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우리 역사 - 일제의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
1910년 한국을 강탈한 일제는 심지어 우리 소학교(현 초등 학교) 교과서까지 거두어 불태웠습니다. |
윤내현 단국대 사학과 교수의 ≪고조선 연구≫라는 책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문헌이나 고고학 자료들을 토대로 연구한, 철저한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쓰여졌는데 이 책자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한 시대의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만든
앞선 시대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그보다 앞선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수적입니다.
지금부터는 윤내현 교수와 '단군조선'에 대해 학설을 같이 하는 부분으로, 1990년 《한국상고사》를 낸 이후로 1998년 현재 맥을 같이 하는 부분입니다.
◎ "고구려"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고구려라고 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어 가야, 백제, 신라 등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를 말합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은 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훨씬 전인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요서지역에 존재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중국에서는 제후국이라 부름)이었고, 그 위치는 후대의 고구려와는 달리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에 서 가까운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습니다.
이 두 고구려는 그들의 존재시기와 지리적 위치는 달랐으면서도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서기전 12세기는 단군조선 중기이고, 서기전
37년은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이 서기전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의 옛 문헌에는 그보다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 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周)나라의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에는 서주(西周)가 성주(成周, 지금의 낙양(洛陽))에서 개최한 성주대회에 고구려가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대회에는 서주가 건국된 후 제(齊)에 봉해졌던 태공 망(望)도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망은 주족(周族)이 상(商, 은(殷))나라를
칠 때에 선봉장으로서 큰 공로를 세웠던 인물입니다.
망(望)이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성주대회는 서주 초인 서기전 12~11세기경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단군조선은 부여(扶餘), 고구려(高句麗), 고죽(孤竹), 예(濊), 맥(貊), 추(追), 진번(眞番),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玄 ), 숙신(肅愼), 청구(靑丘), 양이(良夷), 양주(楊州), 발( 發), 유(兪), 옥저(沃沮), 기자조선(箕子朝鮮), 진(辰), 비류( 沸流), 행인(荇人), 해두(海頭), 개마(蓋馬),
구다(句茶), 조 나(藻那), 주나(朱那), 한(韓, 삼한(三韓)) 등의 거수국(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부여, 고구려, 고죽, 예, 맥, 추, 진번, 낙랑, 임 둔, 현도, 숙신, 청구, 양이, 양주, 발, 유, 옥저, 기자조선 등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 진, 비류, 행인, 해두, 개마, 구다, 조나, 주나, 한 등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이 보다 훨씬 많은 거수국이 있었겠지만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과 관련을 갖지 못한 거수국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단군조선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로부터 북쪽은 어르구나하(額爾古納河), 동북쪽은 지금의 흑룡강을 국경으로하여, 즉 한반도와 내몽골 자치구 동부와 재중동포들이 살고있는 동북3성(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을 비롯한 만주 전 지역을 차지하고, 때로는 재러동포들이 살고 있는 연해주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국(서기전 16세기부터 단군조선 말까지 대체로 이러한 강역이 유지됨)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도 단군조선의 영토였습니다.
단군조선은 2300년간 실재했던 동북아 최강국가였으며, 중국 의 최초국가인 하(夏)나라보다 1백여년 앞선 나라였습니다.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통치영역으로 한 단군조선의 존속기간에
중국에서는 하(夏), 상(商, 은(殷)), 서주(西周), 춘추(春秋), 전국(戰國),
진제국(秦帝國)을 거쳐 서한제국(西漢帝國)이라는 왕조와 시대의 변화가 있었고, 일본에서는 단군조선 말기(서기전 3세기 이후)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彌生)문화가 있었습니다.
단군조선은 중국 전국(戰國)시대 연(燕)나라(서기전 323~222) 와의
전쟁에서 일시침공을 받았으나 그것을 격퇴하고, 오히려 연나라의 동부의 땅을 빼앗아 침략에 대한 응징을 하였고, 서 한제국은 단군조선과의 국경을 지키지 못해 뒤로 물린 바 있 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군조선의 강한 국력(군사력)을 알게 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국력은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없이 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단군'은 각 지역의 거수(渠帥)들만을 통솔하고, 각 거수국(渠帥國)의
주민들은 거수들에게 위임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거수들은 '단군'에게 일정한 의무를 이행하 면서 단군을 그들의 공주(共主)로 받들었습니다.
해모수는 우리말의 해머슴아가 한자화된 것으로 '단군'에 대 한 다른
칭호였습니다.
단군조선인들은 '단군'을 최고 지도자로하여 '하느님'을 믿는 동일한
종교(神敎)를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동일한 정치체제와 경제상황속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인, 지금의 중국 북경 가까이에 있는 난 하( 河)
동부유역에는 일찍이 서기전 12세기경에 기자 일족 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 위만 조선
그런데 서기전 195년에 위만(衛滿)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 터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 부터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서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지금의 대릉하(大凌河)유역 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들은 그들의
영토를 잃게 되었고, 이런 와중에 요서지역에 있었던 거수국들의 지배층과 주민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곳에 정착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 한사군은 무엇인가?
그 뒤 요서지역에서는 또 한번의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였는데 중국의 서한(西漢) 무제 는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서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켜 그곳에 {낙랑(樂浪), 임둔, 진번, 현도(玄 )} 등 4개의 군(郡)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단군조선의 서부영토였던 지금의 요서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아직까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일부 단군조선인 들은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뒤 단군조선이 통치능력을 잃게 되자 그들은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동부여, 고구려(지금의 요동과 평안북도 지역), 읍루(연해주 지역), 동옥저(함경도 지역), 최씨낙랑(평안남도 지역), 동예(강원도 지역), 대방(황해도 지역), 한(삼한; - 지금의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등이 그런 나라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열국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 부여
부여(扶餘)는 원래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 북부유역에 있었습니다.
난하 동부유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자, 다소 북쪽으로 이동하여 '북부여'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한(西漢)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자, 동으로 이동해 지금의 중국 길림성 북부 에 도읍하고 내몽골 자치구 동부와 흑룡강성 전부를 영토로하여 이를 부여 또는 '동부여'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동부여)를 북부여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단군조선
거수국였던 북부여가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잘못입니다.
이 시기에 지금의 요하 서쪽과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는 동일한 명칭이 병존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서한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면서 대부분 단군조 선에서
사용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고구려현, 옥저 등과 후에 낙 랑군에서 분리된 대방군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단군조선 인들이
세운 최씨낙랑, 고구려, 동옥저, 대방 등의 나라가 요 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를 혼동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있었던 이러한 국명들을 중국의 군현 명칭으로 해석해 중국의 군현이 만주와 한반도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데 요서지역에는 고구려현이 있었고, 요동지역에는 고구려국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곳과 새로 나라를 세운 곳에서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 고구려
이 시기, 즉 서기전 37년에 요동에 세워진 고구려국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입니다.
이 나라는 추모왕(鄒牟王), 즉 주몽과 그 집단에 의해서 건국되었는데
이들은 고구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은 추모왕(주몽)을 포함한 건국
주도세력이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옛 고구려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군조선은 후기에 단군의 후손을 각 지역의 거수(渠帥)로 봉하여 혈연조직을 강화한 바 있는데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그 때
거수가 단군의 후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추모왕은 단군조선의 거수국인 고구려 거수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에 의해서 지금의 요동에 세운 고구려는
난하 동부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의 거수 국 가운데 하나인
옛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나라인 것 입니다.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에서 재건된 후 주변에 있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비류, 행인, 해두, 개마, 구다, 조나, 주나 등의 나라를 병합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건국 후 오래지 않아 지금의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그 후 계속해서 중국 북경근처의 난하 유역에서 중국 과 전쟁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줄기차게 지금의 요서 서부로 진출하던 고구려는 미 천왕 때인 서기 313년부터 315년 사이에는 난하 동쪽에 있었던 한사군을 난하 서쪽으로 축출하고, 지금의 요서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요서지역'은 원래 단군조선의 영토였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원래는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이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고토
수복이었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던 시기에 백제는 바다를 건너 지금의 중국 북경과 천진(天津) 지역에 진출하여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활동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만은 아니었고,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과 중국의
단군 조선 침공에 대한 응징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구려의 소망은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그 위광이 중국 북부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미침으로써 일단 성취되었습니다.
◎ 최인호 - "왕도의 비밀"
1995년 SBS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다큐멘터리 6부작으로 최인호(崔仁浩; 1945~)씨의 '고구려, 그 중에서도 광개토 대왕의 영광에
관한 역사물'인 {왕도(王都)의 비밀}을 제작, 방영했는데〈제4부 정복의 길〉에서 표현했듯이,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은 단군조선의 영토
수복에 그 목표가 있었습니다.
{왕도의 비밀}을 흥미있게 보았는데 잘 만들었더군요. 광개토대왕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과 그 거수국인 옛 고구려의 단순한 영토 수복에만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군 조선에서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동'이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극동(極東)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쪽 국경이 이동하면 요동의 위치도 변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재중동포가 살고있는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요하(遼河)는 오랫동안 만리장성 부근 난하를 가르켰는데 후대에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오늘날의 요동(遼東)은 요하(遼河 또는 요수(遼水))의 동쪽을 지칭하는데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지금의 '난하( 河)'가 요하(요수)로 기록되어 있고, ≪사기≫에는 난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산(碣石山) 지역이 요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보아 고대의 '요하'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였고, 고대의 '요동'은 '난하 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곳은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으로서 고대에 중국 영토 가운데서
가장 동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당시의 서한의 요동군은 지금의 난하 하류유역에, 즉 요서 서부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당시에 고구려가 진출한 요동군은 지금의 요동이
아니라, 중국 북경 근처였던 것입니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에는 가장 강성했던 시기의 고 구려 영토가 북경 근처가 아닌,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지금의 요하(遼河)까지였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고대의 '요동'을 지금의 지명과 동일한 곳으로 잘못 인식한 결과가 빚어낸 오류인 것입니다.
그리고 현행 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의 역사는 물론 단군조선의 영토도 축소되어 있더군요.
◎ 가무의 문화
단군조선의 후계세력인 동부여, 고구려, 한 등에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추는 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춤들은 단군조선의 춤을 계승한 것들입니다.
1997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과 정월대보름을 맞아 전국서 정통농악과 강강술래 등 민속놀이를 비롯 세시풍속들이 펼쳐 져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는데 오늘날의 '풍물(농악)'이나 '강강술래'는 바로 단군조선시대의 춤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력설'은 우리민족이 역사이래 줄곧 지켰던 순수한 '우리 설날'입니다.
◎ 단군조선은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
단군조선은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이자, 우리민족 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왜곡, 말살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한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이며, 한민족 '사회와 문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단군조선에 대한 연구가 그간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한국사' 전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한민족 문화의 원형은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에 있으므로 그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한민족의 정체(正體)를 바르게 인식할 수 없습니다.
즉 단군조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민족 본래의 모습을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변화를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현재 윤내현 교수와 대부분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윤내현 단국대 교수한테 문의하고, '한국사 왜곡과 말살실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과 그에 동조한 국내학자들을 비판한 논문』을 쓰고, 정년퇴직한 이후로도 집요하게 한, 일관계사를 추적해온 최재석(崔在錫; 1926~) 고려대 명예교수와 서희건 조선일보 편집부국장에게 문의하면 될 것입니다.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월간조선〉1998년도 1월호 뒷부분에 보면
40페이지에 걸쳐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 범위가 일 본, 만주는
물론이고 중국의 상당부분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그리고 황해와 동해, 남중국해를 주름잡던 선조들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더군요.
'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 3조선으로 분리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에서 서기전 1122년까지이고, 기자(箕子)조선은 서기전 1122년에서 서기전 194년까지, 위만(衛滿)조선은 서기전
194년부터 한무제에 의해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서기전 108년까지 존속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역사인식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단군조선은 2300여년간 지속된 '강대한 광역국가'였고,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로서,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인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 유역에
서기전 12세기경(서기전 1122년경)에 기자일족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 된 것이 '기자조선'이고,
위만조선은 서기전 195년에 위만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단군조선의 거수국인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나라를 세우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 아닌,
서한의 외신(外臣)이 된 것이 '위만조선' 입니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 즉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계승되었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역사인식입니다.
그리고 '단군'은 군주(君主)를 뜻하는 말로서 오늘날의 대통령이라는
칭호와 비슷한, 단군조선을 통치했던 최고 통치자에 대한 칭호로서
단군조선 시대에는 수 십 명의 단군이 있었습니다.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위만조선이 건국되고 그 뒤를 이어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서술된, 즉 『서기전 194년에 위만이 단군조선의
왕이 되고, 서기전 108년에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현행 국사체계는 사실과 전혀 다른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4개군 (郡))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당시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河) 동부유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 역사의 주류일 수 가 없고, 단군조선의 변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우리 역사의 주류는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으로부터 단군조선을 계승한 동부여, 고구려, 읍루(이전의 숙신), 동옥저, 최씨낙랑, 동예, 대방, 한(韓, 삼한) 등의 열국시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체계화되어야 합니다.
이들은 원래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는데 단군조선이 붕괴되자 독립국이 된 것으로 이 가운데 고구려가 북방을 통합하고, 남방의 한(韓,
삼한)은 백제, 신라, 가야로 분열되어 사국시 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근래의 고고학 발굴과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단군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개시는 다른 지역보다 늦지 않았으며,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는 황하(黃河)유역이나 시베리아 지역 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납니다.
지난날에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 지역보다 문화의 발전이 늦을 것으로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확인된 {청동기문화} 연대 가운데 가장 이 른 것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주거지)과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서기전 2500년경으로, 만주(요녕성)에서는 '하가점하층문 화(夏家店下層文化)'에서 서기전 2410년경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황하유역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에서는 서기전
2200년경으로, 시베리아에서 가장 앞선 청동기문화인 '미누신스크 문화'는 서기전 1700년경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문화 개시연 대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 지역보다 앞선다는 것입 니다.
근래의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볼 때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한민족은
외부로부터의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거나, {그 주체가 예, 맥족(濊, 貊族)이었을 것이다}는 등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은 외부로부터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그리고 예, 맥이라는 것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입니다.
일제는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하여 한반도에는 청동기 유물조차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우리문화의 기원을 {시베리아 → 연해주 → 한반도}로
이어지는 {전파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임효재(任孝宰) 서울대 고고학교수(한국고고학회 회 장)가 발굴한 8천년(서기전 6천년경)된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유적(주거지 유적) 등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고유문화를
형성한 후, 전파문화를 흡수했음이 분명합니다(흑요석제 석기는 백두산이 원산지임).
오산리 유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시베리아 신석기 유적보다 2 천년이상이나 앞서는데 현재까지도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는 '한민족의 기원'은 물론, '문화전파설'은 하루 빨리 수정돼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단군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음으로 해서 청동기문화의 전개연대를 서 기전 1000년경으로 못박아 단군조선 중기나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었다거나, 특히 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
3조선으로 분리 이를 바탕으로 아예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철기문화의 보급연대를 단군조선 후기인 서기전 300 년경으로 잡는 사람이 있는데 윤내현 교수의《고조선 연구》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최근 발굴된 자료들에 의하면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800년경부터였고, 서기전 300년경부터는 강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인들이 청동과 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역사상에서도 매우 이를 뿐만 아니라, 그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습니다.
단군조선은 전기와 중기의 청동기시대로부터 후기는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단군조선의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된 그리고 앞으로 발견될 이 기간의 청동기와 초기 철기의 유적과 유물은 모두 단군조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대 최고의 희귀 장신구인 '유리'가 단군조선 시대인 서기전 5세기
무렵에 우리 나라에서 제작, 사용됐음이 밝혀져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더군요.
동아일보 1997년 4월 12일자 29면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한국 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최주(崔 炷) 박사팀은 1995년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유리구슬에 대해 성분분석을 한 결과, 이 구슬이 서기 전 5세기쯤 한반도에서 나는
납을 혼합해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습니다.
그간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유리문화가 초기 철기문화와 함께 서기전 2세기 무렵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밝혔었는데, 이 유리구슬은 바륨(Ba)이 섞여 있는 중국계통의 유리와는 달리 바륨이 들어있지 않는 등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작된 것 이어서 이 땅에 일찍이 유리문화가 뿌리 내렸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성분분석 결과 유리구슬에 산화납(pbo)이 1.7% 함유되어 있음이 증명됐는데 산화납은 낮은 온도에서 유리를 만들 수 있게 하면서 유리의 내구성을 높여주는 첨가물질로, 따라서 산화납의 존재는 유리제조
기술이 매우 앞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기전 5세기경의 유리구슬에서도 산화납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최주 박사가 {금강유역에 발달한 청동기문화는 중국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번 실험결과로 유리 제조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개발되었다는 {새로운 역사}를 밝혀낸 것입니다.
중앙일보 1998년 4월 1일자 1면과 3면에 보면, 국내에 한 점도 없던
단군조선의 미송리형 토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이런 식이라면 단군조선에 대한 아직도 많은 유물과 사료들이 국내, 외에 산재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북의 '단군릉'은 고구려시대의 무덤인데 단군릉으로 잘못 전해왔으며 연대측정에도 착오가 일어났을 것으로 보입니다.
단군릉 발굴에 대한 북한측의 견해는 학문적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인 면을 더 보이고 있습니다.
북한이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들이 한반도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을 간과한 채,《삼국사기》에서 {평양(平壤)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댁(宅)이다}라고 해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리고《삼국유사》〈고조선〉조에서 단군조선의 도읍 가운 데 아사달이나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아사달이나 평양이라는 지명은 한 곳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평양성, 아사달은 요령성 심양 동남 본계시(本溪市) 지역과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하류 유역에도 있었습니다.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생명의 젖줄이기도 한 백두산(白頭山) 정상에 있는 천지(天池)의 물은 세 갈래로 흘러 재중동포들이 살고 있는 중국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송화강(松花江)을 이루고, 북한 땅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이루는데 단군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의 묘가 있다면, 백두산 부근이나 특히 송화강 주변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1928년경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교수로 있으면서 '역사' 연구차 송화강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아사달}은 {국조 단군}이 나라를 처음 열었을 때의 첫 도읍지 명칭으로 {아침의 나라}, {출발의 땅}, {최초의 땅}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 {아사달}은 '백두산'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나는 봅니다.
강대했던 단군조선, 단군조선의 서부 강역이었던 중국 북경 부근의 난하유역까지를 수복하고 중국을 향해 위용을 과시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있었고, 바다를 건너 중국 북경과 천진 지역으로부터 남쪽의 절강성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백제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했었는데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문명을 전해 받은 것으로 교육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의 각종 문헌에는 한국 관련 기록들이 많은데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의 옛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고려하(高麗河), 고려포(高麗鋪), 고려영(高麗營) 등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 북경 인근에만 30여 개에 이르고, 중국 남부 광서성에는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이 보이기도 하고, 무인도이긴 하지만 중국 동남해안에는 신라도(新羅島)라는 지명이 현지인들 사이에서 쓰이기도 합니다.
1996년 9월 15일 KBS 1TV {일요스페셜}에서는 신라중심의 역사기술로 소홀히 다뤄져온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는데 「속 무령왕릉, 잊혀진 땅 ─ 백제22담 로의 비밀」이란 이 다큐멘터리는 백제 특유의 지방 통치체제인 '담로'를 화제로 삼아 6세기 당시 활발한 해상활동을 벌였던 백제의 구역을 추적한 것이더군요.
담로(擔魯)란 백제의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로서, 왕자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한 행정 구역을 말합니다.
백제는 22담로를 두었으나 시대와 지역의 대소에 따라 수효의 변천이 있었습니다.
과연 '담로'는 어떤 모습의 통치체제였고, 어디에 존재했는지 또, 해외에까지 뻗어 있었던 것인가! ─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제작진은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일대를 섭렵하며 8개월 동안 백제의 흔적을 추적했는데 가장 큰 성과는 중국에서 백제의 지명을 찾아낸 것 일 것입니다.
북경에서 3천km나 떨어진 베트남 인접지역 광서장족(廣西壯族, 광시좡족)자치구에서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을 찾아냈고, 이곳이 바로 중국의 사서인 《송서(宋書)》에 등장했던 백 제의 옛 영토 '진평군'이란 것을 알아내더군요.
백제향의 중심마을 이름이 백제허(百濟墟촵백제 옛터)란 것 도 눈길을 끄는데 이곳에는 전남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 등이 발견돼 백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 북경(北京, 베이징)과 천진(天津, 톈진), 석가장(石家莊, 스자좡)지역에까지 백제의 흔적이 퍼져있음을 확인했고, 더 나아가 중국사서에 기록된 백제 태수들의 임지 가 중국 동해안을 따라 선을 잇듯 분포한다는 것도 밝혀, 중 국 속의 백제 지배지가 북경과 천진 지역으로부터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저장성)지역까지 남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더군요.
특히 제작진이 발견한 흑치상지의 묘지명(남경 박물관 소장) 에서 흑치상지가 흑치 지역에 봉해지면서 원래 백제의 왕성(王姓)인 부여씨를 버리고 흑치씨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는데 결국 흑치 지역이 동남아시아를 뜻하기 때문에 백제의 통치지역은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SBS에서 방영된 {왕도의 비밀}과 함께 이 프로도 흥미있게 보았는데 잘 만들었더군요.
백제는 서기 246년(고이왕 13년)에 진충(眞忠) 장군을 파견하여 지금의 북경지역을 공략하고「백제군」을 설치한 후,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지금의 하북성, 산동성(山東省, 산둥 성), 강소성(江蘇省, 장쑤성), 절강성 지역의 동부해안을 차지하였습니다.
백제의 중국 동부해안 지배는 시기에 따라 그 영역에 차이는 있었지만 서기 588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백제의 남방경영은 지금의 제주도 경영부터 시작되는데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필리핀 군도로 뻗어나갔습니다.
즉 백제는 제주도를 기항지로 하여 이전부터 진출해 있던 북 규슈(北九州, 기타큐슈)를 잇는 상설 항로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삼고 대만(타이완)해협을 지나 필리핀 군도까지 항로를 연장시켰습니다.
필리핀 군도(群島)는 흑치국(黑齒國)으로 일컬었던 곳인데 이 곳이 백제와 연관이 있음은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백제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석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그 가문은 왕족에서 나왔지만 흑치(黑齒)에 분 봉(分封)된 관계로 그 지명을 따서 씨(氏)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왕족을 지방의 거점에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발해(698~926)의 개국 시조 대조영(大祚榮; ?~719)은 고구려 멸망 30년만에 거란, 돌궐족의 대두와 당제국의 혼란, 약화라는 국제정세의 타이밍을 포착하여 동북아의 새로운 강대국을 세웠습니다.
'발해'는 사방 5천리의 대제국이었으며,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임(自任)하고,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습니다.
남쪽의 통일신라와 {남, 북국관계}로 대립, 교섭하면서 동북 아 일류의 문화국으로 영화를 누렸던 2백 30여년간 존속한 선진 발해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보유하기도 했고, 1천 300km 떨어진 일본의 보호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발해는 육상전투에서 능숙했던 대륙국이면서도 해양대국이었는데 일본과 47회의 교류를 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발해인의 일본진출 루트는 동해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예로부터 동해는 발해의 내해(內海)였습니다.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한〈월간중앙 WIN〉1998년 1월호에 보 면, {1천 3백년만에 베일 벗는 대규모 발해고분}이란 기사가 실렸더군요.
서기 698년 고구려 장수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옛날 부여가 있던) 지역인 백두산 동북 송화강 유역인 만주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東牟山) 일대에 발해를 건국하였습니다.
고구려의 후예로서, 평양~원산 이북 지역부터 중국 동북부의 대부분과 러시아 연해주를 지배한 동북아의 대강국 발해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단군조선과 함께 잊혀지고, 빼앗긴 민족사의 한 장입니다.
발해 북쪽의 강역은 고구려 북쪽의 강역보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만주 동부에 중심을 두고, 북쪽으로는 아무르강까지,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부를 호령하던 대강국이었습니다.
발해의 152년간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의 동경성(현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은 둘레가 16㎞에 달하고, 궁전터만 37개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인 대집단을 기반으로 형성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데 동북아에서 '한국사'의 위치를 자리매김 하려면 단군조선과 고구려, 발해사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발해를 건국하는데 말갈족도 참여하였는데 말갈족은 단군조선의 속국였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찬란한 5천년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그런데 각 성씨(姓氏) 족보에 보면, 성씨의 기원이 중국이라 고 한 성씨들이 있는데 이것은 사대주의 때문입니다.
중국이 강해지니까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을 비롯한 우리 '역사'를 말살하고는 중국을 상국(上國)이라고 여겼으니 까요.
상고사와 한, 일관계사 등 우리 '역사'를 우선 올바로 정립하지 못한 상황아래서 '한, 일 역사 공동연구'라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일본에 끌려다닐 소지가 있습니다.
중국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한, 중, 일 3국이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게 되면 우리만 고립하게 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홍구(李洪九; 1934~) 전 국무총리(현 주미대사)가 1989년경 통일원장관으로 있을 때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 얘기를 하니까 금방 알아듣더군요.
그러나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한 후에는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자고 우리가 적극 나설 필요성도 있습니다.
현재 한국사(사학과) 교수들은 상고사(단군조선 시대)~현대사까지 폭넓게 연구해 학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어느 일부분만 연구해 학위를 받는데, 이젠 우리교수(전국 대학교수 중에서 국사담당 교수는 모두 280여명)들도 폭넓게 연구해야 하고, 우리 {국사 교과서}도 올바르게 다시 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문화'는 흔히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중국과는 크게 구별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문화권에 속하면서도 독창적 경지를 개척한 것이 우리 문화입니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 교육을 받은 우리 국민이나, 특히 전 세계인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젠 올바로 알려 나아가야 합니다.
광복이 된지 53년이 지나도록 우리 '역사'를 바로잡지 못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 제의 '한국사' 왜곡에 참여했던 인사들과 함께 이들에게 부화 뇌동하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문화'를 비하한 바로 우리 자신들의 책임입니다.
'사료'부족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가 '취사선택'하여 남겨 놓은 사료만을 들먹이면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거 일본이 가져간 수많은 자료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으려는 노력도 미흡했고, 외국 각국의 교과서에서 우리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 서술돼 있거나 잘못 기술되어 있는데도 이런 왜곡실태가 개선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된 실정입니다.
일본 황실문고에는 일제 때 약탈해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 고문서가 많을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확신'합니다.
이젠 일본 황실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 민족사 관련 수탈자료를 반환해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외교부와 KBS, 연합통신이 합동으로 황실문고 도서목록 확 인 작업에 들어가야 하고, 앞으로도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정부는 우선 교착상태에 빠져있는「외규장각 고문서」반환 협상에 적극 나서야 할 것입니다.
1866년 10월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고문서 3백40여권 중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2 백96권이 보존돼 있다고 하더군요.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정립시킨 후 이를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각국의 교과서는 물론 우리의 '역사'에 대해 잘못된 부분이 어느 한 곳이 라도 있다면 우리의 참 '역사'가 적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국경이 없어질 듯 자본과 상품의 공세가 지속되는 국제화, 세계화의 구호 속에서도 강대국들은 부쩍 자국 중심의 '역사' 교육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독일이 그렇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역사' 교육 문제가 사회의 관심 속에 논의되고 있다 고 합니다.
21세기에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려면 먼저 국민의식 수준부터 높여야 하는데 특히 '역사의식'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 한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북3성을 비롯한 만주와 연해주 등 한 대륙에서 터를 열고, 한대륙과 한반도를 발판으로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천하를 누비며 사자후를 토하던 우리 선조의 모습이 담긴 상고시대와 한, 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되면, 우리의 과거가 그리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동안 왜곡된 '역사' 교육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너무도 잘못 보아왔고, 정치, 경제, 사회의 불안정으로 우리 '국가'를 불신하고, '우리'보다는 외국을 선호하며 살아 온 이유로 우리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젠 우리 언론매체가 앞장서서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상고사를 비롯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내 개인적인 관점 등에 대해 많은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물론 많은 비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첫째,『기존 사학계와 배치되는 부분이 있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고,『일방적이다』라는 비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두 달갑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솔직히 나이도 많고, 최근에 나온 학설까지 알 수도 다 흡수 할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으면 고맙겠습니다.
현재 상고사(단군조선)과 한촵일관계사 등 우리 '역사' 회복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후원과 지지를 하시는 분들로는
앞으로 단군학회는 엄격한 사료비판을 토대로 하되, 학문적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단군과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 연구의 전환점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건국 50주년」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건국」이란 「나라를 (처음으로) 세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국 50주년"이라는 표현이 맞는다면 지금부터 50년 이전의 우리 나라 역사는 부정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나같이 1948년 8월생 이전의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 되는 것인지…? 「건국 50주년」이라는 용어대신「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이 맞는 표현입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생존해 나아가려면 정치, 경제, 사회의 안정과 함께 무엇보다 각국에 지한(知韓), 친한 인맥을 형성해 나아가야 하는데, 특히 우리 국민에게 {국가관과 역사의식}을 심어주려면 {한국학 재단(법인)}과 그 부설기관으로 {한국학 연구소}를 설립해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한 후, 올바른 '역사'를 국민과 해외동포 그리고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참 모습을 전세계에 알리고 그들의 관심을 사 지한파 (知韓派), 친한파를 만들 수 있는 올바로 정립된 우리 '역사' 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21세 기에는 전세계에 {한국학 붐}을 일으켜 전세계인의 시선을 우리 '한국'에 집중시켜야 하며, 무엇보다 각국에 지한, 친한 인맥을 형성해 우리의 운신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안정과 함께 올바른 우리 '역사'의 대대 적인 보급과 홍보는 '한국'의 이미지 향상을 통한 {경제와 관 광분야}에 까지 엄청난 파급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사 바로잡기}는 국가전략차원에서, 그러나 정부나 정부 기관에서 하는 일은 활동에 제약조건이 붙게되는 특수사정도 있으므로 자유롭게, 순발력 있게 대응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민간조직'이 적극 나서야 합니다.
1990년대 들어 특히 재미동포 학생들은 물론 미국 대학생들 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고, 대학마다 {한국학} 관련 강좌가 매년 늘어나는 추세이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가 빈번하게 열린다고 하더군요.
{한국학}을 널리 알리는 데는 한국인 2세대 학자들이 적격인 데 우선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한 후, 외국에 있는 한국인 2세대 학자에 대한 올바른 우리 '역사' 교육과 적절한 지원을 통해 이들이 {한국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제가 안정이 되면, 우리의 기금으로 {한국학}에 관한 대학 과목을 개설하여 전세계 대학생들이 {한국역사}를 올바르게 알 수 있게 해야 하며, {한국사} 서적을 간행하고, 한국사에 대한 비디오를 널리 보급하여 전 세계인들이 진정한 '한국'의 모습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울러 경제가 안정이 되면, 최근 서울대에 개설된 '한국어 지도자 과정'처럼 각 분야 인재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국 학 재단(법인)} 부설의 {미니(小) 야간 한국학 대학원}을 설립해 전 세계인에게 올바른 '한국학'을 가르칠 인재를 양성해, 이들을 전세계에 내보내 '한국'을 전 세계인에게 올바로 알려 야 합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해외동포 2, 3세들을 불 러다가 올바른 우리민족의 '역사'교육을 하여야 합니다.
이는 실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한국학 재단(법인)』같은 단체가 설립된다면 소장하고 있는 서적을 기증할 생각입니다.
88서울올림픽을 기해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역사상 초유의 한국문화의 집성판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전27권을 간행하여 문화올림픽의 테이프를 끊었으며, 이 때 민간에서는 내가 유일하게《한국상고사 입문》을 '영문'으로 번역 간행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정부와 민간에서는 해외에서 한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또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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