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철학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규정할 때에는 그것의 본질 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 가장 적절하고 옳은 방법일 것이다.
이러할 때에 우리가 묻는 것은 이른바 'what is question'이다. 즉 '~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질문을 그렇게 나눌 수는 없겠지만 질문은 'what is question'과 'how to question'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대상의 본질을 묻는 것이고, 후자는 기능 또는 작동 방식을 묻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대학 생활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있다고 해보자.
대학 신입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음직한 질문일게다. 이 질문은 아주 명시적으로 '어떻게 하면'을 포함하고 있다. 전형적인 'how to question' 인 것이다.
철학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다. 철학적 이해는 이런 이해가 아닌 것이다.
철학은 'what is question'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있다.
아니 끊임없이 그것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위의 신입생의 질문에 대해 철학은 답을 할 수 없지만
'대학은 무엇인가',
'알차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는 것이다.
철학의 여명기부터 철학자들이 시도했던 대답이 바로 이것이었다.
2.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고대의 자연철학자들은 우주와 자연은 무엇인가를 물었으며, 소크라테스 가 관심사를 인간과 사회로 돌리기는 했으나 물음의 방식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는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러한 물음을 통하여 사물과 사태의 본질에 이르려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다.
그런데 본질은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을만큼 단순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이 이르려면 여러 차원의 탐구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철학적 이해', 즉 '현대사회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답을 내려면 여러 종류의 탐구방법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의 탐구에 여러 학문분과가 사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철학적 이해'는 사회학적 이해, 정치학적 이해, 경제학적 이해, 문화적 이해 등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며, 철학공부하는 이가 다학제적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철학적 이해라는 방법으로 다루고자 하는 대상은, 앞서 말했듯이 '현대'라는 시간과 '사회'라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이렇게 된다:
'현대사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현대사회라는 대상과 가령, 소립자라는 대상은 어떻게 다를까?
즉 '현대사회는 무엇인가'와 '소립자는 무엇인가'는 어떻게 다른가. 앞의 것은 사회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지만 뒤의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소립자는 무엇인가'는 소립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 소립자 발견의 역사는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사의 영역이 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발생과 전개 과정 전체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사회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의 역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현대사회의 역사는 보는 법
현대사회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어떤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현대사회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자본주의를 출발점 으로 한다.
앞서 말했듯이 철학적 이해에 이르는 방편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탐구, 즉 현대사회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이해를 먼저 진행한다는 것이다.
특히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적 변모'를 출발점으로 하여 공간과 시간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 뒤, 현대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적 이해의 전 과정이다
(* 이는 데이비드 하비의 저작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의 탐구방식이기도 하다).
현대사회를 자본주의로 파악하는 것은 관행상으로는 사회이론적 답이다.
그러나 철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둘 사이의 차이는 없다. 사회이론은 일종의 사회존재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사회학, 철학의 구분에서 굳이 어느쪽을 선호해야 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분과경계를 함축하는 사회학, 철학이라는 말 대신에 루카치의 '총체적' 관점을 채택하는게 옳다.
[물론 이러한 총체적 관점은 결코 우리가 총체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도그마를 가리키는게 아니라 그러한 지향성 을 가리킬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총체적인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철학이나 사회과학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고 대신 본질적 이해라는 말을 사용하는게 옳지 않을까?
4.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축을 중심으로 현대사회를 이해하기로 했다.
이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개념을 규정하는 일, 즉 자본주의는 무엇인가라는 what is question에 대답하는 일이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자본주의는 특정한 시공간에 고정된 물리적인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생겨나서 지금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변해온 사회적 형성물이다.
따라서 그것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는 그것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이 필수적이다.
즉 자본주의의 역사를 아는 것이 자본주의의 개념을 알아내는 방법이라는 역사적 접근법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탐구 조건을 전제로 하여 우리는 리오 휴버먼 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책벌레)가 적절한 참고서라 생각하고, 그 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보기로 하자.
이 책은 '저자의 말'에 쓰여 있듯이, "경제 이론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과 역사로 경제 이론을 설명하는 것", 즉 역사와 경제 이론을 결합하는 것 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자본'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돈은 이윤을 남기며 되팔기 위해 상품이나 노동을 사는 데 사용할 때에만 자본이 된다."(p. 197)
어떤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배고플 때 음식을 사먹는건 자본을 투자한 것이 아니다.
기업에서 신규 사업에 돈을 쓰는 건 자본을 투자한 것이다.
회사에서 직원들을 교육하면서 돈을 쓰는건 그들의 노동력의 질을 높여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려는 목적이 있으므로 자본을 투자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영자는 이것을 투자라 생각하지 않고 비용낭비라 여길 수도 있다. 같은 돈이라해도 관점에 따라 그것을 부르는 명칭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윤을 남길 목적으로 쓰일 때에만 자본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자본이냐 아니냐는 그것이 돈이라는 사실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는 목적에 달려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 돈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돈(화폐)은 아주 구체적인 듯하지만, 사실은 추상적인 것이고, 그것이 어떤 관계에 놓이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것으로 변하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돈만이 자본이 될 수 있는건 아니다. 이윤을 낼 목적으로 투여되는 것은 모두 자본의 자격을 갖는다.
"화폐가 자본의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주의하자.
오늘날 산업 자본가는 현금을 거의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런데도 거액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다.
그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생산 수단, 즉 그의 자본은 그가 노동력을 구매함에 따라 증대한다."
(pp. 198-199)
오로지 돈만 가지고 있다면 이윤을 만들어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른바 '돈놓고 돈먹기'를 하면 될 것이며, 이런 식으로 이윤을 만들어 내는 일이 오늘날 아주 성행하고 있기는 하다
(* 이를 가리켜 카지노 자본주의 라 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가 이윤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따라서 고정된 형태의 자본주의가 있다는 것은 착각이며, 그 변용태를 면밀히 살펴 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본가는 돈, 생산 수단(건물, 기계류, 원자재 등)을 갖추고 그것을 이용해서 상품을 만들어 낼 노동력을 산다.
그러므로 돈과 생산 수단, 그리고 노동력을 우리는 넓은 의미의 자본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화폐는 그것 자체로는 추상적이다.
그것이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자본이 된다. 건물이나 기계류, 원자재 그리고 노동력도 마찬가지이다.
그 모든 것들이 이윤 창출 을 목적으로 결합될 때에만 자본으로 불릴 수 있다.
이는 오래 전에도 화폐가 있었고, 건물이 있었고, 기계류나 원자재가 있었으며, 인간의 노동력이 있었는데도 그 시대를 자본주의 시대라 부르지 않는 이유가 된다.
그것들이 갖추어져 있다해서 우리는 그 시대를 자본주의 시대라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그것이 사용될 때에만 자본주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는 이러한 자본주의, 즉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체제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5. 자본주의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것의 본질적 속성(실체적 규정)이 '이윤'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는 무엇인가 등을 생각할 때에도 당연히 이윤을 중심에 두어야 하며, 그렇게 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대답은 '본격적으로 또는 체계적으로 이윤 추구가 시작되었을 때'와 '구체적인 적용 방식과 공간은 달라도 최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는 것'이다.
이윤 !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의 시작에 관한 논의를 위해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의 한 문단을 인용한다:
"근대 산업이 일단 시작되자 산업은 아주 급속하게 이윤을 창출하고 자본을 축적했다. 그러나 맨 처음에 자본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근대 산업이 시작되기 이전에 말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잘 알다시피 축적된 자본이 없었다면 산업 자본주의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계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하는 자유로운 무산 노동 계급이 없었어도 산업 자본주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은 어떻게 마련됐을까?"(p. 199)
이 문단은 산업 자본주의에 있어서의 핵심적인 두 가지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
자본의 원초적 축적 과 자유로운 무산 노동 계급.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만들어지고 생겨난 시점을 산업 자본주의가 시작된 시기라 보면 될 것이다.
우선 첫번째 물음, 즉 자본의 원초적 축적이 언제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자본주의 시대가 개막하기 전에 자본은 주로 상업을 통해 축적됐다. 이 때의 상업은 상품의 교환 뿐만 아니라, 정복. 해적질. 약탈. 수탈까지도 가리키는 신축성있는 용어다."
이 때는 이른바 상업 자본주의 시대였으며, 13-14 세기의 자본축적의 주역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축적으로는 "진정한 자본주의 생산 시대" -- 리오 휴버먼은 산업 자본주의부터를 진정한 자본주의라 보고 있다 -- 가 열리기 어려웠다.
그것은 16세기에 들어서야 가능했다.
휴버먼은 마르크스의 <<자본>>을 인용한다:
"아메리카에서의 금과 은의 발견, 원주민 말살과 노예화와 광산에 매장, 동인도에 대한 정복과 약탈의 시작, 아프리카를 상업적인 흑인 사냥터로 만든 것은 자본주의 생산 시대의 장밋빛 여명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런 목가적인 소행들이 시초 축적의 주된 동력이었다."
(p. 200;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EW], Bd. 23, S. 779)
여기서 우리는 자본의 원초적 축적이 전 세계적 차원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세계화' 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화두가 아니며, 자본주의는 시초부터 '글로벌' 했던 것이다. 위의 인용에 바로 이어지는 마르크스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뒤이어 온 지구를 무대로 한 유럽 국가들의 상업전쟁이 시작되었다."
(MEW. Bd. 23, S. 779)
우리는 이러한 과정의 구체적 사례를 알고 있다.
스페인은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해서 아스텍과 잉카 문명을 멸망시키고 잔인한 착취를 일삼았다. 뒤를 이은 네덜란드도 "17세기에 최강의 자본주의 나라가 되는 데 필요한 돈을 그런 식으로 축적했다."(p. 201)
이러한 축적 활동의 와중에 조선 에 표류해온 사람이 하멜 (1630-1692)이다.
네덜란드 에 이어서는 영국 이 최강의 자본주의 나라로 올라섰다. 영국이 사용한 자본 축적 방법 역시 선행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아주 적절한 것이라 하겠다:
"만약 화폐가 뺨에 자연의 피를 묻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
(MEW. Bd. 23, S. 788)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일단 자본의 원초적 축적이 완성되어 가는 시점을 산업 자본주의가 시작된 계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두번째 요소, 즉 자유로운 무산 노동 계급의 탄생 에 대해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6, 자유로운 무산 노동계급의 형성
초기의 산업 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 이 두가지를 축으로 성립하였다. 이때 자본에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본, 원자재, 공장 설비 등이 포함될 것이며,
우리는 자본과 노동을 묶어서 '자원(resource)' 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resource', 흥미를 끄는 말이다. 자본과 원자재, 공장 설비를 자원이라 부르기를 우리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을 제공하는 살아있는 인간을 자원이라 부르는건 어딘지 이상하다.
그런데 그것은 느낌일 뿐, 우리는 이미 인간을 자원으로 취급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요즘은 기업마다 HRMS(Human Resource Management System) 를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ERP에 통합된다.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는 기업활동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인간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기업용 통합 정보 시스템으로 회계관리, 재무관리, 인사, 구매, 생산, 물류 등 기업의 경영활동에 관련되 모든 업무와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통합관리한다.
만약 어떤 집에서 가족 구성원을 관리하기 위해 HRMS를 구축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더이상 가족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기업은 사원을 가족이라 부르면서 HRMS를 운영한다.
Human Resource 라는 말이 껄끄러운 점은 여기서 감지된다.
리는 산업 자본주의의 성립과정에서 자유로운 무산 노동계급이 형성되는 과정을 인간(Human)이 객관적 대상인 자원(Resource)으로 전환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떤 이는 현대의 자본주의가 노동없는 자본주의 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 지적은 이제 누구나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장미빛 전망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요 기만이다. 노동없는 자본은 노동자가 불필요하다는 뜻이고, 노동자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자본을 갖지 않은 노동자'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애초에 노동자는 자본이 없었으므로 노동자였다. 이제 그가 필요치 않다는 것은 그를 폐기한다는 말이다.
고용되어 노동을 팔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노동을 넘어선 인간'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각설하고, 자유로운 무산 노동계급은 적절한 노동력 공급을 요구하던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휴버먼은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 16세기의 엔클로저[울타리치기]와 엄청나게 비싼 지대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토지에서 쫓겨나 길거리에 나앉으면서 거지, 부랑자, 도둑으로 전락한 것을 보았다.
자유로운 노동계급은 일찍이 그렇게 창출됐다.
18세기와 19세기 초반에 다시 엔클로저가 일어났다. 이 때의 엔클로저는 규모가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임금을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토지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16세기의 엔클로저는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뿐 아니라 굶주림을 강요당한 대중의 폭력을 두려워한 정부에게도 상당한 저항을 받은 반면, 18세기의 엔클로저는 합법으로 인정됐다.
지주를 위해 지주의 정부가 만든 '엔클로저 법'은 그 시대의 질서였다. 토지를 가진 노동자는 이제 토지 없는 노동자가 돼 임금 노동자로서 공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됐다."
(pp. 206-207)
16세기의 울타리치기는 대규모 토지 소유자들이 그 땅에 양을 기르면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타산을 세우고, 그렇게 하기 위해 농민들을 토지에서 몰아내면서 시작되었다.
엔클로저의 원인은 이윤 추구 였으며, 그 결과는 소농의 소멸로 가는 길을 열어젖힌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여전히 상당한 저항이 있었다.
아직까지 그것이 시대의 대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의 울타리치기는 달랐다. 엔클로저 법(1760-1830)이 만들어져 그것을 확고하게 뒷받침했다.
엔클로저는 단순히 땅에만 울타리를 친 게 아니라 지주/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에도 법으로써 울타리를 친 것이다. 지주를 위한 지주의 정부와 그 정부가 만든 법이라는, 정치경제 유착은 여기에 그 기원을 둔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노동자들은 자유로웠다.
그들은,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이중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웠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로운 노동자가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스스로의 노동력을 스스로의 상품으로서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판매할 다른 상품을 갖고 있지 않고 자기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 물적 조건에서 떨어져 자유롭다는 이중의 의미에서이다."
(<<자본>>, MEW. Bd. 23, S. 183)
자신의 노동력을 판다는 것은 내 몸이 내 소유라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는 내 몸이 내 것이므로 내 맘대로 내 몸을 팔 수 있다. 이건 말 그대로 자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토지라고 하는 전통적인 생산 수단을 빼앗긴채 공장 설비라는 생산도구도 갖지 못한 노동자는 자신의 몸 밖에 팔게 없다.
그는 자신의 노동력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물질적 조건에서 자유롭게 벗어나(free from)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자유로운 상황이다.
이렇게 초기의 상업 자본의 폭력적 축적과 무산 노동계급이 결합함으로써 산업 자본주의는 시작되었다.
이것은 인류사의 전혀 새로운 단계였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사의 새로운 단계' 라는 말을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된다.
산업 자본주의의 시작과 함께 인류는 신석기 농업 혁명 이래도 그들의 삶을 지배해온 농업을 버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1789년의 세계'는 여전히 농촌적이었다.
상업으로 인해 도시가 매우 발달한 베네치아도 72-80퍼센트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했으며, 상업과 공업이 발전하고 있던 프랑스 역시 2천 6백만의 국민 중 90퍼센트가 농촌 인구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세계는 거의 완전히 도시적이다.
우리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은 단 한 순간에 삶을 유지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현대의 농업은 더이상 농업이 아니라, 농업의 외피를 두른 공업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근대 산업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근대 부르주아지는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역사에서 굉장히 혁명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공산주의 선언>>, MEW. Bd. 4, S. 404. "Die Bourgeoisie hat in der Geschchite eine hoechst revolutionaere Rolle gespielt.")
7 자본주의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자본주의는 노동력의 상품화에 의거한 자본축적을 핵심으로 하는 특수한 형태의 시장 이다.
따라서 시장은 자본주의보다 더욱 더 넓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를 시장경제와 등치시킬 수 없다.
다음은 자본주의를 이론적인 동시에 역사적으로 파악해 보려고 하는 시도이다.
첫째, 우리는 물물교환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로지 서로간에 필요로 하는 사용가치의 교환만을 목적으로 하는, 즉 교환을 통해 어떠한 잉여가치도 얻지 않는 시장 을 생각해 볼 수 있다.이것이 시장의 기원일 것이다.
[제한적 시장; 단순교환으로서의 시장]
둘째, 우리는 그러한 시장에서의 교환이 화폐에 의해 매개되면서, 각 사용가치간의 상대적 가치관계/체계가 점차 정립되고, 따라서 그에 따라 등가교환이 이뤄지고 (역으로) 부등가교환(이윤/잉여가치) 또한 가능해지는 단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단계는 역사적으로 교환을 통해 이윤이 축적되는 상업자본주의 단계에 대응하는데, 이것을 우리는 원자본주의(proto-capitalism) 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완전한 형태의 자본주의가 아닌 까닭은 잉여가치의 원천이 공간적 차이나 독점에 기반하여 있어서 체제에 내생적이지 않고 외재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단계에서 이윤이란 우연적인 것이다). 또한 이윤이 일부 자본으로 축적된다는 것을 자본축적/이윤추구의 동력이 생성된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윤의 생산이 체제 내적이 되지 않고 축적을 위한 이윤추구=자본축적의 압력이 존재하지 않는 시장은 이윤이 축적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완전한 자본주의로 불리기에는 미흡한 것이다.
[확대된 시장; 교환=이윤 획득기회로서의 시장]
셋째, 이제 우리는 시장에서 이윤이 체제내적으로 생성되고, 자본'축적'의 동력(압력)이 생기는 완전한 자본주의 단계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
첫째, 이윤이 시장에서의 교환을 통해 체재 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윤 취득이 노동과 자본의 교환, 즉 역사적으로 특수한 착취관계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은 노동력의 상품화에 의해 가능해지고, 노동력의 상품화는 이중으로 자유로운 노동자의 등장에 의해 가능해지며, 이중으로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 즉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분리에 의해 등장하게 된다.
[참고로 여기서 노동력의 상품화란, 비록 시장논리인 상품화가 노동에 연장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등장한 노동력은 의제상품으로서 시장 내에 이윤/착취가 체계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유의]
둘째, 이러한 자본의 원시적 축적 및 그에 따른 노동력의 상품화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특정한 압력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생산자들이 시장의 경쟁압력에의 종속된 것 이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시장의 경쟁압력에 종속된다는 것과 단순히 시장에서 교환을 한다는 것은 매우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시장에서의 교환을 통한 부와 이윤의 추구가 반드시 자본축적의 필연성을 낳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축적이란 벌어들인 이윤을 소비하지 않고 재투자하는 것을 말하는데, 시장에서의 교환이란 그 자체로는 결코 그러한 '축적'을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브레너 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축적의 필연성은 특정한 계급투쟁의 결과, 생산자들이 시장에서 경쟁압력에 종속되게 되어, 자본축적(그리고 그것을 위한 이윤획득)이 생존의 문제가 된데서 유래한다.
쓰기를 삼가하고 축적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시장은 이제 단순히 기회와 교환의 장이 아니라 서로 사투를 벌이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 됨으로써 완전히 자본주의의 면모를 띠게 된 것이다.
[일반화된 시장; 이윤축적을 위한 경쟁으로서의 시장]
8. 산업 자본주의 형성에 관한 몇가지 의문
1. 왜 농민이 농촌을 떠나게 되었는가
산업 자본주의 형성에 필수적인 축이었던 노동 계급의 형성과 관련하여, 지주는 왜 울타리를 치는 이윤 축적 행위를 시작하였으며, 소농들은 왜 그 땅을 떠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날 수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으면,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없으면 결코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소한 취미 활동도 아닌 먹고 사는 방식을 아무런 이유없이 바꾸었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중세의 농노나 자유농민이 전통적인 농사 활동으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을 때에는 자본주의 형성의 근거라 할 수 있는 도시의 발전이 더뎠다.
굳이 도시로 나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며 도시는 물물거래의 공간으로서만 기능하였다.
그러면 무엇이 농촌 사람들을 도시로 나가게 했는가?
여기서 우리는 9세기의 농업 혁명 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때 중세사회에는 몇가지 변화가 있었다. 편자가 수입되어 말 의 이용도가 높아졌을 뿐더러 농업 기술 또한 발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농업 혁명이 일어나 식량 생산 또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자 인구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인구가 늘어나게 되니 식량을 생산하는데 있어서 효율이 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 발생하였다.
인구밀도가 증가해서 효율이 떨어지고 농업의 이윤율이 하락 한 것이다.
이전 같으면 이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남아도는 인구는 굶어죽거나 다른 수입 보충원을 찾더라도 농업에 관련된 것이었겠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농업 이외의 것이 있었던 것이며, 그 중 하나가 양치는 일이었다.
엔클로저에서 보았듯이 양치기가 늘면 식용작물을 경작할 땅이 줄어들어 농민의 보유농지는 줄고, 그렇게해서 빈민화된 농촌 인구가 도시와 양모 생산지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2. 산업 자본주의가 시작된 시기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가
산업 자본주의는 신석기 농업혁명 이래 가장 획기적인 세계사적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12세기 부터 시작된 여러가지 사태들과 이전의 상업 자본주의 단계 등을 고려해 본다해도 적어도 500년 은 걸려서 일어난 일이다.
페르낭 브로델 이 지적하듯이 이처럼 자본주의는 장기지속적인 구조 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장기 지속 구조를 강조하다 보면 시장경제체제를 자본주의와 동일시할 때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공업과 다른 생산 영역 사이의 분업이 완수된 시점부터 진정한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은 자본주의를 오로지 경제체제로만 국한시키는 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어떤 경제체제든지 사회 구성원들의 현실적 활동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당연하게도 그들을 규율하는 사회 질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 모두를 통제하는 국가 라는 존재와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이는 우리가 자본주의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국가, 사회 등과 같은 정치적 체제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3. 자본주의의 등장을 정신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본주의가 오로지 경제체제로서만 설명할 수 없는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정신적인 요소로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관념론적 한계에 부딪힌다.
가령 서양이 동양보다 합리성이 앞섰다든가, 경쟁에 의한 이윤추구의 경향이 있었다든가 하는 설명들은 설명해야 할 요소들을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경쟁이 있었으므로 자본주의가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은, 경쟁은 왜 있었는가부터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상누각인 것이다.
더러는 행위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정신이 육체적, 물질적 요인보다 앞서는 개인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어떤 시기에 어떤 집단 또는 국가가 그런 정신무장을 바탕으로 뭔가를 해나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페르낭 브로델 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참조할 만하다:
"이들[자본가]이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과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을 돈에 대한 탐심, 절약하는 태도, 또는 합리적인 정신이라든지 신중히 계산된 위험의 추구같은 것으로 설명한다는 것과는 천양지차이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I-2, p. 567)
4. 도대체 근대 자본주의가 사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길래 이렇게 따지고 있는가
사상사의 전개 단계를 거칠게 또는 굉장히 거시적으로 정리해본다면 인류의 사상사에는 신석기 농업혁명 의 성과에 근거하여 전개된 고대 사상과 산업 자본주의 이후의 사상이라는 두가지 단계만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고대의 사상들을 고전으로 간주하여 연구하고 있으며, 산업 자본주의 이후의 사상들은 아직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상태이다.
고대 사상의 전개 단계를 보면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각기 개별적인 분야에서 여러가지 학적인 탐구가 전개되다가 이른바 황금축의 시대 에 체계적으로 집약되었는데, 이것이 삶의 기반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해버린 오늘날까지도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어긋남, 즉 삶의 기반과 사상적 층위 의 차이 가 오늘날의 정신적 균열의 근본 원인이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은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아들들이라 할 수 있는 개별적 학문의 전개 단계이고, 이는 차츰 거대한 학적 체계로 집약되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집약은 결국 삶의 토대에 대한 분명한 이해에 근거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현대의 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생성되었는가에 대해 탐구해왔다.
사실상 이 두가지 물음은 동일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의 역사를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하비v의 지적처럼
"경제생활의 기본적 구성원리로 '이윤을 위한 생산'이 여전히 건재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을 바꿀 생각이 있건 없건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비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려면 성공적으로 해결해야 할 광범위한 영역의 체제 내적 어려움이 두가지 존재한다. 그 하나는 시장 가격기구의 무정부성 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력의 배치 방식을 충분히 통제하여 생산에서의 가치 증가를 보장해줄, 즉 가능한 한 많은 자본가들에게 이윤을 보장해줄 필요에서 비롯되는 어려움 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내버려두면 보이지 않는 손 따위에 의해 조절되어 저절로 굴러가는 체제가 아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이는 아주 순진한 사람이다.
아니, 자본주의 체제만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체제도 내버려 두면 저절로 굴러가는 건 없다.
사람이 하는 일에 저절로 굴러가는 건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체제 내적 어려움이 생겨나고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시장 가격기구의 무정부성에서 비롯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한 집합적 행동 -- 국가의 규제나 개입 -- 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가치를 생산하고 그것을 실현(판매)하는 것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축적체제라 할 때, 그것이 과정이 잘 진행되려면 조절 양식이 잘 작동하여야 하는 것이다.
조절양식은 이러한 집합적 행동을 통하여
"시장 권력의 과다한 집중을 막거나, (수송이나 통신같은 분야에서) 어쩔 수없이 생겨난 독점 특권의 남용을 제어하고, 시장을 통해서는 생산.판매될 수 없는 집합적 상품들(방위, 교육, 사회적.물리적 하부구조)을 공급하고, 투기의 물결이나 시장 실패의 신호, 기업의 기대와 시장 신호 사이의 부정적일 수 있는 상호작용(시장운동에 대한 자기만족적 예측의 문제)에 따른 기하급수적 실패에 대항하는 것이다."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그것을 적절히 잘 공급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좌우한다.
그런데 자본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노동을 공급할 수가 없고 조절양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본이 사용하기 쉽게 교육시키고 관행을 정착시키는 일은 조절양식 이 하는 일인 것이다.
이 두가지 점을 염두에 두고 현대 사회를 살펴보는 것이 앞으로의 주요한 탐구가 될 것인데,
그것에 들어가기 앞서 우선 자본의 순환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해 두기로 하자. 이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수학 공식을 정확하게 알아야 문제를 풀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M(money) - C(commodity) - P(production): LP(labor power)
MP(means of production)
- C'(commodity) - M'(M+Δm)
이 순환구조는 원환 구조이다.
M에서 시작하여 M'로 끝난다.
이 순환구조에서 나중의 M'이 최초의 M보다 더 커야만, 즉 이윤이 창출되어야만 하나의 기업이든 전체로서의 체제든 유지된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가가 자본주의 체제의 최대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앞서 하비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이윤을 위한 생산이 경제생활의 기본적 구성원리로 작동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우리의 일상의 재생산 또한 상품 생산에 달려 있으며, 이러한 상품은 위와 같은 자본의 순환체계를 통해서 생산된다.
따라서 위의 체계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체계 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체계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관여되는 모든 요소들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다.
우선 M은 자본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기업과 금융의 관계 등이 포함된다.
기업이 사업을 하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하는지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예를들어 US는 주로 주식시장을 통해서 자금을 조달하는데 한국은 은행(관치금융)을 통해서 자금을 조달해왔다든가 하는게 그것이다.
C 는 상품을 가리키지만 주로 원자재를 의미하며, 대기업과 하청업체의 관계도 여기에 속한다.
LP 는 노동력을 말하지만 그렇게 좁은 의미로만 쓰일 수는 없다.
그것은 노사 관계의 형태, 유연성의 형태 등을 포함한다. 노조의 관행이나 정규직 비정규직 등에 대한 법적 처우 등도 여기에 들어가는데, 이쯤되면 LP는 단순히 기업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노동의 관계까지도 포괄하게 된다.
예를들어 설명해보자.
요즘 한국의 기업가들은 노동의 유연성 을 요구한다. 이것을 단순화해서 말하면 노동의 고용과 해고를 수월하게 하자는 것 을 요구하는 것이다.
국가가 이것을 받아들이면 관련법을 만들어서 정부가 시행하게 한다.
짧게 썼지만 이 안에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다. 어떤 사람이 고용되어 일하는 방식은 노동법에 의해 규정될 수도 있고, 계약법에 의해 규정될 수도 있는데, 어떤 법에 따라 규정되느냐는 노동자로서의 그의 규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을 만드는 것은 입법부에서 하는 정치적 행위이므로 노동자의 지위는 결국 정치적인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자가 정치적 행위의 장에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한 것이다.
MP 는 생산수단이지만 이것 역시 많은 것을 포괄한다. 예를들면 여기에는 신기술 개발 등도 포함되는 것이다.
C' 는 생산된 상품이다. 다음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것이 최초의 C보다 큰 가치를 가져야 이 순환체계는 제대로 돌아갈 수 있고, 그것은 Δm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마지막의 M'는 이윤이 붙은 새로운 자본 이다. 이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순환체계의 목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