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주말에는 당구장에 자주 출근을 합니다. 제가 좋아서 먼저 가는 것은 아닙니다. 벗 중 한 명이 미얀마에 사업을 벌였기에 매달 일주일 이상씩 가 있는데 밤에 할 일이 없으니 함께 간 이들과 당구를 치는 게 유일한 낙이자 소일거리랍니다. 이 친구, 물 50 수지로는 함께 치는 게 재미가 없으니 한국 나오면 매일 당구장에 가서 주인에게 개인 레슨도 받고 우리와 실전경험도 쌓는 겁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함께 당구를 치게 된 이들은 아래층 권박사, 사업하는 친구, 고건축 수리하시는 장소장, 단골술집 주인 등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당구장에 머무는 시간도 따라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당구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친한 초등학교 동기가 당구를 가르쳐준다고 하였을 때입니다. 당구대를 처음 잡은 후 한 달여 열심히 배웠습니다. 30을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재미가 붙고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천장이 당구대가 되어 최근 배운 길이 보이고 당구공이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그러다 한 달 만에 당구 치기를 접었습니다. 대봉동에서 산격동 학교까지 걸어 다니며 차비를 아껴 부족한 용돈을 충당하던 때였는데 당구와 다른 일들, 예를 들면 친구와의 술자리, 커피 한 잔하며 개똥철학을 논하는 일을 병행할 순 없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제 친구 중에는 300을 치는 실력자도, 500을 치는 고수도 있었습니다. 가끔 따라가서 당구는 치지 않았지만 눈요기하며 길은 좀 익혔습니다.
직장생활 하면서는 동기들, 동료들과 가면 속칭 갬돌이를 하며 그들이 치는 당구를 곁눈질하였고 가끔씩은 머릿수 맞추기 위해 함께 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름도 모르는 길은 눈에 선하여 수지를 물 50까지는 올렸습니다. 회사를 퇴직하며 당구장 출입을 끊은 지 8년 만에 사업하는 친구 덕에 다시 당구장 드나들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친구는 당구장에서 시간 죽이는 것이 가장 아깝다는 얘기를 제게 하기도 합니다. 저도 하고 싶은 많은 것들에 비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터이지만 벗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기에 아깝지는 않습니다. 마치고 난 후 마시는 한 잔의 술도 좋습니다.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잘 되면 잘 되는대로, 안 되면 안 되는대로 그 순간만을 즐기기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당구’를 사전에는 이렇게 풀어 놓았습니다. ‘우단을 깐 대 위에서 상아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몇 개의 공을 긴 막대기 끝으로 쳐서 승부를 가리는 실내 오락.’적확한 표현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무미건조한 말이기도 하지요. 역사적으로는 BC 400년경에 그리스에서 옥외 스포츠로서 당구의 원형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당구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1500년경부터 ‘빌리아드’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프랑스 전쟁 중이었던 1570년, 샤를르라는 사람이 당구를 즐기며, 그의 부관과 연구를 거듭하여 빌리아드 게임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당구대는 모양이 정방형·장방형·타원형의 것 등 오늘날과 큰 차이가 있었답니다. 근대 당구는 기구의 발명, 개량에 따라 발전하였습니다. 초크가 영국인 잭커에 의해 발명되고 프랑스 사람 맹고에 의해 탭이 발명되면서 당구발달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네요. 미국에는 1820년대에 포켓 테이블이 도입되었는데, 1860년에 프랑스의 베르게가 도미하여 유럽식 게임을 퍼뜨려 그때까지 포켓 게임 일변도였던 미국에 다양한 게임이 보급되게 되었답니다. 그 무렵부터 기구나 기술의 개량, 개선이 급속히 진척되어 당구대의 슬레이트 가장자리에 붙이는 고무 쿠션, 플레이트를 덮는 천, 공의 재질과 지름치수의 개량과 더불어 쿠션에 따라 가면서 공을 흩어지지 않게 무제한으로 쳐나가는 아메리칸 세리(American Series, 4구 모아치기)의 연구에 의한 기술의 향상은 그때까지의 단순한 경기종목을 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새 종목으로 확대하였답니다. 1928년에는 벨기에에서 세계당구연맹이 창설되었으며, 현재 가입국은 30여 개 국에 이르고 있답니다. 특히, 벨기에에서는 1940년대에 당구를 국기로 인정하였으며, 일본에서는 1955년 국회에서 당구를 건전한 스포츠로 인정한 뒤 급속히 발전하여 세계정상을 달리고 있고 아시아연맹을 일본에 두고 있다네요. 우리나라에서는 1915년 순종 때 창덕궁에 최초로 당구대 2대가 설치되고 왕과 대신들이 실내스포츠로 즐긴 것이 최초라 합니다. 1955년 대한당구협회를 창설하고, 1956년 초 서울에서 제1회 전국당구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66년 보건사회부에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 설치허가를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답니다. 1977년 세계당구연맹에 가입하였으며, 아시아지역에서는 한국·일본·자유중국·인도·싱가포르 등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으며, 그 중 일본과 우리나라가 상위 수준국이랍니다. 자넷 리, 차유람 등 세계적인 선수의 이름은 당구를 모르는 사람도 익히 들어보았을 정도입니다. 1984년과 1985년에 대한당구경기연맹과 대한당구회가 발족되어 당구 인구의 저변확대와 국가대표선수 양성에 기여하고 있답니다. 국제대회로는 세계선수권대회(5종목 선수권)·월드컵챔피언보크선수권대회·세계스리쿠션대회·예술구경기대회 등이 있으며, 국내대회로는 전국당구경기대회와 스리쿠션대회 등을 개최하고 있으며, 매년 한일친선당구대회를 개최하고 있답니다. 또한, 1984년 3월부터 대한당구경기연맹 주최로 월례 순회대회를 개최하고 있다고 하네요.
당구 시설로는 당구대가 있고, 용구로는 큐와 공이 있습니다. 당구대는 152×305㎝ 의 정방형이며, 큐는 무게가 16 ∼18온스, 길이는 145∼147㎝ 이고, 공은 지름 61.5 ㎜의 플라스틱 공을 사용합니다. 경기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 빨간 공 치기와 스리쿠션 경기가 압도적입니다. 요즘은 포켓볼을 많이 치기도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당구장은 롤러 스케이트장, 빵집 등과 함께‘출입금지’ 구역 중 하나였습니다. 탈선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전혀 이유 같지 않은 이유였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당구를 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당구관련 용어는 거의 일본어 일색인데 다이, 다마, 히네, 겐뻬이, 겐세이, 오마와시, 우라마와시, 하꼬마와시, 네지마와시, 다떼, 히끼, 오시, 가라꾸, 나메, 가야시, 히까께, 기리까에시 등이 그러합니다. 일본어에 대한 이해가 약한 사람들이 용어를 쓰다보니 그나마 잘못된 발음으로 원래의 의미를 많이 희석시킨 사례도 많습니다. 우리말로 순화한 용어가 오래 전에 안내되었으나 아직도 국적이 흐릿해진 일본어에서 파생된 용어를 주로 쓰고 있어 안타깝기만 합니다. 밀어치기, 끌어치기, 일자치기, 얋게치기, 찍어치기, 뒷돌리기, 앞돌리기, 옆돌리기, 비껴치기, 모아치기 등 좋은 말을 두고 말입니다.
직장 내에서는 제가 요즘 당구 친다는 얘기를 절대 못하게 하였습니다. 중고등학교 때처럼 ‘당구장 출입금지’ 따위 규정 때문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당구 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당번이 되어 경산총각과 의무적으로 당구를 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뭐든 자신이 좋아해야, 즐길 수 있어야 재미가 있습니다. 의무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돈 받고 해도 내키지 않는 것이 취미생활입니다. 몇 달 열심히 주말에는 당구장 출입을 하였지만 이젠 끊든지, 끊지는 않더라도 출입 횟수는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제 같은 경우 토요일이라 부담은 없었고 2주 만에 보는 친구들이라 무장해제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6시에 시작한 당구를 저녁 먹고 다시 쳐서 12시도 넘어 끝냈습니다. 분위기를 따라가느라 저녁 먹은 이후의 당구는 빠지고 싶었지만 함께 어울렸습니다. 날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건 아닌데’ 싶었습니다. 당구치는 것 자체가 싫어서라기보다는 다른 할 일-도서관에서 보고 싶은 책을 4권이나 빌렸건만 서문만 보고 덮어 둔 일 등-이 밀리는 것이 싫어서였습니다. 당구의 고수가 아닌 시간 관리의, 자기 관리의 고수가 되기 위하여 이젠 당구장을 조금 멀리 하여야겠다 다짐합니다. 내 인생을 제대로 짓기 위해서 정말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높이는 것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기에 오늘은 조용히, 정말 조용히 시골집에서 독서에 몰입하려 합니다.
짓다(모셔온 글)======================================
우리말엔 같은 글자를 갖고 있어도 여러가지 다른 의미를 갖는 말들이 많다.
그것이 우리말의 묘미이기도 하다. 그런 말 중에 나는 '짓다'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짓다'라는 단어가 늘 나를 미소 '짓게'한다. 밥을 짓고, 옷을 짓는 것처럼 재료를 들여
어떤 것을 만드는 일을 짓는다고 한다. 시를 짓고 노래를 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논밭을 다루어 농사를 하는 것도'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모두 생산의 의미가 있다.
말을 생산하는 것도 지어낸다고 한다.
엉뚱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말을 지어서 한다고 한다.
묶거나 꽃거나 해서 매듭을 만드는 것도 짓는다고 하고,
이어져 온 일을 끝맺는 것도 짓는다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어서 영어로는 make, build, construct,
write, compose, name등 여러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는 모습이 계속 무언가를 짓는 일의 연속이 아닌가 싶다.
만들어내고 마무리하는 일의 반복이니까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밥을 지어 먹고 길을 나선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말을 지어서 일을 하고 , 마무리를 짓는다.
퇴근하면 힘든 하루를 마무리 지으며 잠자리에 든다.
하루 종일 짓고 지어서 짓는 일의 연속이니,
짓는 것만 잘하면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과연 짓는 일을 잘하고 있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밥을 지을 때는 물의 양을 잘 조절하는 것이 관건인데,
쌀의 종류에 따라 물의 양도 세심하게 달라진다.
밥 짓기 초보는 물의 양을 말 맞추지 못해 죽을 만들거나 떡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몇 십년 주방일에 이골이 난 주부라면
매번 같은 농도의 밥을 끼니때마다 척척 해낸다.
짓는 일의 연속인 우리 삶의 모습도 그렇다.
처음엔 손에 익지 않아서 실수를 반복하던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 꾸준히 그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고수가 되어 있기 마련이다.
짓는 일은 꾸준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조바심을 내고 처음부터 잘 지어지지 않는다고 성질을 부리다보면
결코 단단하게 지을 수가 없다.
시를 짓고 노래를 지을 때는 한순간 떠오른 영감으로 짓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도 작곡가도 순간의 창의력만으로 짓지는 않는다.
한편의 시가 나오기까지 쓰고 버린 수백장의 파지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명곡이 나오기까지 쓰고 버린 수백 장의 오선지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그렇게 수많은 노력을 통해 지어낸 창작물인 셈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많은 것을 지을 때는 혼자 힘으로 지을 수 없는 것들도 많다.
협동하고 도와가며 이루어야 할 것들이 많다.
하지만 오로지 내 힘으로 견디며 지어야 할 것들도 많다.
협동할 것과 스스로 할 것, 이 두가지를 혼동하며 우왕좌왕한다면
결코 훌륭하게 지어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만약 모든 사람의 충고대로 집을 짓는다면 비뚤어진 집을 짓게 될 것이다.
- 마이클 린버그의 <너만의 명작을 그려라> 중에서-
누군가의 충고가 절실할 때 여러 사람의 서로 다른 충고 속에서 방황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집을 짓고 그 안에 살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내가 지은 것에 책임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인생을 제대로 짓는 사람이다.
지어서 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세운 것이 소홀함이 없도록
마무리를 잘 짓는 일도 중요하다.
매듭을 짓는 일을 잘못하면 제대로 된 마무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것을 지어놓았어도 마무리를 제대로 못하면 빛이 바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작하는 순간에는 거창한데 늘 마무리가 빈약한 사람을 더러 보게 된다.
활기차게 짓기 시작했지만 늘 마감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밥을 지을 때는 물을 잘 맞춰야 하고,
집을 지을 때는 기초를 잘 다져야 하고,
시를 지을때는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말을 지을 때는 거짓이 없어야하고
마무리를 지을 때는 깔끔하게 해야 한다.
생활의 전반에서 짓는 일만 제대로 한다면 걸림돌이 없다.
나는 지금 제대로 짓고 있는지, 내가 짓고 있는 것들을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고도원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