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사’로 불리는 제산 박재현의 정신적 자양분은 두 갈래로 분석된다. 그 하나는 개운조사파다. 박도사는 일찍이 계곡 물소리가 일품인 함양의 백운산 밑에 있는 백운암에서 개운조사파와의 합동수련을 통해 신통력을 깨칠 수 있었다. 또 한 갈래는 윤청허 선사로부터 받은 깨우침이다. 현재도 神仙이 되어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 살아 있다는 청허선사는 박도사가 죽을 때까지 그리워했을 만큼 그의 일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박도사가 20세기를 사는 한국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가공할 신통력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주문(呪文)이 나온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을해명당’(乙亥明堂)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고, 학교 다닐 때도 머리가 비상했으며, 지리산 일대를 방랑하면서 많은 도사들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역시 신통력의 핵심에는 주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 주문은 ‘구령삼정주’(九靈三鼎呪)였다. 주문이란 무엇인가. 주문의 본질에 대해 오랫동안 탐구한 결과 주문이란 결국 ‘신들을 설득하는 소리’라는 결론을 얻었다.
소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sound is power). 그래서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누구를 저주(詛呪)한다고 할 때 주문의 주(呪)자가 들어가는 것도 알고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특정한 소리를 계속 반복하면 그 소리와 감응하는 신들의 세계가 있고, 이 신들의 세계에서 그 사람에게 힘을 준다. 마치 인터넷에서 클릭을 반복해 들어가다 보면 특정 사이트와 접속되는 이치와 같다. 접속이 제대로 되면 그 사이트에 저장된 정보를 무한정 이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접속의 방법인데 고금을 막론하고 정신세계와 접속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소리였고, 그 소리는 주문이라는 형태로 패턴화되었다. 따라서 주문은 가장 강력한 영적 파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구령삼정주(이하 구령주)는 도교에서 신들을 설득하는 주문이었다. 주문마다 그 주문이 지향하는 특정한 정신세계가 있다. 이 우주에는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처럼 무수한 하늘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예를 들어 불교의 ‘준제주’(准提呪)는 관세음보살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주문이고, 구한말 김제 모악산(母岳山)에서 수행하였던 강증산의 주문은 ‘흠치 흠치 태을천상원군…’으로 시작되는 ‘태을주’(太乙呪)였다. 태을주는 거기에 상응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격(神格)이 존재한다. 기독교인들이 예배할 때 외우는 ‘주기도문’도 필자가 보기에는 주문의 일종이다.
신비주의를 거부하는 유교에서도 ‘서경’(書經) 서문(序文)이 주문의 대용품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옴-마-니-반-메-훔’의 여섯글자가 전부인 육자대명진언(六字大明眞言)은 가장 유명한 주문으로, 산동네인 티베트에서 발효된 특유의 영성이 물씬 풍기는 주문이다. 10년 전인 1992년 베트남 출신의 세계적 종교지도자 칭하이(靑海)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필자는 부산 KBS 홀에서 처음 그를 상면했는데, 그가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던 수행 방법도 역시 인도·히말라야의 신들을 부르는 5단계 주문이었다. 주문의 장점은 신속하고 강력한 파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주문의 부작용은 심리적으로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는 정신이상이 오거나 심하면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문이란 결국 ‘신들을 설득하는 소리’
밀교의 주문 가운데 하나로 조선 후기 재야의 도사들이 많이 사용했던 주문은 천지팔양경(天地八陽經)이라는 주문인데, 천지팔양경을 외우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쳐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주문 수행자가 한밤중에 팔양경을 외우다 갑자기 천장이 열리면서 머리에는 뿔이 나고 키가 10m는 될 법한, 왕방울만한 눈을 가진 괴물같은 신장들이 눈을 부라리며 나타나 “왜 불렀느냐”고 묻자 주문 수행자가 그만 기절했다는 사례를 접한 적이 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종의 정신 착란 현상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실제로 다가온 현실이었다.
현실은 현실인데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다. 주문을 소화해 내려면 무서운 형상을 한 신장들이 나타났을 때 태연하게 “내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배짱과 담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정신적 쇼크를 받아 미쳐 버린다.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성인용 신화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지금 주문을 외워보라. 주문을 통해 기록으로 전하는 무수한 신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한국에 느닷없이 ‘그리스 로마 신화’ 읽기 붐을 일으킨 작가 이윤기씨에게도 주문 수행을 권하고 싶다.
제대로 신화를 알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발을 직접 담가 보아야 한다. 수박 겉만 핥아서 무엇하겠는가. 식칼로 수박을 쪼개서 빨간 과육을 먹어 보아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이 ‘신켄쇼부’(眞劍勝負) 아니던가. 그러나 책임은 못진다. 고백하건대 필자도 무서워 중도에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윤기씨 관상을 보건대 무인의 투지가 엿보이는 얼굴이라서 한번 시도해 보면 소기의 성과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하는 이야기다.예부터 ‘비기자(非器者)는 부전(不傳)이라!’고 했다.‘감당할 만한 그릇이 아니면 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大借 얻으면 큰 황소 들어올릴 힘 얻는다”
구령주는 장기적으로 볼 때 신선이 되기 위한 도교의 수행 과정의 하나이지만, 부수적으로는 사주팔자를 보는 능력을 증강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신선의 궁극적 목표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이지만 부수적으로는 축지법, 차력, 둔갑술, 예언능력과 같은 신통력도 있어야 한다.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신통력이 있어야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고, 본인도 자유롭게 천하의 명산대천을 유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대 유명한 장군들도 주문수행을 통해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진다.
을지문덕·강감찬·임경업 장군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한다. 장군은 전쟁터에서 무력을 사용해야 하므로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경우에 대비해 무력을 얻는 주문을 외우면 정말로 엄청난 힘이 들어온다. 예를 들면 차력(借力)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借’의 이름이 붙은 주문이 그것이다.
차력 주문에도 3가지 단계가 있다. 소차(小借), 중차(中借), 대차(大借)다. 소차를 얻으면 송아지 한마리 정도를 들어올릴 만한 힘이 생긴다. 중차는 1년 된 중간 크기의 소를 들어올릴 힘, 그리고 대차를 얻으면 커다란 황소 한마리를 들어올릴 만큼의 파워가 붙는다.
장군을 하려면 대차 정도의 힘은 얻어야 한다는 것이 도사들의 중론이다. 그래야 순식간에 상대를 압도해 버린다. 소설 ‘단’(丹)에도 차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필자는 몇년전 충청도 속리산과 상주 일대에서 활동했던 속리산파(俗離山派)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속리산파 인물들의 면면을 알고 있던 어느 스님으로부터 흥미있는 이야기를 얻어들었다. 그 스님 이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는 의승군(義僧軍) 활동으로 유명했던 사명대사도 주문을 통해 차력을 얻었다고 한다.
사명대사가 외웠던 주문의 이름은 ‘섭화차’(攝化借)였다. 인간과 사물이 서로 하나가 되게 하는 주문으로, 이를 외우면 1t 정도의 바위를 번쩍 번쩍 들 만한 힘이 생긴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현대인은 지나치게 물질적 도구에 의존하는 ‘도구적 인간’으로 전락함으로써 과거의 인간들이 지녔던 이러한 정신적인 힘을 알지도 못하고 개발하려 하지도 않는 경향이 있다.
미래의 운명을 예언하는 박도사의 신통력이 구령주를 외우는 주문수행에서 나왔다면 그 구령주는 구체적으로 어떤 주문인가. 구령주는 도교의 ‘옥추경’(玉樞經)이라는 경전에 포함된 하나의 주문이다. 조선 후기 민간도교에서 옥추경은 ‘칠성경’(七星經)과 함께 재야의 방술에 관심이 있는 지식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경전이었다. 인기 있었던 이유는 효험이 즉발하였기 때문이다. 칠성경이 북두칠성을 받드는 신앙을 담고 있다면, 옥추경은 우레의 신을 받드는 경전이다.
전자가 주로 단명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용도로 숭배되었다면, 후자는 우뢰의 신을 이용하여 잡귀를 쫓고 복을 비는 양재초복(禳災招福)의 용도였다. 도교 내단학(內丹學) 전문가인 원광대 김낙필 교수의 연구(‘조선후기 민간도교의 윤리사상’)에 의하면 옥추경은 불교의 아미타불 신앙과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한다. 즉, 인심이 타락한 말세에 이 경을 외우기만 하여도 구원받는다는 타력구원의 신앙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도교 전문 수행자들에게는 도의 본질과 수도의 요체를 제시하는 경전이라는 것이다. 옥추경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사실은 추사 김정희도 이 경을 중시하였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고천문학(古天文學)을 사사받는 삼정(三正) 권녕원(權寧遠)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추사가 옥추경의 서문을 써 놓은 것이 있다고 한다. 재야의 도사들뿐만 아니라 추사 같은 당대의 일급 식자층도 이 경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추사가 옥추경을 좋아한 이유는 종교적 효험도 작용하였지만, 이 경에 나오는 문장이 좋아서 그랬으리라는 것이 삼정 선생의 분석이다. 즉 옥추경 운율(韻律)은 아주 기막히게 맞다는 것이다. 운율은 리듬이다. 같은 문장이라도 운율이 맞아야 읽는 재미가 있고, 운율이 맞다 보면 노래처럼 암송할 수 있다. 지금이야 운율이 퇴색해 버렸지만 조선 후기의 한문 식자층들은 한문 고유의 운율을 아주 중시했던 것 같다. 그 영향이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도 나온다는 사실을 지적한 분이 삼정 선생이다. 정역이 주장하는 핵심 메시지는 패러다임이 바뀌었다(패러다임 시프트)는 내용이다.
우주의 시계바늘이 정오를 지나 오후 3시쯤을 가리키고 있다는 주장으로, 낮 12시가 지났으므로 선천에서 후천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제 여성적 에너지가 세상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선천이 양적 에너지가 주도하는 세상이었다면 후천은 감성적인 성격을 지닌 음적 에너지가 주목받는다고 본다. 선후천이 교체되는 변화의 과정을 ‘금화송’(金火頌)이라는 노래로 표현하였다. 김일부가 남긴 5개의 금화송 가운데 첫 번째인 ‘금화일송’(金火一頌)의 내용이 바로 옥추경의 운율을 따 지은 내용이다. 금화송을 운에 맞춘 이유는 운이 맞아야 거기에서 영적인 힘이 나온다고 본 까닭이다. 이러한 맥락을 감안하면 구령주 역시 운율에 맞추어 암송하는 주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四柱의 정확도는 복채에 비례한다?
구령주를 암송할 때 운뿐만 아니라 어느 시간대에 해야 하는가, 그 암송하는 템포와 반복횟수는 어떠해야 하는가 등은 비밀에 부쳐져 있다. 서양의 클래식에만 콩나물 대가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주문 암송도 고저장단의 악보에 따라야 한다. 주문은 자기 마음대로 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구전심수(口傳心授)의 세밀한 지도를 받아 이루어져야 한다. 즉, 스승으로부터 미묘한 부분에 대한 은밀한 지도가 있어야 효과가 발생한다. 사주명리학에서 구령주를 수련해 효과를 보았다는 사실 자체도 그동안 비밀에 부쳐져 있다 박도사가 죽기 직전에야 제자에게 이를 공개해 필자도 알게 되었다.
박도사의 말년 제자인 청담(淸潭)이 병원에서 그의 똥오줌을 받아내는 병수발을 감당한 공로로 비전(秘傳)을 얻어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구령주의 존재를 모르는 사주쟁이들은 박도사의 초능력이 오직 책만 보고 얻은 능력인 줄로 착각한다. 필자도 청담으로부터 구령주라는 이야기만 들었지 구령주를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에 의해 암송해야 하는지는 듣지 못했다. 그는 구체적인 방법론은 철저히 함구했다. 수업료를 내지 않아서 알려주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청담이 병들어 병원에 입원해야만 필자에게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신앙심의 단계가 헌금 액수에 비례하듯 사주의 정확도는 복채에 비례한다는 것이 이 바닥의 법칙이다. 무노동이면 무임금이라고 하듯 무복채(無卜債)는 무적중(無的中)이다. 무림의 비급을 입수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정성이 필요한 법. 돈이 없으면 몸공이라도 드려야 한다. 화장실 청소 10년이라는 몸공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필자는 화장실 청소 1년만에 구령주의 구체적 수행법은 듣지 못했지만, 그 진원지에 관한 정보는 입수할 수 있었다.
박도사의 정신적 자양분은 두 갈래다. 하나는 개운조사파다. 지난호에 설명한 바와 같이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 개운조사를 추종하는 개운조사파는 ‘능엄경’의 수행법인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 노선을 가지고 있다. 박도사는 일찍이 계곡 물소리가 일품인 함양의 백운산 밑에 있는 백운암(白雲庵, 舊 靈岩寺)에서 개운조사파와 함께 수련한 적이 있다. 또 하나의 갈래는 윤청허(尹靑虛) 선사(仙師)다. 박도사의 일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바로 윤청허 선사이다. 박도사가 20대에 지리산을 방랑하던 시절에 만나 죽을 때까지 그리워한 스승이기도 하다.
청허선사는 충남 아산이 고향이다. 6·25때 피난해 지리산 근처 함양에 살게 되었다. 그는 함양읍 교산리 행교마을에 살면서 한약방을 차려 생계를 이어갔다. 요즘도 한의사들이 선도 수련에 특히 관심이 많지만, 과거에도 도인들이 수도를 하면서 호구지책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원만한 방법이 한약방이었다. 당시에는 입산하기 전이어서 속칭 ‘윤약국’으로 불렸다고 한다. 20대에 운명적으로 윤약국을 만난 박도사는 친구인 남원 운봉의 노개식씨에게도 진짜 도인을 만나 보아야 한다면서 친구를 데리고 갔던 적도 있었다.
청허선사는 50대 초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비로소 처자식의 생계를 해결해 놓고 정식으로 지리산에 입산하였다. 그 전까지는 한약방을 하면서 처자식을 책임지는 한편 도교 수련의 모든 이론과 방법론을 완벽하게 준비한 다음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최치원이 사바세계에 시달린 나머지 가야산으로 들어갈 때 읊었다는 시의 한 구절이 바로 ‘일입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이다. ‘내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 청허선사는 모든 준비를 치밀하게 마친 다음 산에 들어가 현재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는 처음 10명의 제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가운데 주문수행 과정에서 3명이 죽고 4명은 정신이상이 되었으며 나머지 3명이 살아남았는데, 그 살아남은 3명의 제자 중 최연소자가 박도사다. 2명의 나이 많은 제자들은 지리산에 머무르면서 정통 선도 수련에 들어갔고, 박도사는 중간에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게 됨으로써 호구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호구지책으로 인하여 사주명리학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박도사는 목돈을 만지게 되면 그때마다 “선생님이 계신 산으로 돌아가야 할텐데”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비록 시장바닥에서 사주를 보는 천업(賤業)에 종사하였지만, 그가 그리워한 곳은 청허선사가 계시는 지리산이었다.
1970년대 후반 부산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둬 목돈이 들어오자 계룡산에 재입산한 계기도 그러한 연장선상이었다. 계룡산에 들어갈 때 당시로는 거액에 해당하는 1,000만원의 돈이 수중에 들어왔었다. 김복동씨와 농수산부 장관을 하던 장덕진씨가 함께 보내준 돈이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김복동씨는 군 시절부터 박도사와 교류가 있었으며, 매제인 노태우 장군이 장차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대통령 되기 7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긴밀한 관계였던 만큼 박도사가 산으로 들어간다고 하자 목돈을 주어 도와준 것이다. 박도사는 1,000만원 가운데 700만원은 가족의 생활비로 남겨놓고, 나머지 300만원을 가지고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박도사가 그 300만원의 일부를 사용하여 발행한 책이 지난호에서 언급한 ‘선불가진수어록’(仙佛家眞修語錄)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 보면 저자가 백운산인(白雲山人) 윤일봉(尹一峯)이고, 발행인은 계룡산인(鷄龍山人) 박제산(朴霽山)으로 되어 있다. 백운산인 윤일봉은 누구인가. 박도사의 스승인 윤청허 선사를 지칭한다. 청허선사는 ‘선불가진수어록’의 내용이 선도 수련의 알파와 오메가를 모두 담고 있으므로, 이 책을 펴내야 한다고 제자인 박도사에게 당부하였으며, 박도사는 스승의 명을 받아 계룡산 시절 이 책을 세간에 공개했던 것이다.
청허선사는 100세가 넘는 110세 가까운 나이로 현재까지 지리산에 생존하고 있다고 들었다. 도교의 신선은 100세의 수명은 넘게 살아야 진짜 신선이라고 본다. 신선은 몸으로 직접 입증할 필요가 있다.
100세의 나이는 불로장생한다는 선도 수련의 이론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기준점이기도 하다. 일찍 죽었다는 사실을 따지고 들어가면 인생살이에서 무리수를 두었다는 말이고,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 자체가 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렇게 말 하면 너무 가혹한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조심하라!”
다시 주제로 돌아가면, 구령주의 발원지는 청허선사다. 구령주는 3단계의 과정이 있는데, 이 중 처음 단계만 통과해도 막강한 예언력이 나오고, 그 예언력에 바탕해서 박도사가 장덕진 장관에게 “언제쯤 비가 올 예정이니 양수기를 사지 말고 기다리라”는 예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미래의 천기까지 꿰뚫어 보는 능력은 계룡산 시절의 구령주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박도사 전체의 인생을 두고 볼 때 그 예언은 입밖에 내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 적중력이 세간에 노출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계룡산에서 수도하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뽑혀 올라온 것이 된다.
알고도 모른 체하는 내숭이 도사의 필수적 자질인데, 박도사는 그것을 알고도 입을 다무는 함구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 천추의 한이다. 겪어본 사람들의 체험담에 의하면 박도사는 입이 근질근질해서 도저히 말을 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서 함구하고 멈추는 자제력을 갖추기는 웬만한 인내심 갖고는 어림없다고 한다. 십중팔구는 나가서 떠들게 마련이다. ‘고스톱’의 요체도 ‘고’와 ‘스톱’을 시중(時中)에 맞게 판단하는 것이지만, 인생사 전체도 따지고 보면 고와 스톱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길흉이 결판난다. 조용헌이만 보아도 조금 아는 것 가지고 이렇게 떠들고 있지 않은가! 특히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그만 감동하여 천기를 누설하는 경향이 많다.
박도사도 어려운 상황일 때 자기에게 도움을 준 장덕진 장관의 요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삼국지’의 제갈공명도 천하대사 운운하는 유비의 꾐에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재야에서 조용히 수도하여 틀림없이 신선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토정 선생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잠언을 남긴 것 아닌가 싶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말도 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잠언도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염두에 두기 바란다. 명철보신(明哲保身)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청허선사의 제자가 선사에게 물었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선생님! 선생님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왜 세상에 나가서 경륜을 펼치지 않으십니까?”
“너 영화 본 적 있지? 한번 본 영화를 또 보면 재미가 있더냐, 없더냐? 한번 본 영화를 나더러 또 보라는 말이냐?”청허선사 같은 인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필자에게는 한없는 기쁨이다. 아직 한국의 선맥(仙脈)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청허의 선맥을 소급해 올라가면 구한말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와 연결된다. 충남 연산에 거주하였던 연담은 전라감사를 두번 지낸 이서구(李書九)의 뒤를 이어 천문·지리·인사에 능통했던 도인이다. 연담 문하에서 동학(東學)의 최수운(崔水雲)과 남학(南學)의 김광화(金光華)가 공부하였고, ‘정역’을 쓴 김일부가 배출되었다.
연담이 일찍이 김일부에게 전했다는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그림자가 하늘의 달을 움직이게 한다)이라는 시구는 후천개벽을 알리는 ‘정역’의 출현을 미리 감지했던 예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강증산의 후천개벽 사상도 김일부로부터 영향받은 것이고, 원불교 소태산의 정신개벽도 같은 맥락에 속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근세 한국 민족종교의 도맥이 직·간접으로 연담과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청허선사는 김일부의 스승인 연담 이운규와 맥이 닿아 있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연담의 현맥(顯脈)이 김일부에게 갔고, 은맥(隱脈)은 선도 수련이라는 채널을 통해 청허에게로 이어졌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는 청허가 충남 연산과 가까운 거리인 아산 출신이고 정역파들이 활동했던 계룡산과도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
이후락 정보부장과 香谷선사의 운명적 만남
발설해 버려야 속이 시원해지는 화체(火體)의 기질. 화체의 성격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머리가 명석하고 투명한 성격이지만 세간생활에서는 본인에게 불이익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고스톱을 칠 때 ‘고돌이’ 원단이 표에 들어오면 곧바로 얼굴 표정에 그 설레임이 반영되는 체질이라고 보면 쉽다. 화체는 도박에서 좀처럼 돈을 따기 어려운 체질이기도 하다.
박도사의 그러한 기질은 음지에서 은밀하게 활동해야 하는 직업적 도사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되었지만, 무대 밖에서 관람하는 구경꾼들에게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유신(維新)을 유신(幽神, 저승의 귀신)이라고 규정한 것이고, 그 외에도 본 지면에서는 차마 공개할 수 없는 수많은 정치인이나 재벌 회장들과의 ‘스파크’가 있었다.
박도사가 권력과 관련되어 곤욕을 치른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소위 윤필용 사건이다. 1973년 4월 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윤필용 장군이 모반 기도 혐의로 보안사령부에 체포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31명의 군 수뇌부가 옷을 벗어야만 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유신 선포후 계엄령하 궁정동의 한 식당에서 윤필용 수경사령관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윤장군이 “각하가 노쇠하니 건강이 약해지기 전에 물러나시게 해서 우리가 모시고 후계자를 내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하였다. 그러자 이 부장이 “각하가 물러나면 다음에는 누가 되느냐?”고 묻자, 윤장군은 “형님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이 대화 내용이 박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되었고, 이는 모반 사건으로 간주되어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과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주도하에 수사가 시작되었다.
수사는 당시 부산에서 영업하고 있던 박도사에게까지 뻗쳤다. 평소 이후락 정보부장이 점쟁이들에게 무엇을 물어보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던 만큼, 이부장과 알고 지내는 박도사를 데려다 취조하면 어떤 정보가 나올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대권에 야심이 있다면 단골 점쟁이에게는 그 사실을 털어놓고 상의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했던 것이다. 자기 운명이 과연 대권을 잡을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보안사 수사팀은 이후락·윤필용과 평소 왕래가 있었던 부산의 박도사를 그 파트너 점쟁이로 찍었던 것 같다.
여기서 이후락의 이판사판(理判事判)에 관한 정보 수집 형태를 일별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후락씨를 한국의 장량으로 본다. 이렇게 말하면 필자를 비판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행했던 악업(惡業)과 선업(善業)의 차원을 떠나 한 개인이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데 관계되는 판단의 유형만 놓고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초한지’(楚漢誌)에서 보면 한신은 어물쩡거리다 타이밍을 놓쳐 유방에게 잡혀 죽었지만, 장량은 한건 챙긴 다음 미련없이 산으로 도망가 명철보신한 사례다.
이후락도 역시 10·26 이후 낌새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경기도 이천 도자기 공장으로 숨은 다음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그 명철보신의 판단 차원에서만 놓고 보면 그는 ‘초한지’에 등장하는 장량 만큼이나 노련한 판단을 보여주었다. 각종 정보채널에서 올라오는 정보 수집에서도 치밀하였지만 이판의 정보, 즉 본인이 이름난 고승이나 도인 그리고 술객들과의 접촉 과정에서도 필요한 정보라고 여겨지면 선입견 없이 수용하는 성향이었다.
그는 많은 술사들과 어울렸고, 숙명통(宿命通)이 열린 고승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인생의 진퇴를 수시로 상의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들을 무시하지 않을 만큼 그는 노련한 인물이었다는 이야기 다. 필자는 최근 몇년간 그가 재임시절 만나고 다녔던 고승이나 술객들의 면면을 추적해 본 결과 그 범위가 의외로 다양하였다는 사실에 놀란 바 있다. 부산 기장의 묘관음사(妙觀音寺)에 계시던 향곡(香谷·1912~78)스님까지 만나고 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 대목을 짚고 넘어가자. 향곡스님은 1960~70년대 한국 불교계를 풍미한 대선객(大禪客)이다. 그 우람하고 호탕한 풍모에 한방에 원숭이와 여우들을 날려버리는 선기(禪機)는 당대 제일이었다. 묘관음사에 가거들랑 향곡당의 영정을 한번 보시면 짐작이 갈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어느날 현직 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이 묘관음사의 향곡스님을 방문했다.
이부장도 불교에 조예가 있어 ‘벽암록’ 정도는 읽었으므로 선사(禪師)를 만날 때는 첫 물음을 선문답(禪問答)으로 시작해야 하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후락은 대뜸 “어찌 이 골짜기에는 향기가 나지 않습니까?”하고 한 초식을 날렸다. 향곡스님의 이름이 향기 향(香)자에 골 곡(谷)자니 이렇게 빗대서 물은 것이다. 그러자 곧 바로 향곡당의 대답이 날아왔다. 선문답은 0.5초 내에 나와야 한다. 3초 후에 나오면 이는 선문답이 아니다. 향곡당 왈 “니, 이름이 후락이라꼬? 니, 후라이 잘 치게 생겼다.”
현직 정보부장의 이름을 ‘후라이’에 빗대 패러디한 것이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네가 와서 나불대느냐? 까불지 말라는 일갈이기도 하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유신 시절의 현직 정보부장을 향해 “후라이 잘 치게 생겼다”고 한방 날린 향곡당의 칼날은 역시 천하 명검이었다. 졸지에 한칼 맞은 이부장은 그 자리에서 큰절을 세번 올렸다. “큰 법문 들었습니다”하면서…. 만약 저질 같았으면 이런 모욕을 당하고 “저 - 영감탱이 당장 잡아 넣어. 남산 지하실에 가서 뜨거운 맛좀 보아야 하겠구만!”이라고 했을 텐데, 공손하게 삼배를 올릴 정도의 교양과 견문은 간직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무튼 이후락은 사판의 정보 수집에도 열심이었지만 방외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이판에 관한 정보 수집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윤필용 사건에 연루돼 고초 겪은 박도사
1973년 3월 무렵. 부산 동대신동 박도사의 2층집에 기관원들이 들이닥쳤다. 대문 밖에는 검정색 승용차가 대기해 온 동네 사람들은 기관원들이 간첩 잡으러 출동한 줄 알았다고 한다. 영문을 모른 채 기관원들에게 체포된 박도사는 집 밖에서 곧바로 헬기로 옮겨져 경남 마산지구의 정보부대인 해양공사 지하실로 끌려갔다. 정보부대 책임자였던 K소령은 박도사를 지하실에 꿇어 앉혀 놓고 “야! 너 도사야? 도사라면 네가 언제 여기서 나갈 수 있는지 알아 맞혀 봐?”하고 조롱하듯 내뱉었다. 너, 이제 죽었다는 뜻이었다. 이 말 끝에 박도사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오후 2시가 되면 나간다”고 대답하였다.
K소령은 “이 새끼, 여기가 어딘지 알아? 어디서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려”하면서 구둣발로 박도사의 정갱이를 걷어찼다. 그런데 2시가 되자 갑자기 사령부에서 전화가 왔다. “그 친구 지금 즉시 서울로 이송하라”는 오더였다. 깜짝 놀란 K소령은 박도사를 서울로 이송하면서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호칭도 ‘이 놈’‘저 놈’에서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호송 헬기 안에서 “제 팔자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희 집 아들놈 사주도 한번 봐 주십시오?”하면서 정중하게 인생상담을 드려야만 하였다.
서울로 이송된 박도사는 다시 서빙고 지하실에 수감되었다. 보안사에서는 중앙정보부의 이후락 부장이 관련된 사건이라서 혹시 중앙정보부에 박도사를 뺏길까봐 취재원을 신속하게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서빙고에 구금된 박도사는 보안사 요원들의 취조를 받아야만 하였다. 취조의 내용은 ‘이후락과 윤필용이 너에게 와서 대권(大權)에 관한 점괘를 물어본 적이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시원한 대답이 안나오자 요원들은 박도사에게 고문을 가하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박도사를 데려온 K소령으로부터 박도사의 신통력을 전해들었던 까닭에 다른 사람같이 무작정 때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던 것 아닌가 싶다. 그 위기의 순간 박도사는 서빙고 지하실에 모여 있던 보안사 요원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너희들 지금 나를 때리려고 하는데, 나를 때리면 너희들 다 잡혀간다. 아마 사흘이면 잡혀갈 것이다.”
과연 사흘후 보안사 요원 17명이 뇌물수수 혐의로 모두 체포되었다. 박도사의 예언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추측컨대 중앙정보부쪽에서 보안사에 대한 역공이 시작되는 과정에서 보안사 요원들이 뇌물 혐의를 받았던 것 같다.
서빙고 지하실에 있던 박도사는 다시 강원도 모처의 군부대로 이송돼 9개월간 연금상태로 지내야 했다. 군부대에 연금해 놓은 이유는 보안사에서 정보부에 박도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조처이기도 하였다. 만약 박도사가 정보부의 이후락 부장에게 넘어가면 수사하던 보안사에 불리한 증언을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9개월간 연금생활을 할 때 옆에서 박도사를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 최모라는 사람이었는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박도사에게 여러 가지 친절을 베풀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후일 최모라는 사람이 사업을 시작할 때 박도사가 그 보증을 서 주게 되었다.
그러나 최씨의 사업이 부도나는 바람에 그 보증이 두고 두고 박도사를 괴롭혔다. 천하의 박도사도 실수를 한 것이다. 이 보증건으로 인하여 박도사는 죽을 때까지 채권자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박도사 본인 이름으로는 부동산 등기를 해 놓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였다. 보통사람이 그런 실수를 하면 동정의 대상이 되지만, 앞일을 안다는 도사가 그런 실수를 하면 천하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박도사는 말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세상 살면서 식자층 노릇하기도 힘들지만 도사 노릇하기도 힘든 것이다.
박도사의 일생을 보면 돈은 상당히 벌었지만 풍족하게 돈을 쓰는 인생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돈은 쓰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있다. 돈을 버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사실은 재물복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박도사의 사주를 보면 재물복이 없는 팔자다. 필자가 입수한 그의 생년월일시는 음력으로 1935년 11월22일 유(酉)시다. 육십갑자로 환산하면 을해(乙亥)년 무자(戊子)월 정묘(丁卯)일 기유(己酉)시로 환산된다. 태어난 날은 정묘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주팔자상에 나타난 그의 주체는 일간인 정(丁)이다. ‘정’은 불이로되 태양과 같은 큰 불이 아닌, 화롯불과 같은 작은 불이다. 이 불이 태어난 계절이 음력으로 11월, 양력 12월의 추운 계절이다. 추운 겨울에 태어난 화롯불이니만큼 귀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불이라고 일단 간주한다. 그러나 불이 약하다. 약한 불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인수가 되는 목(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박도사 팔자에서는 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목은 가족관계로 보면 어머니에 해당하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학문과 공부에 해당한다. 이럴 때 목을 용신이라고 말한다. 즉, 자신의 운명이 지닌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책 보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한다. 이런 형태의 사주팔자를 보통 전문용어로 ‘탐재괴인’(貪財壞印)의 사주라고 평한다. 탐재괴인이란 ‘재물을 탐하면 학문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사주의 역학관계에서 재물과 학문은 서로 반비례하는 관계에 놓여 있다. 재물이 많은 사주는 학문이 없고, 반대로 학문이 많은 사주는 재물이 없다. 학자가 지나치게 돈을 밝히면 공부를 못하게 된다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탐재괴인의 사주를 가진 사람이 재물을 쫓으면 몸을 상한다. 재물을 절대 쫓아서는 아니되며 어떤 상황에서든 책을 잡고 있어야 한다. 박도사의 사주가 그런 사주다. 박도사도 본인의 사주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재물복이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모든 재산을 부인 이름으로 해 놓았다. 그러나 막상 보증으로 인하여 본인 앞으로는 그렇게까지 재산을 전혀 가질 수 없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또 한가지 시달렸던 일은 고향인 서상면 옥산부락에 덕운정사를 짓게 된 일이다.
을해명당의 저수지 준설과 박도사의 중풍
덕운정사는 보통 가정집이 아니라 규모가 큰 목조건축이다. 단순한 살림살이 용도의 집이 아닌 수양을 하는 도관 겸 제자들을 가리키는 아카데미 용도로 지은 건축이다. 상당히 돈이 들어간 건축이다. 더구나 항간에 ‘50세 넘어서는 집을 짓지 말라’는 말이 있다. 집 짓는 일이 그만큼 사람의 진을 빼는 중노동이므로 50세 넘어 집을 짓다 잘못하면 건강을 다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박도사가 상당한 건축비가 들어가는 덕운정사를 50세 넘어 시작한 것은 무리한 판단이었다. 탐재괴인의 팔자를 가진 사람이 많은 건축비가 들어가는 건물을 시작하였고, 더구나 보증 때문에 채권자들로부터 독촉을 받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50대 중반에 시작한 집 공사였다. 이 3가지는 모두 무리수였다고 보인다. 이 무리수로 인하여 박도사는 명을 재촉했다.
그것이 못내 아쉽다. 좀더 살아서 사주명리학에 관한 저술도 남기고 제자들도 양성하였으면 좋으련만, 그 일을 못하고 중도에 갔다. 이것도 결국 운명이겠지만 사주명리학에 애정이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없이 애석하기만 하다. 박도사 같은 인물은 1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박도사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시점은 1995년 을해년이었다. 그해에 경주 박혁거세 오릉에 가서 절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게 울려왔다. 그때부터 중풍이 시작됐다. 흥미로운 점은 하필 그해에 박도사가 정기를 받고 태어난 극락산 밑 을해명당의 저수지를 포크레인으로 건드렸다는 사실이다.
동네 사람이 저수지를 준설하기 위해 저수지 바닥에 있는 돌들을 포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을자(乙字)의 목 부분에 잔뜩 쌓아 놓았다. 목이 눌린 상태였다. 대조해 보니 공교롭게도 저수지를 준설하던 그 시점에 중풍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까닭이 있는 것인가. 신비주의를 숭상하는 술사들은 이를 동기감응(同氣感應)으로 해석한다. 박도사 본인을 비롯하여 가족들은 그 저수지 준설공사와 중풍이 관련있다고 믿는다.
그 사람이 정기를 받고 태어난 지점을 인위적으로 훼손하면 그 해당인물 또한 훼손당한다는 것이 풍수의 동기감응 사상이다. 지령이 곧 인걸인데, 지령을 훼손했으니 어떻게 사람이 무사하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동양의 풍수신앙이기도 하다. 박도사의 사망은 집을 짓는 무리수라고 하는 인간적인 실수와, 을해명당의 훼손이라고 하는 동기감응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사건의 배후를 캐 보면 대개 이처럼 복합적인 원인이 얽혀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박도사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서 생각나는 서양의 점괘(占卦)가 하나 있다. 국제화시대이니만큼 운명을 판단할 때도 국산품인 사주팔자만 애용할 것이 아니라 서양의 외제품도 이용해 주어야 한다. 박도사의 사주팔자에 대해 서양의 점괘로 크로스체크해 보면 그 점사(占辭)는 바로 ‘너 자신을 알라!’가 나온다.
이 말은 원래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고 희랍의 유명한 델포이 신전 벽에 새겨 있는 금언이라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 가운데서도 최고의 신탁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말은 원래 점괘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점을 많이 보았다.
그리스 신화 자체가 수많은 점사와 혼합되어 있지 않던가. 왜냐하면 전쟁을 할 때는 민족 전체가 죽고 사는 전율할 만한 일이므로 신들에게 그 결과를 겸허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보다 품격이 약간 떨어지지만 서양 역사책의 원조로서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씌어진 헤로도토스의 ‘역사’(歷史)가 유명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첫 대목을 보면 델포이 신탁 이야기가 등장한다. 기게스라는 왕의 측근이 왕위를 찬탈하고 왕비와 결혼하였을 때 과연 그 일이 정당한가를 두고 델포이 신전에 가서 점을 쳐 보았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상 최고의 점괘는 바로 ‘너 자신을 알라!’
서양 역사책의 원조인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가장 첫 대목에 신탁 이야기가 나오고 델포이 신전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필자는 일찍부터 주목한 바 있다. 하고많은 신전 가운데 왜 하필 델포이 신전인가. 다른 책을 읽다 보니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가장 영험하고 적중률이 높았다는 대목을 본 적이 있다. 델포이는 점발(占發)이 잘 받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필자는 아직 델포이를 현장답사해 보지 못해 뭐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추측컨대 바위와 암벽으로 이루어진 지형이고 약간 언덕처럼 주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동양의 점발 잘 받는 곳들이 대개 바위로 이루어진 지형이고 높은 곳이라는 점에 비추어볼 때 그렇다.
특히 단단한 바위가 신전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거나 뒤쪽에 벽이 있을 공산이 높다. 단단한 바위지대일수록 지기(地氣)가 강하게 올라오는 곳이고, 지기의 강도에 비례해 영발(靈發)이 강하고, 영발이 강할수록 점발이 잘 받는다는 원리를 필자는 15년의 방랑 끝에 발견하였다. 델포이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 기도발 잘 받는 델포이 신전의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역대 신들로부터 내려온 점사, 즉 신탁 가운데 최고의 신탁이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객관으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통찰이다.
점의 궁극적 관심은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에 있다. 자기를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신탁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많은 술객, 도사들이 빠지는 함정이 이 통찰의 부족이다. 다른 사람 점은 잘 보아주는데 정작 자신의 점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뻔한 함정에 빠지고는 한다. 이 약점을 방지하기 위해 술사들은 크로스체크를 하기도 한다. 서로 상대방의 팔자를 보아주는 방법이다. 인간은 상대방의 눈에 든 티끌은 밝게 보지만 자신의 대들보 같은 허물은 못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고난도의 고행을 겪어야만 얻어지는 경지이지 함부로 얻을 수 있는 급수가 아니다. 박도사가 말년에 빠졌던 함정도 바로 자신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천하의 박도사도 자기를 아는 데는 실패했다. 자기를 안다고 장담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계율과 스승이 필요하다. 스스로 계율에 의지해 자신을 체크해 보고, 스승으로부터 끊임없는 경책을 받아야만 스스로 반성할 수 있다. 박도사의 일생을 보면서 왠지 델포이 신전의 기둥이 자꾸 생각난다. ‘너 자신을 알라’를 음미하면서 불교의 ‘나는 없다’는 무아(無我)의 법문을 연상하는 것은 현학적인 취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