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주: 22 아름다운 문학상의 주인공 김애경 시인의 최근 디카시집 『이별이 추억으로 가 닿을 때까지』 속의 명편 8작품을 모시면서 이에 대한 졸평을 시리즈 연재를 시작합니다. 회원여러분의 많은 고견을 청하옵니다.>
벽화
김애경 시인
먹물을 듬뿍 찍어
그려놓은 수묵화 한 점
낙관이 없어
바람만 기웃기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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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카시는 사진과 詩가 서로를 도와주는 융합의 이중주 앙상블이다. 그 이중주곡의 마디 마디에는 '순간포착, 순간 언술(言術), 그리고 상호 대등한 ‘소통'의 음표들이 아름다운 상상의 협연으로 연주된다. 어찌보면 그것은 역동적인 카오스적 리듬이라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이다. 사진과 시적 진술 즉 언어 사이에서 상호 수수되는 정동(affect)과 그 뒤에 숨은 시인과 독자의 언어적 욕망이 개입되어 이 각각의 것이 함께 협연을 조화롭게 이루어 내고 있다. 그러니까 저 소통의 음표들은 ‘사물은 시인을 통해서 말하고 시인은 사물을 통해서 말하는 경지’를 의미한다 할 수 있다.
2.
이는 디카시 감상의 방법론을 시사해 준다. 디카시는 단순히 사진에 대한 감상이나 기술 그리고 그 현장의 묘사가 아니다. 순간포착, 사물, 인물 그리고 현상과 마주한 순간 시상을 상호 융합적으로 떠올리려고 고심했던 시인의 순간 포착과 직관을 읽어 낼 줄 알아야 할 일이다. 이것이 디키시만이 지니는 독자와의 소통적 구조다. 또한 디카시가 사진과 글이 몰아일체 됨으로써 독자와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시의 영역을 확장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산물로 문단에서 실험적인 단계지만 내심 인정하고 있는 명백한 논거가 아닐까 한다.
3.
한편, 디카시는 짧은 5행 이내의 글로 마주치는 대상과 시상의 이미지를 착상화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시인은 고도의 연금술사 일지도 모른다. 포착한 대상의 사진과 이탈되지 않으면서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짧은 시간 짧은 내용으로 전달해야 하는 일은 정교한 세공술이 요구되기도 하기 때이다. 그러므로 디카시 본연의 소통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난해하지 않고 너무 깊은 사유와는 거리감을 둠으로써 일반 시보다 더 독자와 가깝게 다가가려는 디카시 본연의 의미를 잘 유지하도록 애써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정성을 유지하면서도 반전의 묘미는 물론 위트와 재치도 번뜩이는 디카시야말로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누구나 편하게 시를 쓸 수 있는 토양에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그 현장을 인용시에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4.
이러한 디카시의 몸체를 어루먼져 볼 때, 디카시가 디지털 시대, SNS 소통환경에서 누구나 창작하고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詩놀이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만큼 장르로서의 확장성이 크다는 애기다. 다만 직관의 능력 만큼은 특히 디카시에서 매우 소중한 시인의 자산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러는 직관은 김애경 시인의 디카시집 『이별이 추억으로 가 닿을 때까지』 명편들의 행간에 감각의 중추가 숨어 있음을 자주 발견 할 수 있는데, 본 인용시가 그러한 직관의 본질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 햇살과 그림자와 바람의 앙상블 속으로 귀를 귀울여 보자 .
5.
벽화로 남겨진 그림자로서의 수묵화의 시각적 이미지와 詩라는 언어적 진술사이에 팽팽한 긴장감과 역동적인 상호 대화적 관계가 자못 흥미롭다. 시적 진술 행위의 주체를 온전하게 사물에게 위임시키고 있다. 벽화를 그린 주체요 화자는 사람이 아닌 햇살이다. 시의 주도권이 시인에게서 사물에게로 바람처럼 이동했다. 이러한 전도(傳導)된 인식은 디카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순간 포착된 그림자가 벽이라는 화폭에 수묵화를 그려내는 현상학적 환원이 도드라져 보인다. 직관능력이 있기에 가능할 일이다. 물론 시인은 행간의 밖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위임받은 햇살이 초점화자로써 수묵화를 그리는 주체로 나선 것이다.
6.
더욱이 통사론적으로 보면 이 詩는 햇살에 의해 그림자가 수묵화를 그릴 수 있는 벽으로 옮겨 놓았다면 시각의 주체는 햇살에게서 그 수묵화를 기웃거리는 바람에게로 또 한번 이동시키고 있다. ‘햇살’과 ‘바람’이라는 이중구조적인 주체를 형성함으로써 디키시의 고유의 맛을 더욱 풍미스럽게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 이중구조를 가능케 한것은 곧 '보이지 않는 낙관'이며 이는 앙상블을 이루어 내는 삶의 지혜라는 메타포요 알레고리로 필자는 읽어내고 싶다. 전반부 그림을 그린 햇살이 주체 일 때는 수묵화가 목적어가 되겠지만 후반부는 그러한 수묵화를 지켜보는 주체는 곧 ‘바람’이다.
7.
이러한 디카시의 본질적인 통사구조가 가능한 것은 디카시에서 시인은 영상 속 풍경을 단순히 전달하는 ‘에이전트(agent)’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포착된 사물들이 주체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가 서로의 상황을 가능케 하는 대화적 국면을 형성을 만들어 주는 대변자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김애경 시인은 디카시의 경지에 오른 에이전트(agent)임이 틀림없다. 전통적 장르 규범으로는 포획하기 어려운 다상성의 담화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디카시만의 속성을 보여준 수묵화같은 시다. <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