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기억은 안나지만
20년도 조금은 더 지난거 같다.
한국과 일본의 해전사
연구자들이 임진왜란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었다.
일본학자가
한국피디를 도쿄의 한 미술관으로 데려가
벽면을 가득채우고 있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2차대전때
수많은 사진병들이 전쟁에 참전했듯이
당시 임진왜란때
일본의 많은 화공들이 각 부대에 배치되어서
전쟁상황을 그림으로 그려서 본국에 보고했다.
박물관 그림은 임진왜란때 수군의 전투상황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에서 일본의 주력선에는 함포가 없었고
한국의 판옥선에는 함포가 여러개 달려있었다.
영화를 보더라도 일본수군은 배에서
조총사격만 하거나, 근접전투를 벌이는 장면만을
볼수 있는 이유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일본학자는 이 차이가 승패를 가른 가장 중요한
분수령으로 작용했으며, 일본은 18세기부터 배에
함포가 실리기 시작했다는 말을 했다.
함포를 배에 싣는순간 속도가 느려질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임란이후에도 일본수군의 근접
전투방식이 오랜시간 유지되었음을 알수있다.
지금도 배를 띄웠을때 평형을 유지하는게 매우
어려운 기술인데,
그 소나무로 만든 목선에 무거운 화포를 싣고
화포사격시 충격을 이겨낼수 있는 배를 만들어낸
그 이름없는 조선의 함선기술자들을 우리는 기억
해야 할것이다.
성웅 이순신과 그 뛰어난 함선기술자들이 있었기에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승리할수 있었다.
성리학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누구보다 기술자를
우대했고, 전쟁을 대비해서 화약을 비축해야 된다
고 강력히 주장했던 세종도 기억해야 할것이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참혹한 전쟁은
마무리 되었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전쟁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중 조선의 많은 도공들과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그 도공들이 만든 화려한 채색자기는
17-18세기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일본은 그 채색자기를 판돈으로 메이지 유신
즉 근대화를 이룩할수 종잣돈을 마련 할수
있었고,
그 돈으로 서양의 각종 무기체계와, 앞선물자를
사들이고, 많은 유학생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지만 이 거대한 서세동점의 시대에 조선은
문을 걸어 잠근채, 성리학적 순수성을 지키는데
몰두했었다.
결국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300년뒤 1905년
망국의 비운을 맞게되고,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승리한 전쟁인지
패배한 전쟁인지 평가하기 매우 어려운 전쟁이다.
다만
한 사회가 안전성과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관념적인 이론보다는 실용적인 기술을 중시해야
한다는 통절한 교훈을 얻을수 있었다.
첫댓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