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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부천개혁교회에서 2024년 겨울사경회를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종교개혁사' 강의를 병행하여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주제로 1월 13일(토요일)-14일(주일)에 가지며 강의한 내용입니다. 강사는 고경태 목사님(주님의 교회,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여섯 번째 시간인 6강은 ' 칼빈의 종교개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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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
목 차
1.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진영이란
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3. 종교개혁 대략
4. 때가 찬 종교개혁
5. 루터의 종교개혁
6. 칼빈의 종교개혁
7.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8.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9.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10.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11. 도르트 총회(1618-1619: the Synod of Dordrecht (Dort) in 1618-1619)
12.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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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사경회 첫째 날 : 여섯 번째 시간 -
6강 칼빈의 종교개혁
“의심할 여지없이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한 인물이야말로 ”존 칼빈“이다.”
교회사가인 유스토 L. 곤잘레스(Justo L. Gonzalez)의 칼빈에 대한 정의이다. 칼빈을 종교개혁을 집대성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신성로마제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의 종교개혁을 총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좋지 않다. 칼빈은 기독교 신학을 집대성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이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틴 루터가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홀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개혁신학의 정수를 펼쳤다. 결국 루터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손을 잡았고, 그들의 뒤를 걸었다. 그리고 루터는 합당한 세력을 구축했다. 루터가 신학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닌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틴 루터에게서 종교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루터의 풍부한 감성에서 중세적 신비주의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것은 학문 체계에 있는 시대적 한계에서 보아야 한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후대 사역자인 칼빈은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성경을 해석했고, 칭의와 함께 성화의 균형을 이루며 신학을 전개했다. 『기독교강요』를 끊임없이 증보한 칼빈의 신학 세계는 기독교 신학사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신학 과정이다. 칼빈은 1536년에 초판을 발행했고, 1559년 최종판(5회 증보, 4권 80장)을 출판했고, 1560년에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자기 작품을 번역하여 저술을 진행한 연구자는 사상사에서 볼 수 없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프랑스어 번역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기독교강요』가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기독교신학 체계를 완성했고, 증보되면서 신학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럼에고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완성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칼빈이 1564년에 소천되지 않았다면 성경주해와 설교 과정에서 형성된 지식으로 6회 증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간략한 생애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피가르디의 감독 교구인 노용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 코뱅(Jean Cauvin)이었다. 칼빈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고하거나 추억하는 내용을 저술에서 보여주지 않았다. 참회록이나 자기 자서전적 진술을 진행하지 않았다. 칼빈에 대한 이해는 그의 서신을 통해서 파악해야 한다.
1509년은 루터(26세)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첫 번째 강의를 마친 직후였다. 아버지 제라드 코뱅은 1481년 노용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시민권을 획득했고, 시청직원과 주교 법률 고문과 비서를 거쳐 교황청의 공증인과 대성당 참사회에서 일했다. 어머니는 귀족의 딸이었는데 칼빈을 낳고 5살 즈음에 죽었다. 칼빈의 아버지는 곧 바로 재혼했다. 재혼한 아버지는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형 샤를은 사제가 되었지만 종교개혁을 지지해서 이단 혐의로 파면을 당해 죽임을 당했다. 다른 형제인 앙투앙은 후에 종교개혁에 동참하여 여동생 마리와 함께 칼빈을 따라 제네바에 정착했다. 앙투앙은 제네바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시민권을 획득했다. 후에 200인 의회의 의원과 60인회의 의원, 그리고 종합구빈원의 감독관에 선출되기도 했다.
칼빈의 아버지는 귀족 가문인 몽모르 집안으로 칼빈을 보내 교육을 받게했다. 칼빈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제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12살 때 칼빈은 성직록(聖職錄)을 받으며,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2살에는 라 제신에서, 1527년에는 마르테빌의 생 마틴교구에서, 1529년에는 퐁 레벡에서 성직록을 받았다. 고등교육을 받을 나이인 열두 살에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고, 그곳에서 인문과정을 마치고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523년까지 칼빈은 고향에 있는 학교다녔다. 그리고 14살 되던 해 마튀렝 코르디에(Mathurin Cordier, 1479-1564)가 라틴어 교수로 있던 유명한 기숙학교인 파리의 마르슈 대학에 들어갔다. 칼빈이 코르디에에게 라틴어를 배운 기간은 매우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칼빈과 코르디에는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나중에 코르디에는 칼빈에 의해 제네바와 로잔의 교육 기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파리로 온 칼빈은 프랑스 이름 대신 라틴어 이름을 사용했다. 코뱅이 아닌 칼빈(칼뱅, 깔뱅)으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마르슈 대학에서 짧은 기간(3개월)을 보낸 칼빈은 1524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다른 기숙학교인 몽테규 대학(파리 대학교)으로 갔다. 몽테규 대학에서는 인문학(3학4과)을 수학했다. 로마 카톨릭 정통주의의 요새였다. 그곳에서는 예수회의 창시자인 로욜라도 수학했다.1) 그곳은 학생들이 매우 두려워는 곳이었다. 학업의 강도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어가 아닌 라틴어로 모든 수업이 진행되었다. 칼빈은 여기서 유명론 철학을 접했고, 1528년에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칼빈은 몽테규 대학에서 과외 활동 시간에 당시 금서였던 루터, 멜랑히톤의 책들을 몰래 읽었다고 한다. 파리 대학에서도 에라스무스의 인문학 영향을 받아 기존의 로마 카톨릭 신학을 벗어나 인문주의적 성향의 학문과 신학을 접목하여 공부했다.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마틴 루터의 등의 신학적 주장들에 대한 논쟁들이 왕성하게 토론되었다. 칼빈은 자연스럽게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성직록을 받고 있었다.
칼빈이 파리에 머물고 있을 때, 생제르만 데프레 성당과 파리 외곽 동쪽으로 41㎞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Meaux: 프랑스 종교개혁의 생수의 우물)에서,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 1450-1537) 교수를 중심으로 개혁 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데타플은 기욤 파렐의 스승이기도 했다. 1509년에 르페브르는 라틴어 시편 번역본 5가지를 비교하여 연구한 책(Fivefold Psalter)을 출판했는데, 그의 저술을 마틴 루터가 읽었다고도 한다. 1523년에 프랑스어로 복음서를 번역해서 발행하기도 했다. 그는 1525년에 박해를 피해 스트라스부르로 망명했다. 기욤 브리소네(Guillaume Briçonnet, 1472-1534)는 르페브르의 도움을 받아 “모”에서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이 모임에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도 동참했다. 파렐은 1525년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바젤에서 소책자로 출판했다. 모의 기욤 브리소네 주교는 교구에서 설교하도록 인가받았지만, 1523년에 설교가 금지되고 추방되었다. 이때부터 파렐도 ‘순회 설교자’로서의 여정이 시작됐다. 파렐은 칸톤 베른의 지원 아래서 스위스 칸톤 지역에서 개혁 사상을 전하며 칸톤들을 개혁했다. 1530년 뇌샤텔(Neuchâtel)을 개혁했고, 1532년에 제네바로 이주해서, 1536년에 제네바에 개혁사상으로 전환시킨 위인이 파렐이다. 파렐은 뇌샤텔에서 사역했고, 마지막까지 칼빈을 지지하며 격려했다.
1528년 칼빈은 몽테규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칼빈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학의 길이 아닌 법률계로 나아가도록 유도했다. 칼빈은 1528년부터 1532년에 부르쥬(Bourges)와 오를레앙(Orleans)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오를레앙 대학에서 독일 출신의 인문주의자이며 복음주의자인 멜키오 볼마르(Melchior Wolmar, 1497-1560) 교수를 만났다. 칼빈은 그에게서 헬라어를 배웠고, 그를 통해 루터의 사상을 접촉했다. 볼마르 교수의 집에서 당시 9세였으며 후에 동료이자 후계자가 된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를 만났다. 1530년에 볼마르는 부르쥬 대학으로 갔고, 칼빈도 그를 따라갔다. 그곳에서 칼빈은 인문주의 정신으로 로마법을 가르쳐온 유명한 법률가 알시아(Alciat) 교수에게 법학을 수학하여 법률 자격증을 획득했다.
1531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자유를 얻어 고대 언어와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오를레앙 대학교수회에서 만장일치로 법학 박사 학위를 결정하였으나 칼빈은 끝내 사양했다(다른 견해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이야기도 많다). 칼빈은 법률자문 변호 자격은 취득했다. 법률사무소를 개업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 속에서 인문학을 놓치지 않았고, 1532년 그의 회심의 작품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을 출판했다.
1533년은 그의 삶을 바꾸어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파리 대학의 학장이며 절친한 콥(Nicholas Cop. 1501-1540)의 취임사가 종교개혁적 내용으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취임사 작성에 칼빈도 포함되어 칼빈은 파리를 탈출하여 유랑하던 중 갑작스럽게 회심(subita conversio, sudden conversion, 1534년 경)했다.2) 1534년 칼빈이 성직록을 포기함을 기점으로, 칼빈은 로마 카톨릭주의에서 개혁신앙으로 회심된 것으로 확증한다.
1534년 4월쯤에는 24살의 젊은 칼빈이 노교수인 르페브르를 프랑스 남부 네락(Nerac)으로 내려가 만났다.
1534년 10월 18일 프랑스 파리 시내 곳곳에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례와 교황주의를 비난하는 벽보(Placards)가 게시되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벽보(프랫카드)는 스위스로 망명간 파렐이 만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535년 1월 21일,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6명이 화형당했으며,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학살당했다. 칼빈이 프랑스에 있을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칼빈은 고향으로 잠시 피한 후 다시 파리 하숙집에 잠시 들렀다가 앙굴렘(Angouleme)에 있는 친구 루이 뒤 틸레(Louis du Tillet) 집에서 임시 은거했다. 틸레는 르페브르에게 영향을 받았고, 그의 집에는 4천 권의 장서를 소유한 부호였다. 결국 칼빈은 프랑스를 떠나야 했고, 1535년 기독교강요를 집필했고, 1536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출판했다.
1534년 칼빈은 『영혼수면설에 대해서』(De Psychopannychia, 1542년 개정함)을 썼다. 이 책에서 인간은 죽은 즉시 영혼이 수면 상태로 들어간다고 주장한 재세례파들의 중간상태에 대한 주장을 반박했다.
※ 세르베투스는 1553년, 『기독교 재건』(Christianismi Restitutio)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삼위일체, 유아세례를 부정했다. 뿐만 아니라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반박하기 위해 32개의 편지를 책으로 묶어냈다.
프랑스에서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려고 만남이 성사되지 못했고, 로마 카톨릭주의를 피해 제네바로 갔다가 만났고, 화형에 처해졌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오류를 비판하기 위해서 1554년에 라틴어로 『거룩한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신앙의 수호』를 썼다.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카스텔리오는 “이단자들에 관하여, 만일 그들이 기소되어야만 한다며”라는 글을 발표하여, ‘관용’, “이단자에게 관용”을 외치는 선구자가 되었다. 칼빈은 프랑스 국왕에 관용, 합리적인 진리 진술에 대한 성찰과 관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카스텔리오 이후에 관용은 이단 주장, 무제한 관용을 주장하게 되었다.
칼빈을 기독교 신학자로 세운 『기독교강요』는 1536년 바젤에서 출판되었다. 총 516페이지, 전체 6장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4장은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례이고, 마지막 2장은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비판와 신앙의 자유의 문제를 다뤘다. 『기독교강요』는 출판되자마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고, 9개월 만에 모두 판매될 만큼 화제가 되었다. 칼빈의 작품을 파렐이 읽었고, 제네바의 사역자로 칼빈을 원했다. 그러나 칼빈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역하기를 원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로 가려는 길에 스페인과 프랑스가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네바를 경유한 우회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기독교강요』는 3년 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1539년 제2판을 출판했다. 2년 후인 1541년에는 제네바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그 이후 『기독교강요』는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출판된다. 칼빈은 라틴어로 저술한 뒤에, 다시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루터의 독일어와 라틴어 기술은 문체가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의 라틴어와 프랑스어 문체는 유사하게 진행된다. 1559년 최종판(5회 증보)이 출간되었고, 1561년에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처음 6장으로 구성된 『기독교강요』는 최종판에서는 4권에 80장까지 확장 증보되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신학대계라고 하는 것보다, 성경해석을 위한 가이드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교육하지 않고, 성경을 강의했다.
바젤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자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길은 스페인과 프랑스가 전쟁하는 전쟁터였기 때문에 제네바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에 하루 머물고 떠날 작정이었다. 당시 제네바는 파렐이 카톨릭주의에서 개혁을 시작한 무렵이었다. 제네바는 상업이 발달한 덕분에 근대적 정신이 어느 정도 수용되는 분위기였지만 도덕적 타락도 성행했다. 기욤 파렐은 수년 동안 제네바에 머물며 열정적인 설교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종교개혁의 영향 아래 들어오게 했다. 파렐은 제네바 개혁을 위해서 칼빈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강권해서 제네바의 교사가 되도록 했다.
칼빈은 15살 많은 파렐의 제언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칼빈이이 수락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파렐은 화를 내며 협박과 저주하는 수준까지 나갔다. “만약 당신이 당신을 이토록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위급한 상황을 못 본 척 하고 단지 학문만을 위한 평온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대의 평화에 저주하시길 원한다.” 칼빈은 파렐의 선언에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제네바에 머물기로 했다.
칼빈은 제네바 피에르 교회의 성경교사로 되었다. 그런데 1536년에 제네바 피에르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의 하나님 교회의 목사, 신학 박사였다. 필자는 칼빈을 목사라고 제언한다. 칼빈은 목사로서 신학과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했고, 많은 사역자들과 교분을 나무녀 동역했고, 제네바 시의회와 원활한 소통을 통해서 시민질서를 확립했다. 한국 목사들이 설교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칼빈보다 더 많이 설교하지 않았다. 칼빈은 일 년에 평균 200회 설교했고, 200회를 강연활동을 했다. 그는 주일에 두 번 설교를 했고, 격주로 매일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한 시간 이상 진행되었고 원고나 메모가 없이 행해졌다. 시의회가 칼빈의 건강을 위해서 설교 횟수를 제한하기로 결의할 정도로 칼빈의 설교 횟수는 많았다.
1536년부터 1538년까지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서 사역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서 추방되었다. 파렐은 뇌샤텔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써의 초청을 받았다. 칼빈은 처음 계획했던 스타라스부르그에 가는 것을 겸허하게 수용했다.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한 칼빈은 안정적인 생활은 아니었다. 마틴 부써는 칼빈에게 피난민 목회의 사역을 맡겼다. 비록 바쁘고 피곤한 일상이었지만 가장 안정적인 시간이었다. 일부 시편들과 찬송을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종교개혁에 합당한 예배의식을 만들었다. 『기독교강요』 제2판을 출판하고, 『로마서주석』도 출판했다. 칼빈은 과부였던 이델렛 드 뷰어와 혼인했다. 칼빈의 아내는 1549년 제네바에서 먼저 사망했는데, 칼빈의 병약한 몸과 과도한 사역을 보좌하다가 그랬을 것으로 추측한다. 칼빈은 혼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혼인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들의 인도로 혼인했고, 합당한 혼인 생활을 유지했다.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년 1월 29-1552년 12월 20일)는 굉장히 활달한 성품이어서 맥주 사업으로 경제 활동을 했다고도 한다.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그 생활이 칼빈에게는 가장 행복하고 안정적인 시기였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써에게 다양한 신학 정보(장로 제도 운용)와 목사의 성품에 대해서 영향을 받았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있으면서도 제네바의 신학 문제를 지원했다. 파렐과 칼빈이 빠진 제네바에 로마 카톨릭주의가 다시 들어오려고 했다. 칼빈이 없는 동안 로마 카톨릭 추기경 사돌렛(Jacob Sadoleto. 1477-1547)이 1538년에 제네바 시민들을 로마 카톨릭 교회로 회유하기 위한 편지를 썼는데, 제네바에서는 그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제네바 시는 결국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칼빈에게 사돌렛에 대한 반박문을 부탁했고, 칼빈은 1539년 사돌렛에 대한 반박문(Reply to Jacopo Sadolet)을 주어 제네바를 보호했다.
1541년 제네바는 상황이 반전되었고, 제네바는 칼빈을 목회자로 청빙했다. 그런데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파렐과 동료들은 제네바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조했고, 칼빈은 제네바로 귀환을 결정했다. 제네바로 돌아가는 칼빈의 심경이 그의 글에 있다.
“나는 하루에 천 번 부서져야 했기에, 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차라리 백 번 이상이라도 다른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선택권이 내게 있다면, 나는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 외에 모든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의 마음이 죽은 것 같이 여기며, 주님께 나를 제물로 드립니다.”
칼빈은 두려움을 안고 제네바로 돌아갔다. 제네바로 돌아간 칼빈은 처음 좌절되었던 교회질서를 작성해서 시의회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조례를 통해 제네바 교회는 당회(Genevan Consistory)가 지도하고 감독하게 되었다. 당회는 목사들과 12명의 장로들이 모여 구성했다. 칼빈의 강력한 개혁정책, 거룩한 질서를 수립할 때에 제네바 시민, 시의회와 충돌이 발생했다.
칼빈은 제네바 사역(1541-1564)을 23년동안 사역했다. 1541년 칼빈을 청빙한 제네바는 칼빈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았다. 1553년에는 칼빈을 반대하는 이들이 득세하여 상당히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 제네바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개혁하려는 칼빈의 노력은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무엇보다도 신앙적 원리에 따라 살지 않는 이들에게 수찬을 정지시키려 했는데,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그 주된 세력이 시 당국이었다. 제네바 시의회는 수찬정지를 명하거나 철회하는 것은 의회의 권한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권한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이것은 그 후 10여 년간 감독회와 시정부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요인이 되었다. 또 이때 칼빈의 엄격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가세했고, 신학적으로 칼빈을 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많은 술집이 폐쇄되었고 간음이나 노름, 부도덕한 행위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교회결석, 예배 도중에 나가는 행위나 신성모독적인 언행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는데 크게 세 가지 부류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 반대 세력이었고, 둘째는 방종파(Libertines, 혹은 자유파: 아모(Pierre Ameaux), 뻬랭(Perrin) 일파와 파브르(Favre) 일파)이었고 셋째는 칼빈과 신학적 입장을 다른 위인이었다. 당시 칼빈과 신학적 견해에 대립했던 위인은 제롬 볼섹(예정론), 장 트롤리(Jean Trolliet), 세바스티안 카스텔로, 그리고 미카엘 세르베투스 등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종파 인사였다는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단지 이 글의 전개상 편리하게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546년 1월 말, 한 차례 치리회와 갈등을 겪은 적이 있는 카드 제작자 피에르 아모(Pierre Ameaux)는 칼빈을 고발했다. 몇 달 후 칼빈을 제네바에 데려오는 데 애썼던 아미 페랭(Ami Perrin, ?-1561)이 칼빈에게서 공개적으로 돌아섰다. 아미 페랭, 파브르(Favre), 방델이 포함된 세력들은 프랑스 망명자들과 함께 칼빈을 제거하기 위해 목사회와 치열하게 싸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칼빈을 대적자하는 세르베투스를 지지했다. 그런데 세르베투스는 너무나도 명확한 삼위일체를 거부한 이단이었다. 세르베투스가 무너지자 세르베투스를 지지하며 칼빈을 대적했던 무리들도 더 이상 정당성을 주장할 근거가 사라졌다.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에 대해 스위스 각 도시들뿐만 아니라 불링거, 멜랑톤, 심지어 칼빈의 반대파였던 제롬 볼섹까지도 처형을 지지했는데, 카스텔리옹은 이단 사상에 관용을, 신성모독자들에게는 추방이나 투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는 프랑스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처형을 앞두고 투옥되었다. 그는 탈옥해서 제네바로 피했다. 제네바를 지나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음으로 체포되었다. 제네바 당회에서는 그에게 38개의 죄목을 작성하여 세르베투스가 이단인 것을 보고했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화형에 처하게 되었다. 칼빈은 이단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늑대를 살리기 위해 불쌍한 양떼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심각한 잔인함이라고 주장했다.
※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는가?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 사상이다. 이단 사상은 종교적 죄인이 아니라 정치범이고 사상범이다. 즉 국가질서문란죄, 반역죄에 해당되어 시의회에서 판결했다. 당시 칼빈은 제네바에서 시민권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세르베투스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르베투스를 존경한 두 사람, 소시니우스(Socinus, Sozzini Lelio1525-1562/조카 Sozzini Fausto, 1539-1604)가 동쪽으로 피신해서 세르베투스의 신학을 구체화시켜 소시니안(Socinianism)을 구성했다. 그들은 유니테리언 종파로 현존하고 있다. 유니테리언은 세르베투스주의라고 볼 수 있다.
1553년 세르베투스가 처형되면서, 칼빈의 대적자들은 모두 약화되었다. 1555년 2월의 선거에서 방종파는 완전히 몰락되었다. 제네바 교회의 결정까지 합쳐져, 칼빈파가 시민대표 및 시의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1555년의 컨시스토리 회의록에서 제네바 사람들이 도박에 빠진 모습, 가족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는 모습 등이 보고되었다.
칼빈의 3기 사역 기간(1555~1564). 53세 무렵의 칼빈. 방종파가 사라진 이후에 제네바에서 칼빈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럽에서는 마틴 루터와 구분되는 종교개혁가로서의 칭송했다. 칼빈과 루터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칼빈은 루터를 존경한 것이 문헌에 나타났고, 루터가 칼빈을 평가한 것은 볼 수 없다. 다만 루터파에서 칼빈파에 대해서 적지 않은 경계를 보였다. 1549년 칼빈은 제네바 교회와 하인리히 불링거의 취리히 교회를 중심으로 티구리누스 합의문(Consensus Tigurinus, 취리히 합의: Consensus of Zurich)를 맺음으로 스위스 칸톤의 연합을 가능하게 했다.
칼빈은 메리 1세 시절 발생한 개신교 피난민들을 1555년부터 제네바에 수용했다. 시의 보호 아래 존 낙스나 윌리엄 위팅햄(William Whittingham, 1524-1579) 등의 유명한 개혁교회 지도자들이 이 때 제네바에 들어왔다. 제네바에서 영어로 번역된 성경이 출판되기도 했다(제네바성경, 1559년). 그 중에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종교개혁을 추진했다.
칼빈은 개혁된 신학으로 후진을 양성하여 교회를 세우는 교육기관을 추진했다. 1558년 3월 25일에 장소가 정해지고, 1559년 6월 5일에는 학교를 개교했다. 칼빈이 시민권을 얻은 것도 1559년 때이다. 제네바아카데미는 칼빈의 개혁신학을 유럽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주요한 도구가 되었다. 루터의 저술이 출판 수단으로 확산되었고, 칼빈의 신학은 제네바아카데미를 도구로 확산되었다.
칼빈은 1556년부터 쇠약해져 1558년 말에 열병에 걸려 이듬해 초까지 심하게 앓았다. 1559년에 기독교강요가 출판되었는데, 칼빈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에서 작업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과업까지 수행했다. 칼빈은 병상에서 일어난 직후 설교를 사역을 감행했다. 결국 경련을 일으키며 격렬한 기침 발작을 일으키는 등 심각하게 병쇄가 악화되었다. 1564년 2월 6일에 피에르 교회에서 한 설교가 그의 인생 마지막 설교가 되었다. 4월 25일에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5월 2일에 짧은 편지를 보낸 연로한 파렐도 칼뱅을 방문했고, 19일에는 다른 목사들과 함께 그의 집에서 정기모임을 가졌다. 칼뱅은 1564년 5월 27일 54세의 나이로 주의 부르심으로 세상을 떠났다.
칼빈의 직계 후계는 데오도르 베자(Théodore de Bèze, 1519-1605)가 감당했고, 디오다티(Giovanni Diodati, 1576-1649, Swiss-Italian Reformed theologian), 테오도르 트론친(Theodore Tronchin, 1582-1657),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이 사역했다. 튜레틴의 아들, Jean-Alphonse Turretin. 1671-1737(제네바에 자유주의 신학을 도입함, 헬베틱 신앙고백서 서약 의무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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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재성은 칼빈과 로욜라는 함께 1년 동안 학교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Van Halsema는 1528년, 칼빈이 파리를 떠난 바로 그 해에 훗날 예수회를 창설하는 37세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학업을 위해 파리에 왔다고 주장했다(Thea B. Van Halsema).
2) 칼빈은 1557년 〈시편주석〉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록 내 아버지께 순종하려는 소망에서 내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밀하신 섭리로 나를 제어하사 마침내 내 진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셨다. 첫째로 일어난 일은 갑작스런 회심(subita conversio)으로 여러 해 동안 너무나 고집스러웠던 마음을 가르칠만하게(docilis, teachable) 만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