그가 혼자서 억누르며 삭혀야 했던 고독과 절망감
그리고 피로와 우울의 깊이 또한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이 세상에 내팽개쳐진
한 불행한 인간의 운명에 대해 그저 먹먹하게
연민감 정도나 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품위 있는 죽음과 누추한 죽음
타인으로부터 죽음을 재촉받거나
타인의 손에 의해 죽음을 처치받는 일은
인격의 존엄성에 훼손이 되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품위 있는 죽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죽는 사람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며
무의미한 연명 치료로 가족들에게 누를 끼치거나
피동적인 생명 연장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을 떠난 어떤 두 분에게서 품위 있는 죽음이라 불러도
별 손색이 없을 만큼 깔끔하게 생을 마감한 잘 죽음의 경우를 보게 된다.
한 분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신영복 교수이다.
그는 희귀 피부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모르핀도 듣지 않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자
스스로 곡기를 끊어 열흘 만에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다른 한 분은 두 차례에 걸쳐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 전 의원이다.
그는 장기간 노환에 시달리면서도 불필요한 연명 치료를
한사코 거부하였고 마지막에는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스스로 곡기를 끊다가 이 세상과 결별하였다.
이 두 분의 경우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사태 앞에서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그리고 타력이 아닌 자력에 의해 선택하고 결정하였다는 점에서
품위 있는 죽음의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명이야 재천이라지만 만약 박 씨의 부모님께서도
이처럼 죽음에 앞서 미리 자신이 갈 길을 준비하고
자율적으로 그 방법과 시기를 택하였더라면
자기가 낳은 자식을 반인륜적 살인범으로 내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박 씨와 그 부모님의 죽음은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고대 일본의
한 산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재로 한 이 영화에서는
두 종류의 죽음이 대비적으로 그려져 있다.
오린이라는 여성 노인과 마타얀이라는 남성 노인의 죽음이 그것이다.
오린 은 자신이 건강해서 아직 식욕이 남아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일부러 치아를 바위에 부딪쳐
깨뜨리기까지 하면서 하루빨리 70세가 되기만을 기다린다.
노인이 70세가 되면 나라야마의 산속으로 업혀가서
신과 만나는 것이 이 공동체의 관습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70세가 되던 해에 오린 은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아들을 재촉하여 지게에 업혀 산속으로 들어가서
휘날리는 눈보라 속에서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자세로 죽음을 맞이한다.
오닌의 자발적인 죽음과는 달리
마타얀이라는 남성 노인의 죽음은 피동적이고 타율적이다.
그는 70세가 된 자신을 산속으로 데려가려는 아들의 청을 거부하다가
끝내는 동아줄에 몸이 묶여 절벽에서 내던져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70세가 된 노인을 산속으로 모시는 것이
공동체의 관습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닌의 죽음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까닭에 숭고미를 띠는 반면
마타얀의 죽음은 피동적이고 타율적인 탓에 추하고 비굴해 보인다.
마타얀이 노인 버리기라는 공동체적 관습의 객체로 전락하였다면
오린 은 이러한 관습의 객체로 전락하기에 앞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자율적 주체로 자리매김된다.
오린 과 마타얀이 각기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의 차이는
장차 그들의 자식에게 부과될 심적 · 윤리적 부담의 차이로 연결된다.
어머니의 간청과 재촉에 의해 그녀를 지게에 태워
산속까지 운반해 준 오닌의 아들은
단지 조력 죽음의 조력자로서 부담만 지면 된다.
그러나 밧줄로 아버지의 몸을 묶어 절벽에서 떠밀었던 마타얀의 아들은
노인 버리기가 아무리 공동체적 관습이라고 하더라도,
끝내는 존속살해라는 심적 · 윤리적 부담을 모면하기 어렵다.
사람은 비록 세상에 나올 때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나오지 못하지만
죽을 때만은 생을 마감할 시기와 방법에 대해
자율적인 선택이 가능해야 한다.
죽음은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가 자연의 섭리 앞에서
무릎을 꿇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임에도
죽음을 잘 맞이하는 일은 인간의 자율적 선택과
결정에 의해 진행되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의지에 맞게 선택함으로써
의미의 결정체로서 자기를 완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완강하게 죽음을 거부하려는 태도 또는 생명 연장에 대한
끈질긴 집착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천부적으로
내장하고 있는 자기 보존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겠지만
생물학적 수명의 연장 이외에 별다른
인간학적 의미를 찾기 어려운 말기 환자의 경우
생명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미련은 스스로를
생물학적 층위의 객체로 전락시켜 버리는 누추한 결과를 초래한다.
생물학적 수준의 하급 욕구를 넘어서서
대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는 초월적 순응의 자세를 보일 때
인간의 죽음은 한층 품위 있는 자기완성의 미학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청빈한 삶을 살다 간 한 구도자는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꽃은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
첫댓글 ㅠㅠㅠ
칠십이 넘은 나는..
할말이 없슴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꽃이 아니라도 질 때는 추하지 않아야 할텐데요~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