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an071002a
2007-10-09 녹취 이름 : 한윤범
20071002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그리스도인의 삶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합시다.
시작합니다. 여기 [그리스도인의 삶] 20과 여기서부터 하도록 하죠. 여기서 요한복음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요한복음이 아니고, 요한일, 이, 삼서를 포함해서 요한의 사상에 대해서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통과하는 그 과정은 사도 요한의 전체적인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제목이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이죠. ‘그리스도의 삶’ 하고 ‘그리스도인의 삶’하고 어떤 차이가 나느냐? 차이가 나겠습니까? 나지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차이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이죠.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이라서 아무도 하지 못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은 로고스는 그분이 혼자 홀로 다 이룹니다. 다 이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죠. 그분 혼자 다 이루시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의 위해서 자신의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전체 다 이루신 삶이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자를 더 붙여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게 아니고, 이미 우리는 죄인이죠. 죄인이기 때문에 여기서 뭐가 들어옵니까? 그리스도로부터 공격이 들어오게 돼있지요. 말씀으로부터. 여기 여러분,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배운다는 게 말이 안되는 게 조금만 생각하면 돼요. 이게. 이상한 게 아니고 조금만 생각하면 되는데. 말씀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말씀 성취를 내가 보잖아요. 우리는 말씀한테 공격받습니까, 말씀 성취로 인하여 공격받습니까? 이창섭 목사님, 답변해 보세요.
우리가 성경말씀 볼 때 공격을 당합니까? 안식일을 지키라. 부모를 공경하라. 공격 안 당하지요. 예. 지키겠습니다. 이래 되잖아요. 말씀성취로부터 공격당합니까, 안 당합니까? 당연히 당하지요. 무슨 수로 니가 디모데전서, 먹는 걸로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예. 알겠습니다. 이건 공격 안 당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먹는 걸로 입는 걸로 족했나? 이래 나오면 그건 공격 아닙니까? 이걸 그래, 신학 총신교수도 모른다니까. 바보가. 간단한 이야기라니까요.
성경말씀은 말씀 안에 완벽한 성취가 내포되어 있어요. 그 말씀 성취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예. 돈을 안 사랑하겠습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라니까. 근데 돈을 한번도 사랑 안했어? 이래 나오면 공격 아닙니까.
왜? 기존의 이 성경 말씀의 전체는 말씀성취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돼있어요. 어디 남의 티끌을. 티끌 있는 지 티끌도 못 빼면서 남의 티도 못 빼는데 남의 티까지 뺄 수 있어요? 안 되잖아요. 말씀을 보는 순간 우리는 말씀성취자로부터 공격을 받게 돼있습니다.
예수님 옆에 계시고 우리 옆에 있어서 딱 펴 놓고, 야, 이리와. 예. 사무엘상 2장에 보면, 여호와를 존중하는 자는 존중히 여기고, 멸시하는 자는 니, 여호와 존중했나? 이래 나온다 말이죠. 같이 성경을 보고.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공격 안 당하느냐 하면, 예수님 좀 나가 주세요. 저 혼자 보겠습니다. 하고 화장실에 지 혼자 볼 때는 공격 안 당하지요. 예. 존중하겠습니다. 이러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 혼자 성경 보고 똑똑하다 하면, 그거는 공격받을 일 없습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말씀만 있는 게 아니고, 말씀성취자가 옆에 있어요. 말씀성취자부터 공격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뭐라고 했습니까? 말씀성취자로부터 뭘 한다? 무슨 삶이다?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뭘 받는 삶이다? 공격받는 삶이에요. 간단한 문제에요. 말씀성취자로부터 공격받는 삶.
아니 여러분들이 목사 되고, 신학교 이렇게 하고, 목회하면서 책 가운데서 이 책도 그런 이야기 안 해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책 봤습니까? 저는 못 봤어요. 예? 봤어요? 그러면 괜찮은 거예요.
-복음.
그거 말고. 저 말고.
-이런 식은 있죠.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이 살아서 뭐,
우리를 찌른다 하는데.
-말씀이 우릴 공격한다. 이렇게는 나오죠.
찌르는 근거는 뭐냐?
-성취차원 보다는.
성취 차원이 없잖아요. 신학을 할 때 자꾸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해 버리고, 말씀하고 나 하고 둘이만 해서 지키려고 하니, 이건 좀 미루고 이건 한 10%, 이건 50% 성취 됐다. 이런 측정을 하고 싶어한다 이 말이죠. 성도의 삶은 공격받는 삶이에요.
그러면 성도가 아닌 사람은 뭡니까? 공격 안 받지요. 왜 안 받느냐? 주님이 안 계시니까 공격을 안 받지요. 지 혼자 사는데 누가 공격합니까? 지가 공격합니까? 공격할 사람이 없지요. 돗댄대. 잘만 하면 도사되는데. 신 되는데, 신. 말씀 지키는 수준만큼 점점 신에 가까운데 접근되는데 어프로치 되는데요. 누가 공격해.
경주에 그런 게 있어요. 경주에 탑이 있지요. 이번에 고발당한 탑이 있어요. 경주에 무슨 분황사? 경주의 유명한 절 있잖아요. 분황사 절이 있다고. 절이 이렇게 조각해 놨는데, 이 절이 이렇게 형체가 있는 게 아니고, 텅텅 비어 있어요. 텅텅 비어있고 바깥에 이렇게 조형물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멀리서 보면 그 형체가 보이죠.
성도의 삶은 없어요. 없는데 그리스도께서 함께 옆에 계셔서 성취자가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앞에서 죄인 됨을 드러나는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못 느끼면 성도가 아니죠. 성도의 삶은 자기를 죄인 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은혜주시는 자로 구세주로 증거하는 삶이에요.
그래 되면 왜 당신은 당신 힘으로 말씀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는데 왜 자꾸 예수, 예수 하느냐? 그것은 심지어 성경에서 믿으라 하는 것조차도 우리가 믿을 수 없어요. 베드로가 그렇게 믿는다, 믿는다 하지만 베드로가 결국은 세 번 부인했잖아요. 베드로는 못났고, 우린 잘났으니까. 예수님 기도 안 해 줬으면 베드로 끝장났어요.
그걸 알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보고 뭐라고 합니까?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 그 끝까지 사랑이 베드로로 하여금 구원되게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신 겁니다.
어제 낮에도 그런 강의 했습니다만 여기서 이 사람 주장은 사랑인데, 사랑이라 할 때 이 사랑이 어디서 나온 사랑이냐 하면, 죽음에서 나온 사랑 아닙니까? 십자가 죽음에서 나왔잖아요. 그러면 이 사랑을 우리가 언제 아느냐 하면, 우리가 죽을 때 알아요. 왜냐하면 그 죽음에 동참해야 되니까. 죽음을 토대로 난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 자리에 죽어 있어야 사랑이 나오지요.
어떤 때는 사랑을 못 느끼느냐 하면, 나, 사랑 받을 만 하네. 이 정도 하면 나, 사랑 받을 만 하지 뭐. 이 정도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 사랑 안 해 주면 하나님 그르지. 자기가 살아있을 때는 사랑을 온전하게 못 느끼잖아요.
이장우 목사님 설교할 때 권정생 씨 이야기했지요. 권정생 씨 이야기하는 추석날 특집 할 때 보게 되면 가난하지 않는 한, 아프지 않는 한 하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난하지 않고 아프지 않고 한 내뱉은 소리는 다 거짓말이에요. 정말 가난하고 아플 때는 세상이 달리 보이죠. 세상이 달리 보인다고. 그런데 권정생 그 사람이 죽을 때 10억을 남겼어. 돈 안 써서. 현찰로. 그렇게 줘도 남으면.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아가 남아 있는 한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어요. 이거는 내가 받을만해서 받는 사랑이다 이래 생각하지, 나는 죽어야 돼. 나는 권정생보다 더 아파야 돼. 나는 그 사람 가난한 것은 유도 안 돼. 그보다 더 가난해야 돼. 그런데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게 구원의 감동 아닙니다. 구원 안 해도 되는데.
이게 혼줄 나야 돼요. 말씀 성취자로부터 혼줄 날 때 그런 고백이 나와요. 말씀성취자로부터 혼줄 날 때. 야, 이 말씀 보니 난 개다. 완전 나는 개네. 라고 느낄 때 그 전체가 주님 하신 모든 것이 전부다 은혜고 사랑으로 느껴지지 그렇지 않고서는 흥정입니다. 흥정. 이만큼 열심히 했는데 교인 불려줘야지. 이런 식으로 흥정이 된다니까.
여기서 제가 초반부터 그리스도 삶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것은 과연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 삶이란 게 있느냐? 저는 없다고 봐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없다고 봐요. 그리스도의 삶 밖에 없어요.
그리스도 삶 밖에 없고, 성도는 뭐냐?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을 증거하는 삶일 뿐이에요. 그리스도는 이렇게 사셨고, 이렇게 혜택을 주셨습니다를 증거하는 삶이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따로 꼬불쳐 놓는 삶은 없습니다. 왜? 죽을 놈이 무슨 삶이 필요해요. 날마다 죽노라 했는데.
그런데 여기 래드의 입장을 돌아가 봅시다. 이거 차이점 아시겠지요. 그리스도의 삶이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인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공격받는 삶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어 공격받는 삶이다. 계속 지적받고 공격받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죽기까지 계속 죽어 있기를 원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왜 그렇게 되는가? 그래야 그리스도의 삶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증거 돼요. ‘내 잘났다’가 증거 된다고. 그거는 성경에서 요한이 말하는 거하고 다릅니다.
그러면 요한이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돼있고. 여기에 초반에 보면 책에 있지요. 완전히 기죽이는. 원어 나오면 기죽잖아요. 여기 보면 ‘피스투오’, ‘믿다’에 뭐, 마가복음에 열 번, 마태복음에 열한 번, 누가복음에 아홉 번, 요한복음엔 단독으로 서른 번, 찾았습니까? 여격으로 열여덟 번, 호칭으로써 열세 번, 쭉 나오죠. 이게 지금 무슨 이야기냐 하면, 믿음이라는 것을 원어적으로 분석해 보면 거기 믿음의 본질, 핵심, 원천이 안 밝혀지겠나? 기대를 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거 아셔야 돼요. 원어라 하는 것은, 원어라든지 언어나 이것은 게임입니다. 게임이에요. 뭐, 헬라어에서 하나 딱 나왔을 때 이거는 주어, 남성, 복수, 여격 뭐 이렇게 쭉 나오잖아요. 여러분 했지요. 여격, 소유격, 주격, 목적격 이렇게 하고 또 전치사 붙은 걸 따지는 이거는 전부다 하나의 애들 레고 움직이는 장난감 게임이에요. 게임은 반드시 분류를 해서 게임을 즐기게 돼있습니다.
여러분, 당구 칠 때 빨간 공, 파란 공 있지요. 빨간 공치고 그 다음에 파란 공치고 노란 공 쳐야 되지요. 빨간 공, 파란 공 분류 되잖아요. 분류하는 것뿐이에요. 이건 제 이야기도 되고, 비트겐슈타인 이야기도 되고. 이게 언어를 연구한다는 것은 새로운 게 나오는 게 아니고, 만지작만지작, 더 나쁜 말로 하면 꼼지락꼼지락. 갖고 노는 거라니까.
김승경 목사가 했던 책 안 많습니까? 에베소서 원어해설 본 적 있습니까? 거기 보면 원어를 이렇게 쭉 한다는데 안에 내용 들어보면 혼자 놀고 있어요. ‘호티’라 하는 것은 이거는 접속사로써 뭐하는 것, 이런 뜻이고, ‘에이스’란 뭐뭐부터 해서
이거는 뭐냐? 기존의 룰이 있어요. 그 룰에 맞는가, 안 맞는가 대조하는 그 즐거움, 게임이라니까요. 그걸 해서 분해했다. 분해해서 다시 조립했다, 해석했다. 뭐 나옵니까? 아무것도 안 나와요. 원어에 무슨 뭐가 있을까 분해하고 뭐 여격 해도 아무것도. 여격이라 하는 것은 ‘~에게’란 뜻이거든요. 예수에게 속한 믿음이냐, 뭐 예수의 믿음이냐? 소유격이나 여격이나 그 말이 그 말이고요. 거 뭐 나옵니까? 분석하는데 백날 해봐야 자기도 분석해봐야 재미가 없었든지 그만 여기도 슬슬 꺼져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언어는 게임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분류체계입니다. 사람이 노는 게임 가운데 이런 게임 있어요. 분류하는 그런 것도 심심하면 재미가 있어요. 같은 음료수라도 이거는 약국에서 파는 것, 이거는 수퍼에서 파는 것, 이거는 집에서 만든 것, 이렇게 분류해 보세요. 이것도 하나의 재미있다니까요. 비타민 알약해서 이거는 소화제고, 이거는 거담제고. 분류해 보세요. 이것도 재미있어요. 분류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성경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냈죠. 누굴 보냈습니까?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냈다. 누구를 보냈다 이 말 아닙니까. 이거 큰 사건입니다. 남북정상회담 이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보냈다는 거예요. 우리가 안 왔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이러고저러고 이바구해도 거짓말해도 우린 통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사도 요한이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를 꼭 집어 보냈다는 겁니다. 이로써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이야기는 이제는 드디어 완전히 종결되었고, 그 누구를 보내신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간주해 버립니다. 사도 요한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지요. 나를 경배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경배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를 보냈다고 하고 원어 가지고 게임, 장난치는 것 하고 같을 수가 없지요. 요한복음이나 요한 일, 이, 삼서를 해석할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누굴 보냈다 여기에 우리는 보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너는 이분에게 목숨을 걸어라! 게임을 즐기라는 게 아니고, 신학적인 언어게임을 하는 게 아니고, 목숨 걸어라. 목숨 걸어 버려라.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상관없이 그분에게 목숨 걸어라. 왜? 하나님이 누굴 보냈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굴 보냈기 때문에 목숨 걸어라. 끝이에요.
목회하다가 목사 하다가 제일 시험이 올 때가 언제냐 하면, 목숨 걸 때가 없을 때 굉장히 시험이 와요. 달리 목숨 걸 때가 없어서. 목숨 거는 게 뭡니까? 목숨 살라고 할 때 제일 큰 시험 들지요. 우에 사노? 보세요. 어떻게 살지? 나, 이 나이에 50대 되서 뭐 하고 살지? 뒤에 뭐가 붙어요? ‘뭐하고 살지’가 붙지요.
하나님이 예수 보냈다. 니는 목숨 걸고 살아라. 이건 성경이고. 목회자는 나, 뭐하고 살지? 완전히 달라요. 무슨 짓하고 살라 하면 게임하면 돼요. 원어분석하고 심심하면 그거 하든지, 안 그러면 딴 게임 하든지. 시장 가서 골라, 골라 그 게임하든지.
하나님이 누굴 보냈다. 이러면 세례요한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먹고 사는 문제는 여기선 희석돼버려요. 이게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뭐냐? 지적받고 공격받는 삶이에요. 누구 때문에? 내신 분 때문에 지적받고 공격받는 거예요. 나, 예수 죽으려고 하는 니, 왜 살려고 하느냐? 현실입니다. 실제상황이거든요.
하나님이 누굴 보냈다. 저자는 그 점에 대해서 약간 언급해 놨어요. 상당히 그걸 고맙게 생각하는데. 전체 뒤까지 다 읽어보면 약간 나와요. 요한복음의 주제는 이 사람이 주장하기를 하나님 누굴 보냈다는 것이다. 오케이. 그건 잘 본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안 보내고, 예수님을 보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살까?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밥 먹고 사느냐 하는 그런 모든 인류역사상 가장 고민거리, 개인적인 고민거리 같은 것은 이제는 그거는 고민거리 축에도 들지 않는 것이 이미 확정, 확인하고 마감돼버렸어요. 더 이상 할 거 없어요.
그 다음에 문젭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다 했으니까 이것은 감추어진 거예요. 보냈다, 감추어진 거다. 박윤진 씨가 어젠가 글을 너무나 참한 글을 썼는데, 너무너무 멋진 글을 썼어요. 감춘 사람이 아니면 감춘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감출 때는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감추었다. 그런데 인간의 힘이 찾아냈다 하는 것은 전부다 거짓말이다. 감출 때는 지적한 사람은 지적한 사람만 알게 되고, 다른 사람한테는 안 들키도록 하기 위해서 감췄다는 아주 멋진 글을 썼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다 할 때에 이 보내심이 우리에게 접근할 때에 여기서부터 의사소통이 안 돼요. 의사소통이 단절돼버립니다. 의사소통이 성사가 되질 않습니다.
여기에 [신앙과 표적들] 그 부분 있지요. 첫 번째 뭡니까? 첫 번째가 신앙. 그 다음 신앙 그건 넘어가고. 신앙, 이건 되도 안고요. 엉터리고. 신앙과 표적들 되지요. 이 의사소통이 단절되게 하는 그것이 뭐냐 하면, ‘표적’이라는 겁니다. 이 표적에 대해서 이 저자가 정리를 제가 보기에는 만족이 80% 될 정도로 만족스럽게 잘 정리해 놨어요.
어떤 점에서 상당히 기대 이상으로 잘 정리해 놓았느냐 하면, 이 책에 보면 저자가 하는 말이 저자가 하는 말을 제가 이야기할게요. 뭐냐 하면, 보통 표적하면 이적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이 저자는 아주 예리하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적 말고 평소에 밥 잡숫고 가신 것도 그것이 표적이다. 라고 이야기를 한 거, 그거 아주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거 참 생각 잘 했어요.
보통 가나안 표적은 표적이고, 나머진 표적이 아닌 걸로 하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 전체가 표적이다. 라고 이야기한 것은 그거는 제대로 잘 봤습니다. 여기에 신앙과 표적에 중간 쯤 보면,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자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모든 이 표적은 하나님 보낸 자가 바로 예수님이다 말이죠. 말 한번 적어볼게요. 어려운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예수다] 할 때 이 말을 사람들이 이해할까요, 이해 안 할까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주체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거든요. 제 말이 어려우면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제 저녁에 제가 강냉이를 삶아 먹었습니다. 여러분,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 턱이 있나. 우리 집에서 강냉이 삶아 먹었는데. 모르지요. 왜 모릅니까? 강냉이 삶아 먹은 주체가 누굽니까? 나잖아요. 낸데 여러분이 왜 알아야 돼. 모르잖아요.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주체에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예수님에요. 사람들이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요. 하나님이 하신 걸 우에 알아요. 사전에 의논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거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 보고 신학하고 설교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뭘 먹고 살꼬? 이걸 떠날 생각이 없어. 우린 생각이 떠나지 않아요. 설교하면서도 설교해서 먹고 살겠나.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보낸 것은 내가 안 보냈거든. 설교자가 안 보냈다니까. 하나님이 보낸 자를 내가 안 보냈기 때문에 나는 내 생각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순간에도. 의사소통이 영원히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를 보냈는데 우리는 내 살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 이게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겠다든지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 믿겠다하는 것은 그 예수는 예수가 아니고,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지요. 왜? 주체가 나거든. 내가 주체가 된다니까.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예수라고 등장시킴으로 말미암아 이쪽의 인간들이 자기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과 이게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어떤 충돌 같은 게 일어나죠. 그죠?
그 점에서 저자가 놓치는 거예요. 그 충돌이 바로 십자가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 저자는 말안 하고 있어요. 뒤에 보면 이런 거 하나 있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해서 십자가로 뭐 이렇게 고난당하고 그거 있지만 표적 자체에 대해서 그 이야기를 안 다뤄났다 이 말이죠. 표적은 못 알아본다만 이야기했지 표적 자체 속에 뭐가 들어있다? 십자가의 고난이 들어있다. 고난을 야기시키는 하나의 동기가 된다는 말은 이 책은 안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저자가 하는 이야기를 이 책을 교재로 하니까 저자가 하는 이야기를 다 하겠습니다. 저자가 하는 이야기는 뭐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낸 자를 우리가 의사소통이 안 되는데, 그럼 어떻게 왜 보냈느냐? 이 저자가 의도했는지 저자가 몰라서 한 마디 했는지, 알고 할 턱은 없는데 이런 소리했어요. 거기에 여격이 나와요. 여격 믿음 나와요. 뭐냐 하면, 믿음을 신앙을 신앙이 있는 자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낸 자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이 저자의 주장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누구다? 예수님이다. 이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다 하고 뉘앙스가 다르지요.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다 하면, 예, 믿습니다. 할 거예요. 왜요? 메시아를 보내는 게 하나님 주특기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예수다 할 때는 이건 뉘앙스가 달라요. 하나님이 예수 보냈다. 그건 나도 인정해요. 하는데
하나님이 보낸 자가 예수다 이렇게 돼버리면 무슨 뜻이 되느냐 하면, 누가 보내라 했습니까? 이래 나올 수 있어요. 내가 안 보낸 일을 왜 쓸데없는 짓을 합니까? 이래 될 수 있다 이 말이죠. 어쨌든 간에 여기 지우고, 하나님이 보낸 자가 예수라는 것을 이 저자는 말하기를 모른다는 겁니다. 아주 그거 동의해요.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그걸 이적이라 보는 거예요. 놀라워라. 웬 이적? 이카거든요. 사실은 저자가 말하기를 이적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이적이 아닌데 그걸 이적으로 본다는 자체가 그 사람들은 신기한 일, 신기한 일로 간주했었다 이 말입니다. 신기한 일로 간주한다는 자체가 그 꼬라지 자체가 뭐가 문제다? 하나님 보내신 예수의 뜻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이 말입니다. 좀 신기한 일 좀 없나? 아, 화끈한 일 좀 없나? 찾는 자체가 지금 하나님이 예수를 보낸 취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증거다 이 말이죠. 그걸.
그러면 목사님,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 하는 일이 다 이적이라면, 다 이적이다 이래 이야기해야지, 어떤 가나의 혼인잔치에 물이 포도주 된 그것만 이적이라 왜 표적이라 하느냐? 그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신기한 일을 언급한 상태에서 신기한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서 주님께서 그거 표적이거든. 니는 그걸 신기한 일로 보나? 그건 단순한 신기한 일이 아니라 누구를 가리키는 표적이거든. 라고 그 신기한 일을 딱 잡고 있는 그걸 계기로 삼아 뭔가 하늘의 정보를 이렇게 담아주려는 의도로써 그걸 표적으로 사용하신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도 표적이다, 표적이다 이렇게 하신 게 아니고, 사람들이 야, 요거 신기한 거다. 할 때 그게 기적이 아니고, 뭐라고 한다고요? 표적이거든. 기적이 아니고 표적이거든. 기적은 뭐냐? 신기한 거, 좀더 솜씨를 보여줘. 그게 아니고 기적이 아니거든. 표적이거든.
니가 덩치를 몰라서 그래. 낙지의 끄트머리만 잡고 야, 멋있다. 하는데 니가 몸통을 몰라. 그래서 그들은 오병이어 한 뒤에 몸통 버렸잖아요. 그죠? 부스러기 먹고 떡 먹고 배불렀는데 실제로 몸통은 뭐였습니까? 떡을 먹는 게 아니고, 이 살을 먹는 게 몸통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게 몸통인데, 그들은 끄트머리 오천 명 떡 먹는 걸로 쭉 따라 왔다가 몸통 먹으라 하니까 다 도망하고 말았잖아요.
그건 뭐냐?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그들은 믿지 않고 그들은 뭐냐? 하나님이 이 예수 자리에다 메시아 보내시는 하나님을 믿은 거예요. 말 어렵다, 정말. 그들은 메시아 보내 줄줄 믿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낼 줄 믿었는데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행하니까 이 메시아 자리에 뭘 집어넣었다? 예수를 집어넣은 거예요.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다. 이 자체가 말짱 엉터리다 이 말입니다.
그게 저자가 그 점에 대해서 아주 잘 칭찬할 만해요. 보통 신학자라면 여러분, 예수 믿는 건 정말 훌륭한 일입니다. 참 은혜 받을 거라 할 건데, 예수가 어떤 예수냐? 요새 누가 시비를 겁니까? 어떤 예수냐? 예수 믿어준 건만 해도 고맙다고 절하고, 성령이 아니고서야 예수를 주라고 못한다고 고린도전서 12장 말씀 인용해 가면서 아이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아이고, 예수 인정하십니까?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이래 할 건데, 당신이 어떤 예수냐를 따지는 사람 누가 있어요. 어떤 예수냐 이 말이죠.
기적을 원해? 그건 예수 아니지요. 그럼 기적으로 하지 말고 뭘 하느냐? 표적을 해야지. 왜요? 표적의 뜻은 뭐냐 하면, 내 힘으로 예수를 믿을 수 있다, 없다? ‘없다’를 보여주는 표적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면 우리는 구원될 수 없다를 보여줘야 표적이 되는 거예요.
야, 신기한 일을 했으니 거 참, 예수님 주님 맞다. 이건 아니에요. 그건 기적을 원한 거지 표적이 아니라니까요. 그건 예수 엄마 마리아가 그런 짓 했지요. 예수여, 당신이 평소에 하나님 아들인데 어떻게 해봐라. 해결 좀 해봐라. 포도주가 떨어졌다. 여자여, 그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하고 기적을 행하지 않고 표적을 행하죠. 표적을 해줘버리니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됐죠.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다는 이걸 내가 어느 책에서 욥기 책을 다 써서 정리해서 보냈는데, 패러디했어요. 죄가 변하여 돈이 된다고. 제가 패러디했어요. 돈이라 하는 것은 죄가 변하여 돈이 된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듯이. 우리는 죄가 변하여 돈이 됩니다.
지금 여기 저자가 이야기 못한 걸 제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저자가 이야기한 것부터 이야기하고, 저자가 놓친 것을 그 다음부터 이야기해 줄게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저자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의 믿음이다. 여격, 예수의 믿음이란 말이죠.
예수의 믿음이니까 현재 인간들은 믿음이라 하는 믿음은 말짱 거짓말이다 말이죠. 왜 거짓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예수라 하는 이 사실을 믿지를 못하고,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낼 것을 믿는 이런 엉터리 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냈다 이 믿음에서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든 안 기다리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은 예수를 보냈다, 예수님을 보내버렸다. 라는 이 사실을 받아야 될 텐데 이런 선입관을 갖고 있는 인간이 이걸 바뀔 리가 없어요. 바뀔 리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 이게 저자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이 그 사람을 믿게 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이 믿는다 이 말이죠. 맞잖아요. 그 말 맞잖아요. 정말 이거 복음 아닙니까? 그 다음에 그 사람이 거기서 멈추어버렸어요.
그러면 제가 제일 처음 이야기한 게 뭡니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차이점은 뭐냐? 지적 받고 공격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이죠. 그렇다면 진짜 믿는다, 믿는다 할 때 예수님의 믿음이 왔을 경우와 자기가 믿고자 해서 믿는 거 하고 차이점을 분리하더라도 그 예수의 믿음 가지고 지적하는 그것까지 설교자가 해야지, 그걸. 신학자가 해야지, 그것도. 저가 했잖아요.
이 사람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게 된다. 왜? 다른 사람들은 메시아, 구세주 오신다 이래 하니까 그건 엉터리고, 하나님이 보낸 너거들 기다리든 말든 일방적으로 오셨는데 그분이 예수다. 요걸 믿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왔다. 거기에 멈추지 말고, 그거는 그 사람이 믿는다, 믿는다 할 때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예수의 믿음 가지고 들이대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는 없어요. 여기 없다니까. 삶의 그 이야기 없다 이 말이죠.
그럼 목사님은 그 들이대는 방법이 뭡니까? 어떻게 들이대서 예수의 믿음인지 지 믿음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게 바로 말씀 해석하면서 바로 이런 것을 끄집어서 반포를 하는 거예요. 이런 내용을.
이런 내용을 반포하면 가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 중간, 중간에 상당히 얼굴이 새파래지고 기분 나빠하는 대목이 있을 거예요. 상당히. 어떤 거냐 하면, 내가 20년 믿었는데 내가 30년 믿었는데 그러면 이틀 전에 믿은 사람하고 내 믿음하고 똑같나. 라는 그러한 우월감이라든지 비교의식이 나올 수 있고.
그러면 예수님의 믿음이 있다면 믿음을 더하고 덜하는 것도 내가 마음대로 수위를 조종 못하고 주님 손에 달려 있다면, 그러면 겨자씨 믿음에서 더 큰 믿음 얻기 위해서 내가 따로 해야 될 일이 없다 이 말인가? 그러면 나는 큰 축복을 내가 받아낼 수 있는 그런 근거가 없단 말인가? 붉으락푸르락 거기에서 또 기분 나빠 할 거고.
그리고 제일 기분 나쁜 게 뭐냐 하며나, 어느 누구도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는 게 기분 나쁘고. 왜 이제 와서 가르치느냐가 아니라 그럼 우리가 사기 당했다는 말인가? 사기 당한 사람으로 취급당한 그게 기분 나쁠 거고. 여러 가지 각가지 기분 나쁠 요소들이 많아요.
제가 이 단락의 끝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예수의 여격, 예수님께 속한 믿음이 우리에게 와서 없던 믿음이 생겨서 믿어보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예수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 걸어라. 니가 이 목숨 거는 것 말고 딴 거 할 일 없다. 하나님이 예수님 보내버렸는데 이제 예수님 위해서 살아야지. 이미 끝난 이야기에요. 다른 어떤 배를 만들고 새로운 약품을 제조하고 그런 것보다 이게 더 중요하다. 예수님 위해서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왔을 때 기존의 믿음을 그 다음에 문제가 뭐냐 하면, 그러면 기존의 믿음을 정리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지요? 제가 집사다. 어떤 목사님이 오셨는데 나는 집사로써 20년, 30년 장로 됐으니까 구원받는다고 내가 여겼는데 어떤 복음을 아는 목사가 와서 방금 이런 소리 했을 때 내가 딱 듣는 평신도 입장에서 집사 입장에서 그것도 장립 집사 입장에서 딱 들어보니까 무슨 일을 해야 되느냐는 숙제를 받느냐 하면, 지금까지 내가 믿음으로 알고 있던 것을 깨부숴야 되는 그런 숙제를 안게 되죠.
그러면 어느 대목에서 무엇을 깨야 되는가를 누가 이야기해주면 참 좋겠지요. 어느 대목에서 뭘 깼으며. 목사님, 내가 지금 이래 믿었는데 그거 깨져야 됩니까? 깨져야 됩니다. 이거는요? 깨져야 됩니다. 이거는? 깨져야 됩니다. 뭔가 깨져야 될 것들을 주면 참 좋겠지요.
왜냐하면 그 동안 쌓였던 것이 그 동안 잘못 배워서 덮치기, 엎치기로 삼겹살, 오겹살로 뭐가 덮쳤습니까? 거짓된 잘못된 믿음이 덮쳐 있잖아요. 그러면 한 꺼풀, 두 꺼풀 이렇게 지구 깨듯이 깨서 벗겨봐야 안에 진짜 이거는 진짜 뭡니까? 예수님 나한테 주신 믿음이 나한테 있다는 걸 발견될 거 아닙니까.
그 일을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낮아짐, 낮아짐이에요. 이게. 나 장립집사다, 곧 장로 될 사람이다. 나는 이 교회에 오천만원 헌금했다. 이게 아니라 권정생 그 사람보다 더 낮게. 나는 폐병이 아니라 폐병 말기 중에 말기고. 그것도 피를 토하면서 걸어 다녀도 나는 기뻐해야 돼. 그게 무슨 병자냐? 몇 년 된 병자? 38년 된 병자. 그것 때문에 표적이라.
표적이 등장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자기한테 절망이에요. 마리아가 절망스러워요. 왜? 포도주는 떨어졌지 해결책은 없지, 절망이에요. 38년 된 병자가 이거는 절망이에요. 왜? 누가 자기를 데려갈 사람이 없으니까.
이것도 어려워요. 여러분, 38년 병자는 자기가 못 움직여서 절망이죠. 그런데 멀쩡하게 맨 그 사람인데 그것보다 더 절망스러운 상황은 한 번 봅시다. 38년 병자가 몸이 아파서 절망이잖아요. 그 이후에 더 큰 절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니는 안식일을 어겼다는 죄인으로 간주되는 절망. 이게 핍박받는 성도의 모습. 의와 복음을 위해서 핍박받으면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 상이 큼이라. 주님께서는 낮아지는데 예수님 가신 그 길로 들어가게 해요. 내가 니가 원치 않는 죽음을 죽을 것이다. 이것도 뭡니까? 또 낮아짐이에요. 베드로 보고 하는 말이 니가 원치 않는 죽음을 가도 베드로는 괜찮아요. 왜냐 하면, 이미 예수님 여격, 예수님에게 속한 믿음이 그에게 왔기 때문에 베드로가 설사 어떠한 죽음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예수다. 라는 것을 제대로 믿었잖아요. 지가 믿은 건 아니지만.
하나님 보내신 자가 예수다가 있으면 자기가 어떻게 깨져도 자기한테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머지 일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하실 계획대로 모든 것이 차질 없이 세상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자리에 있던 간에 그것 가지고 자기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그것 가지고 지가 고민할 걱정거리는 될 수 없다 이 말이죠.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저 사람은요? 쟈는요? 쟈가 주님 재림할 때 올 때까지 니는 상관 하지 말고 니는 내가 너를 이끌어간다 이 말이에요.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 봅시다.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지적 받지 않고 그리스도한테 공격받지 않고 그냥 그리스도의 삶을 살려고 하면 이겁니다. 나, 부족합니다. 맨 날 이거에요. 나, 부족합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착각할 거예요. 저 사람보다 믿음이 더 좋기 때문에 나는 더 겸손하고, 저 사람은 이레 두 번씩 금식도 안 하는데 금식하고, 십일조 안 내는데 십일조 하고, 구제 안 하는데 구제합니다. 나, 부족합니다. 나, 부족합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고난주일에 회개하는.
이것이 믿음의 성숙된 모습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진짜 믿음이 오고 이게 사도 요한의 말 들어보니까 그게 깨져야 되죠. 왜냐하면, 그건 누가 누구한테 주체가 되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외부에서 깎듯이 우리를 깎아버리고, 우리가 깎는 게 아니고 우리가 깎아서 멋있는 모습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말씀으로 낮추시는 주의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 받게 하시는 그 길을 가는데, 자기가 먼저 근사한 그리스도의 성도의 모습으로 가고자 하는 자체가 이게 누굴 믿는 거예요? 주님을 안 믿고, 자기가 자길 믿는 거예요. 이게 깨져야 돼요.
그러면 재산이 한 50억 있다, 한 100억 있다. 그 사람 구원 받습니까? 구원받지요, 뭐. 창고에 곡식을 가득 채워 놨다. 구원받습니까? 구원받지, 뭐. 창고에 곡식 있다. 왜냐하면 재산 때문에 핍박 받는 게 아니고, 복음 때문에 주님 주신 믿음 때문에 핍박 받는 부자지요. 차가 한 열 대 있다. 열 대가 있든 두 대 더 사지, 뭐. 그것 가지고 그거 없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있다고 해서 구원 못 받는 것도 아니고, 부자 된다고 해서 구원 못 받는 게 아니라 단지 주님께서 믿음을 주셨다는 이 사실 때문에 주위에서 공격받고 핍박받을 때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게 성도에요.
그래서 광주에 어떤 목사님께서 우리 노회에 들어오려 하는 그 목사님께 왜 우리 노회 들어오려고 합니까? 이렇게 물어보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딴 게 힘들고 2만 명 모이는 교회의 수석 부목사니까 광주 순복음 교회에. 부러울 거 없는데 단지 복음을 전하는데 전하지 못하는 게 참 괴롭다.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복음을 안 전하고 빙빙 돌려서 복음을 빼고 전한다는 것이 그렇게 괴롭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그 사람 거지 돼야 됩니까? 거지하고 아무 상관없어요. 거지 된다고 인간되는 거 아니잖아요. 권정생 씨 시중에서 복음적인 거 있는가 싶어서 아무리 찾아도 복음적인 거 없어요. 자기는 초야에 묻혀 낮아졌다는데 그 사람은 뭐냐? 기적을 못나오고 있어요. 표적을 몰라요. 다만 기적만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 저자가 예리하게 집은 것이 예수님 살아가는 것이 전부다 표적인데,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기적거리만 따로 뽑아낸 자체가 그것이 예수님의 표적을 모르는 증거다 이래 보는 거예요.
이제 정리가 되셨지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이 저자 말대로 예수님의 믿음이 그 사람에게 주어질 때 믿게 되는데, 비로소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표적인 줄 알고 하는데 그 다음에 하나 놓친 게 뭐냐? 그 믿음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을 공격해야 된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말이죠. 공격을 하게 되면 뭐가 깨지느냐 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이라 하는 게 다 사랑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말이죠.
그리고 그걸로 인하여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저주해야 될. 물 위까지 걸었는데 저주를 해야 돼. 이걸 제가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사랑이 이래 있으면, 사랑은 우리 인간이 이래 있다면 사랑이 있잖아요. 사랑한다, 사랑한다 나오잖아요. 주님의 사랑은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 바깥에 우리가 살아있는 한 살아있는데서 나온 사랑이라면, 주님의 사랑은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죽음에서 나오잖아요. 죽음에서 건너서 이렇게 나온 사랑이에요.
우리가 언제 아느냐 하면, 우리가 죽을 때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야, 그동안 내가 살아서 사랑한다는 것이 항상 그 기초가 나는 살아남아야 돼. 나는 안 죽어야 돼. 이걸 항상 전제로 깔고 한 어설픈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만약에 우리가 죽는다 하면 어머야, 사랑이고 뭐고 그만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 번씩 모른다고 저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거든요. 가능성이 아니고, 사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은 그런 인간조차 사랑했다는 말은 뭡니까? 살아있는 우리하고 흥정한다든지 거래한다는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자기 죽음에 근거해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해주는 거예요.
따라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가 안 죽어보니 모르잖아요. 예수님은 죽어봐서 알았고. 예수님의 죽음에 근거해서 주님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일러주니까 항상 우리 보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라 말이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은총인 것을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거기 봅시다. 그 다음에 [영광]. 여기 영광에서 한 구절 이야기하겠습니다. 영광에서 중간 쯤 보면, 예수의 이 영광은 말할 것도 없이 가려진 영광이다. 자, 정말 참 역시 또 이야길 잘 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뭐라고요? 가려진 영광. 그걸 저는 [뒤에서 본 한국교회]에서는 그걸 뭐라고 했느냐? 십자가 독생자 영광이라 했지요.
영광에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세케나, 빛나는 영광. 빛난 영광이 있고, 하나는 뭡니까? 초라한 영광, 초라한 영광이 독생자 영광이죠. 예수님은 영광이 가려졌어요. 왜 가려졌습니까? 왜 영광을 공개하지 않고 가려졌습니까? 그거는 바로 박윤진 씨 이야기한 것처럼 감추어놓은. 그것 좀더 이야기해 봅시다.
주님께서 영광을 이렇게 감추어 놓은 것은 아버지께서 보낸 자만 알리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말이죠. 하나의 방법이에요. 지나 개나 지가 눈으로 보고 알 수 있는 영광 같으면 공개해서 영광 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 감추었다는 것은 구원받을 자에게만 나누어주는 그거에요.
그래서 이 책에 보면 나옵니다. 믿음 있는 자만 예수를 안다. 굉장히 간단한 문장, 당연, 당연, 당연한 문장인데 안 믿는 사람 같으면 얼마나 속상하면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말씀인 줄 몰라요. 믿게 하는 저희끼리만 알고 남들은 알지 못하는 거예요.
이걸 신학적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렇습니다. 아버지하고 예수님만 알아요. 그래서 증인이 몇 명인가? 두 명이에요. 누가? 예수님이 증인이고 내가 증인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자가 예수다 하는 것을 그걸 전부다 증인할 사람은 두 분인데, 그 두 분도 이 세상에서 전혀 찾을 길 없어요. 따라서 이 말은 뭐냐? 니가 믿거든 몽땅 하나님께 영광 돌려라 이 말입니다. 니가 알아서 믿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말이죠.
예수님은 제가 증인할 게요 나설 인간이 위인이 없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아버지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예수님만 알고 있는 이 테두리 안에 주님께서는 자신의 믿음을 줘서 넣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직까지 뭐까지 이야기 안 했느냐 하면, 이 자신의 믿음을 줄 때 어떤 식으로 주느냐 하는 것은 제가 아직까지 이야기 안 했습니다. 이 책에서도 그 이야기 안 하고 있어요. 왜 그 중요한 걸 빠뜨렸는지 몰라. 아마 생각이 그까지 안 들었나 보죠. 어쨌든 간에 여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할 게요. 다음 시간에 이야기할 게요.
아버지와 예수님만 알고 있는 이 세계를 알 수 있도록 믿음을 줘야 되는데 믿음은 어떤 식으로 오느냐 하는 이야기는 나중에 이야기하는데, 여기 먼저 이야기할 것은 초라한 영광, 감추어진 영광, 그런 영광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죽음, 부활, 승천 그 영광됨이란 뭐냐? 여기 하나 빠졌어요. 저자가 이걸 자꾸 빠뜨리는데 예수님의 영광은 뭐냐 하면, 죽음과 그 다음에 부활과 승천 이것만 하고 쉽시다.
뭐가 빠졌어요? 앞에 뭐가 빠졌습니까? 육신 됨이죠. 육신으로 와서 죽으시고 이래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 지금 일직선이 아니잖아요. 이거 잘못됐어요. 일직선 아닙니다. 직선으로 고쳐야 돼요. 육신에서 죽음은 여기 넣으면 안 되고, 이 밑에 넣어야 돼요. 왜냐하면 육신 속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죽기 위해서 육신이 되었거든요. 죽음은 육신과 함께 있어야 돼요. 이렇게 죽음과 육신을 함께 해야 이 영광과 이 영광이 서로 달리 분리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죽음과 예수의 죽으심, 이것은 독생자 영광, 이건 예수님의 영광, 그 다음에 부활, 승천 되면 예수님이 처음부터 하나님과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그 신성, 신적인 영광인 것을 이렇게 구분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건너가는 것, 이 건너가는 것이 이게 무슨 힘이냐 하면, 이게 성령의 힘으로 가능합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가능하다는 이것과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번 시간에. 아버지, 예수 사이에 우리를 믿음으로 넣도록 하는 이것이 성령세례로 돼야 가능합니다.
육신과 죽음에서 부활과 승천 가는 것이 그냥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이 와서 되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이 와야 아버지, 예수의 그 세계에 합류할 수가 있습니다. 어째서 성령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그거는 쉬고 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