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모 1919년 경북 상주 출생. 휘문고보를 나온 뒤 금융조합 서기로 3년간 일하며 학자금을 마련해 1944년 세브란스 의대에 진학했다. 이어 미국 미시간대학 보건대학원과 연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세대 의대 교수와 학장, 연세대 의료원 원장을 역임했다. 60년 인구보건복지협회를 설립하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상징되는 60~70년대 가족계획운동을 지휘했다. 보건소 설립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장제도 도입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국민건강 증진과 의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가족보건복지협회가 주는 오천혜상(1999년)과 서재필기념회가 주는 ‘서재필 의학상’(2010년)을 각각 받았다. 현재 연세대 의대 명예교수와 성심의료재단 이사로 재직 중이다. |
“인물됨이 작은 의사(小醫)는 치병(治病:병만 고침)하고, 인물됨이 중간인 의사(中醫)는 치인(治人:사람을 고침)하며, 인물됨이 큰 의사(大醫)는 치국(治國:나라를 고침)한다는 것이다. 나는 대의의 길을 가고 싶었다. 사람을 치유하는 의료 분야는 나라의 복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고교 졸업 직후 전라남도에 위치한 ‘소라금융조합’에 근무했다. 의사의 길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곳인데.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대학에 꼭 가고 싶었다. 그러나 두 가지 할 일이 있었다. 고교 졸업 당시 키가 1m45㎝밖에 안 돼 학교 수위가 나를 ‘참새’라고 놀릴 정도였다. 키도 키우고, 건강을 회복해야 했다. 또 하나는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었다. 워낙 집이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융조합에 취직한 것이다.”
-참새란 별명은 극복했나.
“금융조합에 오자마자 매년 10㎝씩 키가 컸다. 3년 뒤엔 1m76㎝가 됐다. 조합이 있던 곳이 전남 여수시 소라면이었다. 그곳에서 많이 먹었던 꼬막이나 조갯국에 성장 호르몬이 들어 있어 키가 컸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키가 커지자 사위 삼겠다는 지방 유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웃음).”
-금융조합에서 나온 뒤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는데.
“내가 1944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을 때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정원은 100명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154명을 뽑았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일제의 징용·징병에 끌려가지 않도록 학교 측이 정원을 대폭 늘린 거다. 일제의 전쟁터에서 총알받이가 되지 않으려면 이공계 대학생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원을 늘린 조치로 인해 당시 연희전문학교 이영준 교장은 총독부에 시말서를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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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교는 서울역 앞에 있었다. 그곳엔 일제의 옥고에 시달려 빈사 직전에 있던 애국 지사들과 징용에 끌려가 혹사당한 끝에 돌아온 동포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몰골이 참으로 비참했다. 학생회 간부들과 의논한 끝에 그들을 강의실에 재우고 이가 우글대는 옷을 벗겨 소독해 주며 구호활동을 시작했다.”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 움직임에 맞서 반탁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렀다.
“나는 신탁통치도, 공산화도 다 반대했다. 35년간 일제의 억압에 시달린 나라를 또다시 다른 나라의 손에 맡기는 걸 찬성할 수 없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연합학생운동 본부를 세브란스에 설치했다. 보성전문학교에서는 신민당 대표를 지낸 이철승 전 의원, 경성제국대학(뒷날 서울대) 문리대에선 5공 시절 국회의장을 지낸 채문식씨 등이 참여했다. 이 일로 인해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2개월간 갇혀 있다 풀려났다.”
-세브란스에서 학생회장을 지냈는데.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나이가 급우들보다 서너 살 많은 점, 일본 글자만 알던 급우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준 점, 반탁운동을 하다 유치장에 다녀온 점이 고려됐던 것 아닌가 싶다.”
-졸업 후 의원을 개업하지 않고 학교에 남았다.
“어려운 집안에 태어나 어렵게 학교를 다녔다. 주변에선 ‘의대를 졸업하면 빨리 돈을 벌어 형님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나는 형님과 가족들보다는 온 나라의 가난한 농민들을 돕고 싶었다. 내 양심상 개업의가 되는 걸 허락하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농민들을 돕겠다는 뜻을 어떻게 품게 됐나.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 전남의 금융조합에서 일하며 가난에 몸부림치는 농민들을 목격했다. 개업해서 의사가 된들 환자를 몇 명이나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 의료보장제도를 도입해 모든 국민이 혜택을 받게 해주는 게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개업의가 되는 걸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건 무슨 뜻인가.
“의대 졸업을 앞둔 4학년 때 무의촌 진료를 나갔는데 불임을 호소하는 두 여인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런 나 자신을 돌아보니 개업의가 돼 환자를 돌본다는 건 어불성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졸업 후 학교의 위생학교실에 남아 유행성 뇌염 역학조사를 하며 학문에 몰두했다.”
-6·25전쟁 때 유엔 민사처(UNCAC)에서 근무했다. 이 경험이 인생을 바꿨다고 했는데.
“6·25전쟁 때 충북도청에 유엔 원조기관이 세워졌다. 위생학을 전공한 미국인 의사와 함께 일했다. 거기서 전쟁으로 인한 기근 속에 전염병까지 도는 참상을 목격했다. 괴산의 산골마을 주민 전원이 발진티푸스에 감염됐던 거다. 지프를 타고 현장에 갔다. 환자의 집 방문을 여니 클로로칼키(고체염소:우물 등을 소독할 때 쓴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의료지식이 없는 면사무소 직원들이 환자 몸에 클로로칼키를 마구 뿌린 거다. 증상이 악화돼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며 지방마다 의료지식을 갖춘 위생요원과 보건소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개업 대신 보건소 설립에 나선 건가.
“그렇다. 그 얼마 뒤에 미국 미시간대 보건대학원에 유학을 갔다. 3개월간 미국 전역의 보건기관들을 돌아보면서 의사들이 질병관리와 공중보건에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55년 귀국해 세브란스로 돌아온 나는 1년 뒤 경기도 고양에 국내 최초로 대학 부속 보건소를 열고 의대 4년생들을 2주간 파견해 실습을 시켰다. 이어 72년 서울시와 공동으로 서울 연희동에 도시형 보건소를 세웠다. 이를 기점으로 전국에 보건소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란 가족계획 운동도 벌였다.
“59년 세계보건기구(WHO)의 특별연구원 자격으로 3개월간 유럽의 의료보장제도를 시찰할 기회가 주어졌다.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려면 임금 생활자가 전 국민의 50%는 돼야 한다는 걸 그때 경험으로 알게 됐다. 우리가 임금 생활자를 늘리고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아이를 덜 낳는 가족계획이 우선돼야 했다. 그래서 영국 런던에 있던 국제가족계획연맹을 시찰하고 방명록에 주소를 남겼다. 그러자 얼마 뒤 국제가족계획연맹에서 ‘1년에 3000달러씩 지원할 테니 한국에 가족계획협회를 만들어 달라’고 제의해 왔다. 61년 9월의 일이다. 이 일을 계기로 가족계획사업에 30년을 바쳤다. 영국이 대단한 나라다. 이런 시스템이 있는 나라가 선진국 아닌가 싶다.”
-가족계획사업은 어디서부터 시작했나.
“이 사업도 고양군에서 시작했다. 마을마다 어머니회를 만들어 ‘아이를 낳는 것보다 잘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새마을 지도자 부녀회도 ‘가족계획 어머니회’가 모태다. 새마을운동의 효시가 가족계획운동인 셈이다.”
-60년대 중반 김학렬 부총리가 국회에서 콘돔을 들어보이며 가족계획을 하자고 야당을 설득했다는데.
“(웃음) 당시는 나라 전체에서 가족계획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래서 야당 의원들이 가족계획 예산을 삭감하려 했다. 그러자 김 부총리가 그런 고육책까지 쓰며 야당을 설득한 끝에 예산이 통과됐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계획운동은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당시 국제사회로부터도 가족계획 관련 기금을 많이 따냈다는데.
“그렇다. 랜드로버 지프 200대를 비롯해 1억 달러, 우리 돈으로 1200억원을 유치했다. 기부자 중엔 미국의 거부 록펠러 3세도 있다. 그를 직접 만나 설득한 끝에 록펠러재단에서 지원을 받은 거다. 거절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설명하러 다녔다.”
-의료보험제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63년 의료보험법이 제정됐지만 조직과 예산 미비로 10년이 넘도록 집행되지 못했다. 결국 강화군 보건소에서 함께 일했던 김일순 교수 등과 손잡고 77년 경제기획원·보건사회부 주도로 의료보험제도의 기틀을 만들었다. 의료보험은 보수주의자인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처음 만든 거다. 공산주의 혁명을 막기 위해서였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게 복지다.”
-복지정책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그렇게 많았는데 왜 정치엔 뛰어들지 않았나.
“관직을 하긴 했다. 보건사회부 장관 비서관을 지냈고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보건 담당으로도 일했다. 나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사돈지간이다. 정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를 내가 할 일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관직에 있을 때도 늘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모와 부인에게 감사한다는 말도 자주 해왔다.
“워낙 가난했기에 집이 없었다. 그래서 처가살이를 했는데 장모가 아이들을 전부 키워줬다. 역시 의사였던 아내가 소아과를 하면서 도움을 줬기에 의료사회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장모는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고스톱을 했다. 그래서 장모와 나, 아내가 자주 함께 고스톱을 쳤다.”
-요즘 의료체제에서 고쳐야 할 점은.
“영국처럼 주치의, 즉 개인마다 전담 의사를 갖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주치의에게 1차 진료를 받은 뒤 전문의가 진료하는 병원을 찾아가게 해야 한다. 주치의가 지역 주민을 책임질 수 있어야 의료체계가 효율적으로 된다.”
-‘사랑이 중요하다’고 역설해 왔다.
“그렇다. 내가 50년대 미국 미시간대에서 공부할 때 오스트리아 출신 정신과 의사가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고아원에서 갓난아기들을 두 집단으로 나눠 한 집단은 계속 같은 보모가 돌보게 하고, 다른 집단은 3개월마다 다른 보모가 돌보게 한 거다. 1년 뒤 보모가 바뀌지 않은 아이들은 발육 상태가 좋았지만 보모가 바뀐 아이들은 발육이 지연된 것으로 나타났다. 큰 감명을 받았다. 사랑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의사라기보다는 의료복지운동을 해온 사회운동가의 인상을 준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대생이라고 다 의사만 하는 건 아니다. 다양한 길을 간다. 슈바이처는 의료가 만인에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아프리카에서 사회운동을 한 거다. 영국에서 간호사란 직업의 기틀을 세운 나이팅게일은 아군과 적군을 떠나 모든 이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줬다. 나 역시 어렵고 힘든 이들이 의료 혜택을 받도록 해주는 게 의무라는 생각에서 사회운동을 한 셈이다. 내가 개업의로 살았다면 병원 한 개를 세웠겠지만, 보건소 설립 운동을 한 결과 병원을 1500개나 개업한 셈이 됐다(웃음).”
-박근혜 대통령에게 주문하고 싶은 건 없나.
“(한참 생각하다가) 국민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여야를 떠나 다 품고 가 달라. 국민 한 명 한 명이 모두 대통령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기 바란다. 국민들에게 밥만 먹여주고 월급만 올려주는 것으론 안 된다. 마음으로 국민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다.”
-94세에도 정정한데 그동안 건강을 지켜온 비결은.
“아직 보청기도 끼지 않고 산다. 특별한 건강 비결은 없다. 밥을 적게 먹는 정도다. 그리고 아침에는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저녁에는 윷을 두 개 나란히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중심을 잡는다. 그러면 지압도 되고 운동이 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다. 아이건 어른이건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 돼야 하고, 또 동시에 사랑을 받는 사람이 돼야 한다. 나는 가족과 주변에 진 사랑의 빚을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갚으면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