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도 모르는 길로 빠져드는 마력이 있는 듯 합니다.
년 초에 나눠준 한국산악회에서 발간한 "한국산악 제26권 2006년" 판을 보다가 해외 원정기편에서 "집념의 마나슬루"라는 책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래서 배종화명예회장님께 혹여 책을 보유 하고 계시는 지 물었으나 워낙 오래된 책이고 해서 찾아 볼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지요.
인터넷을 하다가 찾아본 자료. 참으로 한편의 가족사같은 이야기가 뭉클하게 펼쳐 집니다.
아래 글은 다른 분의 글을 퍼왔습니다.
마나슬루 원정기록(1차 ~ 3차)
-참조 : 별밤지기님의 블로그
대원 추락사로 끝난 1차 마나슬루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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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사 마나슬루원정대
구미 산악인들이 8천미터급 자이언트봉의 초등정을 앞세워 히말라야로 진출한 것과 같이 한국산악계도 1971년부터는 8천미터급 산 등정을 목표로 원정대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국내의 히말라야 원정은 62년 다울라기리 정찰과 그로부터 8년 뒤인 70년에 추렌히말 원정이 있었을 뿐 아직 개척 초기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세 차례의 원정경험을 가지고 있는 김정섭은 74년을 에베레스트 등정의 해로 잡고 그에 앞서 8천미터급 등반경험을 쌓기 위해 마나슬루 원정을 추진한다.
마나슬루원정대는 김호섭대장과 김인식, 한이석(26•연세대), 최창돈(25•전남대), 김기섭(24), 김정심(여•30•대구 청산회) 등 6명의 대원에 서울신문사에서 파견한 이종기기자가 추가되었고, 김정섭은 사무장으로 원정대를 지원하기로 했다.
71년 1월 26일 선발대 출국에 이어 2월 26일 본대가, 그리고 3월 1일 김정섭이 속속 네팔에 도착했다. 3월 20일에는 나머지 대원들이 50여 명의 포터와 함께 카트만두를 떠나 3월 31일 해발 4,300미터의 베이스캠프에 합류했다. 이때는 이미 선발대에 의해 1캠프(5,000m)가 설치된 뒤였다.
전력이 보강된 원정대는 4월 7일에는 2캠프(5,940m)를, 그리고 4월 10일에는 3캠프(6,700m)를 설치했고 이어서 4월 15일에는 7,100미터 지점까지 진출, 설벽을 깎아 4캠프를 세웠다. 이곳에서 날씨가 악화되자 더이상 전진하기가 어려웠다.
4월 20일에는 잠시 날씨가 호전된 틈을 타서 김기섭대원이 셀파와 함께 1차 정상공격을 감행했지만 7,800미터 지점에서 기상악화로 후퇴했다. 그리고 2차 정상공격을 위해 김기섭, 김인식, 김정심대원이 베이스캠프를 떠났지만 5월 1일 눈사태로 제4캠프에서 다시 후퇴하고 말았다.
김호섭대장은 마지막 기회로 자신과 동생 김기섭대원을 정상 공격조로 정하고 5월 3일 4캠프로 올라갔다. 두 대원은 산소를 사용해 하룻밤을 지낸 후 다음날 7,600미터 지점까지 올라가 5캠프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다.
대원들이 텐트를 설치하고 잠시 머무르는 사이 갑자기 일기가 급변하여 돌풍이 몰아쳤다. 이 순간 김기섭대원이 돌풍에 휘말려 40미터 아래의 크레버스에 추락, 사망하고 말았다.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상 최초의 조난으로 기록된 이 사고로 인해 정상등정은 좌절되고 4개월에 걸친 마나슬루 원정은 마감되었다.
히말라야 등반사상 두 번째 대조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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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제2차 마나슬루원정대
마나슬루에서 동생 김기섭을 잃은 정섭, 호섭 형제는 71년 5월 귀국 즉시 2차 원정대를 결성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총대장은 김정섭(39)이 맡기로 하고 등반대장에 동생 김호섭(29), 고 김기섭대원의 유해 운구를 맡을 구조대장에 서충길(35•동국산악회, 김대장의 매부),
그리고 등반대원에 최석모(36•국회산악회), 구신회(32•고령산악회), 송준행(32•부산청봉산악회), 연응모(31•반도산악회), 오세근(28•조선대), 김예섭(22•경기대, 김대장의 막내동생) 등과
기록영화 촬영을 위한 카메라맨에 박창희(41)와 일본인 야스히사 가스나리(70년 일본 에베레스트원정대 참가)를 포함시켰다. 뒤에 후원처인 조선일보사에서 파견된 윤병해기자가 추가되어 총 대원은 12명으로 늘어났다. .
▲ 72년 4월, 사마촌에 내려온 `비운의 두 형제`. 4형제중 김기섭을 71년 마나슬루 원정에서 잃고 또다시 김호섭을 눈속에 묻고 돌아온 예섭, 정섭(오른쪽) 형제.
2차 마나슬루원정대가 셀파 22명과 쿡 4명, 그리고 메일런너 3명과 포터 305명을 거느리고 마나슬루 빙하 말단부 4,3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한것은 72년 3월 11일. 전년도보다 20여 일 빠른 도착이었다.
3월 14일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그날로 5,200미터까지 올라가 1캠프를 설치하고 일주일 뒤인 3월 22일에는 2캠프(6,000m)를, 그리고 27일에는 김호섭대원이 2명의 셀파를 데리고 3캠프(6,500m)를 설치했다. 여기서부터 계속되는 폭설과 싸우면서 고전하다가 4월 7일에는 4캠프(7,250m)까지 전진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정상까지의 고도는 불과 900여 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4월 8일 3캠프에서는 작전회의를 열어 정상공격일을 5캠프를 설치한 직후인 4월 13일에서 15일 사이로 정하고 3개 조의 정상공격 대원을 결정했다. 이곳에는 셀파들도 12명이나 집결되어 있어서 날씨만 좋다면 3일내로 정상공격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런데 4월 9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폭설로 변해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설량은 더욱 많아져 1미터가 넘는 눈이 모든 캠프에 쌓였다. 이것은 불행한 사태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날 밤 거대한 눈사태가 3캠프를 덮쳤다. 정확히 4월 10일 새벽 3시, 폭설의 무게를 견디다 못한 눈더미가 6명의 대원과 12명의 셀파가 자고 있는 6동의 텐트를 쓸어가버린 것이다. 그곳에 있던 12명의 인원 중 텐트 밖에서 제설작업을 하고 있던 2명의 셀파만이 100여 미터를 눈사태에 쓸려내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밤새 깊은 눈을 헤치며 2캠프로 탈출해 다음날 조난상황을 알렸다.
망연자실한 김정섭대장은 2캠프에도 눈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그곳에 있던 대원과 셀파들에게 1캠프로 철수토록 지시했다. 그런데 3캠프의 대원 중에 생존자가 있었다. 1캠프로 하산하던 대원들이 5,400미터 지점에서 부상당한 채 움직이고 있던 김예섭대원을 발견한 것이다.
김대원은 즉시 대원들에 의해 구조되어 베이스캠프로 후송되었다.
2차 마나슬루원정대를 덮친 눈사태는 5명의 대원(일본인 1명 포함)과 10명의 셀파 등 도합 15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이것은 1937년 독일의 낭가파르밧원정대가 제4캠프에서 눈사태로 당한 16명의 조난사고(대원 7명,셀파 9명) 이후 히말라야 등반사상 두 번째로 큰 조난 참사였다.
특히 김정섭대장은 70년 1차 마나슬루원정에서 김기섭대원을 잃고 또다시 김호섭대원을 잃어 두 동생을 히말라야에 묻어야만 하는 비운을 맞았다.
무기력하게 끝난 3차 마나슬루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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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한국마나슬루회 제3차 마나슬루원정대
한국산악인들이 노리고 있던 3좌의 자이언트봉 중에서 76년 가장 먼저 원정대를 맞이한 것은 마나슬루봉이었다. 전년도에서 1년이 연기되어 성사된 3차 마나슬루 원정은 강신호단장(49)의 후원으로 김정섭총대장(41), 최석모부대장(38•국회산악회), 김경배지원대장(30•피톤클럽), 서충길등반대장(37), 김예섭(25), 이영진(28•동국산악회), 김종욱(26•에코클럽), 정병택(26•타이탄산악회), 박재천(24.서울공대), 최정철(25), 홍건식(26), 김도섭(25), 김운영대원(43•한국일보) 등 13명으로 구성된 대부대였다.
▲ 사마 마을에 도착한 제3차 마나슬루 원정대.
이들은 기상악화와 대원들간의 불화로 7,8000미터 지점에서 돌아섰다.
그러나 3차 마나슬루 원정은 기상악화와 팀웍 부재로 인해 정상공격도 하기 전에 7,700미터 지점을 최고 도달점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이로써 한국 히말라야 원정의 개척기를 주도했던 김정섭 형제의 세 차례에 걸친 집념의 마나슬루 도전은 16명의 생명을 잃고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감되었다. 이 마나슬루야말로 한국산악인에게는 집념의 산이자 비운의 산으로 남은 채 한국산악계에 숙제로 던져졌다.
도전의 동기
김 정섭
-<집념의 마나슬루> 中
당초 나는 오늘과 같은 탐험가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사람은 안일하고 부유하고 그리고 오래 살고 싶어한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히말라야에 도전하게 되었단 말인가? 나 역시 남과 같이 편안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한때는 발전된 선진국에서 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받으며 살려 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여러번 천대를 받았었다. 심지어 외국인인 체 하는 한국인에게도 무시를 당했었다.
이유는 한국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이런 모욕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약소국이 되었을까?
이 의문을 풀고 싶었다.
그러나 이 의문은 좀체로 풀리지 않았다.
하루는 알프스를 등반하고 있었다.
각국의 남녀 노소가 등반 혹은 관광을 위해 많이 모여드는 스위스의 셀마트라는 곳에서의 일이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등산을 하는 어머니와 눈보라 속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등산을 하는 스웨덴의 중학교 교사를 만났었다.
"왜 옷을 춥게 입혀 가지고 등산을 시키느냐구요? 보시다시피 이 애들은 남자들입니다.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이렇게 단련을 시켜야 커서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따라서 잘 살게 마련이죠." 그 스위스 어머니의 대답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눈보라 속에서 왜 위험하게 등산을 시키느냐구요? 자연이 난관을 올바르게 뚫고 나갈 수 있는 개척정신을 키워주기 위해 이와같이 등반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웨덴 교사의 대답에도 역시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숙소에 돌아와서 이 두 가지를 놓고 곰곰히 생각 해 보았다. 바로 이런 데서부터 우리와 그들과의 차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어릴적을 회상해 보았다. 나의 어머니는 날이 조금만 추우면 옷을 하나 더 입혀 주셨고 더 추우면 아예 밖에 나가지 못하게 방안에서 키웠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내 친구의 어머니는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전부 우리를 어릴 때부터 이렇게 감싸서 키웠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그 스위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추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 주었던 것이다. 또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산에 가는 것을 우리 선생님은 말렸다.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스웨덴의 교사는 학생들에게 위험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개척정신을 길러 주었던 것이다.
어떤 쪽이 커서 강해지겠는가는 뻔한 일이었다.
이와같이 한국에서 못보던 것을 여러번 볼 수 있었다.
한번은 뉴델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찌나 더운지 에어컨에다가 선풍기까지 틀어놓고 방에만 있어야만 했었다.
밖에서는 머리가 아파 30분 이상을 견딜 수가 없었다.
섭씨 48도의 폭서. 이렇게 더울 대는 물이 뜨거워 장구벌레도 타죽어 모기도 없다고 한다.
이런 더위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뉴델리는 허허 벌판에 세운 새로운 도시로 특히 가로수가 볼만했다.
게으르게만 보이는 인도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도시를 세웠을까?
인도 친구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이 이곳은 영국사람이 아프리카에서 가로수까지 실어다가 세운 도시라는 것이다.
"뭐? 영국사람들이?"
나는 여기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뉴델리뿐 아니라 봄베이, 캘거타 등 인도의 여러 곳을 보았는데 국토건설이 우리보다 훨씬 잘 되어 있었다.
나는 이미 히말라야, 알프스, 일본, 대만 등 험한 산들을 다녀 본 터이라
나 자신 한국 제일가는 탐험가라고 자부 할 때였다.
그러한 내가 에어컨 선풍기 냉장고 자동차 항공기 등 현대 기계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받고도 단 30분을 견디기 어려울 지경인데 무서운 더위를 무릅쓰고 기계문이란 아무 것도 없던 인도에 그것도 500여년 전에, 영국인들이 들어와 전부 개척하고 건설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개척 정신에 그만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졌던 것이다.
영국에도 몇번 가 봤는데 그들의 오늘이 바로 이런 데서 이루어졌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나는 영국인에 대한 인상이 침략자요 착취자로 좋지가 았았었으나 그때부터 그들의 개척정신을 존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인류 발전사에 대해 여러가지 연구와 검토를 해 본 결과 나의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류가 오늘과 같은 고도의 문명사회를 이룩한 것은 오로지 보다 나은 미래 세계를 건설하려는 끊임없는 인간의 집념과 창조 의욕이었지 저저로 앉은 자리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위 오늘의 선진국이 있을 수 있는 이면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탐험과 개척정신이 뒤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일찌기 아프리카, 히말라야, 혹은 극지를 탐험하고 서부를 개척했으며 바다의 항로를 열었다.
여기에는 고귀한 희생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바탕위에서 오늘과 같은 부강국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부의 개척사가 없었던들 오늘의 미국이 있을 수 없듯이. 이와같이 남들이 미지의 세계로 진출할 때 우리 선조들은 무엇을 했던가? 물론 우리도 찬란한 역사와 슬기로운 조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미지의 바깥세계를 향한 꿈과 도전은 용납되지 않았으며, 그저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만 나고 죽어갔을 뿐이다.
자연을 즐길 줄은 알았으나 그것을 개척하는 데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즉 희생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희생이 없는 안일한 전진은 역사가 용납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사실을 나 자신이 특히 해외에서 뼈저리게 체험했던 것이다.
그들이 그와 같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할 때 우리도 그 대열에 끼었던들 오늘날 이처럼 약소민족으로서의 비애는 느끼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고 적어도 식민지시대를 겪어야 했던 치욕의 역사는 갖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히말라야의 정상을 향해 돈과 시간과 젊음의 값진 생명까지 바쳐가며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정상에 무엇이 있길래 그리 하는가'고 묻는다면 대답은 허망하게도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오직 그 무서운 자연의 횡포 밖에. 그러나 우리는 그저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탐험이며 모험이기에 한사코 오르려는 의지요 집념인 것이다.
'탐험과 모험' 이는 인류의 역사를 전진시켜 준 원동력이지 결코 헛된 희생과 헛된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이제는 과거의 고식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로부터 어떻게 해서든지 탈피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한 때 부강한 선진사회에서 영주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된 나로서는 내가 할 일은 자라나는 우리 후대에게 패기를 키워주고 미래에 대한 꿈과 야망을 심어주고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을 열어 주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즉, 내 세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부족했던 씩씩한 개척정신을 그들에게나마 키워주고 싶었기에 내 인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하나의 가치관과 나 자신의 철학을 갖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토록 편한 처지에서 짐을 사들고 귀국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오늘날 혈육을 묻어 가면서 다섯번씩이나 히말라야에 도전하게 되었던 동기가 된다.
실은 히말라에에만 그칠 생각은 아니었다.
마나슬루 다음에는 아프리카 횡단탐험, 남미의 안데스와 잉카왕국 유적탐험, 알라스카, 실크로드, 그린랜드 등 미지의 세계를 전부 탐하고 마나슬루 기록 영화처럼 전부 기록영화를 촬영하여 온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히말라야와 미지의 세계에의 도전에 전력을 투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치든지 그것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것이다.
나로서는 안방 바닥에서 나고 죽는 그런 소시민생활에만 파묻혀 버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가치 있게 살다가 가치 있게 가는 길. 이는 죽음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길인 것이다.
나는 기필코 마나슬루정상에 태극기를 날리고 말겠다.
이것은 절대로 가능하며 기필코 성공하지 않을 수 없다.
대문에 나는 좌절하지 않으며 또 좌절 할 수도 없다.
지금도 마나슬루 빙국에 묻혀 우릴 기다리고 있는 동지들과 폭설에 묻히고 돌풍에 찢긴 처참한 텐트를 잠시도 잊을 수 없다.
설욕의 날을 고대하기 다섯해. 이제 우리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금년 6월에 다시 3차로 이 숙명의 마나슬루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