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사이언스 이채린 기자의 27일자 기사다.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100여년 전에 예측한 중력파의 존재를 최초로 증명해 낸 공로로 201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라이너 바이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명예교수가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6일(현지시간) 뉴욕타임즈 등 외신에 따르면 1932년생인 바이스 교수가 미국 메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별세했다. 바이스 교수는 인류 최초로 중력파를 검출한 ‘고급레이저간섭계중력파관측소(LIGO·라이고)'의 공동 설계자로 '중력파 천문학' 시대를 연 인물이다.
중력파는 질량을 가진 물체가 충돌하거나 합쳐지는 속도가 변하는 운동을 할 때 발생하는 ‘시공간의 파동’이다. 우주에서 가장 무거운 천체인 블랙홀 2개가 합쳐지거나 거대한 질량을 지닌 천체가 충돌할 때 중력이 우주공간으로 물결처럼 퍼져 나가는 파동이 중력파다. 연못에 돌을 던지면 돌 주변으로 동그랗게 물결이 파동처럼 그려지는 모습과 유사하다. 1915년 아인슈타인이 중력파를 예측한지 100여 년이 지나서야 라이고를 통해 중력파가 처음 확인됐다.
중력파 검출이 어려웠던 이유는 지구에서 느끼는 중력파 파동의 세기가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레이저 빛을 활용해 중력파를 검출하는 라이고는 미국 동서에 각각 위치한 길이 4㎞에 이르는 ‘L’자형 진공터널이다. 같은 광원에서 나온 레이저를 분리시켜 다른 방향으로 보낸 후 다시 거울로 반사시키고 한곳으로 모아 간섭을 일으켜 미세한 파동의 변화를 감지하는 ‘레이저 간섭계’ 원리가 적용됐다.
독일 출신인 바이스 교수는 1960년대 후반에 MIT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 과목을 가르치면서 LIGO 프로젝트가 될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구상했다. 바이스 교수는 이 같은 아이디어를 미국 국립과학재단(NSF) 스폰서에게 설명했을 때 '비현실적이다'는 비판을 거세게 받았다.
이후 1972년 MIT로부터 아이디어를 소규모 시제품으로 실현시킬 자금을 지원받았다. 소규모 시제품이 성공적으로 제작되며 중력파 검출 가능성을 보이자 바이스 교수가 이끄는 프로젝트 규모가 점차 커졌다.
스코틀랜드 실험 물리학자 론 드레버와 훗날 바이스 교수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킵 손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 교수 등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드레버는 검출기에 들어가는 거울의 위치와 각도를 정밀하게 제어해 레이저 빔을 조정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후 NSF는 프로젝트에 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다른 기관과 대학도 자금을 지원하며 라이고는 1999년 완공돼 2002년부터 본격적인 검출을 시작했다. 라이고는 2010~2015년 대대적인 개량이 이뤄진 이후인 2015년 9월 14일 역사적인 첫 중력파 검출에 성공했다.
라이고는 13억 년 전 머나먼 우주공간에서 각각 태양의 36배와 29배 질량을 지닌 블랙홀 두 개가 서로 충돌하면서 발생한 중력파를 검출했다. 중력파 검출 최초로 중력파를 직접 검출한 사례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최초로 블랙홀 두 개로 이뤄진 쌍성계의 존재를 확인하고 블랙홀의 충돌과 합병 과정이라는 극적 현상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후 검출된 중력파가 100개가 넘을 정도로 중력파 검출은 일상이 됐다.
바이스 교수는 '빅뱅'이 남긴 잔광인 '우주마이크로파배경 복사(CMB)'의 온도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센서를 설계해 빅뱅이론을 증명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고인의 삶에 대해 빠진 것들이 적지 않아 보완한다.
그는 1932년 9월 29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베를린에서 거트루드 로즈너와 프레드릭 A. 바이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사이자 신경학자이며 정신분석가였던 부친은 유대인으로 공산당의 열렬한 당원이었기 때문에 나치에 강제 추방됐다. 배우인 모친은 기독교도였다. 이모는 사회학자 힐다 바이스였다. 여동생이 극작가 시빌 피어슨이다.
가족은 먼저 체코 프라하로 달아났지만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독일이 체코슬라바키아를 점령하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세인트루이스의 자선단체 스틱스 패밀리가 그들이 미국 입국을 위한 비자를 취득하는 데 도움을 줬다. 바이스는 뉴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콜럼비아 그래머 스쿨에서 공부했다.
그는 MIT에서 공부하다 시카고 출신의 음악학도와 낭만적인 관계 때문에 3학년 초에 중퇴했다.공학을 할지, 아니면 물리학을 할지 고민한 것도 한 요인이었다. 당시 영향력 있는 물리학자이자 MIT 교수였던 제롤드 자카리아스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해줘 마음을 다잡았고, 결국 1955년 복학했다. 그는 1962년 박사 학위 과정을 마쳤다.
바이스는 1960년부터 1962년까지 터프츠 대학에서 가르쳤고, 1962년부터 1964년까지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재직한 후 1964년 MIT 교수진에 합류했다.
1973년, 그는 미군이 "핵심 임무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지 않은 모든 과학에 대한 자금 지원을 삭감함에 따라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 도움의 손길을 뻗친 것이 킵 손이었다.
그는 이민자 가정의 고달픈 삶을 위로한 것이 클래식 음악이었다고 회상하곤 했다. 어릴 적부터 들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이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돌아보며, 평생의 멘토인 자카리아스와의 개인적인 인연을 공고히 하는 데도 영향을 줬다고 돌아봤다.
그는 대학원에 다니던 1959년 레베카 영과 결혼했다. 첫 딸을 본 것을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다고 돌아보곤 했다. 첫 딸 사라 바이스(63)와 아들 벤자민 바이스(58)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