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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떠나시니라
마 27:45-56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마 27:45-56 / [숨을 거두시다;막15:33-41,눅23:44-49,요19:28-32] 그날 낮 12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더니 오후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46) 3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ㄱ)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ㄱ. 시22:1) 47)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못 알아듣고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48) 그들 중의 한사람이 달려가서 신 포도주에 적신 ㄴ) 해면을 갈대 끝에 꿰어 목을 축이라고 예수께 주었다. (ㄴ. 시69:21) 49)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두시오. 엘리야가 와서 구해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큰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셨다. 51) 바로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졌다. 52) 그리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도들이 다시 살아났다. 53)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54)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병사들과 그들의 백부장이 지진과 일어난 모든 일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이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하고 말하였다. 55) 예수의 시중을 들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 온 많은 여자들도 먼데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동안 몇 가지의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45-50)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세 시간 동안 계속됩니다. 마치 출애굽 열 가지 재앙 중에 아홉 번째 재앙같습니다(출 10:22). 그러나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고센 땅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예루살렘이 어두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제 구 시쯤에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크게 소리지르십니다(46).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아야 할 유일한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가 버림받음으로 이미 버림받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과 연합되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엘리”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어떤 사람이 잘못 알아들었는지 엘리야를 보른다고 예수님을 조롱합니다(47). 그렇게 말하는 중에 다른 한 사람이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서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려고 합니다(48).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그것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는지 보자고 합니다(49).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십니다(50).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51-56) 성소의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가림막입니다. 성소에서 지성소로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일 년에 대제사장이 단 한번 들어가는데 정결한 짐승의 피를 들고 들어갑니다. 제사장이라도 조금만 부정하면 죽임을 당하는 장소가 지성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동시에 그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가장 거룩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성도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많은 사람에게 보이는 매우 신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이 땅에 사망 대신 생명이 왕 노릇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일어난 일들을 보고 두려워하며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합니다(54).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나무에 달려 있는 상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광경을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왔던 여자들만 멀리서 목격합니다(55-56).
적용: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지성소까지 단번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고 계십니다.
조지 뮐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묵상하면서 많은 기도의 제목을 발견하였고 그 약속한 말씀들을 마음에 간직함으로 자신에게 엄청난 영적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조지 뮐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기도 제목을 발견하였습니다. 뮐러의 기도가 많은 응답의 수확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기도의 동기와 욕구가 계속 솟구쳐 나왔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서 고아들을 위한 순수한 기도의 열정도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시 68:5)라는 구절에서 일어났습니다.
< 설 교 >
죽음의 자리에 피는 꽃
마 27:51-54, 고후 4:10-12 / 김경호목사
십자가는 단지육신의 무너짐만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절망과 좌절이 거기에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오해와 누명들 위에 십자가가 서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신성모독 죄의 누명을 쓰셨고, ‘성전을 허물겠다’고 불경의 누명을 쓰셨습니다.
갈3,13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라고 합니다.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히 6,6; 12,2)이요, 몹시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고 꺼리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자리, 수치의 자리에 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심수로 감옥에 갇히는 사람은 자기 소신에 따라 떳떳한 마음으로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는 지지하는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만인의 칭송을 받으며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따르던 무리는 그를 십자가에 달라고 소리쳤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를 부인하고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저를 십자가의 못박으라는 증오와 배신, 그리고 고독을 주님은 경험하셔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망가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에서 죄인의 누명마저 쓰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다 죄를 정하(롬 8:3)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 속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하고 외쳤습니다. 제자들에게 잠시라도 깨어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철저한 무너짐이고 붕괴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죽음 뿐 아니라 내적인 절망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그야말로 외적으로, 내적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철저한 죽음 위에 서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후배의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지금 40대 초반의 종로 한복판에서 잘 나가는 치과 원장이었고, 학생 때 열심히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운동권이었습니다. 우리교회 초창기에 선배님이 교회 개척을 하시니 돕는 차원에서 신앙심이 없는데도 몇 달 출석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여러번 신앙을 가질 것을 강조했으나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을 그만두고 요양을 하다가 재입원했습니다. 지난 주에 방문하는 날은 자신의 병세에 대해 아주 좋지 않은 소식을 들어서 낙담하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날 후배들이 모여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갖기로 되었었는데 기도회에도 나올 수 없어 병실에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의 머리는 모두 방사선 치료에 빠져 버리고, 얼굴은 심히 이그러저 있었습니다. 그는 “선배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모습이 되었습니다.”라며 미소지어 보였습니다. 예배 후에 모두 한마디씩 기도를 하거나 덕담을 했습니다. 중후한 40대의 남자들이지만 모두 억지로 눈물을 참아내며 덕담을 했습니다. 맨 마지막에 환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너무 교만했어요. 그 동안 제가 가진 지식, 운동하며 쌓은 알량한 소신, 이런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었네요. 그런데 지금 다 버렸어요. 아니 제 자발적 의지로 버린 것이 아니고 보시다시피 제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고 빈손이 되었는데 하나님을 찾게 되니 참 염치없기도 하고 목사님께 죄송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 보면 그 동안 제가 가졌던 건강, 지식, 알량한 자존심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걸림돌 뿐, 아무 것도 아니었나봐요. 이제 그 걸림돌들을 하나님께서 다 제거해 가셨으니 제가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에 제가 무너지는 것들이 견딜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아주 마음이 가벼워 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삶의 조건들, 울며 불며 매달렸던 인간적인 조건들, 돈, 명예, 지위..... 우리가 우리 삶의 안전 보장 책으로 알고 갖고자 하는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걸림돌일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것은 우리에게 부질없는 것과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며 우리를 참된 것으로 되돌려 주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철저한 죽음의 자리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내세워야 할 것들이 많고, 시시비비를 가려 저울질해야 할 것들이 많고, 아직 교만하여 자기를 꺾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힘을 떨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힘을 떨칩니다.(고후4,10-12) 고 합니다. 바울은 항상 죽음을 옆에 끼고 사신 분입니다. 그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하고,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 맡긴다고 합니다. 그는 늘 죽음과 함께 지냈지만 성서의 어떤 사람보다도 가장 생명력 있는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길게 늘어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정작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꼭 해야할 일을 뒤로 미루거나 간과하고 지내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날이, 그 시간이 이제 몇 일 아니 몇 시간 후로 임박했다고 생각했을 때 나에게 남은 이 짧은 시간에 내가 꼭 해야 할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들입니다.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신 바울은 아예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임박한 의식을 가지고 사신 것 같습니다. 죽음과 함께 하는 그의 삶은 그를 가장 치열하게 살게 만들고 가장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철저한 죽음의 자리 위에서만 꽃 필수 있는 것이 부활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스스로 살고자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인 죽음으로 향해 가고자 하는 결의에 찬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마태복음에는 아주 독특한 부활의 증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고 운명하신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것에 이어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런데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27,50-52)
일요일 아침의 부활이전에 금요일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철저한 헌신과 죽으심 그것에 잇닿아 부활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아쉬움을 가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사셨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조금 더 말씀을 주셨다면.... ”하는 아쉬움을 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한 두 마디의 가르침을 더 주시는 것보다 그의 십자가가 그의 삶을 완성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죽음의 자리에 서신 것이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다음 몫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계획안에 부활을 끌어당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염두에 두고 부활을 계산하는 자에게는 부활이 없습니다. 부활은 오히려 철저한 죽음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부활의 정치성
마 27:57-28:20 / 이병일 목사
한 가지 사건이 다양한 이해관계와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극명한 대립을 이루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특히 부활은 동시대의 사람에서부터 큰 의혹과 음모가 함께 있었으며, 지금은 기독교 안에서도 더 이상 합쳐질 수 없는 깊은 골이 패여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눈으로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덤과 수의(세마포)의 존재를 주장하고, 그것을 유적과 유물로 삼아서 순례자들의 마음을 빼앗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곳은 현재 두 곳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터어키 성벽 북쪽에 있는 두개골 언덕(고든의 갈보리)에 있는 정원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예루살렘 성 내에 있는 성묘교회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남쪽 외곽에 있는 무덤에서 마리아와 요셉과 예수님의 관을 발견했다고 영국의 BBC 방송이 보도하기도 했습니다(1980년). 그리고 이탈리아의 뚜린에 있는 ‘성 세례 요한 교회’에 보관되어 있는 수의는 지금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수의가 예수님의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논쟁과 조사를 하였으며, 1988년에 최종적인 탄소측정 결과는 그 수의가 CE 1260년에서 1390년에 만들어졌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발표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그것이 예수님의 것이라고 믿으며 그 곳을 순례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죽음과 그 후 살아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은 사람의 흔적을 찾아서 경배하면서 그러한 행위로 그 사람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과 오늘 우리가 읽었던 예수님의 장례식은 너무나 대조되는 영상입니다. 세계의 모든 국가들의 대통령이나 대통령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성대한 장례식과는 다르게 예수님의 장례식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고,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겨우 시신을 모셔다가 급하게 안치합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섬기던 한 무리의 여인들이 장례식을 지켜볼 뿐입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고발하여 죽게 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혹으로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첫날에 자신의 예고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식을 지켜보던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루머를 퍼뜨립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떠들어 댄다고 합니다. 결국 부활한 예수님은 생전의 약속대로 갈릴리의 그 산에서 남은 제자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선교 사명을 줍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는 분명한 정치적 입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한편에서는 해방과 기쁨의 사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독기서린 정치적 음모와 돈에 의한 정치적 매수가 깃든 사건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역사상에 있었던 4월 혁명의 실상을 보면서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4.19혁명 영상보기 :
한 사람의 죽음을 사람마다 집단마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정치적 의미가 있듯이 예수님의 부활도 정치적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자신의 권력과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음을 감추고 자기의 책임을 발뺌하려는 사람은 이미 그 음모에 너무 깊이 개입해 있기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음모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음모를 위해서 사람들을 매수하고 권력을 남용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희생당한 한 사람으로 인해서 더 많은 사람의 저항과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소망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영원히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감정을 새로운 힘으로 승화시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로 삼는 사람은 갈릴리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민중들과 함께 하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그를 잊지 못하고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들은 이제 갈릴리에서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역사 속에서 실현하려는 사람들, 비록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나 살아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언하는 사람들, 뒤따르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무쳐서 그들의 길잡이가 되는 사람들, 예수님의 활동 본거지였던 갈릴리와 같은 현장을 찾아서 다가가는 사람들, 그들의 행동 속에서 예수님은 정치적 음모를 깨뜨리고 부활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남긴 두 번째 기도
마 27:45 / 김남준목사
I. 십자가에서 남긴 둘째 기도의 바른 이해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에 이어 나오는 두 번째 기도가 본문의 십자가에서 남기신 네 번째 말씀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였고, 두 번째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리고 세 번째는 “아들이니이다”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번째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네 번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이 부르짖음은 기도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완벽한 히브리어입니다. ‘엘’은 ‘하나님’, ‘이’는 ‘나의’라는 의미로 ‘엘리’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사파크’는 ‘쏟아버리다’, ‘타’는 ‘당신이’, ‘니’는 ‘나를’이라는 뜻으로 ‘당신이 나를 버리셨습니다’가 됩니다. ‘라마’는 ‘왜(why)’라는 뜻으로 전체를 조합해보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왜, 무슨 연고로 당신은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A. 판이해 보이는 두 기도 장면
이러한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를 생각하기에 앞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와 오늘 본문의 두 번째 기도를 연결하여 생각해봅시다. 오늘 본문의 기도를 대할 때, 첫 번째 기도하신 장면과 판이한 장면처럼 생각되지 않습니까?
첫 번째 기도는 죄인들을 향한 중보의 기도였습니다. 첫 번째 기도의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에서 ‘저희’는 일차적으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참여했던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다보고 계신 무리들이며 그들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만 그들은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시고 인간의 죄를 구속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빌라도를 비롯해서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또 그렇게 해달라고 빌라도에게 간청하며 외치던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는 원인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자신들의 손과 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직접적으로 기여했던 사람들의 죄는 실로 더 크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두려워하시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일차적인 예수님의 중보기도 대상자는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확대하여 이차적인 중보기도 대상자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은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에 도구로 사용된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던 이유는 단지 그들의 악한 계획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 기도는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지 않으시면 안 되게 만든 모든 죄인들을 위해 용서를 비는 기도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복음 선포 중에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며 예수님의 이 기도를 부분적으로 응답되었다, 또는 부분적으로 응답되지 않았다는 식의 논리로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는 이 죄 가운데 죽어 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분의 기도는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을 사람들에 대한 유효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 응답으로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또한 첫 번째 기도의 “아버지여”하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조차도 아버지와 하나 된, 연합된 마음을 가지셨고 그 일체감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남기신 두 번째 기도를 보면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 사람들을 버리십니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서 외면당하고 버림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고통을 느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식 어린 절규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B. 십자가에서 탄식하며 기도하신 이유
그러면 이것이 십자가에서 남긴 첫째 기도와 어떻게 조화되겠습니까?
우리들이 여기에서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엄연한 사실이지만, 실제 죄 가운데 있는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기’를 실제로 분리해서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 용납되는 것을 본인 자신이 경험하기 전까지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1998년)라고 하는 시리즈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신다’고 흔히 말하지만, 실제로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경험 속에서는 그것이 분리되어서 느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죄에 대한 진노는 곧 죄인인 자기에 대한 진노이지, 죄와 자신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들이 깊이 회개하고 그 죄의 용서를 경험할 때, 그 죄는 미워하게 되고 죄인을 용납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확실히 그 두 가지가 분리된다고 하는 사실을 압니다.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면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 죄도 사랑하신다고 해석하면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살았을 때는 그 죄가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회개를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연합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오랫동안 사랑했던 그 죄가 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혐오스러운 죄를 분리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고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죄와 자신이 일체를 이룹니다. 나와 죄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죄가 내 안에 내가 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으로 들어가 보면 자기와 죄가 분리됩니다. 그리고 죄가 객관적인 실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때는 내가 주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죄 안에 있든지, 은혜 안에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회개하고 자신이 주님과 연합되어 죄가 객관적인 실체처럼 느껴질 때, 비로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누어져서 경험되는 것이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잘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이 교리가 여기에서 필요한 이유는 본문에서 ‘사파크’, 즉 ‘버리다’라고 표현된 예수님께서 맛보신 하나님과의 철저한 분리가 어떤 강렬한 혐오감과 미움 때문에 떨쳐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으신 것은 애처롭게도 예수님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난을 받고 주를 위해서 순교의 자리에 선다고 해도 예수님의 생애와 우리 자신의 생애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질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고, 하나님과의 불화를 모르시던 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가 ‘신자는 영원히 예수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만일 지옥에 가면 이해할지 모르지만 신자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므로 영원히 예수님의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고 징벌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사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를 모두 짊어진 대속 제물로서 죄를 짊어진 어린양으로 간주되어서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미움과 예수님 자신의 버림받음이 분리되지 않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셨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런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그것을 얼마나 뚜렷이 느끼겠는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왜 미우시겠습니까? 당신의 뜻을 이루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제물로서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형벌을 당하시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이 왜 미우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하나님께서 그 죄를 향해 하나님이 진노의 잔을 쏟아 부으시며 죄를 짊어진 예수님을 징벌하실 때 예수님은 죄에 대한 형벌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당신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탄식하며 기도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II. 예수님의 중보기도 세계가 주는 교훈
이처럼 타인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얻을 수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세계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A. 타인을 위한 기도로 경험하는 은혜
물론 예수님이 이렇게 죄를 짊어지시고 중보자로서 하나님 앞에 하신 기도는 예수님 이외에 누구도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상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자기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그 죄짐을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기도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짐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과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거나, 그들의 신앙과 상관없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불러올 수 있다는 믿음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 용서는 개인의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적인 면에서 이런 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타인을 위한 기도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군가의 죄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 죄인을 위한 우리의 기도에 성령이 역사하시면, 마치 그들이 지은 죄가 나의 죄인 것처럼 느껴져 하나님 앞에 통회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그 죄를 위해서 눈물 흘리고 기도함으로 그가 저절로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진정한 중보기도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죄 가운데 살아가는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죄가 마치 지금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짓고 있는 죄처럼 느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의 영향력이 자기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앙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느껴져 애통하며 회개하는 중보기도의 은혜를 하나님께서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경험되는 공통된 경험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그 기도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과의 놀라운 친밀함, 평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그 기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정작 죄를 지은 당사자도 느낄 수 없는 그 죄로 인한 깊은 고통을 기도하는 자신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누린 화목이 단절됨으로 고통당하셨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또한 우리의 죄는 아니지만 지체의 죄를 나의 죄인 듯 느낌으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통하며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조금이나마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통해서 죄 지은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양심의 강렬한 가책을 받아서 회심에 이르도록 만들어 줍니다.
역사를 보면, 이렇게 하나님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죄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며 회개하는 강력한 회심의 역사가 있기 전에 그러한 회심을 위해 열렬하게 중보하며 기도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이나 역사를 살펴봐도 죄인들을 회개하도록 하는 이 강력한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원하실 때 그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그만두고 싶으실 때 그만두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항상 자기의 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기 전에 그런 일들을 행하실 조짐들을 먼저 보여주십니다. 그 조짐은 자기의 죄로 인해 애통하지 않던 영혼들을 일깨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보고 주 앞에 뉘우친 후, 죄 가운데 살아가는 많은 지체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그들의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눈물 흘리는 기도의 강한 섬김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건강함은 자기처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은혜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얼마나 열렬하게 섬기며 기도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신 이 탄식의 기도는 예수님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를 불평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탄식하는 기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육체에 있어서는 인성을 입으심으로 참사람이셨던 예수님의 연약성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그리고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짐으로 그 죄와 자신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경하셨습니다. 그 죄를 짊어지신 분이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인 동시에 하나님, 당신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대한 진노를 예수님께 온전히 쏟아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한 진노를 당신 자신이 온 몸으로 느끼시며 나오는 탄식을 하나님 앞에 토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육체적으로 피 흘리고 죽으시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더하여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우리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대적이 된 것 같은 형벌을 한 몸에 감당하셔야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어떠함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형벌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주님을 위해 일평생 견고한 결음으로 고난을 감당하며 믿음의 싸움을 싸운다 할지라도, 우리는 감히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고난에 동참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고난이 예수님의 고난과 질적으로 차이가 극심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구속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고 그 분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구속하는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보자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고, 그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중보의 위대한 사실을 전해주는 또 다른 의미의 중보자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이러한 기도의 고난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하나님의 자녀의 눈에 이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는 백성들을 향한 순전한 기도의 눈물이 흐르면, 그 눈물은 모아져서 불신자들 가운데 타오르고 있는 지옥의 불길을 끄는 훌륭한 물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우리들이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먼저 눈물 흘리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의 세계는 바싹 마른 들판과 같아서 한번 붙은 열망의 불길을 끌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C. 예수님과 동일한 정신으로 기도함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광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는 이 처절한 절규는 우리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가시면서 남긴 이 기도는 복음을 듣지 못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영혼들을 위해 예수님과 동일한 정신으로 기도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오늘날 현대 교회는 열심히 교인들을 조직하고 동력화해서 많이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도 많이 보내는데, 왜 그에 비해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까?’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복음 전파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고 하며 복음의 내용을 가지고 문제를 삼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시대 사람들이 너무 개화한 시대에 살기 때문에 원시적인 방법인 ‘말’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별 반응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전달매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담대한 사람들은 성경에 예언한 바와 같이 이 시대의 사람들이 다른 어떤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고, 그 중의 어떤 것들은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렇게 복음을 위한 많은 노력에 비해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단지 복음의 내용이 어리석기 때문이거나 전달매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道)가 현명한 도(道)였던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이 세상 사람들이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까? 이천년 전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로 간다고 해도 “누가 우리의 전한 것을 믿었느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시대가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했고, 지혜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도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결론적으로 이렇게 열심히 전파하고 새로운 전달매체를 간구하고 많은 노력을 해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이유들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십시오.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늘 있음에도 그들은 더 많이 기도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구원받았으나 자신에게 영혼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기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 그들의 기도는 십자가의 사랑과 그 사랑을 모른 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아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부르짖는 애통이었고, 자신에게는 구원할 능력이 없으므로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고백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항상 복음 선포에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가져왔고, 그 놀라운 능력이 사람들에게 변화의 역사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훈은 이것입니다. 그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이 충분히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로 희생한 적도 없으면서 간단하게 ‘저들이 복음을 듣지 않는 것은 저들 자신의 강퍅한 죄 때문이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강퍅하기로 말하면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장본인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그들을 위해서 변명하시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자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주시기를 아버지께 구하셨습니다.
III. 결론과 적용
예수님께서 일생동안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생애를 사시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까지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시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광경을 본문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이 고난을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미 하나님과의 화목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 우리의 사랑하는 지체들이 이 회심의 길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에게 복음은 열심히 전했지만 우리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들의 죄를 우리의 죄인 것처럼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당하는 고난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받으면서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삶을 사는 사랑스러운 지체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심장부
마 27:45-54 / 김남수목사
어저께 아침에는 오늘 아침과 같은 본문 말씀을 마가복음으로 읽었습니다. 오늘은 같은 말씀을 “십자가의 심장부”라는 제목으로 다시 읽으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가장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I. Watts는 그의 찬송시에서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웬 일인가 웬 은혠가!” 이렇게 썼습니다. 또 그는 또 이렇게 십자가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힘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못 박힌 손발 보니 큰 자비 나타나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참 놀라운 찬양시 아닙니까? 불후의 명작입니다. Watts는 십자가가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그렇게 찬양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면, 세상의 욕심이 다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맘을 다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은혜에 못 이겨 자신을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8, 25에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엘리, 엘리 라다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었는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엘리야가 그를 구원하러 오나 보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의 고통을 흥미거리로 여겼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하나님의 아들의 고통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값싼 동정심을 베풀었습니다.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셔서 지팡이에 매달아 예수님의 입에 “입이라도 축여라” 하면서 입에 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통이 안타까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지금 그가 엘리야를 부르는 재미 있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만 이 사람이 죽어 버리면 재미있는 구경을 놓치게 될까봐 조금이라고 고통을 덜어줘서 오래 살게 하려고 장난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고통을 그런 무지한 사람들은 이해 못하고 자신들의 흥미거리로 여긴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은 엘리야를 부르신 말씀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이라도 해 보려고 엘리야를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를 아시지요? 그는 죽지 않고 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그런 엘리야가 나타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데리고 하늘로 승천하는 그런 장면을 사람들은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보인 것처럼, 갑자기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예수님을 구원하는 그런 장면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한 사람의 고통의 절규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아들의 외로운 절규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그 고통의 절규를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부르짖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아픔이 있었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화목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죄를 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화목제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세상 어떤 것도 제물을 대신 할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죄는 컸습니다. I. Watts가 그렇게 찬양하지 않았습니까?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금은 보화를 다 동원해서 드려도 그것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할 화목제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못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제 저는 그 말이 너무 평범해서 싫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요. 오늘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흔하고, 너무 값싸고, 너무 평범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보여 주신 그 놀라운 일을 표현하기에는 “사랑”이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너무 평범합니다. 다른 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는 “사랑”이라는 말 밖에 다른 말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께서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말씀은 자기 사위에게 씨 암탉을 잡아 주는 장모의 마음입니다. 장모는 사위가 오면 씨 암탉을 잡아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씨 암탉은 닭을 불리는 재산입니다. 씨 암탉이 있어야 닭이 불어납니다. 그런데, 사위가 오면 장모는 씨 암탉이라도 잡아 줍니다. 왜 그런가요? 자기 딸을 사랑해 주라고, 자기 딸을 행복하게 해 주라고, 자기 딸까지 준 마당에 장모는 사위를 위해서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위가 오면 아까운 씨 암탉이라도 잡아 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도 그런 말 아닙니까?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외아들까지 내 준 마당입니다. 그런 마당에 무엇이 아까운 것이 있겠습니까? 더 이상 하나님께는 우리를 위해서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벌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총 집약되어서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펼쳐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시냐?” 하는 질문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장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34:6-7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 앞을 지나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이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이다. 나는 그리 쉽게 노하지 않으며 사랑과 진실이 큰 하나님이다. 나는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잘못과 허물과 죄를 용서할 것이다. 하지만 죄를 그냥 보고 넘기지는 않겠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삼대나 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릴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기가 누군지 확실하게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쉽게 노하지 않고, 사랑과 진실이 큰 자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LORD, the LORD, the compassionate and gracious God, slow to anger, abounding in love and faithfulness.”
이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에 자기 아들까지도 버리시는 하나님, 자기 아들까지도 화목제물로 내 놓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의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죄가 있다고 판단하겠습니까?” (로마서 8:33-34) 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2)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얻은 말씀이라고요. 오늘 우리도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같은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 받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를 정죄했던 사탄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제는 더 이상 사탄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권세입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라고 선언한 말씀의 뜻입니다.
나의 하나님
마 27:45-56 / 박지온목사
"우리 갈길 다간 후에 보좌 앞에 나아가 왕의 왕께 경배하며 면류관을 드리리..."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 언약 속에 여러분과 제가 섰습니다. 오늘 이 찬송을 일부러 제가 부른 것은, 그동안 찬송을 제가 못했습니다. 호흡이 안되고, 또 음성이 올라가지를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얼마 전부터 치료를 해주셔요. 그래서 어제 저녁에도 찬송을 한번 부르면서, 가정예배 드리면서, '당신 음성이 너무 좋다! 찬송한번 더 하자!'고 그러더라 구요. 또 한곡 불렀죠. 부르고 나니까, '너무 좋다! 또 한번 더 하자!'고 하더라 구요. 또 한 곡 불렀어요. 그러고 나니 나도 좋은 것 같아요. 음성이 잘 올라가는 것 같고 별로 모르고 살았는데, 또 한곡 더 부르자고 그래가지고 어제 가정예배 드리면서 네 곡인가 불렀습니다.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보다도 가정예배 찬송 부르다가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잘 없는데, 우리 집사람도 눈물 흘리고 저도 눈물 흘리고,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간다! 그런 확신이 들어서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그래서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에게 '지금 병들에 있어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가시는 구나!' 우리가 지금 건축하고,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고난받고 어려움 중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은 지금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왜?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에서 제목을 뭐라고 잡았느냐 하면, '나의 하나님'이라고 그랬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기에 나의 하나님이라고 나오는 배경이 46절에,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지난주에 '그리스도냐? 바라바냐?'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걸 알지 못할 때에 종교에 빠지고, 일찍이 예언하고 일찍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성취를 알지 못하고, 바라바를 선택했던 이스라엘의 고통과 그 후손의 저주와 그 후손들의 처절한 모습을 우리가 봤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그러면서도 종교 생활에 빠져 있는 것, 우리도 알지 못하게 그리스도보다도 바라바를 선택하는 것, 그러면서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붙잡고, 언약을 붙잡고 언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자아의식! 결국은 종교입니다. 내 노력, 내 감정, 내 생각, 내 느낌, 여기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결국은 믿고 살아가나 저주와 재앙과 사단의 통로에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통 속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난 헌신하는 청지기 주일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믿음대로 되라!' 특별히 금년도에 작정하고 헌신하는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경제에 축복할 수 있는 먼저 내게 그릇이 필요하다! 그래서 최소한 십일조, 그리고 우리는 선교헌금의 십이조! 이런 기준조차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 구요. 그리고 또 제가 지난번에 건축헌금을 하시고 3년이 지났는데, 건축 헌금에 대한 이렇게 헌신하는 과정을 쭉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참 우리 자신들의 그릇이 너무 작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다면 하나님 앞에 이 '축복, 축복!'을 말로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 앞에 이 진실한 헌신이 왜 안 되는가! 그런 생각이 좀 드는 그런 마음을 느꼈어요.
무슨 생각이냐 하면, 그게 믿는 마음인지, 안 믿는 마음인지는 모르지만, 물론 사정이야 다 어렵다 그렇지만 건축헌금을 하고 난 후에 3년 동안 만원도 안낸 사람이 있어요. 헌금을 작정해 놓고, 내가 마음에 무슨 배짱으로 예수 믿는지 모르겠다싶어요. 받아합시다. "배짱 좋다!" 나는 이게 이해가 안 되요. 이건 핀잔 이전에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느냐?' 싶은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종교생활 걷어 치워야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리고 내가 세계를 살릴 세계복음화의 위대한 건축에 동참했다! 이게 안 믿어지는가 봐요!
그래서 상당히 제가 그걸 보면서 찹찹한 마음이 들더라 구요. '예수가 그리스도다! 구원받았다! 참 감사하다!' 그렇게 나올 리가 없죠. 그렇다면 그러면 근본 우리가 다시 기초로 돌아간다기보다도 근본문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깨닫고, 정말 저주와 영원한 멸망 속에서 해방 받았다! 이 사실이 조금만 이해된다기보다도 조금만 믿어져도 달라집니다.
여러분 이것을 제가 말씀하는 것은, 이것이 우리의 현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믿는다 그러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고 그래도, 역시 우리가 지금까지 붙잡혀 있는 흑암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현장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닌다 그러면서도 현장입니다. 여러분이 믿는다고 그러면서도 믿음 없어요. 어떤 면에서 열심을 내는 것 같아도 불 신앙입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 배경이 지금 우리가 잡혀있는 배경이거든요. 이것이 우리가 '현장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는 예수님께서 이 고백을 하실 때에 모습을 볼 수 있잖아요.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그분이 최후에 처절할 고통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에서 마지막 부르짖는 모습이 뭐냐하면, '왜, 나를 버리십니까?' 이건 여러분들이 지금 십자가에 대한 고통을 그냥 우리가 미화해서 자꾸 바라보니까 별로 못 느끼지만, 예수님이 지금 당하시는 이 최후의 십자가상의 고통은, 그건 말로 할 수 없는 겁니다!
왜? 너무 고통스러운 형벌이기 때문에, 노예들 말하자면 죄수들 중에 특별히 아주 흉악한 죄수들에게만 지웠던, 로마인들에게는 십자가형틀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장! 바로 그 현장은, 예수님께서 이 고통의 현장에서 최후의 절망의 그리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그런 고통의 호소를 말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딱 붙잡고 계시는 그 한가지 내용이 뭐냐하면, 언약입니다.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구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여러분 여기에 여러분과 제게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리고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지 아니하시면 안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왜, 처절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고통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왜, 하나님이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 그게 지금 여러분과 제가 처해있는 같은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이런 고통을, 이런 괴로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의 약속하신 그 역사를 이루셔야 하는 이 뼈아픈 괴로움을 왜 하나님이 당하셔야 하고, 이루셔야 하느냐? 그게 바로 여러분과 저의 현장에 문제예요. 이 현장에는 우리 주님이 이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사단의 배경을 여러분과 제가 똑같이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이 오랜 기간, 벌써 한 5,6년을 계속해서 이 고통을 당하면서 어떤 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면서 그러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아프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뭐가 어려우냐 하면, 영적 문제가 오는 것이 어렵습니다. 여러분 아마 오랜 기간동안 고통을 당하고, 잠깐 감기한번 걸리는 데도 어려운데, 이게 오랜 기간 되니까 영적 문제가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저께 제 손이 부어있는 때인데, 같이 점심 식사하러 나가있는 동안에, '목사님, 손발이 다 부었습니다!' '부은들 어떻고, 안 부은들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까지 해야죠!' 이러니까, 가만히 쳐다보더니만 뭐라고 하느냐? '목사님 대단합니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었죠.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래도 견딘다기 보다도 뭔가 어떤 그 믿음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참 존경스럽다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보통으로 들었습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맞아!' 견디기 힘든 영적 문제가 올 때는 밤에 잠을 못 자거든요. 벌떡 일어나서 옥상에 올라가기도 하고, 일어나서 책상에 앉아서 계속 사단을 꺾어야 합니다. 계속 그리스도 없으면 안 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그냥 그 아마 상상하기 힘들 겁니다. 여러분이 아마 당해보지 않으면 상상이 안될 것 같아요. 상상하기 힘든 영적 싸움을 하는 겁니다. 내가 '이 복음을 몰랐고 위대한 그리스도의 역사를 몰랐다!' 그러면 꺾이는 겁니다. 그건 뭐 사정없는 거죠. 잡혔다! 사정없는 거죠.
어떤 때는 그런 영적 문제가 올 때는,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정도 계속 기도하는 동안에, 온몸에 땀이 나면서 하나님이 승리의 새로운 기쁨을 주시는 그런 때가 있어요. 그때까지 깊은 영적 문제와 비상한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번 두 번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어떤 면에서 밤이 두렵기도 해요. 그런데 그것이 한번 두 번 올 때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으나, 내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지금도 이런 중에도 위로가, 참 위로가 있었던 것이 뭐냐하면, 이런 중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믿음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때부터 그 시간을 별로 그렇게 힘들지 않게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우리 교우들 중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나는 이런 병고로 현장에서 영적 문제를 느꼈지만, 실제로 나와 같은 병을 통해서 오는 영적 문제로 시달리는 사람도 있지만, 사건이나 일의 어려움을 통해서도 영적 문제가 옵니다. 여러분 모든 사건과 일에 견디기 힘든 어려움을 통해서 똑같이 어렵다는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왜, 문제가 오느냐? 그게 사단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영적 문제가 옵니다.
그래서 통계를 그렇게 보잖아요.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이 약 한 10%정도입니다. 그냥 정신병원에 입원은 안 했지만, 직장생활은 겨우 하고 있으면서도 표나게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한 20-30%정도 돼요. 통계적으로 그렇게 되면 거의 한 30% 아닙니까! 어떤 면에서 정신 문제로 고통을 당한다는 사람들이 병원에 입원하거나, 입원하기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30%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70%는 정신병원에 안가고 시달리고 있지 않은 것 같아도 염려와 걱정과 근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걸 뭐라고 그럴까요? 이건 정신병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정신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이런 사람들이 70%입니다. 그게 다 말하자면 100% 시달린다고 봐야죠.
왜, 그렇습니까? 현실적으로 사단에게 잡혀 있습니다. 이 흑암에 실질적으로 잡혀 있는 그런 분들이 다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나는 괜찮은 것같이 뭔가 이 괜찮다!' 그렇게 보여질지는 모르지만, 한번 조금만 따져보세요. 받아합시다. "나는 정상적인 정신병자이다!" 말이 안되지만 말이 되는 것이 이겁니다. 다 정상인인데, 전부 정신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세요. 약간만 건드려 보세요. 이상하게 막 성질이 나오고, 폭발이 나오고, 히스테리가 나오고...
나는 우리 집에서 그 때에 그 호흡이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중에도, 뭔가 이 영적 문제에 막 시달리고 이런 것을 내가 못 봤거든요. 그게 참 은혜다 싶어요. 그런데 몇 일전에 내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대화하는 동안에 내가 짜증을 좀 내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갑자기 막 그냥 생전에 안 그랬는데, 돌아버리더라 구요. '아, 저 사람도 돌았구나! 정상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 집 한 사람뿐인 게 아닙니다. 여러분 가정에 전부 돌기 직전입니다. 조금만 건드리면...
왜? 지금도 흑암, 지금도 사단이 역사 합니다. 사건과 일을 통해서 여지없이 영적 문제에 빠졌다는 정도가 아니고 빠져있어요. 고통과 재난과 재앙으로 어려움으로 이끌려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길이 다른 길이 없어요.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흑암 세력과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셔야 하는데, 그 깨뜨리시는 길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이건 십자가의 고통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되는 과정을 겪어야 흑암 세력을 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는 겁니다.
저는 이런 어떤 배경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십자가 지시는 고통을 겪어야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다 이루었다!' 선언이 나왔습니다. 여러분과 제게 지금 당하는 사건과 일들, 고통, 괴로움, 그 일을 당할 때에 우리는 흔히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정말 처절하게 고통에서 부르짖는 속에서도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 지금 여러분과 제게 나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구나! 이 믿음 가질 때에 아니 이 믿음이 여러분과 저뿐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성취시켜 나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그 교회를 건축하면서 제가 '사람과 직장과 개인과 가정에 교회를 회복해 주시옵시고...' 이 기도를 지금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고 있는데, 어느덧 제 마음에 뭐냐하면, '맞아!' 어떤 면에서 내가 당신들을 대신해서 아프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바로 대형 교회를, 큰 교회를 건축했다! 내가 지금까지의 생각과 지금까지의 마음이나 지금까지의 어떤 힘으로 큰 교회에 갔다! 꼴이 안 되는 겁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큰 교회를 짖기 전에 먼저 누구부터 바꾸어야 됩니까? 하나님이 '박 목사부터 바꾸어야 되겠다!' 그게 마음에 너무 많이 와 닿아요. 내가 지금까지 어떤 좁은 생각, 수용 못하는 생각, 이것 가지고는 일이 안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어떤 힘으로는 큰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없다!
그래서 어쩔 때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는 이 말씀을 보면서, '맞아, 내가 고백할 문제구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것 같은 이 순간에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시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맞아, 나는 대형교회에 가서 강단에 섰을 때에 지금 이 모습으로는 안 되겠구나! 이 생각으로는 안되겠구나!' 이 생각이 내 마음에 들면서, '주여, 지금도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지금도 성취되어가고 있습니다!' 믿음이 나와야 됩니다. 절망대신에 믿음이 나와야 뭐가 나옵니까? 믿음이 생겨야 용기가 나옵니다. 믿음이 생겨야 지혜가 나옵니다.
나는 새로운 교회에 가는 성도들로 여러분들이, 또 새로운 하나님의 영육 간에 축복해주실 귀중한 그런 백성들로 새 교회에 간다고 그럴 때에 장로님을 비롯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특별히 중직자들에게 하나님이 지금의 모습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경제적으로 아니면, 또 여러 가지 모든 문제로 지금 돈이 펑펑 남아돌아 가지고 그렇게는 안 할 것 같습니다. 왜? 어려움 속에서, 어저께 핵심 메시지 속에서 경제가 부족하다!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에 눈이 열리면,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돈이 없어야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눈으로 돌아갑니다. 돈이 있으면, '아, 돈이 있구나! 잘 돌아가는구나! 참 우리 계획한 것이 잘 되어 가는구나!' 이렇게 될 겁니다. 돈이 없어야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고, '하나님 계획이 어디 있습니까?' 이럴 것 아닙니까! 여러분 큰 교회를 맡기실 때에, 큰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연단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교회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짖고 여러분과 저를 교회 속에서 세계를 살릴 제자로 세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냥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역사 속에 큰 일을 한 사람 치고 아무런 어려움 없이, 아무런 고통 없이 조용하게 큰일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죽다 살아야 큰일을 합니다. 일부러 고생을 하겠다고 뛰어들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이 큰일을 맡기실 때는, 큰 일을 맡길 연단을 하고 맡기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 잘 알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고 알기는 너무 잘 알면서도 큰일을 맡기려고 연단하면 죽는다고 소리지릅니다.
요셉도 하나님이 세계를 살릴 일꾼으로, 렘넌트로 키우고 세우기 위해서 그냥 놔둔 것이 아닙니다. 노예로... 그러면 뭘 말하려느냐하면, '우리가 노예로 들어가서 뭔가 주인에게 인정받았으니까 기적이구나! 야, 하나님의 은혜 받았다!' 그럴지 모르지만, 그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로 끌고 가서 딱 물을 가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로 가서 물을 갈라내신 이유는 그 백성을 어디로 끌고 가기 위해서? 가나안 땅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 속에서, 워낙 이스라엘 백성이 못 믿으니까! 안 믿으니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믿고 나가면 그렇게 보일 필요도 없죠.
그래서 핵심에서 그런 배경이 안 나왔습니까! 여리고가 무너지는 것도, 요단 강물이 갈라지는 것도, 그게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 불 신앙하는 사람들은 뭐냐하면, 그게 일이 일어나면 좋다고 막 박수치고, '야! 기적 봤다고... 하나님이 역사 했구나! 감사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워낙 안 믿으니까, 요단강을 갈라 가지고 '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구나!' 어디까지? 가나안까지 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 나가는 도중에, 중간에 뭔가 좀 위로할 수 있는 기적들이 일어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문제들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이 이제 우리에게 크게 역사 하신다! 위로 받을 수 있죠. 그러나 받아합시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 그 부분입니다. '의심하느냐? 내가 능력이 없어 못하는 게 아니다! 힘이 없어 못하는 게 아니다!' 여러분과 저를 세계 복음화에 귀중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제자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목표를 두고 이끌고 가실 때, 워낙 불 신앙하니까! 이렇게도 달래보고, 저렇게도 달래보고... 그래서 조금 조금 기적도 나고, 뭐 하다가 안되면 이렇게도 해보고...
제가 이렇게 뭔가 고통하면서 보니까 어려운 것이 대게 어려우면 무슨 기도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살려주이소, 살려주이소!' 나도 모르게 이 호흡이 힘들고 그럴 때에, '하나님, 살려 주이소, 살려주이소!' 그러면 또 신기하데요. 또 힘이 나요. 편안해 지고, 또 그러면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웃음이 나와요. '이게 인간이구나!' 조금 위로 받는 것! 거기에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하나님이 '너를 통해서 내 뜻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뜻을 못 봐요. 오늘 예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절망하고 외치는 것 같지만, 이 속에서 예수님은 뭘 봅니까? 나의 하나님, 그 뜻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었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요즘 메시지 속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는데도 응답하신 것을 보는 눈이 없어서 문제다!' 그랬습니다. 요셉이 세계를 살릴 꿈을 꾸고, 해와 달과 별이, 열한 별이 절하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여러분 이게 뭡니까? 요셉이 언약 속에 들어가고, 언약을 이루는 기도의 첫 번째 성취가 노예로 쫓김을 받는 겁니다. 여러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께서 원대한 축복의 계획을 세워놓고,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여러분 언약을 붙잡고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응답되는 첫 번째 형상들이, 문제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생각밖에 고난일수도 있고,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응답에 눈이 열리면 그 순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기뻐할 수밖에 없죠.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눈이 열리지 않으니까,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이 마지막 창세기 45장에 자기형들 앞에서 뭘 말했습니까? '형님들이여, 나를 판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당신들 앞서 나를 보냈나이다!' 여러분 노예로 감옥에 들어가는 것, 모든 것이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는, 그 언약을 이루는 기도에 뭡니까? 응답이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조금만 우리가 눈을 뜨게 되면, 오늘 당하는 현실의 모습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향한 엄청난 언약을 이루시는 응답의 역사입니다. 이 축복에 눈이 열리면 바울의 말한 것처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나올 수밖에 없어요. 이게 안되면 거꾸로 되는 겁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처음 송구영신예배 때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이 메시아 왕국을 건설할 때에 그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는 뭡니까? 첫 번째 응답이 핍박이 있고, 사울에게 쫓김 받는 것이었고, 그리고 원한 가진 자, 빚진 자, 억울함을 당한 자들의 장관이 되는 모습을 우리가 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엄청난 축복과 은혜의 약속을 성취시켜 나가는 과정 속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응답을 못 본다! 이것이 우리도 모르게 불 신앙으로 빠져 가는 문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은 잡으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에 흑암과 사단의 권세는 완전히 깨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십자가 지시기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영원한 저주와 재앙에서부터 그리스도가 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똑같이 지금 그 과정 속에 서서 나가고 있습니다. 고통이나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올 때에 우리는 절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받아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누가 하십니까? 나의 하나님이 하고 계십니다. 그 언약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은혜와 약속을 이미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눈을 열어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과정 속에 서있으면서도, 축복을 안 주신다고 고함치고 살아가는 불 신앙!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완전히 추방될찌어다!' 결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 세대에, 이 민족과 이 세계를 구원을 놀라운 축복의 사명을 가지고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나의 하나님이신 당신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
마 27:45-56 / 박지온목사
본문 마태복음 27장에 몇 구절 조금 이해를 하고 지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그랬습니다. 조금 뭐라 그럴까, 우리가 당하는 또 내가 당하는 고통, 그래서 내가 당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왜 이렇게 되느냐 하는 어떤 어려움이 올 수 있습니다 만은, 바로 그 당하는 고통도 나의 하나님이 주신 고통입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나의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과정이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에 그냥 지나가고 내가 안 당해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만은 중요하게 우리가 지금 이 말씀 속에서 깨달아야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안 당하면 안 되는 고통입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당해야 됩니다. 그래야 메시아가 되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나의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으로 세상이 구원이 되고 또 나가서 여러분과 제가 이 생명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하시는 예수님은 너무 힘드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이런 처절한 고통에 괴로움을 호소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먼저 이 교회를 건축할 때에 불과 몇 명 안 되는 교인들로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앉아있는 교회를 건축을 했었습니다. 그때 뭐 이미 상황 설명을 제가 많이 드렸습니다 만은, 교회 건축에 어떤 그 회계를 볼 사람이 없어 가지고 전부 돈을, 요즘은 우리 장로님들이 다 하시고 집사님들이 다 하시지만, 제가 돈을 빌리는 것, 주는 것 뭐 이런 것을 다 했습니다. 하고 나니까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 교회 건축하고, 그 다음에 중간에 몇 번 짖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그랬습니다 만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 교회는 다시는 안 짖겠습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불러 가지고, 어느 날 밤 '박지온 목사 교회 지어라!'는 소리를 안 하면 안 짖겠습니다! 이런 생각까지 하고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안 지으려고... 그러니까 이 60이 가깝도록 안 지은 것이죠. 그 동안에는, 그런데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 주시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에 눈을 떠보니 교회 짓는 한복판에 서있어요. 그래서 제 마음에 내가 안 지으려고 그랬는데 왜 하나님이 또 이런 일을 맡기십니까? 그때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네가 안 지으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짓는다! 그러나 네게 맡겨서 네가 지을 수 있도록 또 너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지을 수 있도록 맡겨질 사람들에게 주실 축복은 없다!' 나는 상당히 좀 두려운 것이 뭐냐하면, 뭐 '기도한다! 교회 건축을 위해서 기도한다!' 뭐 이렇게 한다 그럴 때에, 또 그 다음에 이 교회 건축을 통해서 오는 여러 가지 뭐 재정적인 압박이라든가, 이런 모든 것이 옵니다. 반드시 오게 되어 있어요. 올 때에, '하나님, 왜 내게 이런 부담을 주고, 이런 짐을 지워줍니까?' 그럴 때에 뭐로 생각이 되어지느냐 하면, '네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짓는다!'
그 에스더에게 하신 말씀이 국가가 위기에 있을 때에, '이런 축복된 자리에, 그 왕후로 서게 된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니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가 교회 건축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교회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런, 그 내가 안 하면 안될 수밖에 없는 이런 자리에 섰던 문제거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을 때에 그걸 뭐로 말씀하고 싶으냐 하면, '나의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끝나게 하는 그런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고, 여러분과 제게 너무 축복되고, 너무 은혜로운 계획 속에 서있다는 고백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고통 속에 있지만, '누구에게도 주지 않는 놀라운 축복의 기적 속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성경에 믿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받아합시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가 조금만 무슨 문제가 있으면, 제일 먼저 떨어지는 것이 뭡니까? 사실은 '힘이 떨어진다! 뭐가 떨어진다! 뭐가 없다!' 아닙니다. 믿음부터 떨어집니다. 사건이 생기면 믿음부터 떨어집니다. '돈이 없다, 뭐가 없다!' 전부 핑계입니다. 뭐가 없어요? 믿음이 없어요.
류 목사님의 메시지 예화 중에 소 눈, 소 입 아무리 구분해도 소머리 하나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뭐가 없다? 뭐가 없어요? 돈이 없어요. 그 속에 다 들어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지금 신앙생활 쭉 하면서 살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하면, '이게 안 된다! 저게 안 된다! 뭐가 어떻다!' 그런데 그 배경은 딱 하나입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이것만 회복되면 다 되는 겁니다. 이것이 안되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오거든요.
그래서 신앙생활에 저는, 그 뭔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 현장에 부닥칠 때마다 제일 먼저 떨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일먼저! 그래서 이게 누구의 배경이냐? 흑암에 배경이죠. 사단의 배경입니다. 왜? 하나님과 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그걸 딱 떨어뜨리게 만드는 것이 흑암과 사단의 배경입니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과정을 거쳐나가는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그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당장 이스라엘을 달랑 들어 가지고 가나안 땅에 옮겨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수많은 고생들을 40년 동안 시키면서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했느냐? 그리고 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에서 탈출 했을 때에, 어째서 홍해에서 기적을 행하여 주셨느냐? 그런 기적을 행하실 것 같으면, 아예 그만 이스라엘 백성을 뭐 그렇게 어렵게 하지말고, 광야를 희한하고 신비롭게 구름을 태워 가지고 가나안으로 보낼 수도 안 있습니까! 그런데도 왜 그런 과정을 쭉 거쳤느냐? 딱 하나입니다. 뭐라 구요? 믿음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적을 자꾸 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소서!' 그럴 때에, 믿음이 없는 세대라 그랬습니다. 왜? 믿음이 없으니 자꾸 기적을 구하는 겁니다. 여러분 홍해를 가른 것은, '아, 기적이다! 참, 감사하다! 참, 축복이다!' 그건 축복과 감사보다도 다른 이유입니다. 뭐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보내시겠다는, 그리고 가나안 땅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언약을 믿는 믿음을 일으켜 주시는 겁니다.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홍해의 기적을 일으켜 주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이 늘 어디에서 빠지느냐 하면, 홍해의 기적을 일으키는 그것을 목적으로, 그것에 취해 가지고, 그걸 좋다고, 그 일이 생기면 감사하다 그러고 그 일이 없으면 아니다 그러고... 한번 받아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 해결자이시다! 이 축복은 당연하다!" 믿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부르고, 뭐 조금만 이상하게 이런 일이 잘되고, 열리고 그러면, '아, 참 감사하다!' 그게 뭐냐? 그건 기복신앙이라 그럽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당연합니다. 여러분과 제게 언약 속에 설 때에 약속한대로 말씀이 성취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 기적이 어쩌다가 이루어지고 어쩌다가 그런 것이 나오면, '아, 기적이 참 신기하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날마다 순간 순간마다 기적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계속 기적이 나와버리면 기적이 기적 같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신앙에 이 언약에서는 축복의 역사를 놓쳐버리면 뭘 구하느냐? 기복신앙에 빠집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 그럽니까? 종교라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어려움에 부닥칠 때에, 문제에 부닥칠 때에, '기적을 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빠져들지 말자! 이겁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뭘 요구하시느냐? 계획만 봐버리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성취되고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저는 여기에 올라올 때에 겨우 올라왔어요. 이 걸음을 잘 못 걸으니까! 그리고 집에 있으면 요즘 조금 회복이 되어서 지난주에도 찬송을 한번 불렀습니다 만은, 하여튼 이 강단에 섰다 그러면 멀쩡합니다. 하도 이게 확실하게 되니까, 여기 올라올 때까지는... 그래서 오늘도 집에서 '그래가지고 되겠나!' 그러는데, '상관없다!' 하여튼 내가 이 시간 여기 섰다 그러면 되니까! 그러니까 첫 번째, 두 번째는, '참 신기하다! 오늘 내가 이 뭔가 메시지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참 오늘도 감사하구나!' 이런 생각이 들다가 지금은 그 생각도 없어요. 응당히 당연한 겁니다.
기적도 한번 두 번 나오고 어쩌다가 나오면 기적인데, 그게 계속 나와 버리면 뭡니까? 당연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언약 속에 설 때에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 기적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 기적을 일으키시는 뭡니까? 하나님의 계획에 눈이 열려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회복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문제는 낙심이 문제고, 실망이 문제이지! 어떤 문제와 사건이 생겼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회복된다! 여기에 모든 해답이 있고 모든 응답이 다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주간에도 강조했습니다 만은, 뭔가 지금 어렵고 힘든 그 자체가 응답입니다. 요셉이 하나님께로부터 세계 살릴 약속을 받았습니다. 약속을 받자말자 첫 번째 응답이 노예로 팔리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축복을 받고, 약속 받고, 언약 속에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에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왜 이럽니까! 엘리 엘리 라마사막다니! 왜, 나를 버리십니까!' 그게 바로 나의 하나님의 뭐라 구요? 응답입니다. 이 눈만 열렸다! 끝나는 것 아닙니까! 말로는 뭘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 그런데도 뭐가 없어서 안 되느냐? 믿음이 없어서 안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들은 오늘 우리가 한번 다시 또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다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세웠는데,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가 축복을 받고 있는 응답 속에 서 있으면서도 축복을 회피하는, 거절하는 이런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언약 속에 확실히 서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눈이 열려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 그분은 어떤 분입니까? 전능자십니다. 그분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다 이루실 것입니다. 믿음이 문제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하필이면 교회건축 할 때를 이 어려운 때로 하나님이 허락하셨느냐? 또 왜 하필이면 이런 힘든 때를 허락하셨느냐? 그래야 하나님의 계획이 더욱 확신되어질 것 아닙니까! 뭐 돈이 많이 있어서, 남아돌아 갈 때에 교회 건축한다! 그러면 내가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쭉 건축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일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구나!' 이 사실을 깨우치기 위한, 이 믿음을 깨우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그래서 저는 이 2004년이 상당히 중요한 해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중요하냐? 흔히 우리가 교회 짖는 시간 때문에 중요하다! 그렇게 볼 수가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 믿음의 눈으로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응답을 보는 뭐가 필요하냐? 믿음준비가 필요합니다. 다른 게 필요 없어요.
그래서 제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 만은, 저 큰 교회에 갈 때에 지금 우리 다 모아봐야 400명, 500명입니다. 1, 2부 다 합쳐도, 그런데 저기 가면 당장 몇 명입니까?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인원이 2,050명입니다. 현재 500명으로 잡아도 2,000명이면 몇 배입니까? 4배정도 됩니다. 이 교회의 그릇으로 목회를 하다가 저 쪽에 갔을 때에 달라져야 됩니다. 달라지는데 뭐가 달라지느냐? 마음과 생각과 특별히 뭐가? 믿음이 달라져야 됩니다. 다른 문제가 아니죠.
그렇다고 달라진다고 해서 코가 두 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눈이 세게 생기는 것이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작년 2003년도에 살던 사람들이 2003년도에 눈을 두 개 가지고 살았는데, 2004년에 눈을 네 개 가지고 산다! 그런 분은 없잖아요. 제가 지금 가만히 보니까 눈이 한 개 더 생긴 사람 하나도 없어요. 다 똑같아요. 뭐가 달라지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달라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릇이 달라져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차라리 여러분 좀 이상한 소리일지 모르지만, 뭐 성형수술 하는 것은 간단해요. 뭐 말하자면 이마에다가 눈을 하나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믿음이 달라진다! 마음이 달라진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의 체질과, 내가 갖고 있는 우상의 체질과, 내가 갖고 있는 광야에 노예 근성과, 그 체질들이 도저히 안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집사람하고 가정 예배드릴 때에 포럼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어찌 당신은 그렇게 안 바뀌어지느냐?' 아마 이건 내가 우리 집사람한테만 듣는 소리가 아니고, 나도 똑같이 우리 집사람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정 가정마다 똑같은 이야기일겁니다. 어찌 그렇게 안 바뀌어 집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뀌어지는 것 같다가 똑같아요. 은혜 없이는 안됩니다. 정말 은혜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큰 축복과 은혜를 맡기실 때에, 그래서 큰 축복과 은혜의 역사를 담기 위해서 전에 있던 그릇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 깨어버려야 돼요. 있는 동안에는 안돼요. 다 깨어버려야 돼요. 영육 간에 깨어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니까!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그릇으로 만드십니다. 이 과정이 어렵습니다.
여러분 교회도 그럴 아셔야 돼요. 100명, 200명 모일 때는 참 재미있어요. 가족적인 분위기 같고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목회하기가 어려울 때가 언제냐? 100명 이전입니다. 왜 그러냐? 100명 이전의 목회는 한 사람만 이상한 소리를 해도 100명이 다 흔들려요. 그런데 언제부터 쉬워지느냐? 제가 겪은 과정입니다. 300명 이상 지나서 400명 정도 되면 그때부터 쉬워집니다. 500명 넘어가 버리면 별로 어렵지 않아요. 1,000명되었다! 그때는 사실상 100명 목회 할 때보다도 훨씬 편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여러분 우리교회 정도 같으면 어디서 들어와서 한쪽구석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도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숫자가 적을 때에는 막 가족적인 분위기로 좋다가도 한사람이 삐치면 또 다 삐쳐!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뭐가 문제냐? 100명, 200명 있을 때에 내 가슴에 수용하는 마음과 숫자가 많아지면서, 그동안 여러 사람을 겪으면서 뭐가 이루어지느냐 하면, 나 혼자 생각에 '아, 그런 사람도 있지! 뭐, 별게 다 안 오나! 뭐 그런 건 다반사지!' 그게 뭐냐?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이 된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교인들도 아주 숫자가 몇 안 될 때는 '교회가 왜 이러냐! 이런 교회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다가, 여러 사람들을 겪어보면서, 별사람들을 다 겪어 가는 과정 속에서 교인들도 뭐냐? 이상한 사람 있으면, '뭐 교회에 별별 희한한 사람 다 안 있느냐! 그 사람들도 와서 구원받아야지! 나 같은 사람도 왔는데, 그 사람들도 와서 구원받아야지!' 이렇게 돌아가면 옆에서 어지간히 뭐 문제가 생기고, 사건이 생겨도 어떻습니까? 마음이 편안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뭡니까? 그리스도! 여러분 제가 그릇을 설명하면서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때에 뭐부터 만들어놓고? 그릇부터 만들어놓고 담습니다. 그래서 일단 거지도 뭐가 커요? '밥그릇이 커야 된다!' 안 그럽니까! 조그마한 것 가지고는 일이 안 된다니까요.
무슨 이야기냐? 나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순종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시는 고통을 겪어야 되는 것은 뭡니까? 메시아의 그릇이 되려면 십자가를 반드시 져야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세계복음화의 놀라운 축복과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때에 '나의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다윗과 요셉을 비롯해서 세계사에 큰 일을 행한 사람 치고 어느 한사람도 많은 역경과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건 내가 안 져도 된다!'는 어떤 마음이 들기까지! '왜, 내가 이걸 져야 합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시간과 때가 올 때마다 뭐라 구요? 여러분들에게 엄청난 축복과 은혜의 계획을 이루시는 그릇이 되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문제 해결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들의 적고 큰 문제를 하나님이 이루시고 역사 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 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 예수께서 운명하시고 운명하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이 성소의 휘장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지성소와 성소사이에 막을 쳐서 덮어놓은 겁니다. 말하자면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 궤인 약속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상징적으로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늘 휘장으로 희미하게 덮여있어요.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누구입니까? 제사장도 아니고 누구입니까? 대제사장! 그것도 일년에 딱 한번입니다. 그것도 막 그냥 향을 피우고 연기를 피워서 희미한 중에 들어가야 됩니다. 만약에 자칫 잘못하면... 그리고 휘장이 덮여져 있으니까 성소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배드리러 와도 그 대속죄제를 드릴 때에 대제사장이 활동하는 것을 표 내기 위해서 대제사장에게 방울을 달아놨습니다. 움직이면 딸랑 딸랑 소리가 납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말고는 어느 누구도 대속죄제 드릴 때, 한번 이외에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면서 큰 소리로 뭐라고 그랬습니까? '다 이루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메시아의 언약을 주시고 이것을 모델로, 모형으로 양을 잡고, 소를 잡고 피를 흘리던 그 모든 것들을 예수님 한 몸으로 단번에 해결하셨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죽으시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다 해결했습니다. 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주와 죽음과 멸망에 처해있던 원죄, 저주, 사단의 문제가, 근본적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이 되었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도저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던, 오직 대 제사장만, 그것도 피를 흘리고 연기 속에서 희미하게 들어갔던 이런 구약의 모든 법도와 모든 의식들이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완성되었습니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축복 받았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담대히 보좌 앞에 나갈 수 있는 은혜를 받았다! 그러면 지금 문제는 뭐냐? 모든 문제 해결자시다! 안 되는 이유는 불 신앙 때문에, 안나가기 때문에 그렇지, 나가면 다 이루어집니다. 나가면 됩니다. 안 나가니 문제라! 이게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불신앙을 끝까지 주는 것이 뭐냐? 흑암의 세력입니다. 그분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다른 이름으로는 해결이 안 돼! 오직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이름으로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모든 약속을 여러분과 제게 말씀대로 성취해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회복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뭔가 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 어떤 경우 그래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면 응답이 되고, 안되고...'하지만, 이렇게 기도할 때에 많은 경우 '된다, 안 된다!' 그런 어떤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가만히 보면서 뭘 느끼느냐하면, 기도를 강해하고, 기도 강의를 들을 때에, 또 기도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지금까지 내 기도는 하나도 응답이 없는 기도만 했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아마 여러분들도 있을 겁니다. 기도 강의를 쭉 들어보면, '나는 응답 안될 것만 기도했네!'하는 이런 어떤 생각이 들 수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뭐냐? 믿음가지고 기도하면 다 응답하십니다. 응답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찌니라!' 여기에 모든 문들이 있습니다. 왜? 그 이름으로 나아갈 때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모든 문제 해결자이시다! 왜, 그러냐? 근본문제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이 문제가 약속이 된 겁니다. 그러면서 누구도 바라볼 수도 없었고, 들어갈 수도 없었던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어떤 분은 기록에 보니까, 지성소의 휘장이 얼마나 질기냐 하면, 양쪽에서 말 몇 필을 가지고 잡아당겨도 안 찢어진데요. 그런데 그것도 밑에서 찢는 게 아니고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에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은혜의 역사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밑에서 잡아 찢는 게 아닙니다. 위에서부터 찢어졌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여러분과 제게 근본적인 문제의 축복을 하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걸 믿고 믿음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때에 여러분들은 이스라엘백성이 실패한 배경이 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배경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는데,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배경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성탄절이 왜 귀중하냐? 반드시 여러분과 저를 구속하기 위해서는 참 사람이고, 참 누가 되어야 해요? 참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만약에 개미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면 뭐가 되어야 합니까? 개미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은 여러분과 저를 실제로 체휼 하시고, 실제로 죄악과 저주와 재앙 속에 있는 이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사실적인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라고 하죠.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가 뭐냐하면,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 진짜 못 믿는다! 진짜 나쁘다!'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똑같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안 믿어집니다. 목수의 아들로 마리아에게서 났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약 한 30년 간 요셉인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그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해서 집도 짓고,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신 겁니다. 하셨는데 어느 날 '내가 메시아다! 하나님의 아들이다!'이러니까! 유대인이 뭐라느냐 하면, '네가 지금 사람으로 있으면서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이 망령된 사람아!' 그래서 때려죽이려고 했던 겁니다.
여러분 나는 감사한 것은, 그때에 내가 유대인으로 있었다든지, 그때에 유대인이 아니고 그 시대에 내가 있었다면, 나도 똑같이 누구보다도, '저 예수 때려죽일 놈이다! 순 사기꾼이다!'그렇게 했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하나님이라는 증거로 살아나시고, 보좌우편에 가시고, 그리고 또 약속된 누가? 성령이 내게 오셨기에,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이 되었습니다.
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당연한 일이다 싶어요. 요한복음서에 '지금 사람으로 있지 않느냐!' 그랬거든요. 그리고 '요셉이 네 아버지고, 네 어머니는 마리아고, 네가 지금까지 배우지도 못한 게 뭐 잘 안다고...' 그러면서 도저히 뭐냐? 예수님을 누구로? 하나님으로 못 믿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런 때에, 여기 오늘 본문 54절에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여러분 메시아의 역사와 메시아의 축복은 하나님의 계획을 보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일에 눈이 떠 질 때에, 우리에게서 진실한 신앙 고백이 나옵니다. 믿음의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 오신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 있지만 말씀이 들리는 순간에, '아, 맞아! 참,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깨닫는 영을 부어 주셔야 합니다. "이방인이라도 그 되는 일을 보고"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언약이 성취되는,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볼 때에 비로소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메시아구나! 그분은 하나님이시구나!' 이 일이 믿어졌습니다. 이 축복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 생긴다!' 다른 게 아닙니다. 이 일이 이루어져야 돼요. 오늘 이 자리에 오셨으나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은혜 받도록 내 마음을 열고, 내 심령을 열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인가!' 상고하면서 기록하기도 하고, 그걸 붙잡고 한 주간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여러분 삶에서 뭐라고 그럽니까? '주여, 맞습니다. 정말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교회 와서, 그냥 와 가지고 멍청하게 앉아있고, 찬송 부를 때에도 멍청하게 있고, 그리고 메시지들을 때에 오만 생각을 다하고, 오늘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만은 희한한 생각, 더군다나 뭐 명절에 어디 갔다온 생각... 아닙니다. 메시지들을 때에, '정말 하나님, 이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말씀이냐!' 상고하면서 말씀을 가슴에 세기고, 그 말씀이 성취되는 한 주간의 역사 속에 순간, 순간 뭡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일어납니다. '아, 말씀이구나! 하나님이 이루시는구나!' 여기에 이 사건이 역사가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성취되는 곳에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에 축복의 역사가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주일날 교회 와서 앉은 자체가 큰 축복이지만, 말씀이 들려진다는 사실이 너무 너무 큰 축복입니다. 이 들려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현장에서 성취되는 사실에 눈이 열린다! 이건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방인들, 전혀 유대인들과 상관이 없는 이 이방인에게 이는 진실로 누구라 구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이 한 주간 삶 속에서 사건과 일들을 만날 때마다, '어렵다, 힘들다!' 이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이 성취되는 사건을 볼 때마다 믿음이 회복됩니다. '주여, 진짜 맞습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는구나! 말씀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 축복은 여러분에게 기적이 아니라 응당히 당연히 누려야 될 하나님의 역사요, 축복입니다.
많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만은, 오늘 제가 이 말씀 중에서 마지막에 56절에 보면,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그랬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보면서 뭐냐하면, '야, 참 신기하구나!' 어쩌다가 보니까 있었어요. 예수님과의 어떤 관계 속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로 지금 다 이루었다는 현장 속에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여기에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그랬습니다.
받아합시다. "그 중에 나도 있더라!" 역사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성령의 역사에 기록입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는 은혜라 그럽니다. 내가 오고싶고, 내가 행하고,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신 것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 중에 서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어떤 생각을 해봐요. 어쩌다가보니 교회 건축의 현장에 있고, 또 어쩌다가 보니까 은혜 받는 현장에 있고, 어쩌다가 보니까 세계 복음화 하는 현장에 서게 되었고, 어쩌다보니까 뭐 좋은 것은 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쩌다가 보니까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여러분들이 다 받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나도 있더라!' 역사 속에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불러서 특별한 어떤 재주가 있고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이 지상에서 가장 축복된 자리에, '그 중에 나와 자녀들이 있더라!' 이 축복이 여러분과 제게 성취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축복의 진짜 내용을 모른다 그러면, 오늘 이 말을 들으면서도 멍청해 질 수 있어요. '박 목사님이 자꾸 뭐가 있더라 그랬는데...' 혹시 집에 가시거든 '그 중에 있더라!'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뭔가 있더라 그랬는데, '나도 있더라 그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금년 2004년도 하나님의 놀라운 이 축복 속에, '나도, 내 자식도, 내 후손들도 함께 있더라!'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 강성찬목사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치십니다. 이 외침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를 그의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셨다는 뜻을 내포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류 죄악을 위해 마련해 두신 '잔' 인 진노와 심판을 그에게 마시우게 하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실로 예수의 이 같은 절규에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충만한 댓가를 자신의 온몸으로 친히 치르고 계신 예수의 뜨거운 사랑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말 가운데 하나가 버림 받는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친척 제자들로부터 버림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하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버려 두어 죽게 하십니다.
이를 하박국선지는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합 1:13)하십니다.
이사야선지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21)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짐을 지시므로 우리의 죄가 되를 담당하시니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으시므로 십자가에서 버림을 당해야만 한 것입니다.
1. 온 땅이 어두움이 임하여 계속하더니
제 육시로부터 제 구시까지 세 시간동안 어두움이 계속됐습니다. 정오인 가장 밝은 시간이 갑자기 어두워졌으니 모두 사람이 놀랄만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 뜨거운 팔레스틴의 태양이 빛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모든 사람들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죽는 날이기 때문에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즉 세계의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사건이므로 이같이 놀랍고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가장 존귀한 창조물인 인간들에 의해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께서 고난 받으시고 운명하시는 것을 자연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무거운 죄 짐을 대신 지신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지를 보여 주십니다.
이 어두움은 그리스도께서 어두움의 세력 즉 마귀에게 결정타를 주기 위하여 마귀의 땅에서 마귀에게 바람과 해 등 모든 이점을 차지하게 하고 거꾸려 뜨림이며 주님께서 우리 위해 죄가 되시니 하늘의 위로까지 거두시고 악한 자에게 내리는 형벌을 내려서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찬 물 한잔 주지 않고 하늘에서는 한 줄기 빛도 주지 않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캄캄한 가운데 서게 하셨다(핸리)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어두움'은 마치 애굽에서 첫 유월절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재앙 시에 나타났던 3일 동안의 어두움을 상기시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서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출 10:21)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 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출 10:22)그 동안은 사람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출 10:23) 었습니다.
따라서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은 심판 또는 비극을 알리는 표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모스선지는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암 8:9)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암 8:10)고 하였습니다.
전우주적 통치자의 고뇌에 찬 죽음에 대한 자연계의 순응 등의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때가 제 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며 (눅 23:44)라고 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2)라고 합니다.
영혼의 신령한 태양되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물질세계의 태양이 밝은 빛을 잃어서 캄캄하게 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빛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주신 것으로 자연계에 있어서 가장 좋은 선물이며, 축복이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없어진 세계는 곧 하나님의 축복보다 진노가 사랑보다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준엄함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죄인은 이처럼 죽인다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 26:24)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리워져서 어두우리라 (사 5:30)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중국에 해군 제독이었던 "첸"이라는 사람이 캔톤이라는 곳에서 한 부흥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설교에 큰 감명을 받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나눠주는 결심카드에 이름을 적어 내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한 보좌관이 "뭐가 그렇게 급하십니까? 나중에 천천히 적어 내시지요 "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첸 제독은 그 말을 뿌리치고 연필을 꺼내어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셔 드립니다"라고 쓴 결심카드에 주소 성명을 쓰고 싸인을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그 부흥회 장소에서 나오는데 한 군인이 밖에서 첸 제독을 기다리고 있다가 총을 쏘아서 첸 제독은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첸 제독은 그 때밖에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는 옆에 있던 사람의 권고를 뿌리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 들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 때 옆에 있던 사람의 말을 듣고 기회를 놓쳤더라면 그 사람은 영원히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인터넷정보클럽)
기회는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어두움이 임하기전 하나님 만날 준비를 언제든지 해 두시기 바랍니다.
2. 크게 소리 질러
마치 기름이 동난 등불이 마지막 자기 심지를 태우며 희뿌연 연기와 불꽃을 일으키듯, 예수께서는 더 이상 항거할 수 없는 죽음에의 기운과 영적인 고독 앞에서 마지막 기운을 돋우어 성부 하나님께 절규하고 있습니다.
실로 예수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가장 필요한 시간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데 대한 절대 고독감과 심각한 위기적 심경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하고 무거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오는 소리며 성경의 성취입니다.
시인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시 55:17)고 하였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던 세 번의시간을 의미하며(단 6:10;행 3:1) '탄식하리니'(시아흐)는 '전하다' 혹은 '말하다'의 뜻으로서 상대에게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상세히 알리는 것을 가리키며(시69:12;삿5:10;대상 16:9) '근심하여'(하마)는 '큰소리로 말하다' 혹은 '한탄하다'의 뜻으로서, 대개 불안한 심리 상태를 억제치 못해 크게 소리 내어 부르짖는 행위를 가리킵니다(시59:6;겔 7:16).
죄를 향한 하나님의 중오와 보응이 얼마나 엄격하고도 무서운 것인가라 하는 일입니다.
성부로서의 하나님은 버리지 않았지만 죄악을 징벌하시는 심판주로서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이상 철저히 포기하고 간섭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6)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7)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8)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21)
하나님께 버림받아 대속적 죽임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인간 구원을 소망하신 예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카포치아는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였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동료들로부터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삶을 보내던 어느 날 카포치아에게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하루는 조각을 위한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채석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인부가 부족하여 카포치아 자신이 직접 채석장에 나가 작업을 지휘하고 인부들과 함께 돌을 나르며 일을 하던 도중, 갑자기 커다란 돌이 카프치아의 오른손 위로 떨어진 것입니다. 겨우 돌을 들어내고 그를 꺼냈지만 이미 그의 오른손은 완전히 문드러져 버렸습니다. 유명한 의사들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큰 사고였습니다. 조각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끝이 난 것입니다. 카포치아뿐 아니라 그를 아끼던 모든 사람의 실망은 여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현실을 원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른팔을 포기하고 왼팔로 조각하는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꾸준히 땀을 흘리며 운명과 싸웠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작품 활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른팔로 하던 조각보다 더욱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시민들은 그 작품을 마을 한 가운데 세우고 그 작품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작품의 이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였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디럭스바이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로 드리실 때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당하시며 외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를 죄악에서 건지셨습니다. 이 은헤를 입은 우리는 자기 삽자가 지고서 환난과 곤고와 핍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성하며 봉사하며 헌신 하는 일군들이 됩시다.
3.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고통 받으시는 가운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히브리어와 아람어 음역에 따른 시22:1의 인용입니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예언적으로 노래한 시22:1의 말씀이 자신의 찢어지는 듯한 영적 절망감을 예언적로 표현해 놓은 것으로 인정하시고 이 구절을 인용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다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으시고 '나의' 하나님이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성으로 인류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는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며 그 인성은 신성의 절대적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아버지'가 아닌 '나의 하나님'이라 호소하신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외침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19)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결코 모순과 우유부단함과 이중성이 없음을 단언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현실로서 동일한 효력을 나타냄을 보여줍니다(Harris).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순종하시는 그리스도의 헌신이 구원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순정하는 성도가 됩시다.
믿음입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23)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법정에서 아무런 죄 없이 우리를 대신하여 심문과 고난을 당하시는 가운데서 오직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자기 자신과 모든 결과를 맡기시는 믿음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끝까지 믿고 의지 하는 성도가 됩시다.
사랑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죄인에 대하여는 제물을 대신하였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하신 사랑을 봅니다.
존 번연(J. Bunyan)이 쓴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의 중심인물인 기독도가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남자가 등에 큰 짐을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터벅터벅 힘들게 걷고 있습니다. 그는 한 번도 그 무자비한 무게로부터 놓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짐은 밤낮으로 그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정상에 오를 때까지 언덕 위를 비틀거리며 걸어갑니다. 그 곳에서 그는 나무로 된 십자가와 그 아래의 빈 무덤을 보게 됩니다. 그가 십자가에 가까이 가자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의 어깨에 거대한 무게로 묶여있던 짐의 끈이 풀리고, 짐이 흘러 내려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던 무덤 안으로 들어가 버리더니 다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독도의 몸은 가볍게 되었고, 그는 상쾌함을 느꼈으며, 안도의 기쁜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그 때 빛나는 세 분이 그에게 다가오십니다. 그에게 처음 분이 "너의 죄가 용서되었느니라"고 공포하시고, 두 번째 분은 그의 누더기를 벗겨 버리고 빛나는 옷으로 갈아 입혀 주셨습니다. 세 번째 분이 그에게 인을 친 두루마기를 건네주시고 "그 것을 천국의 입구에서 펴보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눠기와 같은 죄의 옷을 벗기시고 의의 옷을 입히신다는 내용입니다. 성령님께서 성령의 인을 쳐 주시어 666의 표를 받지 않게 하신다는 예표입니다.
이와 같은 은총은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위해서 십자가를 감내 하시면서 고통 중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날 버리시나이까 라고 부르짖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어찌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외치심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위로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고 해도 주님의 고통만큼 심한 경우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잃은 채 주위에는 온통 어둠만이 깔려 있는 그야말로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다면 눈을 들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비록 크나큰 고난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연단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신 주님의 고통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예수님의 따스한 위로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가장 극심한 고난을 체휼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을 아시는 주님 버림 받는 고통을 체휼하신 주님 우리를 마지막 심판대에서 우리를 아신다 하시고 천국의 복락으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신앙생활 하며 사순절에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묵상하십시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 46 / 이필재목사
오늘은 온 세계 교회가 성찬을 기념하는 만국 성찬 주일입니다. 성찬을 기념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구약 이사야 말씀에 장차 메시야는 어떤 모습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할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예언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에는 이사야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예언의 초점은 “예수는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에서, 마태복음에 와서 “이제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는 공용어로 세 가지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 가지 언어를 사용하셨음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어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의 전통 언어로 지금까지 유대인들만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입니다. 그 다음으로 당시는 헬라 문화가 많이 전파되어 신약 성경 전체가 헬라어로 기록될 만큼 유대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 말씀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아람어입니다. 신명기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인이라.” 그래서 아람어는 유대 백성들의 뿌리 언어가 되므로 계속 내려와서 예수님 시대에도 아람어를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똑같은 마음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린 아이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내가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 노력을 많이 하게 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말하면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버림당하는 일입니다. 버림이란 쓰레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큰 문젯거리 중에 하나가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입니다. 산업 사회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버리는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러다가는 한반도가 온통 다 쓰레기장이 되겠다.” 이런 생각에서, “어떻게 하면 쓰레기를 줄일 것인가? 재활용을 하자. 그래서 우리가 좀 귀찮지만 매일 분리수거를 함으로 말미암아 나라 전체가 쓰레기장이 되는 것을 면하자.” 그렇지 않으면 얼마 안가서 쓰레기 때문에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게 됩니다. 현대 사회는 이것이 굉장히 큰 불행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에 뉴욕에서는 쓰레기 버릴 곳이 없어 대형 유조선 같은 큰 배에다 뉴욕 사람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를 산더미같이 싣고 이것을 어디다 갖다 버릴까 하는데, 버릴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주변에서는 “뉴욕 주변에서 만들어낸 쓰레기를 너희가 어떻게 해결을 해야지 어디다 갖다 버리려고 하는 것이냐?” 아무 곳에서도 그 쓰레기를 받아주지 않아서 몇 달 동안 바다에 떠서 쓰레기 버릴 곳이 없어 오고가고 참으로 곤란해 했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쓰레기는 없어지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사람이 버려질 때가 있습니다. 고아들이란 버려진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이 고아들이 얼마나 슬픈 삶을 살아야 됩니까? 버려져서 살아야 되니까 고난스럽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 사회의 비극은 노인 문제가 심각하게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려지는 노인 문제가 사회 문제로 등장해서 자식들마저도 부모를 돌보지 않고 버려지는 그런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저도 한국에 와서 몇 년 사니까 사회 유머도 좀 알 것 같고 재미난 이야기 하는 것도 잘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여기에 와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서 한참동안 애를 먹었는데, 남자들이 젊어서는 크게 쓰임 받고 살았는데 늙어지니까 별로 쓸데가 없어서 버림 당할까봐 이사 갈 때 자동차 먼저 올라탄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버림당하는 것은 최대 슬픔입니다. 국제 정치에 대한 뉴스를 보시면, 6자 회담이니 정상회담이니 제네바 회담이니 하면서 날마다 모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국제사회에서 버림을 당하지 아니하려고 신경을 써가면서 회담하고 유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일생동안 영광스런 선택과 버려진 슬픔, 이 두 가지를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같은 날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했는가를 조명해보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버려졌습니다. 출생은 마구간에서 되어졌습니다. 성경에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한 만삭의 여인을 영접하는 곳이 하나도 없어 결국 짐승들의 자리로 전락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실력도 없고 돈도 없고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세상은 어느 나라나 임산부들은 인격 대우를 받는 문화입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지하철에서 보세요. 임산부나 노약자들이 앉도록 표시가 되어있습니다. 임산부들이 지하철을 타고 곤란한 일을 겪지 않도록 “여기는 임산부의 자리”라고 표시해 놓은 것입니다. 만약에 만삭된 여인이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면 특별대우해 줍니다. 제일 좋은 자리를 내어주고 편안히 쉬라고 합니다. 승무원들은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도록 온갖 서비스를 다해주고 어쩌다가 비행기에서 아기를 낳게 되면 그것은 큰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선물을 주고 온갖 혜택을 다 주고 태어난 아기는 앞으로 얼마동안 비행기 탈 때 공짜로 타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 한국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그렇게 태어나서 그 항공사 비행기를 일평생 공짜로 타고 다닐 수 있게 됐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 몸에서 사람이 출산하니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데 예수님은 버려져서 날 때가 없어 마구간에서 출생하시는 버려진 일생으로 시작됩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여 버리라고 하는 헤롯의 절대 명령이 내려져서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고 했습니다. 지금 애굽으로 가면 예수 피난 교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피난 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념교회를 지어놨습니다. 또한, 성장하신 곳은 나사렛이라는 버려진 빈민촌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그곳이 고향이라고 말하면 일평생 출세에 지장을 받고 사는 그런 버려진 곳에서 예수님이 성장하셨습니다. 성경에도 “나사렛과 같은 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비판하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지역에서 성장하셨으며 다 성장하신 이후에는 그 곳에서마저 버려져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슬픈 독백을 하신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나중에는 가족들에게마저 버림을 당하셔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출가의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이 슬프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갈 곳이 없다.” 말씀하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버림을 당하여 가야바 법정에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재판을 받았고 나중에는 로마에 버림을 당하여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은혜를 가장 많이 베풀어준 유대인마저 예수를 버려 그들의 고함 소리에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도 마지막 12제자는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12제자마저도 성경의 기록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가장 슬픈 버림이 무엇인가? 오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를 버렸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예수님은 출생에서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버림으로 시작해서 버림으로 끝이 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버림의 이유를 묻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주신 답변이 무엇인가? 버려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버려짐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 “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너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이미 약속해 놓고 예언하였다. 그 예언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버려짐이 나의 사역이다. 네가 책임 져야 할 일은 버려짐이다. 버려짐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 “그는 멸시를 받아서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버려진 예수이십니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이 나타나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즉, 예수가 버려지는 과정에서 인간적 외로움을 표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실 때 세 제자에게 오셔서 슬프게 간청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슬프고 고민스럽다. 나와 함께 시간을 좀 보내줄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 모두 몸이 너무 피곤해서 모두 잠들어 있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군중들이 모여들었다가 모두 다 떠날 때 예수님은 떠나는 군중들의 뒤를 바라보시며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도 가려느냐?”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기록입니다. 왜 버려졌는가? 이사야가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버려짐으로 말미암아 인간 구원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됨의 자격을 교육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나의 버림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만약 너희 중에 누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짐이나 전토나 부모를 버리면” 이것이 버려짐의 진리의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나를 위하여 버릴 수만 있다면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교육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인류 구원을 완성하시고 이후로 나를 따르는 자는 이렇게 자신을 버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진리! “이것이 십자가의 진리다.” 이렇게 가르치신 겁니다.
LA에서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밀집 지역에 밤 12시가 넘었는데 어린 아기 울음소리가 끊이지를 않는 겁니다. “응애, 응애!”하고 우는데 주변의 아파트에서 그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니, 저 집의 엄마는 이렇게 한밤중에 아기를 달랠 것이지 저렇게 끊임없이 두세 시간을 계속 울어대는데 왜 저러고 있을까?” 답답한 겁니다. 가까운 아파트에 살고 있는 데이비스라고 하는 흑인 할아버지가 살았는데 그는 한국 6·25전쟁 때 참전 용사입니다. 혼자 외로이 살고 있는 이 할아버지가 그치지 않는 아기 울음소리가 하도 이상해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렸더니 아무도 안 나옵니다. 문을 열어보니까 잠겨있질 않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까 아무도 없는 겁니다. 엄마도 아빠도 아무도 없고 오직 그 아이를 몇 월 며칠 몇 시에 낳았다고 하는 종이 한 장과 함께 어린 아기가 끝없이 우는데 한국 아기였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난지 3일 되었습니다. 엄마가 버리고 간 겁니다. ‘이 쪽지를 써놓은 것을 보니 버리고 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데이비스 흑인 할아버지가 알지도 못하는 3일된 한국 어린 아기를 데려다가 길렀습니다. 지금은 이 아기가 대학을 졸업한 나이가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 한인 사회에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갈보리교회 오기 전까지 그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우리 한국사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하는 당신은 한국의 은인이라고,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서 상처를 받아가며 싸워준 당신, 그리고 태어난 지 3일 만에 버려진 한국 아기를 데려다 고난을 겪으며 키워주셨으니 너무나도 감사하고 또 부끄럽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기 전까지 그의 생활비를 교회에서 지원해 준 일이 있었는데 제가 온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버려진다는 것은 가장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버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며 살지 않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버려진 예수님을 기년하는 것이 바로 이 성찬 예식입니다. 이 떡과 잔을 받는 의미는 나를 위해서 버림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나도 어느 때는 내 생애를 주님을 위해서 버릴 것을 약속하는 성례전! 어느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 시간을 버려야 할 때가 있고, 물질도 좀 버려야할 때가 있고, 자존심도 버려야할 때가 있고, 청춘도 버려야 할 때가 있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버려야 할 때가 있는데 나의 버려짐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표를 그렇게 정하고 이 성찬의 떡과 잔을 받아 마시고 먹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나도 어느 때는 주님을 위해서 이 아픔의 살을 뗄 수 있으며 피를 흘리겠습니다.” 하는 결단의 각오로 이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영원히 이것을 기념하라. 그리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계획인 인간 구원을 위해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버린 것 같이 너희도 다른 사람을 위해 버릴 때 하나님의 계획인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 년에 몇 번을 이것을 기념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재정비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받으며 이러한 믿음의 결단이 오늘 여러분에게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버림받으신 예수님
마 27:46 / 우남식목사
인하대학에 가보면 봄의 따스한 햇살이 온 캠퍼스에 가득합니다. 어느덧 나무들은 새순을 내고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회 담장이도 어느 사이에 새순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새순은 혹독한 겨울을 견디어 낸 나무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았지만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나무들에게는 아마도 견디기 쉽지 않은 겨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고 견디니 따스한 봄 햇살을 받아 새록새록 새순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참고 견디심을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의 소망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필립 얀시는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누구보다 선한 삶을 살았던 의인 욥은 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에 직면해야 했나요?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가장 아름답게 하나님을 찬양했던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미움을 받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러한 의문은 하나님의 독생자이면서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버림받은 고통과 슬픔이 있습니까?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당신은 사람들로부터 차인 적이 있는가를 물어보면 여학생들은 한 결 같이 차인 적은 없고 찬적은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남학생들은 거의가 차인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차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인들로부터 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채이셨고,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통해 은혜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1. 버림받으신 예수님(마 27:45-50)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마 27:45). 제 육시는 정오 12시이고, 제구시는 오후 3시입니다. 하루에 정오 12시에서 오후 3시까지는 가장 밝고 환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오후 정오 12시부터 3시까지 온 땅에 캄캄한 어둠이 임하였습니다. 이때는 유월절 절기이기 때문에 일식 현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해가 빛을 잃어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눅 23:44). 일찍이 아모스는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암 8:9)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 삼시에 십자가에 못에 박혀 무려 여섯 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기절하시고, 다시 그 고통으로 인해 깨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무서운 저주와 고통을 당하시는 중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침 뱉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상).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면 몸무게 때문에 못 박힌 손이 찢어져 내리는 그 고통으로 빈사상태가 되어 몇 시간 안에 기절하여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셨습니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이 절규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보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이었습니다.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버림받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일생 버림받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이 고통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 절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울부짖는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은 바로 우리를 위한 버림받으심이요, 예수님의 울부짖음은 우리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그것은‘용서’를 위한 울부짖음이요, 우리를 향한 ‘사랑’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이 기도는 시편 22편에 다윗이 한 기도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예수님은 시편에 예언된 대로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버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모든 뼈는 어그러졌습니다(시 22:14).
예수님은 이런 극심한 고통과 죽으심 앞에서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는 순간에도 만민의 그리스도가 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누구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까?
1. 예수님은 종교인들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장차 메시아가 올 것을 고대하며 율법서와 예언서를 손에 들고 다니며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당시 깡패들이나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비친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책망했던 대상이 그들이었습니다. “화 있을쩐저 바리새인들이여”
예수님은 성전에서 책상을 뒤엎으시고 하나님의 집을 더럽히지 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가만 놔둘 리 없습니다. 예수님은 끝내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그들로부터 버림받고 죽임 당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이들은 다름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서로 다투고 증오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나누고 찢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만 우리는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목회를 등시하고 기관 주위를 맴돌며 장과 대표나 되고자 하는 명예와 권력에 눈먼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몸된 교회를 상처 내고 찢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저부터 하나님 앞에서 뼈를 깍는 회개을 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 받으셨습니다. 당시 빌라도는 로마가 예루살렘에 파송한 총독이고 지도자이고 정치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불러 밤새 조사했지만 죄를 발견하지 못하고 무죄를 확신했습니다. 자기 아내도 밤새 꿈에 예수를 죽이는 꿈을 꾸어 그에게 손대지 말라는 경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군중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세상에 믿지 못할 사람들은 첫째는 정치인들입니다. 자기의 유익이나 입지에 따라 조석으로 입장을 바꿉니다. 그래서 대부분 정치인들의 말로가 불명예로 끝납니다. 결국 빌라도는 후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소요에 책임을 물어 로마로부터 소환 당해 가던 길에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으면 그만큼 책임감도 큽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지도자가 위기의 때에 책임을 회피하고 군중들과 야합하여 자신의 입지를 지키고자 하면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빌라도가 그래서 심판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믿지 못할 사람들은 군중들입니다. 민주주의의 좋은 점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다수결이 절대 선은 아닙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열광적으로 환호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께로부터 떡을 얻어먹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병 고침 받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며칠 사이에 그들의 태도가 이렇게 돌변했습니다. 그 군중들 뒤에는 조종자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제사장들이었고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교묘하게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음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우매한 군중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어제는 호산나를 외쳤고 오늘은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과 사회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언제나 군중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선동하여 여론을 조성합니다. 여론을 교묘하게 움직인 사람이 히틀러입니다. 여론은 좋은 면도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민심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론정치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결정적으로 오판할 수도 있습니다.
군중들은 처음에는 선한 뜻으로 거리로 나왔겠지만 나중에는 배후조종을 받고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군중은 군중심리에 이끌리는 우매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우매한 군중심리에 이끌려 인민재판 받듯 처형되었습니다.
3.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고통스러울 시간에 가장 가까이에서 힘이 되어 줄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실 때 산 아래에서 군인들이 다가와 체포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막 14:50). 예수님만 혼자 남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야바 법정에서 심문받고 있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 밤은 추운 밤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추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을 쪼이고 있다가 베드로는 맹세 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마가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사람들이 붙잡으니까 베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갔습니다(막 14:51).
예수님은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버림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약하고 비겁하여 돈 몇 푼에 신앙의 지조를 파는 경우는 없는지요? 주일을 제대로 못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놀러갈 생각 때문에, 더 잠자려고,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마음에는 주일예배라는 개념조차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때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고 오늘도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버림받으시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베드로가 통곡하였듯이 주님을 버린 삶을 통곡하며 회개합시다.
4.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하고 절규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온 몸이 아래로 쳐지면서 살이 찢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하나님은 응답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그렇게 고난 받게 하고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버려지고 제물이 되어야 이 세상이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그렇게 버리셨고 세상에 한 가지를 요구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 예수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죄를 지었던지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는 모두가 버림받은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보다 버림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버림받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철저하게 버림받으셨습니다. 따라서 버림받음에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나의 버림을 위해 버림 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버림받음은 하나님께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이 버리신 것처럼 느끼는 그 순간이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가장 먼 곳에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실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2.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마 27:51-56)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예수님이 죽으시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성전에는 두 개의 휘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전 앞뜰과 성소를 가로막은 외부의 휘장이고(출 26:36, 38:18, 민 3:26), 또 하나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하는 휘장입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자마자 이 두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내려 밖에서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휘장은 높이가 약 55규빗(약 25m) 너비 16규빗(약 7m), 두께는 0.3규빗(15cm)으로 여러 모양으로 수놓은 천입니다. 그 천이 15cm의 두께이기 때문에 황소 2마리가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가려면 제물의 피를 흘려야 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직접 나가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살 길입니다(히 10:19-20).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2-53).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무덤이 열렸습니다.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믿는 사람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이 일어난 것과 그 일어난 모든 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켜본 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마 27:55-56).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에서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에 있어서 멀리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을 바라본 증인들입니다.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3.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마 27:57-66)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 27:57-61).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하였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두려움이 많아 공개적으로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체험하고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신의 새 무덤에 넣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것은 많은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굴속에 놓고 큰 돌을 굴려 무덤을 막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됨으로 우리의 옛사람도 함께 장사지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지내심으로 우리는 죄와 완전히 단절된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날은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이었습니다. 무교절 첫날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였다고 소문낼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종교지도자들의 경비병으로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들이 지킴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더 확실하게 증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막으려는 모든 시도는 부활을 더 확실하게 증거하는 계기가 됩니다.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우리도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심으로 우리는 죄와 단절되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골고다의 십자가
마 27:46 / 김우영목사
이는 존 번연(J. Bunyan)이 쓴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의 중심 인물인 기독도가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장면입니다. 한 남자가 등에 큰 짐을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터벅터벅 힘들게 걷고 있다. 그는 한 번도 그 무자비한 무게로부터 놓임을 받지 못했다. 그 짐은 밤낮으로 그의 동반자가 되었다. 정상에 오를 때까지 언덕 위를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그 곳에서 그는 나무로 된 십자가와 그 아래의 빈 무덤을 보게 된다. 그가 십자가에 가까이 가자 기적이 일어난다. 그의 어깨에 거대한 무게로 묶여있던 짐의 끈이 풀리고, 짐이 흘러 내려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던 무덤 안으로 들어가 버리더니 다시 보이지 않았다. 기독도의 몸은 가볍게 되었고, 그는 상쾌함을 느꼈으며, 안도의 기쁜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 때 빛나는 세 분이 그에게 다가오신다. 그에게 처음 분이 "너의 죄가 용서되었느니라"고 공포하시고, 두 번째 분은 그의 누더기를 벗겨 버리고 빛 나는 옷으로 갈아 입혀 주셨다. 세 번째 분이 그에게 인을 친 두루마기를 건네주시고 "그 것을 천국의 입구에서 펴보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앞으로 한 주간은 고난 주간이며, 다음 주일은 성금요일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부활절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전 9시부터 오후3시까지, 장장 6시간 동안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다가 "내가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자고 새고, 눈만 뜨면, 누가 병들어 죽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 누가 어찌어찌 해서 죽었다...라는 세상 인간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죽음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50절)', '떠나시다'라는 헬라어 '아페켄'은 '이탈'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와 '보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에미'가 결합된 합성어로, 본 절을 직역하면 '영혼을 자기에게서부터 보냈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선 자발적인 의지로 예수님의 영혼을 포기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임을 당하실 수밖에 없는 수동적 입장에서가 아닌, 능동적으로 영혼을 내어 주셨음을 말함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스스로 택하신 길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처절하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도우시지 아니 하셨습니다. 헌데 골고다 언덕 멸시, 천대, 고통의 십자가에서도 주님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까닭은 인간의 죄를 속량하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음은 그 길밖에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1. 알아야 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시는 구속의 십자가요, 나의 죄를 대신 하여 지신 대속의 십자가이며, 공의의 십자가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공의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께서 너와 나, 우리의 죄를 심판하심에 우리들의 죄를 그냥 넘기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려면 누군가가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헌데 죄 값이 너무 엄청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치룰 수가 없었지요. 죄 값은 죽음. 그래서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독생자 외아들로 하여금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너와 나, 우리의 죄가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선 우리를 죽여야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도록 사랑하셨습니다. 때문에 차마 죽게 하실 수가 없으셨지요. 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외아들을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골고다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실현하심이며, 증거 하심이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함께 이루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되어진 것으로서 약속의 성취입니다. 까닭에 예수님께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거역 할 수 없으셨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지셔야 했고, 지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45절)" "이에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51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자연도 슬퍼하며 탄식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시고 되어지는 이 일들을 본 로마의 백부장과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했습니다.(54절) 인간사의 그 어떤 슬픔이나 고통, 아픔도 예수님의 십자가 슬픔과 아픔, 고통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이 사실을 바로 알면 우리에게 닥친 어떤 고난, 역경, 환란도 이길 수 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는 우리 삶의 용기요 힘이며 위로입니다. 십자가 상의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도, 부활도, 쉽게 믿을 수 있습니다. 골고다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용서, 사랑, 희생, 생명, 구원,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선 생의 끝에서도 주님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멸시, 천대, 처절한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고, 인간에게는 그 십자가가 최고의 축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진리를 바로 알아야만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나의 죄와 관계된 것입니다.
2. 믿어야 할 십자가
골고다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는 '네'가 아닌, '내'가 믿어야 하고, '내일'이 아닌 '지금' 믿어야 합니다. 구속의 십자가, 대속의 십자가를 믿어야 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인생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야만이 승리와 성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4)"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21,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야만 죄사함을 받고, 치료, 회복,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민23:19)" 새벽기도 시간, 고통 중에 있는 자매의 헌금을 보고 기도하는 중 제게 주신 말씀입니다. "자기가 당하는 괴로움은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진 괴로움이니라. 그러나 괴로워하지 말고 괴로움을 해결 해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리스도의 대속, 사랑, 용서, 희생, 화목의 십자가를 믿어야만 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으라함은 나무로 만든 형틀을 믿으라함이 아니라 그 나무 형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골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순간부터 인생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죽음이 아니라 3일후 일어날 '눈물 끄-읕'으로 가는 과정이요, 새로운 생을 갖는 절차입니다. 내 구속 자는 내 주인이십니다. 주님은 나를 십자가의 보혈로 사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시요.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최근 바나 리서치 그룹(BRG)이 미국 기독교인 4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중생체험33%, 예수님께서 죄없는 삶을 사셨음을 믿는 사람이 53%였다고 합니다. 미국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믿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나타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악의 형벌이었으나 최고 최상의 복을 주는 십자가임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를 믿어야만 내게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3. 져야 할 십자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짐은 내가 죄인임을 밝힘이요, 동시에 내가 죄 사함 받았음을 증거함이며,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짐은 내가 기독교인임을 증명하는 생활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못함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음이요 성령 충만치 못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자기 십자가를 짐입니다.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아니지면 내가 이 땅에서 실제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축복만 강조하고 십자가를 지는 훈련을 시키지 않음입니다. 이는 오직 된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애, 모두 인간에 대한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최고의 사랑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자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의 하나님을 알되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 독생자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을 먼저 알고, 믿고, 그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기독교인은 복만을 좇아 다니는 종교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려고 십자가를 찾아 다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왜 교회에 옵니까?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러 오는 것입니다. 설교가 짧다, 길다, 재미없다, 재미있다, 잘한다, 잘못한다, 누구 때문에 교회에 오고 누구 때문에 교회에 안나온다? 이는 모두 인간 중심의 교인 생활이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십자가 진리를 증거하면 밤을 새워도 '아멘', 짧아도 '아멘' 잘해도, 못해도, 재미없어도, 재미있어도, '아멘'이어야합니다. 신앙의 난간에 걸터앉으면 유두고처럼 떨어져 죽습니다. 십자가는 짐이 아니라 생이요, 삶이며, 영원이요, 영생이며, 성령 받은 사람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교회가 교회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는 지되 죄의 짐은 지지 않아야 됩니다. 지금 십자가 지는 고통은 내일의 축복입니다. 십자가를 짐은 오늘 죽고 내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죽고, 내일 살자.
찢어진 휘장
마 27:50-54, 히 10:19-20 / 이종윤목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슬픔, 분개, 충격 아니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두운 지성소에 계시지 않는 것? 이 사건은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이 끝난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성경은 “성소의 휘장이 찢김으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히10:19-20)고 선언한다.
I.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라
첫째로, 이것은 거룩한 율법 의식이 폐지된 것을 의미한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1번 그것도 희생제물의 피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에 가까이 하는 자는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 감사, 기쁨, 산 예배를 드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둘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은 죄를 제거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휘장이 찢어졌다. 죄가 제거된 증거로 휘장이 찢어진 것이다.
셋째,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모든 것 이상이다.(more than all)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없는 것보다 못하다.(less than nothing) 참 하나님, 참 인간 되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만난다. 그가 죽으심으로 그 심연을 채우고 육체를 통해 거룩하신 분께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스도 없는 당신에게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제사장은 휘장 옆으로 돌아서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찢어진 휘장 사이를 통과하여 하나님께 접근한다.
넷째, ‘지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눅23:45) 휘장은 말아 올린 것이 아니고 찢어졌다. 이것은 하늘가는 문이 영원히 열린 것을 의미한다. 큰 죄인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이 여신 문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II. 예수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가져라.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10:19) 예수의 피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우리는 대제사장도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 들어가고 하나님이 낮아지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한다. 거지는 집에 들어갈 수 있으나 담대하게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아버지 집에 있는 아이가 용감한 것처럼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 더 이상 가로막는 휘장은 없다. 위로부터 아래로 찢겨졌다. 따라서 우리의 언행은 복이 되어야 한다. 지성소에 들어간 제사장은 나온 후 백성에게 축복했다. 병든 자를 위로, 낙심 자를 격려, 미지근 한자는 회복케 한다. 당신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야 한다.
III. 이 은혜를 어떻게 활용할까?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10:19)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씻음이 없고 죄가 있는 한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없다. 이 길은 새로운 살길이다. (히10:20) 2천 년 전에 놓으신 길이지만 지금도 새로운 길이요 살길(Living way)이다. 이 길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다.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10:20)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께로 올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의 휘장을 찢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은 없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는 큰 제사장이고 우리는 작은 제사장이다. (히10:21) 예수를 따라 지성소에 들어가면 죽지 않는다. 그가 매를 맞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지 않는다. 그는 성소에 들어갈 때 2가지 일을 했다. (22) 첫째는, 피 뿌리는 일이었고, 둘째는 맑은 물로 몸을 씻는 일이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힘입고 회개하여 거듭난 자 되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자.
죽음의 자리에 피는 꽃
마 27:51-54, 고후 4:10-12 / 김경호목사
십자가는 단지육신의 무너짐만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절망과 좌절이 거기에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오해와 누명들 위에 십자가가 서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신성모독 죄의 누명을 쓰셨고, ‘성전을 허물겠다’고 불경의 누명을 쓰셨습니다.
갈3,13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라고 합니다.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히 6,6; 12,2)이요, 몹시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고 꺼리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자리, 수치의 자리에 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심수로 감옥에 갇히는 사람은 자기 소신에 따라 떳떳한 마음으로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는 지지하는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만인의 칭송을 받으며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따르던 무리는 그를 십자가에 달라고 소리쳤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를 부인하고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저를 십자가의 못박으라는 증오와 배신, 그리고 고독을 주님은 경험하셔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망가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에서 죄인의 누명마저 쓰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다 죄를 정하(롬8,3)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 속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하고 외쳤습니다. 제자들에게 잠시라도 깨어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철저한 무너짐이고 붕괴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죽음 뿐 아니라 내적인 절망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그야말로 외적으로, 내적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철저한 죽음 위에 서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후배의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지금 40대 초반의 종로 한복판에서 잘 나가는 치과 원장이었고, 학생 때 열심히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운동권이었습니다. 우리교회 초창기에 선배님이 교회 개척을 하시니 돕는 차원에서 신앙심이 없는데도 몇 달 출석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여러번 신앙을 가질 것을 강조했으나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을 그만두고 요양을 하다가 재입원했습니다. 지난 주에 방문하는 날은 자신의 병세에 대해 아주 좋지 않은 소식을 들어서 낙담하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날 후배들이 모여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갖기로 되었었는데 기도회에도 나올 수 없어 병실에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의 머리는 모두 방사선 치료에 빠져 버리고, 얼굴은 심히 이그러저 있었습니다. 그는 “선배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모습이 되었습니다.”라며 미소지어 보였습니다. 예배 후에 모두 한마디씩 기도를 하거나 덕담을 했습니다. 중후한 40대의 남자들이지만 모두 억지로 눈물을 참아내며 덕담을 했습니다. 맨 마지막에 환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너무 교만했어요. 그 동안 제가 가진 지식, 운동하며 쌓은 알량한 소신, 이런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었네요. 그런데 지금 다 버렸어요. 아니 제 자발적 의지로 버린 것이 아니고 보시다시피 제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고 빈손이 되었는데 하나님을 찾게 되니 참 염치없기도 하고 목사님께 죄송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 보면 그 동안 제가 가졌던 건강, 지식, 알량한 자존심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걸림돌 뿐, 아무 것도 아니었나봐요. 이제 그 걸림돌들을 하나님께서 다 제거해 가셨으니 제가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에 제가 무너지는 것들이 견딜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아주 마음이 가벼워 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삶의 조건들, 울며 불며 매달렸던 인간적인 조건들, 돈, 명예, 지위..... 우리가 우리 삶의 안전 보장 책으로 알고 갖고자 하는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걸림돌일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것은 우리에게 부질없는 것과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며 우리를 참된 것으로 되돌려 주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철저한 죽음의 자리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내세워야 할 것들이 많고, 시시비비를 가려 저울질해야 할 것들이 많고, 아직 교만하여 자기를 꺾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으나,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힘을 떨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힘을 떨칩니다.(고후4,10-12) 고 합니다. 바울은 항상 죽음을 옆에 끼고 사신 분입니다. 그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하고, 예수를 위하여 늘 몸을 죽음에 내 맡긴다고 합니다. 그는 늘 죽음과 함께 지냈지만 성서의 어떤 사람보다도 가장 생명력 있는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길게 늘어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정작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꼭 해야할 일을 뒤로 미루거나 간과하고 지내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날이, 그 시간이 이제 몇 일 아니 몇 시간 후로 임박했다고 생각했을 때 나에게 남은 이 짧은 시간에 내가 꼭 해야 할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들입니다.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신 바울은 아예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임박한 의식을 가지고 사신 것 같습니다. 죽음과 함께 하는 그의 삶은 그를 가장 치열하게 살게 만들고 가장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철저한 죽음의 자리 위에서만 꽃 필수 있는 것이 부활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스스로 살고자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인 죽음으로 향해 가고자 하는 결의에 찬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마태복음에는 아주 독특한 부활의 증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고 운명하신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것에 이어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런데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27,50-52)
일요일 아침의 부활이전에 금요일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철저한 헌신과 죽으심 그것에 잇닿아 부활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아쉬움을 가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사셨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조금 더 말씀을 주셨다면.... ”하는 아쉬움을 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한 두 마디의 가르침을 더 주시는 것보다 그의 십자가가 그의 삶을 완성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죽음의 자리에 서신 것이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다음 몫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계획안에 부활을 끌어당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염두에 두고 부활을 계산하는 자에게는 부활이 없습니다. 부활은 오히려 철저한 죽음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