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豊友會 원문보기 글쓴이: 시보네/54
歷史 가운데 살아 숨쉬는 久遠의 땅, 豊基 (풍기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강 사 : 朴 錫 泓 (慶專大 / 東洋大 /神大院 등) 강 좌 : 경북전문대 관광통역과(英 ? 日)1차
※ 예 : 조선의 진산(白頭山 : 不咸山), 서울의 진산(三角山), 영남의 진산(小白山), 대구의 진산(八公山), 광주의 진산(無等山), 영주의 진산(鐵呑山), 순흥의 진산(飛鳳山) 등.
※ 용천: 용천태아(龍泉太阿)의 준말로서 중국 풍성지방에 파묻혀 있다가 나타나게 된 명검(名劍)을 이르는 말이다. 풍성검기(豊城劍氣)라고도 하여 文武를 겸비한 큰 인물이 태어나는 곳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려 태조 왕건은 풍기의 도솔봉下 등강성과 마산에서 후백제의 견훤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삼한을 통일한 후, 그의 용천검을 땅에 묻고 떠나니 훗날 그 자리에 삼한통일을 기념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의미로 「용천사」라는 절을 세워 호국기원을 위해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로 절은 소실되었고, 그 터만 전해 오지만 역사의 발자취를 찾는 후학들에게는 가슴을 달궈 주는 국난극복의 현장이기도 하다.
※ 풍기의 豊은 周易에서 풍패풍(성대한 象)이요, 豊亨豫大(풍형예대)로서 64괘(卦)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 豊은 성대한 모양이며, 豫는 화락(和樂)한 모양이니 천하가 태평하여 백성들의 향락이 극에 달함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풍성검기(豊城劍氣)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豫章에서 풍성지방에 파묻힌 용천과 태아(太阿)라는 명검이 자색의 광망(光芒)을 발하며 하늘에 나타났음을 밝혔으니 풍기 역시 예사로운 고을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래서 “별들의 고향”이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 舌上有龍泉 殺人不見血(설상유용천살인불견혈 ; 혀가 칼보다 무섭다.)
※ 용천과 태아라는 쌍검처럼 간장(干將)과 막야(莫邪)도 고대 중국의 명검으로 원래 ‘간장’은 오(吳)나라의 도장(刀匠)이고, ‘막야’는 그의 아내임. 오왕 ‘합려(閤閭)’를 위해 양검(간장) ? 음검(막야) 두 칼을 만들어 바친 데서 생겨난 말임.
※ 고려 태조(왕건)가 풍기에서 천하를 얻게 될 때 인근 예안(녹전)에서 이곳 풍기로 향하던 중, 말(馬)을 세우고 잠시 쉬었다는 주필지(駐?址)가 바로 지금의 오천(汚川)의 태조봉(太祖峰)이다. 이런 연유로 먼 훗날 려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으로 왕의 행차가 이 고장으로 몽진 길에 오르게 된다. 소백준령을 넘어 이곳 순흥부(順興府)에 오시게 된 이유 중 하나가 1) 회헌 안향선생과 근재 안축선생 등의 연고지로 자타가 인정한 지역이란 점, 또 하나로는 2) 고려 태조가 천하를 얻은 기념으로 용천검을 꽂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조(고려)에서 부터 누대로 왕의 태를 묻은 고을이요, 나라의 역사와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가 있던 곳이니 이러한 곳을 '삼재팔난 불입지지'라고 일컬었으며, 왕의 행차 역시 당연지사였다. 그 무렵이 추운 겨울(동짓달)이라 매서운 눈바람에 주 ? 신(主 ? 臣)이 모두 고생함을 보고, 왕이 안타깝게 여기니 따뜻한 복주(안동)으로 모시고 가게 된다. 그때도 송리원 ? 안기역로를 이용하지 않고, 하필이면 돌아가는 녹전 ? 예안 길을 택했을까? 그것은 회헌 안향 선생의 수제자였던 역동 우탁 선생의 연고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나는 길에는 고려 태조가 말을 세우고 잠시 쉬었다는 주필지(駐?地)인 태조봉(현 봉화 상운 오천 및 영주 평은 천본)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역동의 선곡현(현, 예안)으로 향할 때 모두가 고생이니 행차를 잠시 멈추고 노고를 따라 임시 녹읍을 베푼 곳이라고 해서 녹전(祿田)이요, 그때 왕을 도와 상급을 베푼 임시 관원을 봉상색(封上色)이라고 했다. 그래서 “녹전 봉상색”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 오는데, 그 이름을 따서 훗날 지명이 된 곳이 지금의 안동시 녹전면이다. 일설에는 평은면 강동리 두문재 아래에서 왕이 잠시 머물렀다고 해서 그 동네 이름을 왕머리(王留洞)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인근 청량산을 찾았다고 하나 이 모두 (안동은 태종 2년때 복주로 개칭) 전후사를 미뤄보아 공민왕의 몽진과는 거리가 먼 얘기일 뿐이다. 그러나 영주는 부석 남대리, 단산 마락리 등에는 어래산 행재소(行在所), 행궁터 등 공민왕이 다녀간 근거로 어가행렬이 지난 자취마다 지명으로 남아있다. 이무렵 왕의 행차가 안동에 머무르고 있을 때 안의(安義)와 김득배, 이방실 등이 홍건적과 싸워 대승을 거둔 승전보를 복주(福州 : 現 안동 행재소)의 공민왕께 전해 드렸으나, 김용의 시기와 모함으로 되려 화를 입게 된 사실이 《고려사》〈본전〉에 실려 있다.
※ 예; 김천(金泉)도 三山二水의 고장임(황악, 수도, 금오+직지, 감천), 남원, 인천(문학산) ※ 양백지간(兩百之間) : 小, 太白山이 마주하는 그 사이의 向陽之地 봉화(내성 춘양), 순흥, 풍기(은풍), 예천 등의 영하취락(嶺下聚落)을 말한다. 小白山의 이칭(국망봉 : 참산내기봉, 비로봉 : 민배기재, 연화봉 : 다리안산 , 도솔봉 : 두산 등)
◎ 그러나 1)두물머리(南院과 錦溪)가 만나는 곳과 물이 흘러나가는 2)水口머리가 터져있어서 "옥의 티"이므로 선조들은 그런 곳을 애써 보태고 감추고자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고려의 山川裨補都監과 東晉의 郭璞의 “人傑은 地靈” 참고) 그런 곳을 ‘비보(裨補 : 허하고 약한 곳을 도와 채운다.)숲’ 또는 ‘비보처’라고 한다. 이곳 역시 비보한 곳이므로 ‘솔경지숲’이라고 불러왔다. 용천동 뒷산에서 앞을 내다보면 수구머리(남원 ? 금계)가 열려있어 그곳을 감추고자 '솔'을 밀식하여 '엄폐(掩蔽)'한 곳이다. 세월이 흘러 학(鶴)들이 구름떼처럼 이곳에 날아와 집을 짓게 되었다고 해서 이 동네를 운학동(雲鶴洞 : 孤雲野鶴)이요. 또는 구름밭(土城들)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해서 밖에서는 안의 좋은 기는 못 나오게 하고, 반대로 안에서는 밖의 나쁜 기(병마, 외침)가 못 들어오도록 인위적으로 나무를 심고 숲을 가꿔 '수목비보(樹木裨補)'를 한 곳이다. 실제로 현 안정면 생현동 장승배기(황새목) 주유소 앞에서 풍기 시가지를 바라보면 수구머리가 훤히 드러나 보인다. 그래서 그곳에 장기수를 빽빽하게 심어 은폐 ? 엄폐하여 왜적의 침입 등을 막고자 했던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엿보게 된다.
〈 도표 Ⅰ : 좋은 지형 〉 〈 도표 Ⅱ : 좋은 지형 〉 < 도표 Ⅲ : 풍기 〉
솔경지 숲 터 자리
현재는 풍기읍 동부동 토성(土城)들로 불리는 곳으로 오래 전에 소나무 숲은 다 사라지고, '느티나무'와 '선돌'만 남아서 마을 서낭숲으로 관리되고 있음.
풍기의 토성(土城)의 원경과 마을회관
운학동(구름밭) 입구 전경
※ 이곳(순흥 소래뜰)은 순흥 도호부 시절인 일제 초에 개신교가 제일 먼저 들어온 곳임. 야소교(耶蘇敎)가 최초로 전래된 곳이라고 해서 야소에서 “소”자를 따고, 전래에서 "래"자를 따서 '소래뜰'이라고 부르게 되었음. 실제로 1907년도 11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기사에 보면 일본 본토에서 건너 온 왜병 약 1700여 명 가운데 1250명이 투입되어 10일 날 소백산중에 암약활동 중이던 의병소탕을 목적으로 도호부 관아와 소재지를 불 질러 180여 호가 전소가 됐을 때, 이 지역 최초로 세워진 대평교회(大平敎會)마저 불탄 것으로 보이며, 1934년경 화마로 '흥주소학교'가 소실될 때, 함께 불탄 것으로 추정됨. 소래뜰은 원래 순흥의 남정(南亭)인 봉서루 주변을 말하는데, 이곳은 원래 대평촌(大平村) 또는 태평촌(太平村)으로 불렀던 곳이며, 이때 소실된 "대평교회"는 여기서 따온 이름으로, 지금의 순흥교회(長合)의 전신임.
순흥 도호부 봉서루 주변에 묻혀있던 봉황알돌(鳳卵石)
봉황이 깃들어 살 수 있도록 '솔'과 '오동'을 심었던 장소
사명대사 진영(동화사소장) 동화사 극락문루인 봉서루
동화사 일주문인 봉황문 편액
사진
◎ 水口막이 비보숲(裨補林)으로 二水와 邑治의 氣를 살렸다. 솔경지 숲과 사과밭
그는 선교사역을 감당하다가 이국 땅 풍기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생전 복음사역 때 심었다는 풍기 사과가 한창 열릴 무렵, 지역 촌로들이 길에서 선교사와 상면 시에 풍기사과를 자랑삼아서 “당신네 나라에도 사과가 있소?”라고 되물었다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전해온다. 기후온난화 현상으로 사과의 경산 ? 대구 아성이 무너지고 풍기를 거쳐 북상중이지만, 사과가 아직까지 이 고장의 “랜드마크”인 이상, “북문교회(현 성내교회) 터” 아니면 토성들(운학동) “솔경지 숲” 어디매쯤 적당한 곳을 택하여 그를 기리는 기념비 하나라도 세워 줄 수 있는 “풍기인”들이 어디 없을까.
실제 사과나무는 선교사들에 의해 국내에는 대구(大邱)가 제일 먼저 들어 온 곳이다. 안의와(제임스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한 배위량(베어드)의 처남으로 대구 ? 경북지역의 첫 교회인 남문안교회(현, 대구제일교회)를 세운 분이다. 그의 아들 안두화 선교사 역시 6.25 전쟁의 포화가 멎은 1954년 교회 지도자들로 기성회를 조직, 달구벌 넓은 땅에 기독교 정신에 의한 대학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는 오늘의 계명대학교이다. 그는 초대 이사장을 거쳐 제 2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1899년 美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우드브리지 존슨(장인차) 선교사가 맨 처음 지금의 약전골목(옛날 제일교회 자리)에 있던 초가집을 매입하여 제중원(濟衆院)을 설립, 신식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그 후 1903년 병원을 현재의 동산동으로 이전 확장하였고, 2대 병원장으로 플렛처가 부임, 인근 지역에 147개 교회를 개척한 바 있다.
이 무렵 자연스럽게 들여 온 것이 이 지방 토양에 맞는 사과나무 묘목이었다. 우드브리지 존슨(장인화) 선교사가 미국에서 묘목을 갖고와 선교사 사택 정원에 시험재배 한 것이 성공하자, 차츰 보급범위를 넓혀 지역민들에게 나눠 준 것이 한 때 대구 사과의 명성을 얻게 한 시초가 되었다. 지금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 24호로 지정된 「선교박물관」 앞마당에 이식한 “사과나무”가 그때 심은 나무의 대를 이은 유일한 나무여서 지금까지 보호수로 지정받아 관리되고 있다.
풍기는 오월번 선교사가 심었다는 ‘시조목’을 이어 그 씨를 받아 대를 이었다는 사과나무는 지금쯤 어느 농장에 남아 있는지 궁금한 일이다. 모두가 관심 밖이니 가슴 한구석만 아릴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