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김씨종택 배치도
의성김씨종택 전경
안동 의성김씨 종택
(安東 義城金氏 宗宅/보물 제 450호/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80-1)
안동 의성 김씨 종택은 158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학봉 김성일이 스스로 감동(監董: 건축감독관)이 되어 지은 집이다. 학봉 김성일(1538-1593)은 우리 역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온 사람이다. 임진란 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정에 보고하면서 임진란에 대비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원죄를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임진란이 일어나자 김성일의 죄를 물어야한다는 논란 속에서 유성룡 변호로 처벌을 면하였다. 그 후 김성일은 경상우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김시민을 도와 진주대첩을 이끌어 임진란 초기 전세의 전환점을 가져온 인물이다. 김성일은 진주대첩 이후 곧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학봉은 퇴계가 칭찬해 마지않았던 제자로서 퇴계학문을 계승한 학자였다. 김성일의 위상은 매우 높아 가문에서 태실을 보존할 정도였다.
종택 중문 마당
의성김씨 실측조사보고서에 나타난 학봉종택 이력을 보면 1587년 새로 지은 후 1730년 대 바깥사랑채를 철거하였고, 1890년 작은 사랑채를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1757년에 학봉태실을 없애고 마루로 개조한 것을 1970년 학봉태실을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의성 김씨 종택은 학봉 김성일과 관련된 집이라는 것 외에도 집 구조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주목받을 만한 집이다.
우선 가장 눈에 띠는 부분은 안채 배치이다. 안채는 완전한 ㅁ자 형태로서 다른 집과는 달리 중문이라는 개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배치도 사랑채와 직각으로 배치되었다. 이렇게 배치하고 보니 안방은 행랑채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었고 대청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었다. 우리나라 집 대청은 중문 또는 대문을 향해 가로로 길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집 대청은 대문과 직각으로 배치되어 깊이가 깊은 대청이 되었다. 이런 대청의 구성은 바로 옆에 있는 의성 김씨 귀봉종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택 행랑채와 안채(좌측이 안채)
이러한 안채 구성은 분명 다른 집과 차이가 있다. 왜 이런 평면이 나왔을까하는 의문은 결국 안방 중심의 배치인가 아니면 대청중심의 배치인가 하는 점이다. 기존 집들은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이 배치되는 구성이라고 한다면 이 집은 철저하게 안방을 중심으로 안채가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안채를 햇빛이 잘 들도록 전면에 배치하다 보니 안채를 돌려놓게 된 것이다.
대청의 발달은 여름을 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제례 중심으로 생활이 바뀌면서 집안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안채 대청이 그런 역할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청이 집 중앙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제례 문제 못지않게 생활공간으로서의 안방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안채 대청(안방쪽 날개채 서까래 마구리가 보임)
이런 배려가 제례공간으로서의 대청 기능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한다. 대청깊이가 깊어지면서 제례의 편이성이 좋아지고 제례상 위계를 설정하는 것도 오히려 원활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넓은 배치보다는 깊은 배치가 제례를 할 때 더 유리하다. 이런 장점이 그대로 전해져 옆에 있는 귀봉종택 대청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가 독특한 구성은 단순히 실 배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안채 지붕구성을 보면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다. 안채 대청이 전체 집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지붕이 집안에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과장해서 만들었다. 앞에서 볼 때 안채 지붕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높게 만들었다. 대청지붕을 높게 만들고 보니 대청지붕이 안방이나 윗방을 구성하고 있는 날개채 지붕에 올라 탄 형식이 되었다.
안채대청(북쪽 날개채 쪽)
이렇게 지붕을 구성하고 보니 대청 천정이 매우 높아졌다. 지붕이 높다보니 기둥도 훌쩍 높아졌다. 그리고 안방을 구성하고 있는 날개채 도리가 돌출되어 부분적으로는 도리가 2중으로 걸리고, 지붕을 받치는 대들보와 종보까지 뒤얽혀 마치 중국 천두식 건물을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대청지붕이 날개채 지붕위에 올라 타다보니 대청에서 안채나 윗방의 지붕서까래를 덮은 흙과 서까래 마구리가 보여 어수선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렇게 안채가 여러 모로 우리가 보아 왔던 일반적인 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보니 학봉이 중국사신을 갔다 왔을 때 눈여겨 본 중국 주택을 참고로 하여 이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러나 학봉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왔다면 주로 명의 수도인 북경 사합원 주택을 참고하였을 것인데 사합원과 의성김씨종택 사이에서 유사성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안채 중정(2층에 보이는 누마루가 여름 음식보관장소)
또한 학봉문집에 "一依舊制 稍寬廳事 以復行事 즉 옛 모습 그대로 지었다. 다만 대청만은 조금 넓게 하여 일을 치르는데 편하게 하였다."(해석 : 학봉 김성일의 생각과 삶/이해영/한국국학진흥원/127쪽)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의성김씨 종택은 옛날 집과 다름없이 지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대로라면 오히려 임진란 전에 존재한 우리 옛집의 구조를 살피는데 참고 될 만한 집이 아닐까 한다.
안채 대청은 높이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윗방 쪽이 제일 높고 앞쪽 중정 쪽 퇴칸이 가장 낮은데 높이는 각각 약 15cm정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높이가 다른 것은 위계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아마도 예전에는 제일 높은 곳이 위패를 모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 초 아직 성리학의 이념이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사당을 짓기 보다는 집안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 상대적으로 높은 곳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단을 높인 것이 아닌가 한다.
종택 대청 건너편 광 위에는 누마루 같은 시설이 있다. 처음 언뜻 보기에는 마치 안사람들을 위한 휴게공간으로 인식되는 곳인데 이곳은 음식을 갈무리하는 곳이라 한다. 음식이 상하기 쉬운 여름철에는 음식을 통풍이 잘되는 이곳에 보관하여 상하는 것을 방지하였다고 한다.
큰사랑채와 바깥사랑채(앞쪽이 바깥사랑채)
이 집에 사랑채 역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랑채는 큰 사랑채와 바깥사랑채로 나뉘어 있는데 두 사랑채는 2층 구조로 된 행랑채로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는 1층은 곡간으로 되어 있고 2층은 서고와 누다락으로 되어 있다. 바깥사랑채에서 큰 사랑채로 가려면 바깥사랑채 뒤에 있는 한 칸 규모 마루에 있는 계단을 올라 복도 4칸을 지나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깥사랑채는 1890년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큰 사랑채와 바깥사랑채로 연결되는 행랑채도 이 때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안마당에서 본 큰 사랑채와의 연결이 어설퍼 보이는 것으로 보아 바깥사랑채와 안사랑채를 연결하는 행랑채는 처음 이 집을 지었을 때 계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큰 사랑채 앞이 지금과 같이 바깥사랑채나 행랑채가 없어 종택의 큰 사랑답게 우뚝 서 보였을 것이며 매우 시원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채는 모두 전면 4칸 측면 2칸으로 모두 8칸 규모이다. 동쪽 2칸은 방이고 나머지 6칸은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 사랑채는 뒤로 물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 사랑채가 안채보다 전면에 나와 있는데 이 사랑채는 뒤로 물러나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종가 사랑채의 권위를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었나 한다. 또한 여섯 칸이나 되는 넓은 대청 규모로 보아 사랑채가 생활 중심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라 종가로서 모임을 중심으로 건물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런 목적에 걸맞은 위치를 찾다 보니 안채보다 뒤로 물려 높은 곳에 짓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안사랑채로 가는 계단
이번 의성김씨 종택을 돌아보면서 근처에 있는 학봉종택도 같이 돌아보았다. 학봉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에 침략문제에 대해 오판을 함으로써 조선역사에 씻을 수 없는 큰 오점을 남겼다. 그런 오점 때문에 학봉이란 사람이 폄하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학봉은 퇴계의 수제자로서 조선 주자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리고 임진란이 일어나서는 오히려 몸을 던져 전쟁을 지휘하였다. 학봉은 진주대첩이라는 큰 승리를 남겼지만 결국 과로로 몸이 상해 임진란 발발 다음 해에 병으로 죽게 된다.
의성김씨 종택에 관련된 자료를 보면서 극히 일부분 때문에 만들어진 선입관을 가지고 학봉을 평가해온 것은 아니었나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주리학파의 큰 족적을 남긴 성리학의 거두로, 그리고 임진란을 당해 몸을 던져 전쟁을 치러낸 그를 다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깊게 깨달았다.
사당전경
안동 귀봉종택 평면도
참고 문헌
● 안동 의성김씨 종택 실측조사보고서/문화재청
● 학봉 김성일의 생각과 삶/이해영/한국국학진흥원
● 답사여행의 길잡이 10(경북 북부)/한국문화유산답사회/돌베개
● 문화재청사이트/우리지역문화재/안동시/안동 의성김씨 종택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2&VdkVgwKey=12,04500000,37&queryText=
● 디지털안동문화대전/안동 의성김씨종택
http://andong.grandculture.net/Contents/Index?dataType=0203
첫댓글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예전에 다녀온 곳을 사진과 글로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