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지한 문화재 안목이 국격(國格)을 훼손(毁損)시킨다.
3.1절 아침 조선일보 1면 신문 큰 제목에 “통곡할 독립선언서”라는 글이 실렸다.
내용은 서울 종로구 종로2가동(鍾路二街洞)에 있는 한국 최초의 공원인 탑골공원(塔公園) 에 있는 “독립선언서 대형 석판” 의 글씨가 바꾸어져 있는 내용이다.
필자가 직접 가서 “독립선언서 대형 석판”의 글씨를 확인하여 보았다.
가서 확인해 보니 종전에 “독립선언문”을 쓴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의 글씨가 아니고 보통 흔해빠진 컴퓨터 글자체 였다.
주무관청인 종로구청은 “독립선언서 대형 석판”을 바꾸게 된 이유는 2010년 8월 13일 동아일보에 아래의 기사에 그 내용이 있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3·1독립선언기념탑에 새겨진 기미독립선언서의 앞부분이다. 원래 인류평등(人類平等)이지만 “평등”이란 한자가 알 수 없는 한자로 바뀌어 있다.
이 기념탑의 전체 한자 1762자 가운데 원문과 달리 뜻을 알기 힘든 글자, 점과 획이 빠지거나 불필요하게 들어간 글자 등 잘못된 글자가 100여 자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한자 교사 출신 박동규 씨(73·전 영북고 교장)가 지난해 11월부터 조사한 결과 드러났다.
박 씨는 “역사적 장소에 원문과 다른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가장 대표적 오류는 다른 한자로 쓰인 경우. 世界(세계)의 “界”와 民族的(민족적)의 “族”자는 다른 한자로 바뀌었다. 양(兩) 의(義) 복(服) 류(類) 등 20여 자는 점과 획이 사라졌고, 토(土) 명(明) 매(昧) 선(善) 등 10여 자는 획과 점이 추가됐다.
한편 공원의 관리 책임을 맡은 종로구청은 지난 30년 동안 이의를 제기한 경우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 기념탑은 1980년 건립됐고 글씨는 서예가 김응현(1927∼2007)이 쓴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강은지 기자」
종로구청은 위의 박동규 씨의 “서예 글씨로 쓰인 석판의 많은 글자가 독립선언서 원문과 다르다”는 이의신청을 받고 독립기념관 자문과 종로구 문화재자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2000만원을 들여 석판을 교체했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선언서 원문 글씨와 같게 고쳐야 한다”는 이유로 교체했으나 교체한 내용에도 원문(原文)과는 차이가 크고 오자(誤자)와 탈자(脫字)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새 석판은 독립선언서 원문과 다른 컴퓨터 활자체로 쓰였으며, 석판을 검토한 진태하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이사장은 “뒷부분 공약삼장(公約三章) 등 모두 11곳 이상에 원문(原文)과는 다른 잘못 쓴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새로 교체한 글씨는 독립선언서 원문과도 다른 정체불명의 컴퓨터 활자라고 서예가들 은 지적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조선일보 2011년 3월 1일 기사내용을 정리한 것임)
「독립선언서 대형 석판”을 바꾸기 전의 것은 1967년에 처음 건립됐다가 1980년 지금과 같은 높이 2.25m, 폭 5m의 크기로 다시 세워졌다.
석판의 글씨는 “20세기 한국 최고의 서예가”로 불리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1927~2007) 선생의 작품이었다.
독립선언문을 활자체로 재현하지 않고 당대 대가(大家)의 서예 작품으로 했던 것이다.
이 독립선언서 글씨는 여초의 서집인 “여초쇄금”에 실려 있는 대표작 중 하나다. 전문가들은 해서체(楷書體·정자로 또렷이 쓰는 글자체)로 쓰인 이 글씨가 여초의 필력이 가장 왕성하던 시절에 나온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여초(如初) 작품은 현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직 문화재 지정 대상은 아니다.
서예계 관계자들은 “새 석판에 오류가 많다는 것도 문제지만, 여초(如初)의 작품을 교체한 것도 문화적 무지(無知)의 결과”라며 복원을 요구하고 있다.
여원구 동방연서회장은 “여초의 글씨는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이체자(異體字)를 쓴 작품으로 이는 활자체와는 달리 서예에서 허용된다”며
“그것을 바꾼다면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금석문(금속이나 비석에 새긴 문자)을 교체하자는 얘기와 같다”고 말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44년동안 3·1 독립선언의 현장에 서 있었던 여초(如初)의 석판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적 가치와 예술성을 지닌 문화유산”이라며
“이것을 정체불명의 오자(誤字)투성이 활자체로 바꾼 것은 문화 말살과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1927~2007)선생은
“20세기 최고의 한국 서예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형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씨와 함께 형제 서예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해서, 행서, 초서, 예서, 전서 같은 모든 서체들의 그 정화(精華)를 흡수한 뒤 마음과 손의 조화를 이룬 작품세계를 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94년 출간한 10권 분량의 서예 교본 “동방서범(東方書範)”에서 동양 서법의 대표적인 문헌·금석문 중 글자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을 골라 직접 글씨를 썼다.
천안 “독립기념관” 한글 현판도 형인 일중 김충현의 글씨다.
특히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씨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호(號)를 “중수(中樹)” 라고 지어준 사람이다.(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수(中樹) 호(號)를 한번도 사용안했지만)
이에 대해 종로구 공원녹지과 관계자는 “요즘 사람들이 누가 서예 글씨를 알아보겠느냐”며 “문화재 지정이 안 돼 있어 문화적 가치도 적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20세기 최고의 한국 서예가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이 기미독립선언서 석판에 글씨를 쓴 것은 “기미독립선언서 석판” 조성에 문화재적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원문의 글자모형과 다르게 서예체의 “이체자(異體字)”를 쓴 것은 “서예계에서 허용된다” 하더라도 원문을 재현(再現)시키지 못한 것은 틀림없다.
이체자(異體字)란 소리와 뜻이 같은데 글자 모양만 다른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못 연(淵)자를 氵변을 빼고도 연으로 읽는다.
배(裵)와 배(裴)도 같은 의미이다.
한자는 4000연전 거북의 껍질이나 짐승의 뼈를 이용하여 갑골문(甲骨文) 이라는 최초의 한자를 사용하여 점(占)을 쳤다.
초기 갑골문으로부터 시작된 한자의 문자 체계는 시대의 흐름과 쓰기 도구의 변화, 인쇄술의 발달 등을 거치면서 갑골문(甲骨文)으로부터 금문(金文), 전국문자(戰國文字), 예서(隸書)와 행서(行書), 초서(草書), 해서(楷書) 등으로 발전하면서 글자의 모양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지금도 변화되고 있다.
이체자(異體字)란 변화되는 한자의 글자체라고 할 수 있다.
“기미독립선언서”의 원문글자를 변형하지 않고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이 글씨를 썼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 또한 해당 문화재관리 당국의 책임이 크다.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이 글씨를 쓸 때에 문화재적 차원과 서예적 차원을 엄격히 구분하여 선택을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리고 숙고(熟考)를 하지 않고 기존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의 글씨를 없애고 정말 컴퓨터 활자체로 석판을 만든 것은 너무 졸속(拙速)이다.
지금 탑골공원에 새로 조성된 “독립선언서 석판” 은 흔해빠진 컴퓨터 글씨체로 아무런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그냥 돌에 글자”를 새긴 간판 같은 석판에 불과하다.
문화재관리당국이 문화재의 격(格)을 안다면 여초(如初) 선생의 글씨를 없앨 것이 아니라 집자(集子)를 해서라도 원형을 보존하고 그 내력을 별도로 표시하는 것도 좋은 문화재 보존의 한 기록이 된다.
역사의 문화재란 것은 “옳고 그럼”의 발자취가 다 보존되어야 한다.
독재자의 동상도 무덤도 매국노의 글씨도 그 발자취를 보존하므로 써 후예들이 전철(前轍)을 따라야 될일 따르지 말아야 될 일을 판단하는 좋은 교훈이 되는 것이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