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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게네스(Origenes 184/5-253/4 = 오리겐)
오리게네스는 초대교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출생과 사망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그는 대략 184년 혹은 185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 레오니데스(Leonides)는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 통치 197-211) 치하의 박해로 인해 202년에 순교했다. 최초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의하면 오리게네스는 아버지를 따라 순교하려고 했으나 어머니가 그의 옷을 숨기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독교 박해를 견디지 못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rexandria = Titus Flavius Clemens)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기독교 세례반 학교(Catechetical School), 즉 세례 준비자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의 교장이었다. 클레멘트가 떠나간 후에 그의 가장 뛰어난 학생 오리게네스가 203년 약관(弱冠)의 나이가 채 되기도 전에 그를 대신하여 교장이 되었다.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창시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의 스승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의 학교를 수학한 실력자 오리게네스가 자신에게 맡겨진 교장직을 처음부터 성공적으로 수행한 덕분에 학교는 학생들이 몰려왔고 날이 갈수록 그의 명성은 높아져 갔다. 특별히 재능과 지적 능력을 갖춘 학생들이 많이 찾아왔기 때문에 보조교사가 필요했고 교장은 그 일을 헤라클라스(Heraclas)에게 맡겼다.
이미 청소년 시절부터 수도사처럼 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210년이 되기 전에 더욱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후에 그의 적들이 그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큰 약점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와 같은 일이 비난 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오리게네스는 자신을 알렉산드리아 세례반 학교의 교장직에 임명한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메트리오스(Demetrius = Δημήτριος)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어 간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별로 없다. 오리게네스가 유명해지자 다른 지역의 초청으로 성경 해설을 부탁받곤 했는데 이것은 확실히 데메트리오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당시 평신도였던 오리게네스의 성경 강해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는 감독도 있었는데, 데메트리오스는 평신도가 감독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 결코 좋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메트리오스는 오리게네스의 명성을 시기했을 수도 있고 또한 자신의 권위가 도전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와 오리게네스 사이의 긴장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결국 231-232년 사이에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야만 했다.
그는 고향을 떠나 가이사랴로 갔는데 그곳의 감독들에 의해 장로로 임명되었다. 감독에도 추대되었으나 데메트리오스가 제공한 정보, 즉 오리게네스가 젊은 시절 스스로 거세했다는 사실과 연관된 소문 때문에 서품을 받지는 못했다. 이 일로 데메트리오스는 노회를 소집하여 오리게네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직위를 해제하고 그를 추방하도록 했다.
이때가 오리게네스에게는 가장 큰 영적 위기였으나 그가 233년, 혹은 234년에 쓴 <기도>라는 글을 감안한다면 그 위기를 기도로 잘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공교롭게도 데메트리오스는 233년에 사망했다. 그의 감독 자리는 오리게네스의 보조교사였던 헤라클라스가 계승했다. 오리게네스가 6-7년 정도 가이사랴에 있는 동안 학교를 설립했는데 당시 출중한 학생들이 몰려왔고 그들은 후에 감독들이 되었다.
오리게네스는 로마 황제 데키우스(Decius)의 기독교 박해 시에 70세의 노구로 투옥되었고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가 출옥했으나 고문의 후유증 때문에 얼마 후 죽고 말았다. 그의 제자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험악한 세월을 영적인 힘으로 견디어낸 그에게 ‘강철 같은 사람’이라는 뜻의 헬라어 ‘아다만티오스’(Αδαμάντιος = Adamantius)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이로 인해 오리게네스는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라 불리게 되었다. 그의 이름이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11조항에서 이단자 명단에 들어있으나 황제의 초안이나, 공의회를 승인한 비길리우스 교황의 편지에는 없으므로 공의회가 실제로 그를 정죄하지도, 그의 신학을 이단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술
초대교회 교부들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다음으로 많은 양을 저술한 교부는 오리게네스다. 하지만 헬라어로 저술된 원본들은 소실된 것들이 많아 라틴어 번역본으로만 존재하는 것들도 상당수에 이르는데 이 번역본들은 후대의 첨삭을 감안하여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오리게네스 저술들의 원본 소실과 번역본에 있어서 후대의 첨삭 문제는 오리게네스 사후에 벌어진 오리게네스의 신학을 둘러싼 논쟁으로 인해 발생했다. 4세기 말경에 살라미스(Salamis = Constantia)의 감독 에피파니우스(Epiphanius)가 자신의 <약상자>(Panarion)라는 책에서 오리게네스를 이단 명단에 포함시켰고, 이어서 393년에는 예루살렘의 감독 존 2세(John II)를 오리게네스주의자라고 비난하자 아퀼레이아(Aquileia)의 수도사 루피누스(Rufinus = Tyrannius Rufinus)는 존 2세 편에 서서 오리게네스를 옹호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오리게네스 논쟁이다. 이 때 오리게네스 저술의 라틴어 번역본에 나타나는 내용의 첨삭 문제가 번역자 루피누스에 의해 발생하게 되었다. 6세기에도 오리게네스를 둘러싼 논쟁이 재개되었을 때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가 543년에 오리게네스를 정죄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이 칙령에 따라 오리게네스의 모든 저술들은 수거되고 소멸되었다.
오리게네스의 작품은 크게 성경주석과 논쟁서와 교리서 및 신앙서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성경주석에 분류되는 <헥사플라>(Hexapla. ‘육중’을 뜻함)가 있는데 이것은 230년경의 것으로써 6개의 구약성경 번역 대조본(히브리어 원문, 히브리어 원문의 헬라어 음역, 아퀼레이아역, 심마쿠스역, 70인역, 테오도키온의 헬라어역본)이다. 그의 성경주석 가운데 온전히 보존된 것은 단 하나도 없으며 모두 일부분들만 잔존한다. 헬라어 원본으로는 <마태복음주석>이 8권만, <요한복음주석>이 9권만 각각 남아 있다. 라틴어 번역본으로는 <마태복음주석>의 후반부가, <로마서주석> 중 10권만 남아 있다.
둘째, 논쟁서, 즉 변증서에 속하는 대표적인 저술은 8권으로 된 <켈수스에 반대하여>(Κατὰ Κέλσου = Contra Celsum)인데 켈수스가 자신의 <참된 로고스>(Λόγος Ἀληθής)라는 논문에서 그리스도를 메시아라고 하는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그리스도를 사기꾼과 마술사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도들이 날조한 신화로 간주한 것에 대해 매우 논리정연하게 반박하면서 기독교를 변증한다. 이것은 245-248년 사이게 저술된 작품이다.
셋째, 기독교 교리를 설명한 대표적인 저술은 220-23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원리들에 관하여>(Περί άρχων = De principiis)이다. 이 작품의 헬라어 원본은 몇몇 단편만 존재하고 루피누스의 라틴어 번역본으로만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모두 4권으로 되어 있는데 1권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2권에서는 인간의 창조와 구원에 대해, 3권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종말에 대해, 4권에서는 성경의 영감과 해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넷째, 대표적인 신앙적 저술로는 주기도문(Pater noster)을 해설한 <기도에 관하여>(De oratione)와 순교를 인내할 동기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한 <순교를 위한 권면>(Exhortatio ad Martyrium)이 있다.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자는 기도를 오직 성부께만 드려야 하며 성자께 기도드리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성자와 함께 성자를 통해 오직 성부께만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사상
오리게네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를 가장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유대교와 그리스 철학을 결합한 인물이 필로(Philo)라면 기독교를 헬라철학과 연결을 시도한 최초의 기독교 사상가는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 Martyr. 저스틴)이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에 헬라철학을 가장 완숙하게 옷 입히고 이러한 결합을 보편화한 것은 최초의 신학자라 불리는 오리게네스이다. 오리게네스로 인해 헬라철학의 사상과 용어는 기독교 교리 속에 큰 이질감 없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리게네스는 풍유적(allegorical) 성경해석방법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이 육체와 정신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푸신 선물인 성경도 그러하다.” 그는 성경이 문자적 의미와 정신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기독교에는 육적인 가르침뿐만 아니라 영적인 가르침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오리게네스가 육체에 해당하는 문자 자체의 의미를 결코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영혼에 해당하는 문자의 영적 의미를 더 고상한 것으로 간주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주석가로서 그는 열정을 다해 모든 성경 구절에서 더 고상한 진리 즉 영적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오리게네스의 이와 같은 성경해석방법론은 중세에 성경의 4중적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4중적 성경해석이란 한 본문에서 문자적, 풍유적, 도덕적, 신비적 의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문자는 실행된 일들을, 풍유는 당신이 믿어야 하는 것을, 도덕적 [의미]는 당신이 행해야 하는 것을, 신비는 당신이 어디로 향해 가야할지를 가르친다.”(Littera gesta docet, quid credas allegoria, moralis quid agas, quo tendas anagogia.) 이처럼 오리게네스가 기독교 역사에서 성경해석학에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며 그 영향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에서는 사실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의 동일한 본질이시라는 동일본질 개념과 성자와 성령께서 성부께 종속된다는 종속설 개념 둘 다 발견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후대에 일어난 삼위일체 논쟁을 통해 동일본질 개념이 교회의 정통 교리로 수용되면서 종속설이 이단적 교리로 정죄될 때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은 종속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오리게네스가 이단자의 명단에 오르게 된 것은 단지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이단적인 종속설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외에도 그는 여러 가지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는데, 가령 천사도 육체를 가진다는 주장, 영혼이 선재한다는 주장, 지옥 형벌이란 영원하지 않고 한시적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타락한 천사들과 사탄까지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인데 그 때에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고 어떤 악한 세력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주장 등이다. 그의 마지막 주장은 기독교 구원론과 종말론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이며 이단적 사상이다.
오리게네스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들은 대부분 그가 성경해석에 적용한 플라톤 철학의 논리적 결과물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저술들 속에는 유해한 것들로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 유익한 가르침도 많이 발견된다.
유명한 독일의 신약학자이며 교회사가인 쿠어트 알란트(Kurt Aland)는 오리게네스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교회는 그의 신학 사상 때문에 오리겐을 정죄하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리겐은 분명히 성자로 불리었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자기의 전부를 바쳐 그리스도를 섬긴 사람이다. 그의 신학은 논란의 여지도 공격의 여지도 있다. 그러나 오리겐이 교회 역사상 비교할 만한 인물이 없는 고결한 주님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4-5세기의 교부 히에로니무스(Hieronymus)가 오리게네스에 대해 증언한 것처럼 그는 본능적인 욕구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킨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성경을 암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밤낮으로 수고했다는 사실만은 높이 평가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의 덕들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의 잘못들을 본받지는 말자.”(Non imitemur eius vitia, cuius virtutes non possumus sequi.) 이것이 오리게네스에 대한 히에로니무스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