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학창시절은 어떠했습니까? 아아, 나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빛내며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그런 사람은 나의 악몽 같은 기억을 통해 쾌감을 느끼려는 새디스트가 틀림없다. 다시 돌아가기 싫은 군대처럼, 학교 역시 그러하다. 제대한 뒤 나는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었다. 서류가 잘못되었으니 다시 이등병으로 군대에 입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위 눌리며 신음했고, 비명을 지르며 벌떡 깨어났다. 그것처럼, 학교 역시, 매일 반복되는 답답한 일상, 그 숨 막히는 억압을 생각하면 군대 못지않게 절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목을 죄던 후크, 빳빳한 칼라, 그리고 검은 교복은, 내 상상력을 억압하는 죄수복에 다름 아니었다. 왜 이 땅의 모든 청춘들은 고통스러운 기억과 함께 학창시절을 회상해야만 하는가.
1978년 봄, 그해 이 땅에는 긴급조치가 발효되어 있었고 유신 말기의 독재정권이 다양한 의사소통을 막으며 획일적 교육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십년 전이나 이십년 전이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나라 교육은 오십보 백보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청춘 영화는, 그런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피해서 신변잡담의 개그로 흐르거나, 아니면 청춘의 불같은 사랑으로 도피하거나 둘중의 하나다. 정면으로, 우리의 학교 이데올로기 속에 숨어 있는, 전체주의적 발상과 억압적 사회체제를 비판하는 영화를 나는 본 적이 없다.
프랑스와 트리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는, 학교가 개인의 독창적 능력을 발굴하고 각각의 특성에 맞게 그것을 극대화해서 한 사람의 훌륭한 인간을 길러내는 공간이 아니라, 지시와 복종과 억압이 있는 전체주의적 공간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또한 가장 훌륭한 성장영화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청춘시절을 통과한 후 성인이 된다. 미확인 물체인 세계에 대해 아직 자신의 자세를 뚜렷하게 확립할 수 없는 청춘시절에는, 좌충우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은 그런 시행착오가 아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런 시행착오 자체를 원천봉쇄하고 한쪽 방향으로만 가게 하려는 기성체제의 억압적 질서다.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는 지나간 청춘에 바치는 송가이면서 동시에,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정치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드문 영화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시대적 배경은 유신 말기인 1978년이며, 장소는 부동산 개발 투기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하던, 그러나 아직은 주위에 논과 밭이 더 많이 보이던 강남 말죽거리의 정문 고등학교다. 악명 높은 복장검사, 소지품 검사, 등교시 교문 앞에 늘어선 선도부원들. 선생들은 야구방망이로, 군화발로, 출석부로 학생들을 소 말 개 돼지 패듯이 팬다. 실제로 그랬다. 학창시절의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대부분 폭력적 이미지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니체나 엘리어트의 철학과 시에 대해 말한 선생님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한 번 겪게 되는 폭력이라고 해도 그것은 너무나 일방적이고 무자비했으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이성적 방법이어서 우리들의 상처 많은 영혼에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정문고 2학년에 전학 온 현수(권상우 분)는 범생이다. 체육관 관장을 하는 아버지(천호진 분) 때문에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배웠고,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문지르며 괴음을 내던 이소룡을 우상으로 생각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현수는 농구시합을 계기로 학교짱인 우식(이정진 분)이와 친구가 된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크게 이들의 학교생활과 사랑을 축으로 전개된다. 현수, 우식, 햄버거의 다른 쪽에 선도부장인 종훈, 쓰리 스타 아들 성춘, 성질나면 볼펜으로 상대의 머리를 찍어버리는 찍새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획일적이지 않다. 현수와 우식은 은주를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로 갈등하며, 친구들에게 빨간책을 파는 햄버거는 우식의 고자질로 선생에게 혼이 난 후 배반감에 사로잡혀 상대파인 종훈에게 붙는다.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편가르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풍요로운 사고를 우리에게 제공하는가. 이렇게 각각의 캐릭터들은 전형화 되어 있지 않고 생동감 있게 살아 있다.
현수가 버스 안에서 처음 만나 가슴 시린 첫사랑을 시작하는 은주(한가인 분) 역시 착하고 순진한 현수와 불량스럽고 바람기 많은 우식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성적으로는 현수에게 끌리지만 감성적으로는 나쁜 남자인 우식을 선택한다. 이런 크고 작은 갈등이 [말죽거리 잔혹사]의 많은 캐릭터들을 천편일률적으로 끌고 가지 않고 각각의 인물들에게 개성을 부여하며 그들만의 자장을 형성하게 한다.
학생/학생, 학생/선생의 폭력은, 유신체제 속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 내고 있는 이 거대한 폭력적 세계의 축소판이다. 학생들을 철제 캐비넷 속에 집어넣고 군화발로 짓이기는 교련 선생의 폭력 앞에서, 우리는 저절로 손에 불끈 힘을 주고 이를 악물게 된다. 사소한 이유로 선생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고 언어폭력을 사용한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학교를 풀샷으로 잡아, 학교 건물 위에 걸려 있는 유신정권의 표어를 여러 번 뚜렷하게 보여준다. 결국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그 시대 인물들은, 이런 폭압적 지배체제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암시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문제점은, 각 인물들의 개성도 살아 있고 폭력적 세계의 폭력적 드러냄에도 성공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씨줄 날줄로 얽히면서 감정의 대폭발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영화들이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전해주는 절정의 순간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엇인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암시를 주면서 관객들을 긴장시키다가, 소위 결정적 한 방 없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은, 상업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서 뻣뻣한 연기로 일관하던 이정진은, 본인 자신에게 꼭 맞는 배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힘을 매력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권상우다. 소심하면서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불을 감추고 있는 그의 연기는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외형적 캐릭터에 비하면 훨씬 많은 성장을 했다. 아쉬운 것은 은주 역의 한가인이다.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는 그녀의 연기와 대사는, 작품 전체의 탄력성을 약화시킨다.
옥상에서의 현수/종훈, 우식/종훈의 결투씬과, 교실에서 우식/3학년들의 패싸움 장면은 보는 사람의 엔돌핀을 솟구치게 할 만큼 활력 있게 찍혀졌다. 이런 액션씬을, 마초들의 세력다툼으로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의 싸움 속에는, 세계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그릇된 욕망과, 개인의 상상력을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에 저항하는 순수의지가 삼투되어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의 육체로써 확인하는 고독한 순간이 깃들어 있다.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 그래]
학교를 접을 것을 결심하고, 옥상에서 종훈과 최후의 일전을 벌인 뒤 피묻은 얼굴로 돌아서며 내뱉는 현수의 일갈은, 이 영화를 십대 청춘 영화에서 단숨에 체제 알레고리에 대한 비판의 세계로 확대시킨다. [말죽거리 잔혹사] 최고의 명장면이다.
[압구정동에서 말죽거리까지 걸으면 두 시간이면 되는데, 십년 걸렸다]라는 유하 감독의 회고는, 그의 데뷔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3)부터 세 번째 작품인 [말죽거리 잔혹사](2004)까지 오는데 걸린 물리적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어쩌면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천민자본주의 비판에서, 그것이 가능했던 말죽거리 시대의 뿌리 깊은 고통을 발견한데 걸린 시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의 청춘시절을 지배하고 있었던 고통스러운 상처를 치유하기까지, 그리고 그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고통을 영화 속에 투영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