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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38-44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38-44 / 그날 아침에는 강도 두 사람도 십자가형을 받아 예수의 양편에 달렸다. 39)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수께 욕을 퍼붓고 고개를 흔들며 말하였다. 40) `그래, 네가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였지? 자,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네 자신이나 구원하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41)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유대의 지도자들도 예수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42) `남은 구원한다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그래, 유대인의 왕이라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럼 우리가 믿겠다! 43) 하나님을 믿고 있다니 하나님께 풀어 놓아 그 증거를 보여주시라고 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소리를 치지 않았는가 말이야.' 44)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두 강도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모욕하였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하신 채 십자가에 달려있는 상황입니다.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38-40) 이 때 강도 두 명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단순히 강도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 형에 처해질 정도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잔혹한 강력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바라바의 일당이었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처형해야 예수님이 다른 죄수들처럼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사기꾼이라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입장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잔혹한 죄수들과 함께 처형되는 모습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기대했던 일말의 희망도 다 사라져 버리게 할 만큼 강력한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성전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요 2:21). 그런데 그 성전된 육체가 지금 무너지고 있기에 백성들은 조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이 조롱의 말이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성취됩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41-44)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말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다”라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은 예수님이 금식기도 하실 때 마귀가 예수님을 미혹했던 말과 동일합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예수님을 미혹했습니다(마 4:6).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커녕 증오와 빈정거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목적은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라 사기꾼이다”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유대인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도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십자가에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예수님을 욕하는 이들의 모습은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얼마나 조롱하였는지 보여줍니다.
적용: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자신을 구원하셨다면 당신의 구원은 어찌 되었을까요?
기도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기도하기 시작할 때 기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기도를 무시하고 덮어둔 사람에게는 결코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기도를 원하고 기도를 해야 비로소 기도의 길목에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기도의 길목으로 들어간 사람은 더욱 소중한 기도의 진가를 배우게 되며 기도에 대한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맛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계속 기도의 땅을 밟고 가면 결국에는 응답이라는 기도의 선물을 만나게 됩니다.
< 설 교 >
주님의 고난 곁에서
마 27:38-44, 눅 23;39-43 / 강문호목사(갈보리선교교회)
고난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거룩한 주일입니다.
서울 대형 병원에서 일하시는 원목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병원에서 일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병원에서 10년 동안 투병생활하면서 입원하여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입원하였다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돈, 고난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수술을 12번 하였습니다. 한번은 아예 죽었습니다. 그런데 시체를 넣는 냉동실이 가득차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시체실 바닥에 시신을 놓아 두었습니다. 아침에 직원이 그 날 나가는 시신을 꺼내고 목사님 시신을 넣으려고 보니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전날 냉동실에 넣었으면 죽은 몸이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여서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주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병원에 들어가서 자기처럼 고난을 받고 있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고난받고 있는 환자들에게 늘 위로의 말을 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수술을 앞두고 걱정하는 환자에게는 기도하고 나서 말해줍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시체실까지 갔었어요.”
장기 입원하고 있는 환자가 짜증을 부리면 말합니다.
“나는 10년 입원하였었지요.”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환자들이 위로를 받곤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난곁에서 위로자가 되는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가장 큰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모든 사람의 결론은 생명입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 즉 영생이란 말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을 지키던 간수가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바울이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없습니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암으로 죽기 직전에 성직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죽음 후의 세계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내세를 공부하다가 구원의 확신을 받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죽음앞에는 명예와 직위가 필요없습니다. 인생의 결론은 구원입니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침대 옆에 의사 세 명이 서있었습니다.
“나를 일년만 더 살게 하여 주면 10억씩 주겠다.”
그러나 의사도 일년을 더 살게 하여 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결론은 생명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입니다.
무덤속에 있는 정주영 현대 회장에게 1조원을 주면 살려 주겠다고 하면 즉시 그렇게 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무덤속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살려 줄 터이니 청와대 청소부할 테냐고 물으면 즉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인생의 결론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지금 죽어가고 계신 현장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에 죽어 가고 계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죄없으신 예수님이 죽고 있습니다. 가장 큰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 곁에 세 종류의 사람이 보이고 있습니다.
1. 지나가는 사람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며..”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지나갑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한 사람은 지금 극심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은 인생의 고난 중에 최고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 옆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고난은 아무리 아파도 나만 아니면 됩니다. 머리를 흔들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그린 <바보 예수>라는 초상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한쪽 눈이 찌그러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고난과 아픔을 보고 눈물을 많이 흘려서 찌그러진 눈입니다. 입술은 쪼글쪼글 말라 있습니다. 가슴은 앙상하게 말라져 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으십니다. 능력도 있습니다. 12영이나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 오려고 하면 얼마든지 내려 오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저항 한번 안 하시고 힘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모습니다. 바보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바보같습니다. 그런 바보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초상화입니다.
그런데 그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 지나가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뿌리를 내린 사람인가요? 지나가는 사람은 뿌리가 없고 뿌리가 없는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일뿐입니다.
겨울철에 보리가 파릇파릇 나옵니다.
그러면 보리밭에 들어가서 사정없이 발로 짓밟아 줍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농사를 망치는 것인가 보다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겨울철에 보리를 밞아 주지 않으면 뿌리가 들떠서 말라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돋아난 줄기와 뿌리를 사정없이 밟아 주어서 땅에 뿌리가 내리도록 하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줄기가 강해집니다. 그리고 뿌리가 단단히 내려집니다. 그래서 보리 한 이삭에 보리알이 450알이 열리는 데 줄기가 그 무거운 알들을 능히 지탱할 정도로 강해지고 뿌리가 튼튼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면 안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자세를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려고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모욕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셨다면 우리를 구원시키지 못 합니다. 이들은 엄청난 실수를 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실수를 하는 지 모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나가면서 모욕이나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어느 모임이나, 어느 단체나, 어느 교회나 지나가면서 모욕이나 하는 사람을 좋아 하지 않습니다. 뿌리를 그 곳에 내리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일하는 사람을 좋아 합니다.
고난당하시는 예수님 곁에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님 옆을 지나가면서 모욕하던 이들은 지금 지옥에 가있습니다. 펄펄 끓는 지옥불속에서 땅을 치며 울부짖을 것입니다.
“‘내가 그 분 옆을 지나갔었어. 그 때 그 분을 믿었어야 했는 데. 그 좋은 기회를 내가 놓지고 뜨거운 불속에서 고통을 당하는구나!”
혹시 여러분도 생명되신 예수님을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족들도 교회옆을 지나가고만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옆을 지나 지옥으로, 교회 옆을 지나 음부로 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2. 희롱하는 사람들
고난받으시는 예수님 곁에는 희롱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합심하여 희롱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희롱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본래 대제사장은 한 명입니다. 대제사장은 세습제 종신제입니다. 아버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아들이 대제사장직을 물려 받습니다. 세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대제사장입니다. 지금 교황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가 정치적으로 대제사장을 이용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니까 대제사장을 여러 사람을 임명하였습니다. 물론 돈주고 팔기도 하였습니다. 로마는 꿩먹고 알먹고 였습니다. 그래서 사이비 대제사장이 많았습니다. BC 37-AD 26 63년동안 대제사장이 28번 바뀌었습니다. 63년이면 겨우 두 세명 정도 대제사장이 나타날 기간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대제사장이지 대제사장들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은 희롱을 받고 있는 이들입니다. 희롱받고 있는 이들이 생명되신 예수님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서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연구만 하였지 율법대로 살지 못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살아가는 바리새인들로부터 희롱을 받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장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로들은 정치 세력에 아부하며 이리 붙고 저리 붙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올바른 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공의를 따르지 못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희롱받고 있는 이들이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다.
이들도 생명을 얻지 못 하였습니다.
희롱한다는 말의 원어는 흉내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흉내만 내는 사람이 아닌지 나 자신을 들여다 보는 고난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서 예배드리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기도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헌금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전도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주님의 고난 옆에서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수님의 고난 옆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흉내만 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 욕하는 사람들
그러나 예수님 양쪽 옆에 강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강도처럼 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강도 사이에 못박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과 강도는 십자가에서 6시간 매달려 있었습니다. 두 강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에게 같이 욕을 퍼부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혀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한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에게 욕을 퍼부었고 한 강도는 급격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불과 6시간 동안 일어난 변화로는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1) 다른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같이 욕하다가 욕하는 강도를 욕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급격한 변화입니다. 예수님 옆에서 고난받는 행운은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태풍이 불었습니다.
해변가에 있는 학교였습니다. 교실이 무너졌습니다. 건물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두 기둥은 그대로 당당히 서있었습니다. 이유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 두 기둥은 바닷가에서 모진 바람과 험한 태풍을 수없이 맞으며 굳굳히 자란 나무였습니다. 이미 그런 태풍을 견디는 훈련을 받고 자란 나무였습니다.
고난을 견디고 나면 반드시 새로운 역사가 전개됩니다. 강도가 그랬습니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도로 살아 왔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무서워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깨끗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똑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데 한 강도는 깨닫지 못 하였는 데 한 강도는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고난이 도리어 축복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난쟁이라 할만큼 키가 작았습니다.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을 박재하여 박물관에 보관하여 두었습니다. 말도 아주 작았습니다. 줄리어스 시저는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헬렌 켈러는 눈멀고 귀멀고 말못하는 벙어리 삼중고로 살았습니다.
모차르트는 폐병환자였습니다. 베토벤은 귀머거리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아마비였습니다.
강도는 강도였다는 그 동안의 약점을 멋지게 극복하고 승리하였습니다. 구원의 반열에 우뚝 섰습니다.
월남전쟁 때였습니다.
월맹에 포로 되었던 미군들이 포로교환으로 돌아와 기자 회견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군들은 포로 생활 당시를 회고하면서 배가 너무 고파 쥐까지 잡아먹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요?”
한 병사가 말했습니다.
“너무 학대가 심하니까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다는 악착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을 미워하고 증오했습니다. 기어코 살아 남아야겠다고 작정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조건이 사람을 약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고난 속에서 오히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3)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강도는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모하는 영을 만족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좀 심한 말로 하면 양심에 털나는 것이 복음입니다.
강도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욕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여 달라고 하니까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살려 달라고 하니까 살려 주셨습니다.
이 강도는 기회를 놓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았습니다.
지금 천국에서 순간 순간 감사드릴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지옥에 간 사람과 천국에 간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가능합니다. 부자와 부자 집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음부에 가있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안에 간 나사로와 서로 보면서 대화하였습니다.
지금 지옥에 간 강도와 천국에 간 강도가 서로 보면서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같이 강도짓하다가 같이 잡혀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천국에 하나는 지옥에서 영영 운명이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수많은 이들이 지나갔고, 수많은 이들이 희롱하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이 극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받으시는 현장에 우리는 있습니다.
고난 주일
주님의 고난을 통하여 모두 구원에 현장에서 모두 구원의 확신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소록도 안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께 칠순이 춸씬 넘은 노인이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의 얼굴과 손가락은 망가지지 않았고 차림새로 보아 육지에서 온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나를 이 소록도에 살게해주십시오.”
“아니 노인장은 정상으로 보이는데···”
이야기는 약4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노인은 서울 근교 농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10남매 중 막내아이가 11살 때 문둥병에 들었습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가족과 마을에서 그를 격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소록도로 보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해 늦여름, 차를 타고 또 걷고 하기를 3일, 이제 소록도에 거의 다 왔습니다. 아이는 여름날 뜨거운 여행으로 지쳐 신작로 옆 나무 그늘에 쉬다 잠에 들었습니다.
“차라리 이 돌을 들어 죽일까··· ”
허리 힘을 다해 돌을 들어 아들을 향해 던졌습니다. 바위같은 돌은 아들을 누르지 못했습니다. 놀란 표정을 하고 아이가 깨어났습니다.
소록도행 배를 타기 위해 고흥나루에 도착했습니다. 막상 배를 타기 위해 가까이 이르렀을 때 손이 뭉개지고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들 속에 아들을 보낼 수 없어 우물쭈물 망설였습니다. 그 사이에 배는 사라졌습니다. 생각을 달리해 신발을 벗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함께 죽기로 아들과 결정내렸습니다. 어른의 가슴 높이에 11살난 아이는 숨쉬기가 곤란해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런 아들을 껴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문둥병이 걸린 것은 난데 나나 죽지 왜 아버지가 죽어요! 형과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데 아버지가 죽으면 어떻게 살으라고 아버지가 죽어요! 나 혼자 소록도에 갈테니 아버지는 돌아가세요.”
울며 야단치는 아들을 떼어놓고 아버지는 서울 근교로 돌아왔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아버지는 9남매를 키웠습니다. 죽을 고생으로 9남매를 대학, 결혼까지 다 시켰습니다. 허리를 펼 때가 되었습니다. 이 때 그만 아내가 죽었습니다. 얼마 지나 서울의 큰 아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님, 혼자 계시지 말고 땅 팔아 그 돈으로 저희가 아파트 사는데 보태 함께 사는 게 편할 겁니다. 그렇게 하세요.”
아들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아파트 구입하여 함께 살았습니다. 두 달이 지났을까 하였을 때 큰 아들과 며느리가 말했습니다.
“큰 아들만 아들입니까? 왜 우리 집에서만 사시나요?”
아버지는 도저히 눈치가 보여 같이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날 밤으로 보따리를 꾸려 둘째 아들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비극은 둘째, 셋째···한달 정도되면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울며 울며 옛집에 와서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때 문득 40년전 소록도에 쳐넣은 아들 생각이 났습니다.
“과연 지금까지 살아 있을까···죽기전에 만나나 봐야지.”
물어 물어 아들이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11살 소년의 아들 모습은 사라지고 아버지 보다 더 머리가 쉬어진 50살의 할아버지가 되 있었습니다. 둘은 얼싸 안고 울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했더니 이제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나같은 아비를 뭘 그리 그리워하고 있었느냐? 아들을 내다버린 죄인을 뭘 기다렸느냐?”
아버지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소록도에 와서 예수를 믿었어요. 예수의 사랑안에 살면서 매일 감사하면서 살았어요, 내가 문둥이가 된 것도 감사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아버지는 면담을 요청한 목사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때 비로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내 온 정성 다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한 그루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습니다.아들은 완쾌되어 음성 나환자 촌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도 얻어 아이까지 있으며, 손주들은 건강하고 예쁩니다.”
아버지는 문둥이 아들과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시험을 당합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잠깜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은 주님
욥 1:6-8, 마 27:40-44 / 이성희목사
서론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은 24살이던 1997년 12월 10일, 수령 900년 된 65미터 높이의 삼나무(Japanese Cedar) 위에 올라갔습니다. 캘리포니아 험볼트 카운티에 있는 이 나무의 지상 55미터, 가로 180센티미터, 세로 240센티미터의 좁은 공간에서 무려 738일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 나무는 온대우림 나무이며 최대수령이 만 년이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생물입니다. 줄리아는 벌목회사인 ‘퍼시픽 럼버’에 맞서 나무 위에서 시위하고 있었습니다. 연방정부는 ‘퍼시픽 럼버’ 회사에 4억 8천만 달러를 보상해주고 회사가 벌목하려던 4천 핵트아르의 삼나무 숲을 보존지역으로 설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리아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삼나무 숲 전체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올라간 나무는 보호 받지 못했습니다. 다른 환경단체가 회사와 협상하여 나무 둘레 60미터에 있는 숲을 손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비로소 내려왔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줄리아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은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큰 의미를 시사합니다. 우리의 지구를 살리고, 숲을 살리려고 한 감동적인 환경보호 이야기입니다. 자연을 살리는 지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구촌에 보여 준 것입니다.
십자가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9:29에는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라고 합니다. 갈대의 길이는 고작 90cm 정도 되므로 십자가는 210cm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인의 키에 비해 볼 때 조금 높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내려오지 못할 만큼 높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내려오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즉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위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라는 표현도 있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에 계시다는 당시인의 관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셨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시지 않으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려오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끊임없는 역사는 주님을 향해서 계속됩니다. 인간이란 한계를 마귀는 알고 있으므로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 인간적 시험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마귀는 시험을 합니다. 공생애 기간 내내 쉼 없는 시험을 사람들을 통하여 합니다. 사탄의 시험과 유혹은 사탄의 존재이유입니다. 죽이려 하고, 돌로 치려 하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최후의 유혹을 합니다.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엄청난 시험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강도들도 욕하더라”고 합니다. 강도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상대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강도보다 못한, 강도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취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데 내려오면 절대로 안 됩니다. 만일에 내려오시면 우리의 구원은 무위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시지 않은 이유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은 이유를 묵상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사흘 후면 부활하실 것이므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7:40에는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이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9에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다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성전을 46년 동안 지었거늘”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6:21에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합니다. 성경 곳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에 살아날 것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흘 후의 부활을 백성들도, 심지어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히려 빌라도에게 고소거리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6:61에는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고소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메고 가실 때에 지나가는 자들까지 이 말을 조롱거리로 삼았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절대로 사흘 만에 성전을 짓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대로 죽으면 못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일어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굳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흘만 견디면 부활하실 텐데 내려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지난 번 수도원에 갔을 때 경험으로는 수도사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삶보다 훨씬 편한 삶입니다. 그분들의 삶을 비하하려는 목적은 전혀 아니지만 그들이 수도사가 될 때 한번 독한마음을 먹으면 수십 년은 견디겠습디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독한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세상과 접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단이 주로 사용하던 말입니다. 마태복음 4:3과 6절에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사탄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말을 사탄이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6:63에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탄의 끊임없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질문은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예수님의 신성은 초대교회의 가장 큰 질문이었고 신학적 과제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지식은 놀라운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기초입니다.
베드로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신앙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의 시작입니다.
마가복음 1:1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면 성전을 사흘에 일으킨다는 말씀도 이해하고 믿을 것입니다. 그 말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부활도, 소망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자는 자들의 첫 열매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자살폭탄 테러라는 것이 있습니다. 테러하는 이들을 ‘무슬림 가미가제’라고 합니다. 어린 소년들을 그들의 교리로 가르쳐 폭탄을 몸에 안은 채 죽게 합니다. 텔레비전에서 가미가제였다가 탈출한 어느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죽을 수 있도록 세뇌하는데 천국에 가면 많은 예쁜 처녀들이 반겨 줄 것이라고 한답니다. 이런 그들의 교리가 죽음을 자청하고 수용할 수 있습니다. 자살폭탄 테러를 자행할 수 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천국의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과 확신이 있다면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죽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고 죽으신 죽음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서양격언에는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Best is yet to come)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던 청교도가 자주 쓰던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8:18에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합니다. 현재적 고난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삶은 장차 영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현재적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십자가를 절대 내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사는 삶을 삽니다.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지 말고 절대 이 신앙의 삶을 포기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기를 구원할 필요가 없으므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7:42에는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지 않는 자들의 외침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실과 비슷하지만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는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구원할 필요가 없도다”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므로 구원받을 필요나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중이 자기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만 자기 머리 못 깎습니까? 아닙니다. 자기 머리는 누구나 못 깎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발사들은 자기 머리를 누가 깎아주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발관에 가서 물어봤더니 자기 친구 이발사한테 가서 깎는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해결하지 못할 자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문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원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조롱하는 말로 “자기는 구원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원할 필요가 없어 자기를 구원하지 않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15:13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첫째는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다른 사람, 친구를 위하여 주셔서 가장 큰 사랑 보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친구를 삼으려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예수님이 왜 자기 목숨을 버리려는지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의도를 전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한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의도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구원하려고 오시지 않고, 남을 구원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는 그리스도를 구원하라고 하였고, 구원이 필요한 자신이 구원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둘을 다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한 자들은 로마군인, 군중들, 산헤드린의 중추적 인물이었던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구원에는 등한히 하고, 자신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대하여 무지한 자가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나를 위하여”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죽음의 속죄는 우리 각자가 받아들일 때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 어떤 것이 선물로써 받아들여져야 선물이 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을 준 사람에게 답하는 최고의 감사의 인사는 받은 선물을 온전히 즐기는 것입니다. 선물로 받은 것을 즐기고 사용하면 준 사람이 가장 기뻐합니다.
맥스 루케이도라는 미국의 저명한 저술가는 골프 치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어느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골프대회에 나갔습니다. 네 사람씩 조를 짜서 단체경기를 하는데 자신의 점수는 엉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팀원들이 잘 쳐서 우승을 하였습니다. 공이 숲으로 날라 갔던 물속에 빠뜨렸던 상관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4인조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막강한 4인조는 바로 나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이십니다. 이보다 더 환상적인 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루케이도는 말합니다. 이런 것을 신학용어로 ‘위치적 성화’라고 합니다. 내 실력 때문이 아니라 내 팀원들 때문에 내가 함께 상을 받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합작하여 나를 승리하고 우승하게 하려고 십자가를 사용하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예수님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를 합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내려오시지 않고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의 모든 삶은 우리를 위한 것들입니다. 주옥같은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주린 자를 먹이셨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일들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입니다.
결 론
존 스토트는 교회의 ‘이중성’이란 말을 말했습니다. 교회는 성화되었으나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있으며 거룩하라고 부르심을 받습니다. 교회는 풍족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불완전하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고통스러운 긴장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받고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우리의 구원받은 삶은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입니다. 남을 구원하기 위한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은 그 삶을 본받아 사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삽시다. 예수님과 함께 매 달린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는 그 삶을 삽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내려오지 말고,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나의 구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