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대한제국"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이 라오둥반도 뤼순항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 태평양함대를기습했다. 2월 9일에는 인천 앞바다에 있던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했다. 러일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한반도에 진주한 일본은 일사천리로 대한 제국을 장악해 나갔다.
보름 뒤 일본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위협해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다. 대한제국이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는 의정서였다. 이로서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전략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됐다. 한마디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군사기지가 된것이다. 사실상 이때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3월에는 한국주차군 (韓國駐箚軍)을 편성해 상주시켰다. 창설 당시의 병력은 총 4273명 이었지만 같은 해 8월 2개 사단 규모로 증강됐다. 이때부터 일본은 한국주차군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을 조직적으로 침탈했다. 일본은 7월 20일 '군사경찰 훈령'을 만들어 대한제국의 치안권을 빼앗았다. 일본군이 대한제국의 치안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다음 순서는 경제권과 외교권의 침탈이었다.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이 협약의 공식 명칭은 '외국인 용빙 (傭聘) 협정'이었다.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정책을 쇄신하기 위해 전문가인 외국인 고문을 초빙해야 한다고 강요한 것이다. 물론 그 외국인은 사실상 일본인이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으로 용빙하고,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2)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용빙하고, 외교에 관한 업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 시행해야 한다.
(3) 대한제국 정부는 외국과의 조약체결과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을 미리 일본 정부와 협의해야 한다.
이에 따라 10월에 메가타 다네타로가 대한제국의 재정 고문에 취임했다. 메가타는 부임하자마자 화폐 정리사업을 추진했다. 그동안 대한제국에서 유통됐던 백도화를 금지하고 일본 다이이치은행 (第一銀行)에서 발행하는 화폐를 사용하게 했다. 대한제국의 경제를 장악하기 위해서다.
12월에는 친일 인사인 미국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가 외교 고문에 임명됐다. 이로서대한제국의 재정. 외교. 군사. 치안, 문교, 정책을 일본인들이 농단하게 됐다.
1905년 4울에는 대한제국군 감축을 강행했다. 당시 중앙군은 시위대와 친위대가 각각 5000여 명과 4000여 명이었으며, 지방군인 진위대는 1만8000여 명이었다. 여기에 황제를 호위하는 호위대 730여 명과 헌병대 등까지 포함해 대한제국군은 총 2만8000여 명이었다.
일본은 4000여 명의 친위대와 730여 명의 호위대를 폐지했다. 또한 5000여 명이었던 시위대와 1만8000여 명이었던 진위대도 대폭 감축했다. 당시 러시아 장교가 본국에 보고한 대한제국군 병력은 시위대 2512명, 기병 139명, 포병 168명, 공병 208명, 헌병대 380명, 진위대 4438명, 총 7845명에 불과했다. 실제로도 대한제국군의 병력은 8000명 정도로 축소됐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9월에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아예 보호국으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갓다.
10월 27일 일본 가쓰라 내각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안을 통과시켰다. 그 내용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가지며,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정계의 최고 실력자인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5일 고종황제에게 일본 정부가 결정한 협약안을 내밀었다. 고종은 내각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며 일본정부의 협약안을 거부했다. 황제가 신하들에게 결정의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다음 날 이토는 자신의 숙소인 손탁호텔로 내각 대신들을 불러들여 협약안을 설명했다. 밤늦게까지 논란이 이어졌지만 결론없이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저항은 단 하루에 불과했다.
11월 17일 오후 8시 이토가 경운궁으로 대신들을 다시 소집했다. 내각의 수반인 참정대신 한규설은 극렬하게 반대하다 작은 방에 연금됐다. 이토의 압박에 견디지 못한 대신들은 차츰 동요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찬성의 뜻을 밝힌 인물은 학부대신 이완용이었다. 내부대신 이지용과 군부대신 이근택도 이완용에게 동조했다. 자정을 넘겨 11월 18일 새벽이 되자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과 외부대신 박제순도 찬성의 뜻을 밝혔다. '을사오적'으로 기록되는 매국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11월 18일 새벽 1~2시에 조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18일 새벽에 체결됐지만 조약은 17일에 체결된 것으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대신들이 조약을 체결했으나 고종은 끝까지 반대 했다. 조약을 승인하지도 않았으며 비준도 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비준 절차와 황제의 전권 대행이 없는 이 조약은 국제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무효였다. 조약 날인에 고종황제의 국새가 찍히지 않았고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만 찍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효인 것이다.
을사조약 (乙巳條約)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의 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 (韓日協商條約)이다. 1904년 8월 22일에 체결한 제1차 한일협약과 구별해 제2차 한일협약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말이 조약이지 일본이 강제로 밀어붙인 늑약이었다.
이로서, 대한제국은 일본 정부를 거치지 않고는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수 없는 껍대기 뿐인 나라가 되고 말았다.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었지만,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슬픔을 견디지 못한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1월 30일의 일이다.
1905년 12월 21일 일본은 초대 총감에 이토 히로부미 (伊藤 博文)를 임명했다. 이듬해 1월 17일 보호조약에의해 대한제국 외부(外部)가 폐치됐다. 이에 따라 구미 각국의 외교사절은 모두 본국으로 철수했다. 1906년 2월 1일에는 광화문 앞에 통감부가 설치됐다. 3월 2일에는 이토가 한성에 부임했고 그달 28일 개청식을 거행했다. 일본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한제국을 장악한 것이다.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