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피서의 그리스도 찬가 첫 부분을 두고연관된 주제들에 대해 함께 묵상해오고 있습니다. 이번 달은 지난 달에 이어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시작된‘선사의 물길’에 맞서는 ‘선망의물길’에 관한 관찰을 마무리하면서 ‘폭력’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폭력의 양상들 – 탈취, 제거, 따돌림 선망은 시기심을 낳고, 시기심에서 폭력에 이르는 거리는 아주 짧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폭력의 양상도 여러가지입니다. 우선 탈취가있지요. 이것은 단순히 상대방이 지닌 것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탈취의 대상은 비단 물질의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능한한 타인의 정신도 탈취하려 듭니다. 타인의 생각이나 관점, 취향 등을‘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규정하면서 나한테 맞추라고 강요함으로써 말이지요. 자기에게 ‘흡수통일’되라고 강요하는 이 자세는 집단이든 개인이든 강자의 입장에 있을 때흔히 취하는 태도입니다. 예컨대 이것은 한 사회의 다수자(매이저리티)들이 소수자(마이너리티)들에게 너무도 흔히취하는 태도지요. 그런 태도가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스스로는결코 이게 폭력이라고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기심에서 솟는 폭력의 두 번째 양상은 제거 혹은 파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타인이 지닌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지 못할 때도 있는데, 예컨대 뛰어난재능이나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같은 것이 그러하지요. 이런 것은 상대방의 존재 자체와 너무도 깊이 결합되어 있어, 따로 분리해서내 것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사람은 그것의 소유자인 타인의존재와 인격 자체를 제거하고 말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예수님도 유다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으로말미암아 그 사회에서 제거된 분이라고 보아 그리 틀리지 않겠지요?
시기심이 낳는 폭력의 또 다른 양상은 따돌림입니다. 이른바 ‘왕따’ 현상이 어린 학생들의 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란 것을 누가 부인할 수있겠습니까. 한 사회나 집단에서 특정 구성원(들)이 따돌림을 받을 때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딱히 그 사람이 잘못해서 그런경우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수의 다른 사람들과 (외모나생각, 출신지나 취향, 능력 등이) ‘다르다’는 이유일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모듬살이에서 ‘다른것’은 즉시 ‘불편한 것’으로느껴지고, 불편한 것은 이내 ‘틀린 것’으로인식되기 마련이지요. 나아가 한 사람이 소속 집단의 다수로부터 모종의 견제나 미움을 받는 경우, 진짜 죄목은 ‘나보다 잘난 죄’인 경우도많습니다. ‘조직의 쓴 맛’이란 말은 이 경우에도 훌륭하게 적용되는것이겠지요?
오래 전 유학생 시절 윤리신학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러 나라 출신의 다양한 수도회 소속젊은 수도자들이 함께 공부하던 학교였지요. 수업 중에 선생님께서(당신도도미니코회 수도자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혹시 별로 친하게지내지도 않았던 형제가 어느날 새삼스레 ‘형제여, 친교를 좀 맺읍시다’하면서 당신 방에 찾아온다면 조심들 하세요. 그 형제는 십중팔구 친교가 아니라동맹을 맺으러 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정말 많이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냥 유쾌하기만 한 웃음만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웃음의 뒷맛은 좀 썼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젊은 나이였음에도, 각자가 경험한 ‘조직의 쓴 맛’으로 말미암아선생님의 그 말씀이 얼마나 적확한 지적인지를 몸으로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생양 메커니즘 우리는 언제 ‘친구’가 되는가… ‘선망의물길’을 타고 흐르고 있는 이상,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경쟁자’인 세상에서 사는 이상, 우리는말하자면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동맹’을 맺을 때에만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지만, 둘 다에게 별로 탐탁하지 않은 제 3자의 험담을 하면 분위기가 순식간에 화기애애(화기애매?)해지는 경우가 더러 있지 않던가요? 동서고금을통해 공통된 이런 체험에 대해서도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전에는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12).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깊이 관찰하고 묵상할 것이 바로 ‘희생양’ 현상이아닌가 합니다. 이 현상에 대해 르네 지라르(1923-2015)라는인문학자는 깊은 통찰을 남겨주었습니다. 사람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시기심이 지배하고 있기에 인간사회에서 폭력은필연적인 귀결입니다. 그러나 이 폭력이 마냥 난무하도록 내버려두면, 사회를지탱하는 최소한의 평화마저 얻지 못합니다. 인류사회의 지속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지라르의 생각이었습니다.
요즘도 신문의 정치사회면에 이른바 ‘꼬리자르기’란 말이 종종나오잖아요? 한 불행한 사건이나 사고에 대해 최종 책임자가, 그 사태와직결되진 않지만 어떻든 모종의 죄가 있는 한 사람이나 혹은 적당한 위치의 아랫 사람에게 책임을 몰아지우고 그를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정작 자기는면피(免避)하는 행태를 지칭하는 것이지요. 과연, 크고작은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우리 사회는 오늘도 ‘정상적으로’ 희생양을 만들어냄으로써 서둘러 혼란을 수습합니다. 예컨대 2년 전 세월호 사고 직후 언론이 부추긴 대중적 광풍(狂風) 끝에 비극적으로 인생을 마감한 선박회사 최고경영자를 생각해 보세요. 비록 죄가없지는 않았지만, 그가 사태의 최종 책임자가 아니었단 사실, 결국 그는희생양에 불과했단 사실이 이젠 많이 분명해졌지요?
그런데 그게 꼭 사회에만 국한된 현상이고 교회 공동체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일까요? “우리에게는 결코그런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공동체일수록 희생양 메커니즘이 효과적으로 작동되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구성원들의 무지를 통해서만 작동되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늘 무의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권력자들은 ‘사회의안정과 평화’를 위해 종종 의식적으로 희생양들을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예수님 살아 생전 어느 해 대사제였던 가야파 입에서 나온 이 영민(英敏)한 말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세상 권력자들의‘지혜’가 어떤 것인지 무섭도록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쯤이면 ‘선망의 물길’의 필연적 귀결인 폭력의 여러 양상에 대해 부족하나마어느 정도는 얘기한 셈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얘기가, 이‘선망의 물길’이 사회와 교회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를 지금도가장 힘있게 휘어감고 있는 세력이란 사실을 실감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찬가 첫구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새로이 열어주신 ‘선사의 물길’을 더 깊이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영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모습’을 노획물처럼 독점하기는커녕 아낌없이 내려놓고 비우고건네주실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께서 먼저 당신의 그 모습을 아까와하시기는커녕 아드님께 아낌없이 건네주셨기때문입니다. 바로 여기가 ‘선사의 물길’이 솟는 원천(源泉)이라고말씀드렸지요. 찬가 첫 부분을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모습이같았기 때문에”라고 푸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사람들의 ‘원죄’ 그리하여 강생을 통해, 어떤 종류의 시기심으로부터도 자유로운 한 ‘인간’이 인류 최초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분의 ‘모습’은, 창세기가 묘사하는 첫 사람들의 모습과 깊고도 예리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과 비슷하게 당신 모습으로” 만드신(창세 1,26) 존재였습니다. 하느님께서흙먼지로 빚으신 후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어”(창세 2,7) 만드신 존재였습니다. 하느님과 그들은 말하자면 같은 숨-생명을 공유하는 사이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이미 하느님자신의 모습으로, 심하게 말하면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른바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원죄(原罪)’의 순간이지요.
그런데 ‘원죄’라고 할 때의 ‘原’자(字)는 시기적으로 오랜 옛날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근본(根本) 바탕이 되는 영역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해석해야 더 옳지 않을까합니다. “아주 옛날 첫 사람들이 지어 죄없는 우리에게까지 억울하게 유전된 것”이 원죄라고 믿는 생각 자체가 원죄의 영향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내’ 책임이 아니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무의식적 ‘면피’의이 자세는 우리 마음의 근본에 뿌리내린 ‘무명(無明)’에 다름아닙니다.
각설하고,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느님처럼 되겠노라고 마음먹은 것은, 하느님께 대한 일종의 시기심에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이미 보았다시피, 시기심은‘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결핍감 혹은 박탈감에서 비롯되는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처럼 되는 것을 싫어하신다. 그분은당신의 신성을 독점하시고, 우리가 그 영역으로 건너가 당신처럼 되는 것을 참지 못하신다. 안타깝고 분하다. 우리는 왜 당신처럼 되면 안되는가?” 아마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이런 말들이 흘러다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시기하시는 하느님? 그런데 위에서 이미 말씀드렸듯,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사실상 당신 자신의 모습으로 지어내셨고, 당신자신의 숨-생명마저 사람과 공유하셨단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뱀’의 역할이 치명적입니다. 뱀은자기가 가장 잘하는 짓, 즉 거짓말을 통해 첫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감추고 속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는 것에 모종의 시기심이라도 가지신 것처럼, 아낌없이 나누고 내놓으시는 그분의 본성을 왜곡해서 소개합니다(창세 3, 4-5 참조). 그리하여 이미 모두 받았음에도 아직 아무것도받지 않았다고 느끼게 합니다.
결국 그들이 시기심을 지니게 된 것은, ‘거짓의 아비’인(요한 8,44) 뱀의 이런 거짓말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는경우가 많은 듯해요. 저는, 뱀의 이 거짓말에 첫 사람들뿐아니라 오늘의 우리도 끊임없이 속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심각한 의문을 지니고 있습니다. 암만 열심히성당에 다니고 기도해봤자 왜곡된 신상(神像)을 마음에 품고있으면 죄다 헛일입니다. 아니, 그럴 경우 ‘열심’은 오히려 위험하기까지 합니다.사실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력들은 거개 세 유일신 종교들(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나왔다고 하지 않나요?
하느님은 결코 시기심을 지닌 분이 아니시지요. 만일 그리 생각한다면, 그리 생각하는 내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어졌다기보단, 그리 생각되는 하느님이 내 모습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느님께서 자기 모습과 생명을 독점하시고 마치 노획물처럼 거머쥐시며 아끼신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결코 ‘선사의 물길’을탈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기쁨 그러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과 생명을 아낌없이 베푸셨고 지금도 베풀고 계신다고 알아듣는다면, 나 역시 나의 존재를, 나의 ‘모습’을, 나의 ‘얼굴’을 지금도 끊임없이 받고 있다고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당신을 주심으로써 ‘나’를 주셨다고, 지금도 주고 계신다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의 ‘모습’, 나의 진면목은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생기며 자라고 있다고인식-감상-감사(appreciation)할 수 있게 됩니다.그리하여 마침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선사의 물길에 올라타서 흘러갈수 있게 됩니다.
옛 비잔틴의 위대한 신앙인이요 신학자였던고백자 막시무스(580-662)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절대적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피조물들을 창조하셨다면, 그것은 이 피조물들로 하여금 당신을 쏙 빼어닮는 기쁨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피조물들이 무한한 당신에게서 무한히 길어 마시며 즐거워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침내는, 이렇게 즐거워하는 피조물들로 말미암아 당신 자신도 즐거우시기 위함이었다.
위에 인용한 글은 <사랑에 관한 100 단장(短章)>이 출전(出典)인데요, 알아들으시기 쉽도록 신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어려운 대목을 (사실 이는 옛 교부들의 이른바 ‘신화(神化, theosis)’에 관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직역하지 않고 평이하게 손질한 번역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얘깁니다. 저물녘 혼자 들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저기 일락서산(日落西山)에 한숨이 절로 새나올 만큼 기가 막힌 노을이 걸려 있었다고 쳐요. 이 아름다운 장면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노라면, 누군가 좋은 사람과 같이 먹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이처럼, 절대적 충만이신 하느님께서도 이 충만함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을 품으셨다고 생각해 볼 수 있으리란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창조하시고서는, 그것도 당신을 붕어빵처럼 쏙 빼닮은 모습으로 만들어내시고는, 마침내 존재의 충만함을 함께 즐길 수 있게 되어 그분의 기쁨도 더욱 충만해 졌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이렇듯 당신의 본성(神性)에 참여하여 ‘하느님이 되는’ 것을 시기하시거나 꺼리시는 분이 전혀 아니시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여 하느님처럼 되어서 “즐거워하는 피조물들로 말미암아 당신 자신도 즐거우시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거지요.
아, 이런 하느님을 자기 하느님으로 모신 이에게 사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죽는 일 역시 이에 못지않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이렇듯 우리 기쁨을 당신 기쁨으로 삼으시는 하느님이라면 말입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분이라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성인처럼, 사는 일이 때로 죽을 것처럼 힘겨워도 “하느님만 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우리 역시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백자 막시무스가 노래하는 ‘하느님의 기쁨’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선사의 물길’에 적셔져 흘러가고 있는 사람만이 간파하고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같은 복을 누리기를 청하며, 길게 이어온 찬가 첫 구절의 묵상을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