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貞純王后) 생가*** 소재지 :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지정번호 : 충청남도기념물 68호
지정년월일 : 1988. 8. 30
시대 : 조선
관리자 : 김기흥(041-688-0283)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출생한 곳으로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영조 35년(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집은 조선 효종 때 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 적에게 왕이
내린 집으로 효종 시절인 1649~1659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은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 건물 좌우에
각각 3칸씩 덧달아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앞면 5칸․옆면 1칸의
별채를 배치하였는데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대문은 평문이다.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한다리 마을 야산 아래에 동향하고 있는 ㅁ자형
목조 전통 기와집이다.
조선 효종때 문신으로 승지 충청감사. 예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김홍욱의 효성이 극진함을 알고 그의
부친인 김적(金積)에게 하사한 집으로 효종대(1649~1659)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이 가옥에서 김홍욱의 4대손인 김한구의 맏딸로 정순왕후가 출생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안채의 건물에 죄우로 각각 3칸씩의 건물을 달아내어
ㄷ자형의 평면을 이룬 안채 중앙3칸은 넓은 대청을 두고 우측에 고방(庫房)과
안방 부엌이 이어져 있고 대청 좌측에 제실, 건너방, 광 등이 있고 광 옆으로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중문칸이 나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 사랑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 와담장이며 대문은
평문으로 되어 있다. 화강석 1벌대 기단 위에 덥벙초석을 놓고 그 위에
각기둥을 세웠으며 가구는 일고주 오량 집으로 상부에 제형대공을 설치
하여 종도리와 함께 지붕의 하중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지붕은 홑처마이다.
찾아오는 길
∴현지교통
서산버스터미널에서 해미행 시내버스 이용하여 중간 유계리 입구에서 하차 도보로 5분 소요
∴자가운전
1. 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 → 해미 → 유계리입구 → 정순황후생가
2. 경부고속도로 천안I.C → 아산 → 예산 → 덕산 → 해미 → 유계리입구 → 정순황후생가 답변참고 >> http://seosantour.net/
<이산> 정순왕후 김씨는 누구인가?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거꾸로 거스른 인물중에 속하는 '정순왕후 김씨' 그는 왜 그토록 정조를 죽이고 싶었을까?
조선왕 독살사건 정조편에서 보면 정조를 암살한 인물로 '정순왕후 김씨'를 지목한다. 그 만큼 정조와 정순왕후는 원수지간이었고,정순왕후는 정조가 죽은 후 순조를 통해서 수렴청정까지 했으니 참 대단한 인물중에 하나다. 자식이 있었다면 더 대단하게 '가문의 영광' 을 더 찾고자 했는지 모른다.
역사에서 정순왕후 김씨에 대한 평가는 개혁과 개방을 외면하고 오히려 보수와 폐쇄로 전환한 세도정치는, 역사의 반동이나 후퇴였으며 사실상 조선의 멸망이라고 평한다.
당시 정조가 사망한 후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는 노론 강경파와 함께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키며, 명목은 사학인 천주교를 금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신서파인 남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정순왕후 김씨는 '정약용의 살인사건' 이라는 책에서도 존재한다. 소설이기는 하지만 아주 사실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는 책으로 실존의 그럴듯한 내용을 가지고 정약용의 당시 어려움을 가진 부분을 표현한다. 그곳에서 정약용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인물이 정순왕후 김씨이다. 지금의 <이산>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조폭짱' 이미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정순왕후 김씨는 누구인가?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책 자료에 의하면, 정순왕후는 김씨는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은지 2년 뒤에 일이다. 15세 때인 1759년(영조35년) 66세의 노인이었던 영조의 비로 간택되었다. 당시 그녀는 영조의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고 손자인 정조와는 겨우 일곱 살 차이였다. 매우 가난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소생은 없었고, 영빈 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속에 가두고 굶어죽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후 조정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치죄를 당연시했던 벽파로 나누어지자 시파를 미워하고 벽파를 옹호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으며, 이때에 벽파인 공서와 결탁하여 시파의 신서파 대신들을 모함하였고, 또한 시파 인사들이 많이 관여했던 천주교에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과정에서 이가환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으며,정약전,정약용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과 그의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사사시켰다.
정순왕후 김씨(출처:iMBC)
<이산 정조대왕> 책에 의하면 정순왕후을 이렇게 말한다. "정순왕후, 사실 그녀 역시 치열한 권력투쟁의 희쟁자였다. 15세의 꽃다운 나이에 왕비가 된 그녀, 정조에 의해 친정이 풍비박산나자 그 원한으로 꾸려온 인생이 아니었던가. 그 안에 여인으로서의 행복이 과연 있었을까." 그전에 정조 또한 정순왕후로 인해 그 아비가 죽음을 당했으니 참 동시대에 태어난 것이 아픔이다. 둘의 싸움은 정순왕후의 승으로 돌아갔으며 3년 반 동안 수렴청정하면서 정조가 이룩했던 개혁과 성과를 완전히 백지화 시켜버렸다. 그 또한 수렴청정을 마친 이듬해인 1805년(순조5년)에 파란만장했던 삶을 접었다.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를 그토록 죽이려 했는가?(세손시절) 정순왕후에는 후손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지세력이 약하다 보니 자신들이 지지하는 왕족을 정순왕후의 양자로 삼아 등극시키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사도세자와 자식을 모두 제거해야 했다.
만약 제거가 되었다면 정순왕후의 자손으로 왕이 되며 그의 집안은 활짝 필수 있었을 것이다.
정순왕후 김씨는 왜 정조의 독살을 하고자 했는가? 대비 정순왕후 김씨와 정조는 법적으로 따지면 모자지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원수였다. 또한 정조 24년인 이해, 세자(순조)의 나이 11살로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친정이 다시 살 것이다. 정조가 죽어야 정순왕후 집안이 살아날 수 있다.
정조가 죽기전 마지막 죽음을 본 사람은 정순왕후 김씨이다.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 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예법을 어기면서 정조의 임종을 맞이했으며 그 당시 정순왕후 김씨는 직접 탕약을 가지고 정조에게 가져갔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이에 심환지 등이 명을 받고 잠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는데, 잠시 후 방 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조실록> 에 정조의 임종 장면과 시간은 상세히 기록하지 못하고, "이날 유시(오후 5~7시)에 상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 고 두루뭉술하게 기록한 것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 김씨였기 때문이다.
어떤 근거로 정조의 죽음을 독살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정조의 갑작스런 사망은 개혁의 절정으로 치닫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은 후 2달 후에 승정원일기에는 정조 독살설이 기록이 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떠나기 한달 전 만해도 상당히 정국 구상을 밝혔기 때문에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정조와 같은 입장에 서 있던 남인들 사이에서는 독살설이라고 주장했다.
정조의 투병과정 기록 사망하기 보름 전부터 기록된 정조는 병은 해묵은 홧병과 그로 인한 종기였다.
6월 14일, 지방의원이 정유교에게 진찰 받는다 6월 16일, 궁중의 주치의 격인 내약원이 진찰을 청하자 이를 거부한다. 게다가 정조는 가감소요산이나 백호탕 등의 약을 직접 처방한다. 정조는 내약원을 불신을 했다. 자신의 제거하려는 정치세력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의원 최고 책임자는 좌의정 심환지이며 그는 정적관계에 있던 노론 강경파의 영수였다. 6월 24~26일, 연훈방 치료만 했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 의원을 시켜 왕을 죽인 정승이라고 적은 인물이 바로 심환지였고 그가 썼다는 독약이 연훈방이었다. 연훈방 치료를 받은 후 일시적으로 호전되는 듯 했다. 그러나 사흘째 연훈방 치료를 받은 26일 저녁부터 의식이 혼비해져갔다. 6월 28일, 정조의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으며 끝내 숨지고 만다. 여기서 독살설을 제기하는 장시경과 정약용은 '연훈방'을 뜻하는 것은 '독약' 이라고 한다. 정조는 자신의 병을 홧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처방전도 홧병에 관한 것이다.
위 자료 참고는 조선시대 책에서 정순왕후 김씨에 대한 자료를 발췌해서 적은 내용이다. 때론 정순왕후 김씨는 가문의 위한 한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로 정조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산> 에 대해서 제공했던 자료들
아래 자료는 네이버 지식을 통해서 발췌한 자료이다. 선조시대부터 붕당정치에 대해서 잘 표현된 자료이다. (원본 위치) 아래 more.. 클릭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more..
<출처:네이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는 영조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가 66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1759년 영조가 66세의 나이에 15세였던 김한구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역시 정순왕후도 계비이다. 영조가 즉위 하던 때는 참으로 혼란 스러운 시기였다. 때는 1724년! 경종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했을때 그의 신분은 왕세제... 경종이 후사가 없자 즉위한지 1년이 지난 1721년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봉했다. 경종이 죽을 때만 해도 연잉군은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에 휩싸였다. 그가 즉위하고 1725년 정빈 이씨의 소생 행(倖)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10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자 그로부터 7년 후인 1735년 영빈 이씨의 몸에서 귀한 아들을 보게 된다.
그 불운의 주인공은 훗날 뒤주에 갇혀 죽은 장헌세자!(사도세자思悼世子) 42세의 나이에 자식을 봤으니 얼마나 귀한 아들이겠는가! 장헌세자는 2살이 되던 1736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1749년 영조 25년 영조의 명을 받고 15세에 대리기무를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총명했던 그는 살아생전에 효종대왕의 릉을 바라보며 먼 훗날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영조는 노론 입장에 서 있었다. 후에 탕평책을 써 보지만 한계에 이르게 된다. 노론이 영조의 힘을 등에 업고 기세 등등하며 정권을 휘어잡자 장헌세자는 노론과 멀리하고 소론과 가까이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나뉜 셈이다. 장헌세자는 10세가 되던 1744년 영의정 홍봉한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그녀는 훗날 정조의 어머니로 한중록을 지은 유명한 혜경궁 홍씨이다. 혜경궁 홍씨와 동갑이었던 둘은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가 노론 집안이었기 때문에 혜경궁 홍씨는 둘 입장 사이에서 갈등을 했을 것이다.
둘은 18세의 나이에 아들을 보게 된다. 그 주인공은 후에 왕위에 올라 민생정치를 펴며 효를 중시한 조선 왕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정조이다. 영조의 정비이던 정성황후의 병세는 점차 악화되고 결국 1757년 영조 31년에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바로 2년 후... 이 두 부부와 대립하여 후에 인목대비와 함께 최악의 왕비가 되는 여인... 바로 정순왕후가 그 주인공이다.
정순왕후는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1759년 15세의 나이에 영조의 계비로 간택된다. 당시 조선의 법은 숙종이 후궁이 왕비로 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 여식중 왕비로 간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영조 시대에는 600여명의 궁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수많은 궁인들을 비롯한 내,외명부를 통제할 최고의 통치자인 왕비를 뽑아야만 했다. 역시 영조는 대궐에서 웃어른이 없는 관계로 자신이 직접 나서서 왕비를 간택했다. 무려 51세나 차이나는 두 부부는 본격적으로 궁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이를 계기로 정순왕후 Vs 장헌세자, 혜경궁 홍씨간의 말 못하는 치열한 싸움과 내면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위의 인목대비 그룹보다 여긴 1살 더 많은 10살이나 차이난다. 그런 사람에게 존칭을 쓰고 마주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도 사람인 것을 말이다. 거기에 정순왕후와 장헌세자간은 서로 다른 세력이었다. 정순왕후는 노론계열, 장헌세자는 소론계열이었다.
그 이전부터 장헌세자를 자신의 반대세력으로 보고 있던 영조는 정순왕후내의 노론세력을 바탕으로 계속 정치를 해 나갔다. 노론은 후에 장헌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분명 자신의 세력이 위축될 것이라 판단했다. 더군다나 영조는 70을 바라보는 나이었고 장헌세자는 장성했으니 언제모를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김한구의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은 장헌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의 세력이 위력을 발휘하자 장헌세자를 폐위하고 홍봉한 일파를 몰아내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장헌세자의 비행 10가지를 들어 상변을 하게 하였다.
이에 영조는 장헌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지만 장헌세자는 끝내 거부하고 장헌세자를 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뒤주에 가둬 일주일 만에 28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만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는 광경을 목격한 왕세손 산(蒜)은 울부짖었고 영조는 그런 왕세손을 신하들을 시켜 내보내게 하였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도와주지 못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노론세력에서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남편을 잃더라도 자신의 아들이 있었기에 아마도 그녀는 선뜻 도와주지 못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1775년 영조는 병이 깊어져 왕세손에게 대리기무를 보게 하였다. 좌의정 홍인한이 방해하여 조정이 한 때 긴장하였다.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세손 산(蒜)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바로 정조!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어머니 혜빈 홍씨를 혜경궁 홍씨로 높이고 정순왕후를 왕대비로 승격시킨다.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대왕으로 추존하고 생부의 존호도 장헌으로 높이면서 장조로 하면서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마치게 된다.
장헌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정순왕후 및 그 세력들은 위기감에 놓이게 되고 정순왕후의 세력인 노론 중 친할아버지인 홍봉한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을 제거한다. 정순왕후는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고 싶어도 정조가 이미 25세로 장성한 뒤라 어찌할 수 없었다. 1777년 정조 01년 정조의 침소에 자객이 들이닥친다. 정순왕후 세력에서 정조를 죽이고 자신들이 추대하는 인물로 왕위에 올리려 했으나 발각되어 처형되고 만다. 다행히 정조는 목숨을 유지했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권력의 힘은 정순왕후 쪽이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인 색깔과 정조의 생각이 맞아 떨어지면서 정조는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바로 새로운 신도시 건설과 민생정치! 자신의 어머니 회갑연을 빌미삼아 그는 자신의 왕권을 입지를 굳힌다. 1794년 수원 화성을 건설공사를 시작하고 1795년 어느 정도 완성단계에 이르게 됐을 때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61세로 환갑을 맞은 나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아들 앞에 가마를 타고 화성 행차를 하면서 수원 화성에서 환갑잔치를 열면서 자신의 아버지 묘소도 둘러 보고 자신이 직접 전투복을 입고 3000여명의 군사들을 지휘한다. 이런 결과로 정조는 1795년 마침내 왕권이 신권을 누르며 앞서게 된다. 노론은 위기를 느끼고 이런 상생정치에 도전장을 내밀지만 정조의 뜻을 굽히지는 못한다.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남편인 장헌세자의 죽음이 정순왕후가 나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아들 정조가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읽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도 굳히고 정순왕후 내의 세력을 꺾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게 된다. 결국 몇 년간을 유지해오다 정조가 49세로 승하한다. 그를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인물이 순조... 그 나이 11세 때다.
정순왕후는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56세의 나이에 1803년까지 수렴청정을 한다. 그녀는 1801년 그동안 숨죽이고 있다가 천주교 탄압을 빌미삼아 혜경궁 홍씨의 남동생 홍낙임을 사사하고 정조가 아꼈던 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축출한다. 여주(女主)로서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순왕후는 혜경궁 홍씨에게 복수했다.
졸지에 남동생을 잃고 자신의 아버지까지 누명을 쓰게 되자 혜경궁 홍씨는 회한의 슬픔으로 또 한권의 한중록을 쓰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는 장헌세자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남동생을 잃은 슬픔까지 책을 통해 토로한다. 이들은 10살이나 차이가 나는 데서 빚어지는 갈등 속에 권력을 이용해서 서로 아픔을 맛봤다.
나이가 많이 차이나는 데서 빚어지는 갈등 속에 치열한 당파 싸움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왕실에서 맞 부디친 이들은 서로 화해도 하지 않은 채 앙금만 쌓인 채 서로 각자의 인생을 찾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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