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행복한 사람들 - 비전, 사랑, 현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를 묵상하는 중 떠오른 말씀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역설적입니다만 가난한 부자입니다. 지닌 것은 없어도 마음 안에 참 보물인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환경이 행복을,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똑같은 환경 중에 주님과 사랑의 깊이에 따라 천국을 사는 이도 있고 지옥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비전이, 꿈이, 희망이 행복의 요체입니다.
비전 중의 비전이 하느님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이 무소유의 가난 중에 행복할 수 있었던 것도 빛나는 비전이자 참 보물인 하늘 나라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불모의 땅 어디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고, 어린왕자의 별이 아름다운 것은 한 송이의 장미가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도 있듯이,
사막 같은 세상에서 오아시스 주님의 비전을 지닌 자들이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황량한 사막같은 유배지에서 요한에게 빛나는 비전을 보여주심으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가난한 부자로 만드십니다. 우리의 천상 비전으로 삼아도 좋은 아름다운 비전입니다.
구원 받은 이들의 천상 행복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대로 요한의 신비 체험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여 마음 순수할 때 이런 신비 체험의 선물입니다. 문제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행복은, 부요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주님과 사랑의 깊이에 달렸습니다. 한 집에서 남남으로 사는 부부관계도 있듯이,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살아도, 교회의 신자로 살아도 냉담으로 주님과 남남의 관계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 비전이신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사막은 낙원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과부가 그 모범입니다.
'사랑을 통한 비전의 현실화'입니다. 그대로 '비전-사랑-현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아무리 많은 소유를 지니고 오래 살아도 이런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통해 비전을 현실화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들이며 인생 헛 산 것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인지요.
육신의 외적 성장은 멈춰 노화되어 갈지라도 주님과 내적 사랑의 관계는 날로 깊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가 바로 마음 가난한, 마음 깨끗한 부자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세상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도대체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아,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내면의 보물, 주님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저절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하여 이미 지상에서 묵시록의 천상 비전을 사는 가난한 과부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고 이르셨다.'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주님은 가난한 과부가 진정 부자임을 인정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봉헌을 상징합니다.
이런 이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1독서 요한 묵시록의 구원 받은 이들입니다. 내 존재 전체를 봉헌하는 이가 진정 가난한 부자입니다.
마음 가난한 겸손하고 순수한 이들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비전이자 꿈인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 때 비전의 현실화요, 겸손과 순수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비전을 잃으면 열정과 겸손, 순수도 잃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천상 영혼들과 새노래를 부르며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참 비전인 당신을 선사하십니다. 다음 말씀은 가난한 과부는 물론 주님을 비전으로 지니고 인생 사막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누가 주님의 집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시편 24,3-4ㄱㄴ)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10)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어떤 남자가 이웃에 있는 부인을 보고는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반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뿐 아니라 세련된 옷차림, 그리고 교양이 넘치는 말투에 이 남자가 홀딱 반하게 되었지요. 이런 상태에서 자기 아내를 바라보니 너무나 형편없이 보입니다. 후질구레한 옷만 입고, 아무 말이나 툭툭 던지고 있으며, 여자이면서도 자신의 외모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 등을 보면서 점점 보기가 싫어졌습니다. 아니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무슨 행동을 해도 다 보기가 싫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내를 불러서 “난 도저히 당신과는 함께 살 수 없을 것 같아. 우리 헤어지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에 크게 슬퍼하는 아내는 “알았다”라고 말한 뒤에 친정으로 가기 위해 머리를 빗고 화장을 곱게 한 후 외출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렇게 단장한 아내를 본 순간, 남편은 그제야 이웃집의 아내보다 자기 아내가 훨씬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집안 살림을 위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포기했던 아내의 헌신을 그제야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이 잘못했다면서 그래서 제발 가지 말라고 하며 싹싹 빌었지요. 자기 눈이 잠시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반드시 남보다 나을 수는 없습니다. 즉, 남이 더 좋은 것을 그리고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남이 나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나 역시 남보다 나은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모든 점에서 남보다 더 많고 좋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면서 불평불만을 던지는 마음 역시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마음, 또한 남을 향한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빈곤한 모습을 한 과부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었지요. 부자들이 봉헌한 금액에 비교할 때 형편없이 적은 금액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마음을 보십니다. 비록 봉헌금은 부자가 더 많이 했겠지만, 풍족한 데에서 아주 일부를 봉헌한 부자의 마음보다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 전체를 다 봉헌한 과부의 마음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집에 여유가 없어서 누군가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핑계입니다. 물질적인 여유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말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빈곤한, 가난한'이라는 말은 '무일푼, 재산이 하나도 없는'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야기 속의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를 전부 다 봉헌했다는 말은 사실상 전 재산을 바쳤다는 뜻입니다. 부자들은 아무리 거액의 돈을 바쳤더라도 여전히 부자로 남아 있지만, 그 과부는 동전 두 닢을 바쳤더라도 전 재산을 바친 것이기 때문에 봉헌한 다음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만일에 이 이야기 속의 과부가 가난하지 않고 '부유한 과부'였다면, 그래도 그 과부는 전 재산을 다 봉헌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의 마음을 보시고 칭찬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는데도' 다 바쳤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 과부가 부유했든지 가난했든지 간에 다 바쳤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이 복음 말씀은 그 과부를 본받으라는 가르침인데, 그러면 우리도 그 과부처럼 전 재산을 봉헌해야 한다는 뜻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바치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뱅이가 되라는 뜻인가? 모든 신앙인이 그 과부처럼 전 재산을 다 바치는 일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일인가? 사람들의 실제 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이 아닌가? 우리는 이것이 막연한 이상론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교회의 역사에서 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사도 4,32.34-35) 초기 교회의 신앙인들은 소유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교회에 봉헌함으로써 모두가 다 재산이 하나도 없는 가난뱅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가난해짐으로써 모두가 부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역사에서 이미 했었던 일인데 또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따를 때 실제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루카 5,11).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같습니다. 자기의 소유물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루카 18,22)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씀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사랑'이신 하느님께 가진 것을 다 바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친 것을 하느님께서 가져가시는 것은 아닙니다. 초기 교회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일은 실제로는 이웃과 나누는 일이 됩니다. (교회에 헌금을 바치는 일은 신자들은 가난해지고 교회만 부자가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함께 부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게 실감이 잘 안 나긴 하지만, 그래도 진짜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 그 보상으로 '하늘의 보물'을 받겠지만, 그 전에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 자체도 '하늘의 보물'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1요한 4,8) 사랑은 곧 하느님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 하늘나라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일 자체가 하늘의 보물입니다.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소유욕, 집착, 이기심 등은 부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부자들은 잃지 않으려고 집착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가지려고 집착할 때가 많습니다. 가진 것이 동전 두 닢뿐인 과부가 그것을 모두 바친 것은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린 모습입니다. (따라서 그 과부가 '부유한 과부'였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뀌지 않고, 복음 말씀의 제목을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어떤 과부의 헌금'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신앙인이 성직자나 수도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재산을 버릴 수가 없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러나 집착을 버리는 일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승에서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편의상, 그리고 일시적으로(임시로) 가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것들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영광이 아니라 멸시를> 박보영 목사의 강의 중 그가 얼마나 솔직한 사람이었는지가 나오는 대목이 있어 소개합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데리고 사는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상물들이 인터넷을 통해 들어올 것을 두려워해 인터넷에 방어 프로그램을 설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혼자 어떤 것들이 인터넷에 있기에 그런지 살펴보려는 마음으로 잠시 인터넷을 뒤지다가 야한 영화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으로 빨리 돌리며 단 몇 분을 보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죄책감으로 다가오더랍니다. 그만 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이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몇 분을 더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하느님께 부끄러운 죄로 여겨져 다음날 부끄러워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신도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신도들을 등지고 뒤돌아서서 울면서 어제 있었던 일들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성경에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라고 나와 있습니다. 솔직해지고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창피를 당하고 멸시를 받는 일은 성경말씀을 따르는 큰 덕입니다. 신도들은 그날 예배가 가장 은총이 충만했고 많은 것을 배우고 갔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 이미 자신들의 죄에 떨어진 비참한 처지를 인정하기 싫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이기 싫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거짓이 자신 안으로 들어와서 죄인인 자신들을 의인처럼 보이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이렇듯 솔직히 자신의 죄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교만이라는 죄에 억눌려 있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진실하지 않고, 진실하다면 죄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은 거짓이 없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받았던 이가 바로 나타나엘입니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았다고 하시며, 동시에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시고, 또한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느님나라 백성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는 이들이 아니라 참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밝힐 줄 아는 겸손하고 솔직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늘나라에서 구원된 이들 중 특별히 선택된 십사만 사천 명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어린양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며 그들 외에는 누구도 배울 수 없는 새 노래를 부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다 같은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뽑힌 이들은 더 특별한 행복과 특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사만 사천 명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겸손하고 순결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숨기는 것이 없이 진실할 수 있는 사람이 흠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 긴장하게 되는 이유는 자신의 이미지가 나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세속적인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들어 높임을 받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러운 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께만 인정받으면 되는데 어떻게 해서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들에게도 잘 보이려고 갖은 수단방법을 동원해 몸을 지나치게 치장하는 여인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니 하느님께는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청하라고 했을 때, ‘멸시와 고통’을 청했습니다. 고통을 받아봐야만 다른 이의 고통도 느낄 수 있고 또한 나를 속량하기 위해 당하셨던 그리스도의 고통도 깊이 깨달아 그분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싶다는 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야만 교만해지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에만 잘 들도록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사람들 앞에서 들어 높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 받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전 존재와 인격의 봉헌>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하느님에 대한 태도가 재물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성전의 ‘여인들의 뜰’에는 남녀가 다 드나들 수 있었는데, 이 여인들의 뜰 입구에 나팔 모양의 열세 개의 헌금함이 있었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은 헌금 액수나 쓰일 목적에 따라 각기 해당되는 헌금함에 예물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부자와 권력가들은 자기가 쓰고 남은 것을 헤아려 바쳤고, 바리사이나 율법교사들도 위선적으로, 또는 의무감에서 헌금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셨다(21,2). 이를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선 이 과부는 넉넉하고 삶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헌금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경제적으로 가난하였고, 사회적으로는 여자인데다 과부라는 처지 때문에 소외당한 채 살아가야 했다. 나아가 정치적으로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자기를 돌볼 힘도 의지할 데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내놓는 태도는 참으로 놀랍다. 우리는 보통 내가 살만하고 마음이 편해야 봉사하고 기부나 사랑 실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그분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신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아프면 아픈 상태에서 사랑이신 당신께 오길 원하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릴 수 있으며, 눈에 보이는 선물을 준비한다 한들 그것이 주님께 필요할까? 아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어떤 상태에 있든 당신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지닌 ‘나’를 원하시는 것이다. 참으로 보잘것없고 가진 것 없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남은 전 재산은 ‘렙톤 두 닢’뿐이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의 최소 단위의 쇠돈으로 하루 일한 품삯에 해당하는 그리스 은전의 128분의 1에 해당된다. 그녀가 지닌 것은 하루를 살기 위한 최저 생계비는 커녕 한 끼를 떼우기에도 부족한 김밥 반의 반 토막 정도 밖에는 살 수 없는 극히 적은 돈뿐이었다. 그런데 그 과부는 그것 전부를 성전 헌금함에 예물로 넣었다. 이 과부는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위해 쓸 것 다 쓰고 선심 쓰듯 극히 적은 일부를 바친 것과는 달리 최소한의 먹을 것조차 포기하며 자신의 전부를 바친 것이다. 여기서 렙톤 두 닢을 ‘영혼과 육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아무튼 그녀는 액수는 적었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친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의 전 존재이다. 전 존재를 바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는 축성된 삶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성별(聖別)되어 하느님께 속하게 되었고 그래서 거룩한 존재들이다.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해주신 그 자비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전 존재를 바친다는 것은 소유물 전부를 바친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 이유이신 그분을 위해 시간과 능력, 지혜와 일과 재물, 영혼과 육신 등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되돌려드리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리적인 구분이나 산술적인 계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봉헌을 하고 돌아설 때는 완전한 빈손, 빈 마음이었고 그 빈자리에 성령께서 계시고, 온갖 부의 원천이요 우리 삶의 전부이신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적인 봉헌은 가난의 자세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태도이다. 이 기본이 안 된 채 온갖 재물과 원의와 탐욕과 집착을 지니고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과부처럼 전 존재를 봉헌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향’이다. 재물도 권력도, 재능도 시간도, 나의 생각과 행위도 모두 그분의 뜻에 따라 하고 그분을 위하여 하며 그분께 되돌리겠다는 그 지향 말이다. 오늘도 주님께 대한 사랑 하나로 전 존재를 바친 과부와 더불어 나도 주님 마음에 드는 향기로운 내 삶의 봉헌을 하도록 하자!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여!” (성 프란치스코)
-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받았기에 줄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더욱 모두를 내놓는 것은 자신을 내놓는 것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는 것은 바로 그 과부가 가진 것을 전부 바쳤기 때문입니다(루카 21,4). 얼마나 많은 액수를 바쳤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바쳤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동전 두 닢을 넣었는데 그것이 자기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러니 그는 자기 자신을 모두 바친 것입니다. 그는 많은 것에서 일부를 바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바친 것입니다.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부분은 전체의 일부인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해도 소유물이 그것을 소유한 사람보다는 클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진 것이 없어서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 12,1)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매순간 물었습니다. “주님! 저를 어디에다 쓰시렵니까? 말씀하십시오. 어디에? 어떻게? 그리고 언제 쓰시렵니까?”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애착 때문에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주위를 한 번 살펴보십시오.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면 적게 가질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채워주시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비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께 드림으로써 그분이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고 권고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돈에 애착을 느끼는 사제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무엇이며 제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 같은 예물을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것은 당신에게서 오기에, 저희가 당신 손에서 받아 당신께 바쳤을 따름입니다.” (1역대 29,14) 하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 했는데 무엇인가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총입니다. 바치면 바칠수록 바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똥을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노력, 수고와 땀이 들어갔다 할지라도 이미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활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한 번 내어 놓아 보세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위령 성월의 끄트머리인 까닭인지 죽음에 대한 묵상의 기회를 자주 가집니다. 이 죽음에 대한 묵상은 오히려 삶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합니다. 죽음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삶이 더욱 절실해지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손톤 와일더의 희곡 『우리 읍내』는 죽음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삶의 소중함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젊은 주부 에밀리가 일찍 죽어, 막 죽은 이들의 세계인 마을의 무덤가로 오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단 한 번이라도 산 이들의 세계로 돌아가 보기를 염원했던 그녀는
마침내 행복했던 열두 살 때의 어느 하루로 되돌아가는 기회를 갖습니다. 그 시절의 행복을 되찾으려던 그녀는 다시 찾은 이승에서 사람들이 소중한 하루하루를 얼마나 맹목적이고 이기적으로 보내며 허무하게 사는지를 깨닫고 비통 속에 말합니다. “몰랐어요,
모든 게 그렇게 지나가는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데려다 주세요, 산마루 제 무덤으로요. 아, 잠깐만요. 한 번만 더 보고요. 안녕, 이승이여. 안녕, 우리 읍내도 잘 있어.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째깍거리는 시계도 해바라기도 잘 있어. 맛있는 음식과 커피도, 새 옷과 따뜻한 목욕탕도, 잠자고 깨는 것도. 아, 너무나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이승이여, 안녕.” 그러면서 그녀는 이렇게 묻습니다. “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인간이 있을까요, 매순간?” 사색의 이 계절에 용기를 내어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현재의 삶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은 지금 여기서 더욱 생생하게 살게 하는 길을 보여 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눈으로 죽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죽음으로 단절되는 유한한 삶에서 슬픔과 허무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삶의 빛나는 조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아 있는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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