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9편)
*모네타*
눈이 와서 그런지 달리는 차들은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비실비실’ 더디게 가는 차들만 보인다
늙은 노주인과 함께 탄 해순이의 차도 마찬가지다
남대문을 거쳐 을지로로 들어서니 차의 앞뒤가
꽉 막힌다
제설차의 눈 치우는 작업 때문에 일부 구간
차량 운행이 지연되는 것 같다
노주인의 차가 을지로를 접어들어 30분간 가자
우측으로 꺽어 아담한 2층 양옥으로 된 집앞에
선다
늙은 노주인의 뒤를 따라 1층 현관에 들어서니
병색이 완연한 늙은 노부인이 반겨맞는다
‘니가 온다는 소식 이미 들었다
오는데 불편은 없었니?“
안주인은 자상하게 해순이를 맞으며 어색한
해순이의 태도와 표정을 누그러뜨릴려고 한다
그런데 해순이의 답은 없고 손짓 몸짓만 하자
벙어리인 것을 알고 노트와 펜을 준비해서
대화를 한다
‘괜찮아요’
해순이는 대답한다
거실에는 석유난로가 놓여있고 그 옆에 오래되어
낡게 보이는 쇼파와 탁자가 있다
늙은 노부인은 해순이를 쇼파에 앉히고 자신은
힘겨운 몸을 추슬러 커피를 타러 간다
죄송한 해순이가 일어나 자기가 한다고 하지만
처음 와 집안 일이 어설플테니 다음부터 하라며
극구 만류하며 가스렌지에 물을 데워 커피잔에
탄 커피를 해순이와 남편앞 탁자에 놓는다
미안해하는 해순이에게 안주인은 어서 식기 전에
마시라면서 남편에게는 다과를 좀
가져 오라고 시킨다
‘그래 고향은 어디지?
서울은 어떻게 올라온거야
내가 조카한테 듣기는 무조건 올라왔다고 하던데‘
해순이는 기가 팍 죽어서 고개를 더욱 아래로
떨구며 간신히 대답한다
‘고향은 해남이구요
서울에 오면 원하는 것은 이룰 수가 있다고 해서
부모님 몰래 상경했어요‘
말을 하고 나니 못할 말을 했는지 풀이 더욱 죽는다
‘나무라는 것은 아니니 풀이 죽을 필요없다
다행히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우리한테 왔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큰 일 날 뻔 했구나
니가 보다시피 난 몸이 성치 않다
어디가 뚜렷이 아픈 곳은 없다만 온 몸이 아프고
일 하기가 벅차
니가 이렇게 우리 집에 왔으니 조금 힘들더라도
집안과 바깥양반을 챙겨주렴‘
‘예 마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너만 믿으마
우리 바깥양반은 서울에 있는 XX대학 교수란다
그리고 아들 둘이 있는데 모두 다 외국에 유학갔고
언제 올런지는 모른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걱정 말고
내가 3년 전부터 아프다보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몸이 덜 아플 때 치워보지만 예전같지는 않아‘
‘예 마님 열심히 요령부리지 않고 잘 해볼께요
혹시 마음에 안드는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시골에서 집안 살림은 제가 맡아서 했기에
조금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거에요‘
‘그랬어?
그럼 잘 하겠구나
우리 집에는 아들 둘만 있고 딸은 없어
우리집 양반이 딸을 얻고 싶어 늘 원했지만
내가 몸이 약해서....
니만 열심히 잘 하면 니가 하고싶은 것을 하도록
해주마
모든 것이 니 할 태도에 달렸다
오늘부터는 한 집안 식구가 됐으니
지금부터는 나와 우리 집 양반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어떻니?‘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해순이는 천부당만부당 하다면서 고개를 젓는다
‘처음에는 호칭이 낯설어 힘들거야
그런데 자꾸 부르다보면 익숙해질거야
내 말대로 하렴
우리 집 양반은 전부터 딸을 원해서 니만 잘 하면
친자식 이상으로 잘 해줄거야
물론 나도 그렇고‘
해순이의 방은 2층에 정해졌다
1층에는 안방 건너방 주방 거실 화장실이 있었고
2층에는 2개의 방과 화장실이 따로 있었다
해순이가 쓰는 방 건너에 방이 있고 중간 화장실 및
세면장이 있엇다
건너방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2층방으로 안내를 하던 안주인은 절대로 저 방은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유학가기 전 아들들이 쓰던 물건들이나 책들을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 날부터 해순이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늙은 주인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아침을 준비하였고
점심은 안주인에게 미음을 끓여 드렸고
저녁에는 퇴근하는 바깥주인의 저녁식사며
집안 청소 및 가꾸기에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1층 건너방은 바깥주인의 연구실이라 청소할 때
가급적 놓여진 물건들이나 책들을 건들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을 하였다
어색했던 집안일이나 아버지나 어머니라 부르는
호칭도 약 반 년쯤 시간이 흐르자
익숙해져 자연스러워 졌고
여가시간이 많이 남게 되었다
하루종일 안주인과 함께 지내다보니 정도 많이
들어 친 혈육 간 이상이었다
자상하고 착은 안주인의 성격도 있었지만
해순이의 부지런함과 근면함 속이지 못하는
착한 성품이 있어 가능했다
안주인의 병은 점점 깊어져만 가고 여기저기
병원이나 한의원에 다녀보지만 차도가 별로 없었다
물론 병원에는 해순이가 늘 모시고 다녔다
일이 손에 잡혀 익숙해진 8달 후
아침에 청소하러 들어간 바깥주인의 방에서
한방에 관련된 서적이 책상위에 놓여 있었다
해순이는 직감으로 느꼈다
분명 안주인의 병으로 근심하던 노주인이
자기나름대로 처방책을 찾을려고 본 것 같았다
그날부터 해순이는 집안 일이 끝나면
안주인 병수발을 드는 일을 제외하고는 한방책을
혼자 공부하였다
처음에는 어려운 용어 때문에 힘들었지만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다보니
제법 지식이 머릿속에 쌓여간다
그리고 안주인이 잠이 들면 보통 3시간 이상 주무시기에
택시를 타고 청량리 경동시장 한약 상가로
가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과 비교를 해 본다
노인 2분만 모시고 일이 익숙해져 갈수록
여유시간이 늘어만 갔기 때문이다
해순이가 그 집에 온 지 일 년이 조금 넘을 무렵
평소 안주인이 준 돈을 꼬박 모아 놓았던
저축 통장을 일부를 털어 경동시장에서
몸에 좋은 약재를 구입한다
몇 번이고 밤새워가면서 연구하고 또 연구했던
것을 실천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처음 하는 일이라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자연 약재도 몸에 해가 없는 것으로
혼자 처방을 하였고
처방된 내용을 약재상이나 한의원에 찾아가
확인 또 확인하느라 시간도 많이 걸렸다
불안하기도 했다
대학교수인 바깥주인도 하지 못했던 일인데
자신의 학력은 중졸이니 잘못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든 날은 밤을 뜬 눈으로 세웠다
약을 처방하기 며칠 전 고민하다 쓸어져 잠든
해순이의 꿈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시커멓게 변한 벌판에 해순이 혼자 있어
무서움에 벌벌 떨며 큰 소리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 하얀 모시적삼을 입고 머리위에는
세상만큼 큰 삿갓 모자를 쓰고 허리춤에 무언가
찬 사람이 나타났다
해순이가 두려워 뒤로 뒷걸음을 치자 어느새 다가와
해순이의 손을 잡으며
걱정말라고 한다
그런데 어디서 듣던 목소리다
두려운 시선으로 올려다보니 키가 하늘만큼 큰
외할아버지이다
해순이는 반가워 목을 끌어 안으려고 하지만
워낙 키가 커서 두 손이 닿지를 않는다
외할버지는 어린 해순이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시더니
허리춤에 찬 보따리를 꺼내 해순이 손에
쥐어주면 얼른 가라고 종용한다
여기는 너무 위험해 니가 머물 곳은 못 되니
뒤를 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리라고 한다
‘예’ 대답을 하고 보니 외할버지는 온데간데
없고 저 멀리서 어둠이 먹구름과 함께 몰려온다
해순이는 앞만 보고 죽자살자 달렸다
천둥과 번개가 치는 곳을 벗어날려고 달렸다
그러다 기진맥진하여 쓸어진다
그 순간 해순이는 눈을 떴다
온 몸에는 땀이 뒤범벅이었다
이상하고 요상한 꿈이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외할아버지였다
어렸을 때 해순이가 말 못하는 것을 알고
늘 안타까워 하였고 돌아가실 때도 해순이 걱정을
하였던 외할아버지였다
이런저런 방법도 안 통해 해순이는 자기가
처방을 한 한약을 정성껏 다려
안주인에게 권한다
‘어머님, 제가 미숙하게 지은 한약처방을 다린
건데 괜찮다면 들어보시겠어요?‘
왠 뜬금없는 소리냐며 안주인은 해순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아해한다
‘아니 니가 언제 한방을 알았어
그리고 이 약은 어떻게 지었어?‘
‘어머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6개월 전 아버님 방을 청소하던 중 책상위에
놓여진 한방책을 보고 제나름대로 공부 좀 했어요
나쁜 한약재는 빼고 좋은 한약재만
골라 넣고 다렸으니 한번 들어보세요
제가 처방한 약을 경동시장 한약상에게 묻고
또 물어 제조한 것이에요‘
‘그래, 몇 달 전부터 니가 오후에 외출을 하기에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이제보니 한약 공부를 했구나
고맙다 니 정성이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암 먹고말고
니가 이렇게 날 위하는데
당장 먹고 죽어도 내 먹을거다‘
하면서 해순이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단숨에
약 그릇을 비워버린다‘
약을 먹은 이후 어머님의 얼굴에는 약간 기가
서리면서 전보다는 나아보인다
해순이는 아침 저녁으로 약을 다려 어머님께 드리고
다음 처방된 약도 다려드린다
두 번째 처방된 약을 드신 어머님은
화장실에 시커멓게 죽은 혈변을 배설한다
그리고 일주일내내 혈변이 쏟아지며 핼쑥해진다
몸속에 있던 어혈된 피가 밖으로 배출된 것이다
걱정이 된 해순이는 약을 그만 드시라며
어머님께 권해보지만 어머님은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보자며 약을 가져오라 한다
몸은 야위어갔지만 기가 살아나는 것을 어머님이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아버님에게는 비밀로 했었다
말하기에는 어머님이나 해순이나 부담스러웠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기에
해순이가 그 집에 온 지 2년째 되던 은행나무잎이
양옥집 안마당에 듬뿍 쌓였을 때
어머님은 거뜬하게 일어섰고
온 집안은 경사였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해순이의 정성이 기특해
연신 칭찬을 하였고
해순이를 자신들의 수양딸로 삼아 호적에 올렸다
어머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건너방에서 연구하던 남편과 해순이를
부르던 날
해순이는 큰 소리로 ‘예’ 하고 대답을 했다
말문이 트였던 것이다
일시간 닫혀졌던 목소리가 제 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온 집안의 경사 중 최고의 경사였다
|
첫댓글 잠깐의 실어증 이였을까요 ...
처음부터 끝까지 매끈한 글솜씨에 숨가쁘게 읽었네요 ^^*
감사합니다
오늘도 고운 날 되시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맙습니다
고운 댓글 힘이 납니다
순식간에 글에 빠져 한약처방 에서는 잘 못 될까 조마조마..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춥습니다
움추려드는 마음
큰 기지개를 켜 봅니다
어렵게 살아온 해순이가 드디어 행복을 찾는군요..다음을 기대 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시간 되시길요
너무 재미있어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 다음 스토리는 물론 작가님이
잘 이끌어 가실 것이지만
검정고시를 통과하여 고교를 졸업한 해순이
일류 한의대에 입학하고 목소리도 되찾은
데다가 미모도 빼어난 처녀로 성장하여
외국에서 공부를 끝내고 귀국한 그 집 아들이
탐내는 아가씨가 된다는 설정도 기대해 봅니다.
매끄럽게 잘 풀어가는 님의 단편에 저는
오늘도 매니아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