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뉴스 연재 마지막회]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 물이 마르지 않는 여지연(중랑구 면목동 위치).. (2017. 7. 27)

연재ㅣ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물이 마르지 않는 여지연 - 여지연에 띄운 돛단배
붉은 보름달이 당나무에 걸렸다. 여지연을 찾은 수령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스님과 용이가 돛단배 위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스님, 돛단배는 어디서 가져오셨는지요?”
수령의 목소리를 듣고, 스님과 용이가 돛단배에서 내려왔다.
“고을에서 동아줄과 낚싯바늘을 만들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돛단배를 만들었죠.”
“아! 그러셨군요.”
“자! 용이야,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느냐?”
“먼저 돛단배의 쓰임새를 설명해 드리죠. 이 고을의 지세는 동남쪽으로 긴 타원형을 한 돛단배 형태, 즉 행주형(行舟形)입니다. 배가 움직이는 것을 행주라 하는데, 풍수에서 행주의 위치는 보통 좋은 집터를 말하기도 하지요. 돛대에 해당되는 곳은 저쪽(현재 서울 중랑구 면목사거리)이고, 배의 후미 선실 쪽은 이쪽(현재 중곡초등학교)입니다. 배가 갖추어야 할 기본 설비로는 키와 돛대 그리고 닻인데, 이것들 셋 모두를 갖추면 대길(大吉)한 땅으로 봅니다. 그중 하나만 갖추어도 배가 갈 수 있으므로 길지(吉地)라고 할 수 있지요.”
용이의 말을 듣고 있던 수령이 무릎을 치면서 탄복을 하였다.
“이 지역이 행주형이라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구나. 넌 어찌 알았느냐?”
“이 고을에 우물이 없는 걸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오래도록 연구했지요. 틈나는 대로 용마봉에 올라 여지연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행주형에 해당하는 이 지형에 우물을 만들게 되면 고을이 침수가 되어 단번에 흉지로 바뀝니다. 그래서 예부터 이런 지형에는 우물을 파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물은 땅 밑바닥을 깨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용이의 설명을 듣고, 스님도 이 아이가 언제 그런 것까지 배웠는지 대견하게 여겼다.
“용이야, 참으로 세밀하게 살폈구나. 지형까지 훤히 꿰뚫어보다니!”
“스님, 이곳은 돛대 부근에 닻을 갖춘 지형입니다. 그렇기에 돛단배로 화를 잠재워야 합니다. 또한 이무기를 잡으려고 연못에 미끼를 끌고 가려면 돛단배를 이용해야 하지요. 그래서 돛단배를 만든 겁니다.”
듣고 있던 수령은 어린아이의 머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있으니 기가 찰 일이었다.
“참, 대단하시오!”
수령이 얼떨결에 용이에게 존댓말을 하였다. 갑작스런 존댓말에 용이가 발갛게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이었다.
“돛단배에는 백마와 제가 탈 것입니다. 돛단배를 옮겨 준 스님들께서는 배의 앞쪽이 중랑천으로 향하도록 해주십시오. 절대로 아차산을 향해서는 안 됩니다.”
“용아, 너 혼자 이무기에게 보내려니 걱정이로구나.”
“스님, 저로 인해 생긴 보복이었으니 제가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그게 합당한 이치지요. 그러니 염려하지 마세요.”
“오냐, 꼭 살아서 돌아오너라. 난 너를 믿는다.”
“잘 다녀오시오. 황용 군!”
스님과 수령이 번갈아 인사말을 건넸다.
백마는 낚싯바늘을 꿴 동아줄을 궁둥이에 묶고 용이와 함께 돛단배에 올랐다. 그 동아줄의 한쪽 끝은 여지연 밖 큰 바위에 친친 동여매어 있었다.
스님들이 돛단배 둘레를 에워싸고, 조심조심 뱃머리를 여지연 안으로 밀어넣었다.
여지연에 뜬 붉은 보름달이 물살에 이지러지고, 밤바람이 선득하게 불어왔다.
중랑천 쪽으로 향한 돛단배가 돛을 올렸다. 여지연을 조심조심 가르며 가운데까지 간 돛단배가 멈추었다.
용이가 백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마는 용이에게 인사를 하듯 뜀뛰기를 하였다. 그리고는 힘차게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여지연 깊은 물 속에 있던 집채 만한 이무기가 치솟아 올랐다. 물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이무기는 돛단배를 통째로 삼킬 듯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울부짖었다.
“으어허허헝, 으으흐흐흐흥.”
용이가 타고 있던 돛단배가 물기둥과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 그러다가 돛단배는 폭포처럼 거꾸로 내리꽂혔다. 동아줄을 동여맨 바위도 들썩거렸다.
이를 지켜보던 수령이 ‘으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은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하였다.
이무기는 용이의 돛단배를 향해 입을 벌리고 덤볐다. 이를 본 백마가 이무기를 향해 뒷발을 날렸다.
그러자 이무기가 입을 크게 벌리고, 백마의 궁둥이를 덥석 물었다. 궁둥이를 감은 동아줄에 매달려 있던 낚싯바늘이 이무기의 입속으로 들어가 꽂혔다.
이무기는 피를 흘리면서 온몸을 뒤흔들었다. 여지연은 이무기와 백마가 흘린 핏물로 시뻘겋게 출렁거렸다.
한참동안 발버둥을 치던 이무기가 뒤로 발랑 나자빠졌다. 신음소리를 내며 잠을 자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여지연에 희미하게 동이 텄다. 때맞춰 이무기의 몸이 여지연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았다.
수령이 기쁨의 소리를 내질렀다.
“만세! 이무기가 죽었다!”
용이는 이무기가 죽은 걸 확인한 후, 돛단배를 끌고 물가로 나왔다. 용이의 몸은 핏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수령이 돛단배를 끌어당기며, 용이가 편하게 내릴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참으로 훌륭하오! 황용 군은 우리 고을 영웅이오. 스님, 지금 당장 잔치를 벌여야겠소. 기쁜 소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지요. 으하하!”
수령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용이가 침착하게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그보다 먼저, 동아줄을 모두 모아서 불을 지르세요. 동아줄이 타는 동안 이무기의 명복을 비는 제를 지내야 합니다. 또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무기와 싸운 백마의 명복도 기려야 합니다. 마조단(馬祖壇)을 세우고, 마조제(현종 10년 2월, 영조 8년 2월에 제를 지냈음)를 지내 주십시오.”
수령은 용이의 말대로 관원들을 불러와 동아줄에 불을 붙이고, 음식을 차려 명복을 빌었다.
동아줄이 타는 불길은 마치 이무기가 하늘로 승천하는 듯 보였다.
관아에서는 풍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으시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황 서방에게 용서를 구해야겠소. 그런 의미로 안골댁에게 쌀 백 섬과 비단을 주고, 기와집을 지어주어 사죄의 값으로 삼겠소.”
수령은 고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용이와 안골댁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하였다.
직급과 관계없이 모인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용이를 칭송했다.
그 후로 고을 사람들은 가뭄 걱정을 덜게 되었다. 마르지 않는 여지연의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해갈된 것이다.
이 소문은 먼 고을까지 퍼졌다. 가뭄으로 물싸움이 치열한 고을 사람들은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지연을 찾아왔다. 인산인해를 이룬 여지연은 언제나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물이 고였다. 풍요로운 고을에서 살겠다고 식솔들을 모두 이끌고 온 사람들도 줄을 이었다.
1967년 면목지구 택지조성공사 중 마모된 돌망치 등이 발견되었다. 채집된 석기와 석편이 모두 112개에 달하며 석기들은 찍개, 돌망치, 뾰족개, 긁개 등으로 비교적 많이 사용되었던 유물들이다. 산을 등지고 중랑천이 이루어 놓은 들판이 눈앞에 펼쳐 있는 이곳은,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좋은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서울시 유일의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설화에게 길을 묻는다 중 『물이 마르지 않는 여지연 - 여지연에 띄운 돛단배』
여지연은, 현재 서울 중랑구 면목 2동 배수 펌프장 자리, 중랑초등학교와 한신아파트 인근 위치로 추정.
여지연은, 살곶이 목장 말들의 물을 먹이기 위한 큰 연못이었던 것으로 파악,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시립대 목장도 고지도에 나타난 연못의 명칭과 위치를 일제시대의 지도 속에서 확인한 것임
살곶이 목장은, 조선시대 수많은 목장 가운데 하나로 도성 근교에 위치하여 관심의 대상. "경제속육전"에도 실려 있고, 1470년 성종 1년 경기도 근처 여러 읍에서 말먹이로 쓰는 풀을 거두었다고 기록됨. 1865년 고종 2년 1865년에 폐했다.
------- 중랑의 설화 연재가 마무리 되면서
중랑구 최고 언론사인 중랑뉴스는,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2014. 9. 30일자 신문에 "설화의 고향, 중랑" 중랑문화원 刊 중에서 『태조 이성계의 낙원, 망우고개』를 시작으로 연재를 출발하였다.
그리고 2017. 7. 27일자 "설화에게 길을 묻는다" 중랑문화원 刊 중에서 『물이 마르지 않는 여지연 - 여지연에 띄운 돛단배』 로 연재를 마치면서 3년간의 기나긴 대장정을 마무리 지었다.
이 기나긴 중랑의 설화를 삽화까지 실어가며 연재를 해준 중랑뉴스사에 감사드리면서, 좋은 글을 발표하여 중랑구민에게 중랑구의 역사를 소개하고 중랑구민의 자존감을 높이도록 좋은 설화를 발표해 주신 안재식 작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 연재를 시작하던 그때로 돌아가

(중랑뉴스 연재. 2014.9.30일 신문)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연재를 시작하며>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연재를 시작합니다.
중랑구는 용마산, 망우산, 봉화산이 뒤에 있고, 중랑천을 마주하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면수(背山面水)의 길지로 꼽히는 지역입니다. 중랑천에 풍족했던 물고기, 농사짓기 좋은 비옥한 땅, 꿩사냥에 알맞은 용마산, 그래서인지 중랑구는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면목동에서 기원전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봉화산 기슭과 망우리 고개에서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중랑구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설화가 많은 지역입니다. 신화나 민담, 전설을 일컫는 설화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흥미와 교훈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설화 속에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기 때문에 시기별로 역사와 풍속 등을 가늠해 보는 중요한 잣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안재식 작가는 지난 2010년부터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자료를 참고해 역사와 설화를 연계한 내용으로 ‘설화의 고향, 중랑’, ‘설화에게 길을 묻는다’ 등을 저술해왔습니다. 설화를 소재로 한 소설과 동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랑구 뿌리를 찾고, 지역문화를 정립하자는 취지로 안 작가의 설화를 발췌해 연재를 시작하니 많은 성원 바랍니다. [중랑뉴스]
안재식 작가는 중랑작가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편집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국제펜문학 전문위원,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2011년 행정안전부 전국공무원문예대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 작가다.
중랑문화원 '중랑문학대학'과 소정문학창작실 지도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30여년간 출판사를 경영하였고, 그동안 다수의 소설집과 동화집, 시집, 전자책을 저술 또는 공저하고, 특히 중랑문화원 지원으로 편찬한 역사소설/ 설화집 조선왕조 500년과 함께하는 '설화의 고향, 중랑' '설화에게 길을 묻는다'를 연속 집필하여 명실 공히 중랑지역 설화 발굴의 개척자로 자리매김한 현역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