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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Türkiye)의 역사와 고고학(考古學)의 명소
터키 카파도키아 지방 / 카파도키아 풍광 / 니케(Nike) 신상(Efes-에베소)
1. 튀르키예(Türkiye) 약사(略史)
튀르키예는 우리가 지금까지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으로 불렀는데 일명 토이기(土耳其), 튀르키예(Türkiye)라고도 불렀다. 위치는 아시아의 서쪽 끝으로 유럽에도 국토의 일부(이스탄불)가 속해 있는 나라이며 수도는 앙카라(Ankara)이다. 면적은 78만㎢, 인구가 8,500만으로 제법 큰 나라인데 면적(面積)으로 보면 우리나라(남한)의 8배, 인구(人口)는 1.5배 정도의 나라라고 보면 되겠다.
국호는 작년(2021년)까지는 ‘터키(Turkey)’로 통용되었으나 2022년 ‘튀르크인의 땅’을 의미하는 ‘튀르키예(Türkiye)’로 변경했다고 한다.
튀르키예(Türkiye)는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서쪽으로 보스포루스(Bosporus) 해협을 건너면 유럽대륙인데 유럽 땅에 터키의 대도시인 이스탄불(Istanbul)이 있다.
이스탄불은 BC 8세기, 그리스(Greece)인들이 비잔티움(Byzantium)제국을 세우고 수도로 정하였던 곳이며 AD 4세기에는 로마(Rome)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1세가 동로마제국의 수도(首都)로 삼았다.
이스탄불(Istanbul)은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불렀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이며 인구가 1,500만이 넘는 대도시이다.
이곳은 다시 AD 15세기, 투르크(Turk)인들이 세운 오스만(Osman)제국의 수도가 되었다가 1923년에 터키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를 앙카라(Ankara)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Istanbul)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스탄불의 위치를 보면 흑해(黑海:Black Sea) 입구 삼각형 모양의 반도(半島) 요충지에 있으며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동양과 서양을 잇는 통로로 옛 실크로드(Silk Road)의 종착지이기도 하였다.
이곳 튀르키예 지방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유한 지역인데 페르시아(Persia), 아랍(Arab), 비잔틴(Byzantine), 오스만(Osman) 및 서유럽 문명 등 다양한 문화가 꽃피웠던 곳이기 때문이다.
터키의 중심부는 광활한 아나톨리아(Anatolia) 고원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의 역사를 잠시 되짚어 살펴본다.
이 지역은 BC 7,000년 이전에 정착민들이 자리 잡았던 곳으로, BC 1,900년경에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히타이트(Hittite)인들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이집트의 파라오(Pharaoh-람세스 2세)들과 전쟁(Qadesh전쟁 등)이 많았다.
이후, 페르시아(Persia) 제국이 BC 6세기에 이 지역을 차지하여 찬란한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그러다 BC 1세기경에 로마령이 되는데 로마황제인 콘스탄티누스(Constantius) 대제(大帝)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으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13~14세기 들어서는 다시 오스만족(Osnan)이 세력을 휘어잡고....
1,2차 세계대전의 시련을 겪은 후 1952년에는 NATO에 가입하고 1950년 6·25전쟁에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한국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우리나라의 혈맹(血盟)이다.
튀르키예(Türkiye)를 근대화를 이끈 선구자는 튀르키예(Türkiye)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로 일명 케말 파샤(Kemal Pasha),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 이라고도 부르는데 아타튀르크(Atatürk)의 의미는 ‘투르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2. 괴레메(Göreme) 국립공원과 카파도키아(Cappadocia) 튀르키예(Türkiye)는 전국토의 1/4이 삼림(森林)지대이고 아직 거의 개발되지 않고 있는데 이 일부가 카파도키아(Cappadocia)이다. 괴레메(Göreme)는 카파도키아 지역을 관광하는 관문(關門) 도시로 튀르키예의 수도인 앙카라(Ankara)에서 보면 남동쪽이다. 카파도키아는 암굴(暗窟)도시로 알려졌는데 흡사 깔때기를 엎어 놓은 듯 수백만 개의 기암괴석들이 갖가지 형태로 계곡을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고 아직 공개되지 않은 30여 개의 지하도시가 있으며, 땅 위는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기기묘묘한데 사람들로부터 ‘요정의 굴뚝’이라 불린다. 이곳은 화산폭발(火山爆發)에 의한 화산재와 용암(鎔巖) 등이 오랜 세월을 거쳐 바람, 비, 눈, 강물, 호숫물 등에 의해 침식되고, 지진도 겪으면서 기암들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기암들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도시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미로처럼 얽힌 이곳이 로마 시대 후기에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 교인들이 숨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발견된 지하 교회만도 천 개 정도로 추정되니 최대 200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살았던 지하도시라고 추정된다니 그들의 신앙심에 대한 경이와 존경으로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이곳은 워낙 넓고 기암괴석이 얽혀있는 구릉지대(丘陵地帶)다 보니 어떤 이들은 마치 ‘화성에 온 것 같다’고 표현되었다고 한다. 튀르키예(Türkiye) 정부에서는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열기구(Balloon)를 띄워 관광을 하는 방안을 고안해 냈는데 관광객들로부터 열광을 받는 정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으로 이곳을 선택하기도 한다는데 이 지역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이다. 3. 핫투사(Hattusa) 유적 핫투사(Hattusa)는 세계 최초로 철기문명(鐵器文明)을 이룩한 것으로 알려진 히타이트(Hittite) 제국 초기의 수도(首都)였던 유적지인데 당시 히타이트는 어머 어마한 면적의 강대국이었고 이곳에는 지금도 점토판 문서 등을 비롯하여 당시 히타이트족의 유적(遺蹟)과 문명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의 파라오(Pharaoh-황제) 람세스 2세(Ramesses II)와 히타이트의 왕 무와탈리 2세(mNIR.GÁL II)의 군대가 맞서게 된 것은 두 나라의 국경지대인 카데시(Qadesh)였는데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꼽을만한 대규모 전투였다고 한다. 히타이트(Hittite)군은 대략 보병(步兵) 4만 명과 전차(戰車) 3,700여 대, 용병(傭兵) 1만 1천여 명이었고 이집트군은 보병(步兵) 1만 6천 명과 전차(戰車) 2천여 대, 용병(傭兵) 4천 명으로 이루어졌다고 추측한다니 히타이트군이 2배 이상 전력이 많았던 전투였다. 전쟁의 결과는 서로 군사를 퇴각시키고 전투를 마쳤는데 이집트령이던 우피(Upa-현 시리아의 수도 Damascus<다마스쿠스>) 지역을 히타이트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 후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의 카데시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을 들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는 항의(抗議) 서한을 보냈는데 이 서한이 현재 이집트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4. 콤마게네(Commagene) 왕국 유적 튀르키예(Türkiye) 동남쪽에 우뚝 솟은 해발 2,000m가 넘는 넴루트(Nemrut) 산 정상에는 콤마게네 왕국(Komagene, BC 163~AD 72)의 유적이 있다. 이곳에는 기원전에 번성했던 소국 콤마게네(Commagene)의 왕인 안티오쿠스(Antiochus) 1세의 거대한 영묘(靈廟)와 그 무덤 앞에는 5개의 거대한 신상(神像)이 있는데 헬레니즘(Hellenism) 시대의 뛰어난 건축물로 손꼽힌다. 헬레니즘은 그리스(Greece)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Orient) 문화가 융합(融合)하여 이루어진 세계주의적인 예술(藝術), 사상(思想), 정신(精神)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이곳 터키는 중세(中世)에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겠다. |
5. 트로이(Troy) 유적
트로이(Troy)는 소아시아반도의 서쪽,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海峽)에 가까운 히사를리크(Hisarlik) 언덕에 있던 고대도시이다.
내가 어린 시절 읽었던 ‘트로이전쟁’의 줄거리(호메로스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를 요약해 보면,
신들의 제왕 제우스(Zeus)의 부인인 헤라(Hera)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Athena),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Venus)는 서로 자기가 더 예쁘다고 언쟁을 하다가 제우스에게 묻자 곤란해진 제우스는 인간 중에서 제일 미남으로 꼽히던 트로이(Troy)의 왕자 파리스(Paris)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라고 한다.
헤라(Hera)는 먼저 파리스에 접근해서 자신을 뽑으면 부귀영화와 절대 권력을 주겠다.
아테나(Athena)도 슬쩍 다가가서 나를 뽑아주면 모든 전쟁에서 승리와 명예를 주겠다.
아프로디테(Aphrodite)도 몰래 다가가서 나를 찍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주겠다.
파리스는 누구를 찍었을까요?
세 여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바꾼 다음 파리스에게 다가가서 사과를 한 개 건네주며 셋 중에서 제일 예쁜 여자에게 주라고 하자 파리스는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건네주었다.
화가 난 헤라(Hera)와 아테나(Athena)는 쌩하고 돌아서서 사라지며 ‘어디 두고 보자’... 그리하여 비극이....
너무 길고 복잡한 이야기(그리스-로마 신화)라 생략하고,
결국,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요청하여 아르고스(Argos)의 아가멤논(Agamemnon)왕의 동생 메넬라오스(Menelaos)의 아내였던, 당시 제일 아름다운 여인으로 꼽히던 헬레네(Helene)를 꾀어 트로이로 데리고 돌아오자 화가 난 아가멤논 왕은 동생의 아내를 구하기 위하여 군대를 조직하여 트로이로 쳐들어 오는데...
이때 참전한 전사들은 아킬레우스(Achileus)와 오디세우스(Odysseus)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수 없는 전투들이 등장하는데 결국 인간들의 싸움은 신들의 농간(弄奸)에 놀아난 인간의 비극이었다.
트로이(Troy) 성은 너무 견고하여 깨뜨릴 수가 없자 신탁(神卓)에 빌었더니... 신탁에 따라 나무로 말을 만들고(木馬) 그 속에 정예병을 숨기고 모두 배를 타고 해변을 떠나 멀리서 동태를 살핀다.
트로이 병사들이 신기하여 이 사실을 보고하자 모두 나와 보니 나무로 커다란 말(木馬)만 만들어 놓고 돌아간 것으로 보이자 일부는 태워버리자, 일부는 성으로 가지고 들어가자고 한다.
그런데 너무 커서 성문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성(城)의 한쪽 귀퉁이를 조금만 허물고 끌고 들어가자....
할 수 없이 신관을 불러 앞에서 제를 올리고 신탁에 귀를 기울이더니 ‘신이 불태워 버리라고 한다.’라고 말하는 순간 바다에서 엄청나게 몸통이 굵은 뱀이 나와서 신관(神官)을 칭칭 감더니 한입에 삼켜버린다.
결국, 트로이 성문 옆을 허물고 목마를 끌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큰 잔치를 벌이는 동안 멀리 바다에 동태를 살피던 배들이 다가오며 보니 성 위에 횃불을 흔드는 모습이 보여 쳐들어와서 결국 트로이 성을 함락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신들의 장난이었는데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결국 아킬레우스(Achileus)는 발뒤꿈치에 활을 맞고 죽는데 그것이 바로 아킬레스건(Achilles 腱)이고 오디세우스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엄청난 고난을 겪는 이야기가 바로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이고 이 트로이(Troy) 유적이 바로 그 이야기의 근거지이다.
파리스 왕자와 세 여신 / 트로이 목마 / 영화의 한 장면(트로이 목마) / 트로이 성곽 유적
호머(Homer)는 호메로스(Homeros)가 정식 명칭으로, 그리스의 고대 유랑시인이었다는데 생몰(生沒)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서사시(敍事詩) 형식으로 두 편의 시를 남겼다고 알려졌는데 바로 ‘일리어드(Iliad)와 오딧세이(Odyssey)’이다.
이것은 그리스·로마의 신화로 분류되는데 일리어드는 트로이전쟁 이야기를, 오딧세이는 전쟁 후 귀국하며 겪는 그리스 이타카(Ithaca)의 왕 오디세우스의 서글픈 이야기가 줄거리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내용을 확인하고자 고고학자들이 트로이 지방을 발굴했는데 수없이 많은 고고(考古) 유물유적들이 끊임없이 나와서 놀랐다고 한다.
이후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은 트로이전쟁이 사실과 부합된다고 주장했지만 여러 가지 측면으로 볼 때 역사적인 장소는 맞지만, 트로이전쟁이 사실이었다는 것은 과장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하는데 과연 누구 주장이 맞을지....
6. 파묵칼레(Pamukkale)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파묵칼레 자연온천 / 원형 경기장 / 성 필리포스(St. Philippus) 성당 유적
파묵칼레(Pamukkale)라는 말은 ‘목화(木花)의 성(城)’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파묵칼레 뒷산에는 거대하고 하얀 석회석(石灰石) 봉우리가 자리하고 있어서 목화 꽃같이 흰색으로 환상적인 풍경을 보여 준다.
이곳은 탄산칼슘이 과포화(過飽和)된 따뜻한 지하수가 단층(斷層)의 고지대에서 흘러나온 것이 이 지형의 조성원인으로 본다고 하는데 35~36도의 따뜻한 지하수가 수천 년이 넘도록 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렸고, 물에 포함되어있던 석회 성분(또는 미네랄 성분)이 지표면에 퇴적되어 부드러운 회색 석회질로 뒤덮인 것이다.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는 파묵칼레 산의 정상 중간지점쯤에 있는 사적지로 로마(Rome) 시대에 온천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고 하며 당시의 유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또 언덕 꼭대기에는 예수의 12사도 중 한 명인 성 빌립보(St. Philippus)의 순교(殉敎)성지와 기념성당 유적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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