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구입해서 읽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 에세이 ‘침묵하는 소수’ 중..일부 내용입니다. 길지만 직접 손으로 입력했음..T.T
역사를 어떻게 봐야할지..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고 있고..시오노 나나미도 스티븐 런치만 경이 쓴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읽어본 모양입니다. 에피소드에 나오는 정복왕 메메드2세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군요..'저 도시를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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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그대로와 역사 이탈
역사상 인물, 사건, 국가 등을 다루어온 탓인지 내 작품은 학문적인 연구서적이 아닌데도 ‘역사 그대로’와 ‘역사 이탈’이라는 말로 평가될 때가 많은 듯하다. 그런 경우 모리 오가이(森鷗外:일본의 소설가, 평론가, 의사로 일본 근대문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옮긴이)에서 비롯되어 인용되고 있는 이 말은 무슨 암행어사 마패처럼 꺼내 보이자마자 당장에 결판이 나는 것과 비슷하여, 그것을 본 사람들은 잘 보지도 않고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엎드리게 되니 우습다. 아니 나 또한 오랫동안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으니 웃을 자격도 없다.
어느 날, 이 고명한 말을 표제로 단 논문은 어떤 내용일까 하는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친한 편집자에게 복사본이라도 좋으니 한 부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곧 보내온 글을 받아본 나는 너무나 짧아 멍해졌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고명한 문장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나 같은 덜렁쇠에 지레짐작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여기에 그 일부분을 소개하고 싶다.
내가 최근에 쓴 역사상의 인물을 취급한 작품이 소설이니 소설이 아니니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논의가 일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규범적인 미학을 신봉하여 소설은 이래야 한다고 운운하는 학자가 적지 않은 시대이니 이런 판단은 꽤 어렵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쓰고 싶은 진실을 자유롭게 취사선택하여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다.
훨씬 뒤의 일을 앞의 일처럼 꾸민 적이 있고, 요즘 와서는 소설을 쓸 때 극적 효과를 노린 이런 수법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그 동기는 간단하다. 나는 사료를 조사한 후, 그 중에 엿보이는 ‘자연’(전해오는 이야기의 내용이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너무 잔인하다든지 황당무계한 것이라 할지라도 액면 그대로를 말함)을 존중할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자연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이 싫어졌다.
이것이 첫째 이유다. 나는 또한 현존하는 사람이 자기의 생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을 보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써도 좋다면 과거도 그렇게 써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다. 이러한 내 작품이 다른 작품과 차이점이 잇다면 좋고 나쁜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핵심은 이와 같다.
나의 친구들 가운데는 다른 이들이 정(情)을 가지고 사물을 다루나, 나는 지(智)로 다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 작품 전체에 걸친 것으로 역사 인물을 다룬 작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내 작품은 대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아니라 아폴론적이다. 나는 아직 작품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다. 내가 다소 노력한 것이 있다면 그저 관조적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다.
나는 역사의 ‘자연’을 변경하는 것을 싫어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오랏줄에 동여매이게 되었다. 나는 이 오랏줄 속에서 허우적대며 괴로워했다. 그래서 이것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모리 오가이는 소설가든 역사가든, 더욱이 현대의학처럼 극도로 세분화된 연구에 일생을 바치는 역사학자든 간에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이 중요한 과제, 즉 ‘역사 그대로’와 ‘역사로부터의 이탈’ 문제를 논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로’든 ‘이탈’이든 역사 자체, 그의 말을 빌리면 사료, 즉 사실(史實) 그대로에 대해서는 모든 사실이 진실한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후 60여 년간 일어난 파문의 그 어느 것도 이 점만은 모리 오가이와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사료의 신빙성에는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고, 단지 그대로인가 이탈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만 논하고 있다. ‘역사 그대로와 역사 이탈’이라는 광고 문구로도 만점을 받을 만한 표제를 생각해낸 모리 오가이가 수많은 파문을 제치고 위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를 알 듯하다.
나 또한 사료에서 엿보이는 ‘자연’을 존중할 마음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역사를 있는 그대로 써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연’을 존중하면 요즘 시대에 태어난 나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그때의 모습이 보인다.
볼 수 있으면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참된 맛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또 역사에 대한 이러한 마음가짐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한 수단으로 역사를 이용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나로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글을 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사실이라고 되어 있는 사료가 과연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내 머릿속에서 떠난 적은 없다. 나는 모리 오가이와는 달리, 역사적 사실이라는 속박에 몸부리치며 고심한 적은 없다.
그보다는 이 역사적 사실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 속박의 정도를 늘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했나.
이 네 가지에 대해서라면 과거든 현재든 알기 쉽다. 하지만 여기에 ‘왜’와 ‘어떻게’라는 두 가지 문제를 더했을 때, 이 두 가지에 대한 진실을 아는 작업이 과연 쉬울까? 이것은 어제 막 일어난 사건이라 해도 그리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경찰 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곤란한 작업이라 해도 ‘왜’, ‘어떻게’를 외면할 수는 없다. 확실한 진실에만 흥미를 갖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했냐만으로 만족할 것이고, 오늘날의 일이라면 텔레비전 뉴스, 역사상의 일이라면 대학 입시용 역사 참고서를 보면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이래가지고는 역사를 읽거나 쓰거나 하는 이유와 즐거움, 어느 것도 가질 수 없다.
흔히 말하는 신빙성이 있다든지 양심적인 사료로 평가되는 자료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 자료는 최소한 다음 조건은 갖추어야 할 것이다. 우선 진짜일 것, 즉 누군가가 위조한 것이 아닐 것. 둘째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했냐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을 것. 마지막으로 ‘왜’, ‘어떻게’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얼마 전에 화제에 오른 히틀러의 일기는 첫째 조건에서 실격해버렸으니 사료가 되지 못했지만 혹시 진짜였다면 어땠을까? 그런 것은 없었으니 당장 제1급 사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조건까지는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셋째 조건은 어떨까. 처칠의「제2차 세계대전」정도로 ‘부정확’하여 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안성맞춤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런 제1급 사료를 써서 제2차 세계대전사를 쓰려는 자는 이 사실이 과연 어느 정도 진실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사료를 대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제3자가 쓴 것으로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자세로 쓴 것을 중시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제3자의 사료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3자가 과연 언제나 객관적이고 정확한 기술을 했으리라고 누가 보장해줄 것인가. 직접적인 손익 관계가 없는 제3자라 해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덤불 속」(한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이 서로 다르게 증언하는 것을 묘사한 소설-옮긴이)에서 잘 그려주고 있다.
그래도 우선은 제3자의 증언이 비교적 진실에 가깝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제3자의 기술만으로는 역사를 쓸 수 없다. 역시 제3자인만큼 사건의 핵심을 지켜볼 기회가 별로 없다. 그 신빙성에는 의심이 가면서도 당사자의 증언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현장 증인의 기록은 거의 제1급 사료로 취급된다. 그것은 인간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100퍼센트 거짓말을 할수도 없다는 진실을 꿰뚫어본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역사에서는 다수결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어느 사건에 대한 사료가 열 가지가 있어서 8대2의 비율로 범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치자.
80퍼센트나 증언하고 있으니 이쪽이 진실에 가깝다고 범인이라고 정해버리면 잘못이다. 잘못을 범하고 싶지 않으면 기록을 남기고 있는 열 사람 모두의 과거나 현재 상황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개인의 적개심이나 원한, 아니면 혹시나 잘못 기록될 가능성은 없었는지 말이다. 편견이 있었는지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살인사건 조사과정에서 용의자들의 동기를 조사하는 형사와 비슷한 심경으로, 크고 작은 여러 살인 동기에 객관적인 척도가 적용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사실의 기록자에게도 ‘왜’, ‘어떻게’처럼 그들 기록의 잘잘못을 판단할 척도는 없다. 결국 사료를 조사하는 측의 양심보다는 사설탐정과 비슷한 이 작업을 재미로 삼는 수밖에 없다.
다수결 원칙을 거스른 소수파의 증언을 택한 경우 유쾌한 기분은 더욱 강해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른바 ‘정설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확실한 사료도 상당히 많은 까닭에 이러한 탐정놀이와 같은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는 비교적 적다. 시작하자마자 미로에 빠져서는 작품을 끝내기란 그야말로 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사물을 쓰는 작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신중해야 하는 역사학자들이 ‘역사 그대로’에 대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먼저 검토해보자. 사료로 택한 것은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겠다는 결의를 재상 할릴 파샤에게 처음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사료는「투르크․비잔틴의 역사」를 쓴 비잔틴 역사가 두카스가 쓴 것으로 그는 메메드 2세와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같은 시대 사람에 의해 쓰어진 기록을 제1급 사료 또는 원사료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그것에 해당하리라.
나는 이 장면을 두카스의 기술 그대로 직역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은 나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읽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사료라는 것이 이렇게 불완전한 것이란 사실을 곧 알게 되리라.
그의 서술은 이 사료를 사용하여 작품을 쓰려는 자가 손댈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다. 그런 그의 서술도 이 정도니, 다른 많은 사료에 이르러서는 탐정 빰칠 정도로 추리를 해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료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원사료를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거나 아니면 그것을 써서 역사를 써본 적이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어느 날 밤, 첫 호위 교대가 끝날 시각쯤 술탄의 전갈을 지닌 궁정 호위병 몇 명이 할릴 파샤의 저택에 찾아왔다. 호위병들은 할릴의 침실까지 들어가 술탄의 명령을 전했다. 할릴은 이제 올 것이 왔다는 두려움에 아내와 자식들을 포옹한 후, 접시에 금화를 가득 쌓아 궁전으로 향했다. 이미 내가 앞서 설명한 이유로 할릴은 그때까지도 공포에 싸여 있었던 것이다.
술탄의 침실로 들어간 할릴의 눈에 잠옷을 걸치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술탄의 모습이 들어왔다. 할릴은 땅에 이마를 깊게 박고 정중한 예를 올린 후 가져온 접시를 그의 앞에 내놓았다. 술탄이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이오, 라라.”
라라는 그리스어로는 타타, 즉 선생을 뜻한다. 할릴은 대답했다.
“술탄, 높은 직책에 있는 신하가 깊은 밤에 술탄의 부름을 받았을 때 빈손으로 뵈어서는 아니 된다는 습관이 있습니다. 저도 그에 따랐을 뿐입니다만, 가져온 것은 제것이 아니라 술탄의 것입니다.”
술탄은 대답했다.
“짐에게 라라의 금화는 필요 없소. 아니, 라라가 가진 재산보다 더 많은 금화를 지금 당장 선물할 수도 있소. 짐이 라라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저 도시를 짐에게 주시오!”
앞에서 쓴 역사학자는 기번, 바빙거, 런시먼을 가리킨다. 기번은 더 설명할 것도 없이 명저「로마 제국 쇠망사」의 저자요, 바빙거는 메메드 2세 전기의 결정판인「정복왕 메메드 2세」를 쓴 저자로 1953년 뮌헨에서 이 책을 발표했다. 또 런시먼의「콘스탄티노플 함락, 1453년」은 1965년에 런던에서 간행되었다. 역사학자와 역사가가 언제나 같은 뜻은 아니지만, 이 세 사람이라면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적 권위의 세 역사가는 조금 수정한 곳은 있지만 두카스가 남긴 기록을 충실히 인용하고 있다. 학자가 아닌 나는 이 장면을 시종 투르순의 눈을 통해 보는 형식으로 썼으나, 그래도 수정한 정도는 이 세 권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두카스의 기술이 그리 수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된 것이라는 증거이리라.
그래도 이 세 사람이 어느 정도 수정했는지 검토해보면, 우선 기번은 장면의 흐름에는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 아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쓰다가는 이런 대작을 쓰지 못했겠지만, 이 장면만은 장황하다고 여겨질 만큼 설명을 덧붙여 서술하고 있다. 반대로 바빙거는 이 전후에 사정 설명을 교묘히 마친 다음, 막상 이 장면에 와서는 두카스의 기록을 빌려 쓴다는 것은 감추고 자연스럽게 장면의 흐름을 살려주고 있다.
런시먼 또한 필요한 최소한의 설명을 덧붙인 것 외에는 두카스의 서술을 그대로 옮기고 있으나 나름대로 수정을 가하고 있다. 특히 런시먼이 수정한 것을 보면, 십자군 역사 연구의 금자탑「십자군사」의 저자답게 비잔틴 또는 유럽에 치우친 관점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도 실로 객관적이고 정확한 기술을 관철하고 있으면서도 심정적으로는 서구측에 기운 이 영국 역사가는, 당시의 서구가 그리스도의 적으로 여긴 메메드 2세의 천재성은 인정하지만 그가 야만스럽고 난폭한 젊은이라야 했던 모양이다. 런시먼의 붓에 의하면 메메드 2세는 노재상이 바친 금홧더미 접시를 세차게 뿌리치며 마지막 말도 흥분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두카스의 담담한 필치 쪽이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대담하기 그지없는 젊은이는 조용하고 정중한 쪽이 더 두렵다. 특히 속마음이야 어떻든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학자도 아닌 내가 세계적인 권위자인 이 세 사람에게 절대로 동조할 수 없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들의 저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눈치챘겠지만 세 사람 모두 ‘저 도시를 주시오’를 ‘콘스탄티노플을 주시오’로 다시 쓰고 있다.
두카스의 원문은 대문자로 폴리스를 의미하는 단어밖에 쓰지 않았다. 고대에는 라틴어 대문자로 ‘우르베’라고 쓰면 로마를 가리키는 말이요, 그리스어라도 대문자로 폴리스라고 하면 동지중해 세계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즉 콘스탄티노플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고 세 학자는 생각했을 것이다.
정확한 의역이란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그에 해당하리라.
그런데 나는 이곳만은 두카스의 기술을 꼭 살려주고 싶었다.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학자의 의무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 지키면 충분하다고 그들이 생각했다 하더라도 비난당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주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저 도시를 주시오!”라고 한 경우 그 자리에서 생기는 분위기는 달라진다. 그런 막연한 것까지도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다. 이것도 메메드 2세가 쉰 살의 중년 남자였다면 내가 이토록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당시 갓 스무 살 난 젊은이였다. 그러나 이런 것에 마음이 끌리고 집착한다는 것은, 내가 학자가 아니라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두카스의 사료로 말을 돌리면, 세계적인 권위자 세 사람 모두가 인용하고 있을 정도니 ‘역사 그대로’인지 아닌지 의심할 필요조차 없을까? 그러나 사실 이것은 대단히 신빙성이 낮은 ‘사실(史實)’이다. 두카스의 기록은 대개 신용할 만하지만, 이 장면만은 그렇지 않다.
우선 두카스는 이 이야기가 전개되던 때 술탄의 궁전이 있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 없었다. 또 그 밖에 누구 한 사람 이 에피소드를 남긴 자도 없다. 메메드 2세 옆에서 그를 모셔온 시종 투르순이 남긴 기록도 다른 것은 있어도 이 이야기는 없다. 이렇게 인상 깊은 장면을 술탄에 심취한 투르순이 쓰지 않았을 리 없다. 물론 투르순이 없는 밤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당시 현장에 있었던 그리스인이나 예니첼리 군인에게 들어서 썼다는 두카스지만 이 에피소드는 투르크 수도의 술탄이 거처하는 궁전 속 깊은 곳에서, 더구나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적국인이던 그리스인은 물론이요 술탄 친위대인 예니첼리 군단 군인까지도 접근할 수 없었던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더욱이 술탄 침소의 밤 호위는 시종과 흑인 노예가 맡았으나, 흑인 노예들은 대개 성대를 끊어 말을 못하게 해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이 세계적 권위자들이 거짓이라는 확증은 없지만 신빙성이 낮은 이 ‘사실’을 채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번은 별도로 하더라도 과학적 역사학이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20세기의 사람 바빙거와 런시먼은 왜 버리지 않았을까? 내가 상상하기로는 이들도 이 이야기만큼은 버리기 아까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역사상의 일대 사건은, 한쪽 주인공은 콘스탄티노플로 상징되는 로마 문명이요, 다른 한쪽은 그에 도전한 메메드 2세다. 이 투르크 젊은이의 성격을 알려주는 몇 가지 사료 가운데서도 이 비범한 젊은이 상을 이렇게 간략하고 훌륭하게 부조해주는 사료는 없다. 진실보다 거짓에 가깝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버리기가 아까웠던 것이리라.
두카스의 경우, 문제는 글을 남긴 이가 단 한 사람이라는 것에 유래하고 있지만, 반대로 많은 제1급 사료가 모두 같은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경우라면 어떨까. 이 경우의 예로 소개하고 싶은 것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자 체사레의 아우인 후안이 암살당하는 장면이다.
그 시각, 테베레 강 기슭에 매어둔 배에서 자고 있었다는 한 사공이 연행되어 왔다. 조르조라는 뱃사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6월 14일에서 15일에 걸친 밤, 여느 때처럼 배 위에서 자고 있는데 기묘한 소리가 들려와 잠에서 깼다. 그때 두 남자가 스카보니 병원 옆의 샛길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주의 깊게 주위를 살피며 걸어 나왔다. 조금 지나자 한 남자는 백마에 타고 있고, 두 남자는 말안장 뒤에 매단 인간 몸뚱이를 좌우에서 받치며 걸어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강기슭까지 오자 발을 멈추었다. 기사는 남자들에게 명령했다. 남자들은 움직이지 않는 그 몸뚱이를 말안장에서 내려 강물에 던졌다. 잘 처리했느냐고 묻는 기사의 목소리를 사공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남자들은 “예, 주인님”하고 대답했다. 강물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물 위에 떠올랐다. 죽은 자가 입고 있던 망토가 바람을 안고 흘러가고 있었으며, 그것을 향해 남자들은 돌을 던졌다. 기사의 명령에 따라 남자들은 흙자국을 지웠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들은 산 자모코 병원 쪽으로 사라졌다. 또다시 밤이 되었다.
사공은 신고할 마음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런 장면을 보아왔고, 또 그런 것들은 언제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이 에피소드는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보고서를 작성한 사누도와 마리피에로, 로마 교황청 내부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부르카르도, 또한 정보수집력으로는 베네치아 다음간다고 하는 페라라 공국 대사보고서 등에서 보듯이, 거의 모든 제1급 사료가 입을 모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다수결에 부칠 필요도 없이 만장일치의 ‘사실’인 셈이다. 확인조차 필요 없다고 판단한 역사가가 있다 해도 그들을 나무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두카스의 경우처럼 진실도가 낮은 정도가 아니라 진실성 빵점인 거짓이다.
이 증언을 믿고 테베레 강을 샅샅이 뒤진 결과 다음날 정오 가까운 시각에야 겨우 후안 보르자의 시체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장소는 포폴로 광장 가까운 곳의 강바닥이었다. 목격한 증인이 시체를 던졌다고 진술한 장소는 스카보니 병원 가까운 강기슭이다. 거기는 포폴로 광장 가까운 강기슭으로부터 500미터나 하류였다. 그렇다면 그날 밤만은 테베레 강이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흘렀다는 말인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니 사공이 보았다는 시체는 후안 보르자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도 보르자뿐 아니라 15세기 로마를 다룬 역사가들은 그 누구도 이 에피소드를 빼놓지 않고 있다. 그것도 두카스의 기술보다 이야기로서는 더 잘된 탓인지 그 누구도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듯 정말로 모두 똑같이 베끼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이것을 취하지 않은 이는 대작「중세 로마사」를 쓴 그레고르비우스 단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당시에도 거짓이라는 것이 분명했을 이 사료를 이렇게도 많은 역사가들이 취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카스의 경우처럼 버리기엔 아깝다는 것과 조금 다르다. 이 경우는 진실이라 한들 이상하지 않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후안의 시체도 아마 그와 같은 방법으로 던져졌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른 목격자는 없다. 혹시 있었다 해도 포폴러 광장보다 상류에서 본 목격자가 아니다. 단 한 사람의 증인인 그 사공도 그런 장면은 몇 번이나 보아왔으니 신고할 마음조차 없었다고 했다. 사건 당시의 사람들도 그것을 알면서 기록했고, 훗날의 역사가들도 알면서 취한 것이다. 스카보니 병원이 있는 일대는 투르크가 침략해 올 것을 예상하고 로마로 피란 온 달마티아 난민들의 캠프 수용소로, 당시 로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산 자코모 성당(그 당시 병원은 종교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다)은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다.
꼭 진실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경우는 진실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거짓말로 대용할 수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역사에서는 종종 그런 거짓이 더욱 진실에 다가서는 때가 많다.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어떻게, 무엇을 했나? 이것 모두를 분명히 하지 않고는 역사를 쓸 수 없다. 두카스의 예는 ‘왜’에 빛을 비추는 역할을 했고, 로마 사공의 증언은 ‘어떻게’라는 물음에 답해준다.
사료의 ‘덤불 속’을 걷는다는 것은 정말 신경 쓰이는 일이다.
진실도가 낮다고 또는 거짓이라고 그것들을 무턱대고 버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모든 가지와 잎을 존중하다가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힘들다. 작품은 영영 끝내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나 신경이 쓰이는 작업이니 사료에 대해 ‘역사 그대로’와 ‘역사 이탈’이라고 일축해버릴 일은 아니다. ‘그대로’니 ‘이탈’이니 말하기 전에 그 누구든 이 기회에 한 번쯤 모리 오가이가 의미한 ‘역사’, 즉 사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처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갈 것인지 분명히 해보면 어떨까? ‘역사’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역사 그대로’나 ‘역사 이탈’을 구분할 수는 없다고 본다. ‘역사’에 대해 확실한 주관이 섰다면 ‘역사 그대로’나 ‘역사 이탈’은 저절로 분명해질 것이다.
모리 오가이는 사료에 나타난 옛 사람들의 기록에서 흔히 보이는 간결하고도 품위 있는 윤택한 글에 감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될 수 있으면 손상하지 않고 그대로 살려주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러한 생각은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종종 완전히 베끼는 형태에 가까울 정도로 사료를 참고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을 국부적인 것에 한정한 모리 오가이는 이 방법만으로 관철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나, 대상이 커지면 사료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진실도 천차만별이 된다. 소설을 쓰겠다는 의도가 있고 없고 간에 취사선택은 반드시 필요하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상상력과 추리력의 도움 없이는 연결되지 않을 정도다.
모리 오가이는 역사 이야기나 역사소설같이 역사를 다루는 어떤 글이라도 그런 방식으로 집필할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모리 오가이가 한 말은 60년이 지나도록 잘 되새겨보지도 않고, 암행어사 마패처럼 꺼내 들고는 ‘한 건 낙착’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후세의 우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