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정공의 연보(年譜)
문정공 지포 김구 선생은 부안(부령)김씨의 중시조이며 원조(김알지)로부터 37세손이고 시조(일)로부터 9세손으로 고려 말 정치․외교가이자 대학자임
문정공 김구(1211-1278)의 자는 차산, 호는 지포, 시호는 문정공임.
문정공은 1211년(고려 희종7년)생으로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중후하며 의기와 도량이 크고 깊었음, 4~5세에 경서 사기를 깨우쳤으며 시문을 잘 지어 신동이라 칭함, 12세에 성균관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232(고종19)년 22세에 문과에 2등으로 합격함,
문과에 급제한 후 정원부사록과 제주판관을 거쳐 원종(고려 24대왕)때 예부시랑으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북정록」을 집필하고 40여년간 수많은 벼슬을 역임하여 정치․외교 학문에 훌륭한 업적을 남김.
제주판관으로 있을 때는 "돌문화“를 개척하여 주민의 생활문화 향상에 큰 업적을 남겼음. 그리고 원종 때 신종 희종 강종의 3대 실록을 수찬하고 충렬왕 때는 고종 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지포집」외에 많은 문집을 발간하였음.
또한 시문에 능하여 「흥원읍관」이라는 시를 남겼음.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지포선생이라 일컬었음.
문정공은 1278년 9월 26(충렬왕 4년)에 향년 68세로 세상을 뜨자 왕이 말하기를 “일찍 평장사를 지냈으니 조례와 뇌문에 마땅히 평장으로 쓸 것이며 관에서 장사를 비호하라”하고 시호를 문정공이라 하였음.
그의 묘소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 산3번지에 있으며 그의 위패는 부안의 도동서원에 주벽으로 배향되어 있음. 음력 3월1일에 향사함.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문정공 유허비각」이 세워져 있음.
그리고 제주도 제주시 삼양동 제주 민속박물관에는 문정공 공적비가 있는데 “돌문화의 은인 판관 김구선생 공적비”라고 씌어 있음.
문정공은 아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는데 그 중 장남 여우는 선천적으로 성품이 좋고 가풍을 이어 받아 학식이 높아 고려 원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형부상서, 동지밀직부사로서 문한 학사를 겸하였음.
원종 12년 왕세자 섬(후일 충렬왕이 됨)이 볼모로 원나라에 들어갔을 때 한림학사로 수행함.
나라의 안정과 세자를 위하여 원나라에 정혼할 것을 청하여 원나라 세조 홀필열의 딸 안평공주, 홀도노갈리미실공주를 세자빈으로 맞게 하는 등 제반사를 주선한 공로가 현저하였음.
문정공의 차남 종우는 수창국 녹사를 거쳐 전교시부령을 지냈으며 삼남 숙우는 서도판관, 막내 승인은 강릉 존무사와 대사성을 역임하였음. 여우의 두 아들 각과 식은 평장사와 이부상서를 역임하여 명문의 대를 이었음.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 절요, 동문선, 동인시화
■ 창의적인 돌문화의 공적
고려 고종19년 단기3567년 고려 조정에서 보낸 최초의 제주판관으로 부임하여 5년간 재임하는 동안 많은 선정을 베푼 가운데서도 특히, 제주 삼다(三多)의 하나인 돌을 잘 다스려 돌 문화의 은인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오랫동안 칭송되어 오고 있음.
판관 부임 당시 제주도는 돌 경계가 없어 이웃 간에 다툼이 많았고 또 가축을 놓아기르다 보니 가축의 침범으로 인한 피해가 많아서 농사에 많은 불편이 있었는바 돌을 주어 모아 경작지의 경계선을 만들고. 집집마다 돌담을 쌓아 두도록 함.
이렇게 새로 쌓은 밭담과 집의 울담은 소유하고 있는 땅의 경계표시가 되어 서로의 다툼을 없애 주는 구실을 하여 주었고, 소와 말의 침입으로부터 농작물이나 울안을 보호하는 방법이 되었음.
또 방풍의 구실도 해주어 풍다(風多)로 인한 바람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음.
돌이 많았던 제주도는 돌의 처리로 말미암아 농토도 넓어지는 효과를 얻게 되었음. 이와 같은 돌 처리방법으로 도민들로서는 실로 일석사조의 혜택을 입게 되었던 것임. 또한 돌을 이용한 생활도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이 무렵을 전후하여 돌그릇이나 돌의 연모도 보다 정제되기에 이르렀으며 오늘날 제주 풍물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는 정주먹도 이 무렵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임. 이상과 같은 위민정신과 창의적인 돌문화의 내력은 제주도민의 삶의 역사와 더불어 길이 전해오고 있음.
(참고문헌)동문감(東文鑑), 탐라지(耽羅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