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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한민족의 독립운동 1919년 3월 l일,
어언 92년의 세월이 흘렀다.
끊어진 민족의 대 동맥을 연결하려는 이 그대한 민족운동의 그날을 오늘 맞이하였다.
세월은 흘러 그때의 함성은 들을 수 없고 그 붉은 피는 퇴색되었지만 선열들의 조국을 위해 그 귀한 목숨을 홍모(鴻毛)와 같이 버리면서 선혈로 쓴 한시는 그 얼과 함께 면면이 이어져오늘 감히 세치 혀와 한 뼘 붓을 빌려서 우국지사들의 마지막 임종 시를 소개한다.
지금 중동에서 천부인권(天賦人權)을 독재자의 권력과 치부로 사용된 결과가 극에 달하여 민중의 절규는 하늘의 노여움으로 변하고 있다.
약 100년 전 우리의 모습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필자는 조용기 목사를 대인(大人) 종교인이라 생각했다
92년전 오늘 삼일절에 외세의 문물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는 기존종교인 천도교 불교와 개화와 수구 간의 갈등도 대단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자기들의 주장을 밀쳐놓고 천도교와 개신교, 불교가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함께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기독교 대표인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李昇薰), “님의 침묵”을 썼던 한용운(韓龍雲), 천도교의 손병희 등이다.
나라를 구하는 통분의 92년 전 삼일절 맞이하면서
동족이며 형제인 북한이 아귀(餓鬼)로 변하여 충혈된 눈으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이성(理性)잃고 악을 쓰는 북한의 핵폭탄 위협 앞에 명색이 개신교 원로 조용기목사의 “종교 이익”만 집착하는 소인적인 발언에 큰 실망을 하게 되고
우리는 또 다른 삼일운동의 선언서를 읽어야 할 현실에 비감함을 느낀다.
★3.1 독립운동
爲復先王國(위부선왕국)-옛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交來有義人(교래유의인)-의로운 사람들과 사귀어 왔네!
誓死貫天日(서사관천일)-죽겠노라 맹세가 하늘과 해를 뚫나니
萬刑不讓身(만형부양신)-오만가지 형벌인들 몸을 사리랴
曰維光復(왈유광부)-조국광복을 하자는 것은
天人是符(천인시부)-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聲此大罪(성차대죄)-일본의 큰 죄를 성토하여
戒我同胞(계아동포)-우리 동포를
聲戒人(성계인)-경계하노라
채기중(蔡基中)
채기중(蔡基中1873.10.7~1921)
호는 소몽(素夢)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1913년 풍기(豊基)에서 유창순(庾昌淳) 등과 비밀결사인 대한광복단을 조직여 1916년 김좌진(金佐鎭) 등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단을 만들고 군자금모집과 친일반역자,악질 관공리를 응징하였다. 군자금모집을 거부한 칠곡(漆谷)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사살하고 목포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사형 당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 !!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름 그대로 1910년 경술년에 이러난 국치(國恥) 나라의 수치라는 의미이다.
경술국치는 한일합방조약을 이르는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35년간이라는 세월을 일본의 짓눌림에 시달리는 암울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민영환(閔泳煥) 유서
嗚呼(오호)-오호라,
國恥民辱乃至於此(국치민욕내지어차)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바로 여기에 이르렀으니,
我人民將且殄滅於生存競爭之中矣(아인민장차진멸어생존경쟁지중의)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하는 가운데에 모두 멸망하려 하는도다.
夫要生者必死期死者得生(부요생자필사기사자득생)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諸公豈不諒只(제공기부량지)
여러분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영환도이일사앙보황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이사아이천만동포형제)
그럼으로써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泳煥死而不死(영환사이부사)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期助諸君於九泉之下(기조제군어구천지하)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幸我同胞兄弟益加奮勵(행아동포형제익가분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더욱 더 분발 하여 힘쓰기를 더하고
堅乃志氣勉其學問(견내지기면기학문)
그대들의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決心戮力復我自主獨立(결심륙력부아자주독립)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則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칙사자당희소어명명지중의)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민영환(閔泳煥1861.7.25~1905.11.30)
한말의 문신이며 순국지사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다가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고, 다시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본 뒤 조용히 자결하였다. 당대 제일의 권문세가 출신으로서, 현직(顯職)의 명예를 던지고 망국(亡國)의 슬픔을 죽음으로써 달랜 것이다.
민영환은 홀어머니와 아내와 같이 살고 있었다.
남달리 효자였던 그가 만일 집에서 유서를 쓰고 자결하려 한다면
부인과 어머니에게 발각되어 만류당할 것이라는 것과 마음이 약해지리라 생각이 들었다.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옛 하인이었던 이완식의 집으로 가서 자결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에 잠깐 들여 어머니와 부인의 얼굴을 보고 다시 이완식의 집으로 간다.
명함에다가 다급하게 썼던 유서는 아마 충직한 하인 이완식에게 발각되면 그 역시 어떻게든 말리려고 하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목숨을 끊어 사태의 심각성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천천히 붓을 들고 먹을 갈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민영환의 자결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라
분노에 북받쳐 우발적으로 한 행동이었다는 그런 증거가 된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