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우리 마개둥아
미소(微笑)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屈辱)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어휘풀이]
-문(文) : 신발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 1문은 약 2.4cm
[시인의 시 이야기]
나는 박목월 시인의 시 <가정>을 읽을 때마다 진한 가정의 사랑과 행복을 느낍니다. 가난한 시인의 가족. 아홉 켤레의 신발은 더더욱 가난이 묻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슬픈 가난이나 추한 가난이 아니라 정이 새록새록 묻어 있는 아름다운 가난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가난이란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혹시 말 같지 않은 얘기라 생각지는 않나요? 가난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느냐고 되묻고 싶지요? 그러나 이 시에서 보여주는 가난은 아름다운 가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은 식구가 많아야 셋 또는 넷 정도입니다만, 수십 년 전엔 보통 여섯, 일곱, 많게는 열 명도 넘는 집이 허다했습니다. 경제 사정도 지금 보다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해서 보릿고개라는 말도 있었던 때였습니다. 박목월 시인의 집엔 아홉 명이 넘는 식구가 있으니 얼마나 살기가 힘들었을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박목월 시인은 어린 자식들을 향해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하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가정의 행복을 위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묵묵히 참고 아버지의 길을 걸어갔던 이 땅 위에 많은 아버지들과 지금 이 순간도 굴욕을 참으며 걸어가고 있는 많은 아버지들의 처진 어깨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못나고 부족하고 가난한 아버지도 분명 우리들의 아버지며 남편입니다. 아버지는 이 땅을 지켜 오신 분들이고, 또 지켜나가야 할 살마들입니다. 오늘 당신의 아버지에게 진심을 담아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해보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그 말 한마디로도 무척 가슴 뿌듯해하며 행복해할 겁니다.
출처 : 《위로와 평안의 시》
엮은이 : 김옥림, 펴낸이 : 임종관
김옥림 :
-시, 소설, 동화, 교양, 자기개발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집필 활동을 하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에세이스트이다. 교육 타임스 《교육과 사색》에 〈명언으로 읽는 인생철학〉을 연재하고 있다. 시집 《나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만남이고 싶다》, 《따뜻한 별 하나 갖고 싶다》, 《꽃들의 반란》, 《시가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소설집 《달콤한 그녀》, 장편소설 《마리》, 《사랑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들》, 《탁동철》, 에세이 《사랑하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아침이 행복해지는 책》, 《가끔은 삶이 아프고 외롭게 할 때》, 《허기진 삶을 채우는 생각 한 잔》,《내 마음의 쉼표》, 《백년 후에 읽어도 좋을 잠안 315》, 《나는 당신이 참 좋습니다》, 《365일 마음산책》, 《법정의 마음의 온도》, 《법정 행복한 삶》, 《지금부터 내 인생을 살기로 했다》, 《멋지게 나이 들기로 마음먹었다면》, 《인생의 고난 앞에 흔들리는 당신에게》, 《마음에 새기는 명품 명언》, 《힘들 땐 잠깐 쉬었다 가도 괜찮아》, 《법정 시로 태어나다》, 《이건희 담대한 명언》 외 다수가 있다. 시세계 신인상(1993), 치악예술상(1995), 아동문예문학상(2001), 새벗문학상(2010), 순리문학상(2012)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