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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23 - 알제리 8년간 독립전쟁에서 150만명이 죽고서야 프랑스에서 해방!
전세계의 식민지 통치에서 잔인무도 하지 않은 나라는 단 한나라도 없었지만 그중 제일 심했던
곳은 카리브해의 "아이티" 이니..... 프랑스인 농장주들은 흑인들이 작업중 사탕수수를 먹지
않을까 염려되어 그 무더운 날씨에도 깡통으로 된 자물쇠를 "입에 채워" 짐승 취급을 했습니다!
흑인 노예들이 백인 프랑스 농장주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채찍질은 기본이고 남자 노예를 거세시켰으며
땅에 엎드리게 해서 마차를 달려 팔다리를 분질러 버렸고, 화형을 시켰으며 배에 태우고 나가 바다에
던지고 가마솥에 산채로 넣은후 불을 피워 삶아죽이며 원형경기장에 넣고 사냥개를 풀어 물어죽였습니다.
스페인 식민지 남미 파라과이에서 원주민인 과라니족은 백인들의 통치를 전면 거부했으며
1607년 들어 과라니족 인디언들의 계속된 반란에 지쳐버린 스페인은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에 통치를 맡기니..... 예수회는 1609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해 정착한 원주민들의
마을인 '레둑시온(reduccion)' 을 세우고, 원주민들의 강제 노역과 노예제도를 폐지합니다.
롱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 이 이때 당시 상황을 소재로 삼았는데, 스페인 정부는 1750년 레두시온
제도를 금지하자 과라니족이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원주민들은 사람이 아니라 미개한 짐승, 동물
이므로 예수회 선교사들은 철수하라" 는 식민지 당국과, "원주민도 영혼을 가진 사람이며 신앙 전파의
대상" 이라는 사제들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데 프랑스도 아이티인들을 짐승으로 보았는가 봅니다?
아이티인들이 마침내 궐기해 독립전쟁을 일으키자 나폴레옹은 1801년 11월 3만여명의 원정대를 아이티
(산도밍고)에 파견해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 부활을 시도하였으니..... 아이티 독립군을 붙잡아 배의
선창 짐칸에 아이티인들을 실은 후에 바다로 나가 “이산화 황” 가스를 살포해 죽여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하지만 아이티인들의 저항과 황열병으로 프랑스군 33,000명 가운데 생존자가 3천명이 되자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전쟁 중인지라 영국 해군의 경계 때문에 추가 병력 파병을 못하니 아이티인
들은 1804년 독립을 쟁취했지만, 1825년 루이 18세는 다시 군함을 보내 함포로 위협
하면서 독립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니 아이티는 굴복했고 저 보상금은 매년 이자가 불어
나는지라..... 122년만인 “1947년” 에야 다 갚았으니 오늘날 아이티가 최빈국이 된 이유 입니다!
저런 짓을 저지른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에서도 잔인무도한 짓을 했으니 1897년에 베트남
총독에 부임한 폴 두메르는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며, 술 제조와
판매 독점권을 프랑스 기업 퐁텐에 부여하고 마을 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으며 집에서 술을 빚다가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에서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 6배로 폭등하였고, 명절 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던 관습을 파괴했으며, 또 소금을 전매하자 소금 값은 10년만에
5배로 상승하였고 아편마저 독점 판매해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
이었는데 베트남인에게 강제로 아편을 먹여서 아편 흡연자가 3배로 늘어나는 성과(?) 를 거둡니다.
이런 프랑스인지라 알제리에서도 식민지 백성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는 짐작할만 한데.... 식민지 독립
전쟁에서 가장 치열하고 큰 희생을 치른 두 나라는 베트남과 알제리이니, 베트남은 프랑스와
10년 전쟁 그리고 미국과 15년 전쟁에서 군과 민간인 250만이 희생당했으며.... 이 나라 알제리도
1천만 인구 중에서 15% 인 무려 150만명이 죽고서야 프랑스의 압제에서 풀려나 독립을 쟁취 합니다.
알제리는 아프리카 북부 마그레브 지역에 위치한 아랍-베르베르 국가로 서쪽으로 모로코, 남쪽으로
말리, 동쪽으로 리비아 및 튀니지와 국경을 접하는데.... 마르세유에서 알제까지 거리가
마르세유에서 파리 거리와 비슷하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10번째로 넓은 나라 입니다.
석유(세계 4위)와 천연가스(세계 5위), 망간(세계 3위), 수은(세계 3위), 납(세계 5위), 코발트(세계
2위) 같은 자원 매장량이 엄청나며.... 개발되지 않은 철광석, 석탄 및 온갖 자원이 수두룩한데,
따스한 온대 지중해성 기후에서 부터 더운 사막성 기후가 있으니 스텝 기후 이지만 겨울에
눈이 내리기도 하며 지중해 연안과 아틀라스 산맥 바트나 외에는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에 속합니다.
수도 이름 알자자이르가 국가 이름이 된 나라로 베르베르인이 처음 도시를 세울 시기에는 앞바다
에 섬들이 있었다는데..... 프랑스령 치하에서 '알제(Alger)' 로 알려졌고 국호에 대해서는
지명 접사 -이(-ie) 를 더해 '알제리(Algérie)' 라고 지칭했는데, 한국어 명칭은 프랑스어
명칭을 차용한 것이니 영어는 '앨지어리어(Algeria)' 이고 독일어는 '알게리엔(Algerien)' 입니다.
알제리의 정식 국호는 '알제리 인민민주 공화국' 이니 독립 운동가들이 반불 독립 운동을
벌이면서 소련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사회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인데....
그러나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도입한 것은 아니지만 독립후 제3세계 진영에
속하면서도 오랫동안 친소 반미 경향을 보였으며 현재 알제리 외교 성향은 중립 입니다.
알제리의 국기는 초록색은 번영을, 하얀색은 순결과 평화를, 붉은색은 독립전쟁 당시 인민들이
흘린 피, 초승달과 별은 국교인 이슬람을 상징하니..... 이 국기는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알제리 독립진영에서 1958년에 채택했으며, 1962년에 독립할 때 정식 국기로 채택되었습니다.
고대 카르타고가 성장하면서 현재 알제리에 해당하는 누미디아로 영향력을 넓혀나갔으니 카르타고인
들은 알제리 해안가에 식민도시들을 건설하면서 대농장들을 운영하였으며 누미디아인들은
카르타고와 교역하였고 많은 누미디아 기병 및 현지인 보병들이 카르타고군에 용병으로 참가했습니다.
이후 포에니 3차전쟁에서 누미디아는 로마와 동맹을 맺고 카르타고를 함께 멸망시켰으며 그 후에
유구르타 반란을 계기로 로마의 속주로 전락했는데.... 제밀라 유적등이 남아있고 누미디아 왕국
남부의 가에툴리족은 노예를 동원한 지하수 농업용수 공급을 통해 번영하였으며 기독교가 성했는데,
게르만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에 쳐들어왔을 때 도나투스파 기독교도 소농들은 반달족에 협력했습니다.
6세기경 동로마 벨리사리우스 장군에 의해 반달왕국이 무너지고 비잔틴 영토로 탈환되나, 7세기
말에 아랍인 무슬림들이 쳐들어오면서 알제리는 카르타고와 함께 시리아의 우마이야 왕조
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러자 해안 지대의 도나투스파 기독교인들과 내륙의 토착 신앙을
믿는 베르베르인들은 지중해 정복 및 해적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대거 이슬람으로 개종합니다.
우마이야 왕조가 바그다드에 망한후 압바스 왕조는 튀니지 지방까지는 권역을 넓혔지만 알제리 지방은
후우마이야 왕조가 지배하면서 세력권이 나뉬으며, 스페인의 코르도바를 수도로 했던 후우마이야
왕조가 아랍인 및 베르베르인들의 갈등으로 여러지방으로 쪼개지면서 멸망한후, 튀니지에서 발흥한
파티마 왕조가 북아프리카를 통일했다가 베르베르인들의 무와히드 왕조가 다시 알제리를 점령합니다.
무와히드 왕조가 레콘키스타로 인해 멸망한 후에는 모로코에는 마린 왕조, 알제리에는 자얀
왕조, 튀니지에는 하프스 왕조가 각각 세워지는데.... 자얀왕조가 멸망하면서 알제리는
아랍 대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니, 이후 스페인에서 벌어진 레콘키스타
와 뒤이은 종교재판으로 박해를 받는 유대인들이 대거 알제리 해안 도시들로 이주합니다.
알제리 일대는 이슬람화 직후 부터 유명한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가 되었다가 1516년
에 드디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번국이 되니.... 오스만 치하에서는 명목상의
총독이 있었지만 도시들은 자치적인 형태를 띄었고 오스만 제국이 강성했을
때는 바르바리 해적들이 지중해에서 대놓고 기독교 국가들에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1538년 기독교 함대가 알제리와 튀니지 및 리비아의 해적으로 구성된 오스만투르크 함대에 패전한
프레베지해전 2년 후인 1540년에 스페인왕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전
부터 생각하던대로 1만 3천명의 노잡이와 선원을 태운 65척의 갤리선과 수송선 100척에 2만
2천명의 병사를 태운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군은 북아프리카 알제 동쪽 해안에 상륙시킵니다.
하지만 마침 불어닥친 폭풍우, 태풍으로 인한 궂은 날씨는.... 스페인 상륙군의 보급을
불가능하게 만들자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성을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스페인군대가 철수하니 150척의 배와 병사등 1만명을 잃는 엄청난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 아들 스페인왕 펠리페 2세 는 1560년 다시 갤리선 53척에 14,000 명의 병사로 해적 울루치 알리의
상관인 투르구트가 지키는 리비아의 트리폴리를 공격했지만 늦가을이라 함대는 태풍에 밀려 튀지지
와의 국경부근 알칸타라에 상륙하는데, 그래도 스페인군은 진열을 정비해 동쪽 트리폴리로 진격합니다.
하지만 이슬람 베르베르인의 습격에다가 오염된 물로 환자가 급증하여 진군이 더디자
총사령관 메디나 코엘리는 트리폴리 공격을 포기하고 인근의 해적 소굴 제르바섬
을 공격해 점령한후 요새를 보강하는 사이에 터키 본국에서 피알레 파샤가 80척 함대
를 인솔해왔으니 울루치 알리는 20척의 함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항구를 공격합니다!
카를로스왕에 의해 총사령관에 임명된 메디나 코엘리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새
터키 함대가 쇄도하여 기독교 군대를 전멸시키니 이후 "지중해는 이슬람의 바다" 가 되고 알제리와
튀니지, 리비아 해적들은 스페인과 프랑스 및 이탈리아 해안을 습격해 유럽인들을 노예로 잡아옵니다.
알제리등 이슬람 해적들이 지중해를 휘젓고 다니자 유럽인들은 공포에 떨게 되는데 지중해
가 유럽 기독교세계의 바다로 회복되는 것은 1565년 터키 함대가 몰타섬 공격에
실패하면서 해적 두목 투르구트가 전사하고..... 6년후 베네치아와 이탈리아 및
스페인 함대 310척 8만명이 총 집결한 1571년 그리스 레판토 해전 승리 이후 입니다.
300년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프랑스의 침공을 받으니 1830년대 부터 프랑스가 지중해 해안
일대의 바르바리 해적 토벌을 명분으로 알제리를 공격해 점령하면서 프랑스령 알제리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식민제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지중해 해안 일대에서 출발한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은 식민 지배기간 내내 계속되어 내륙의 사하라 사막 방면으로 진출합니다.
프랑스군은 모로코 왕국이나, 베르베르인, 투아레그인 등의 내륙의 유목민들과 싸워가면서
1936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국경으로 확정되는데.... 프랑스군이 알제리에 처음 진주
했을 당시에는 알제리인 문자 해독율이 프랑스 군인 평균 문자 해독율 보다 높았다고
하며..... 이는 프랑스군에게 최초로 공략당한 지역이 알제리 해안 도회지였기 때문입니다.
식민통치를 하면서 알제리 북부 해안지대가 프랑스 남부 해안지대와 유사한 자연환경을 가졌음을
파악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를 제2의 프랑스로 만들어 영구 지배하겠다는 계획으로 강력한
프랑스화 정책을 추진했으니.... 알제리 내륙이 건조하고 척박한 것과 다르게 해안지대는
겨울에 춥지도 않으면서 여름에는 지나치게 덥지도 않고 비가 적당히 와서 토질이 비옥했습니다.
1837년 프랑스 군의 콩스탕틴 함락으로 해안지대를 장악한 프랑스는 다른 프랑스의 식민지와
달리 알제리 만큼은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취급되었고, 실제로 프랑스 본토의 행정구역과
동일한 데파르트망을 설치하여 데파르트망 지사가 파견되어 알제리 지역을 관할하였습니다.
1877년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 서부 오랑에서 부터 동부 콩스탕틴에 이르는 거의 전 지역에서 최악의
기근이 발생했고, 가뭄과 굶주림이 188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으니 이 과정에서 알제리 내륙의 농촌
경제는 몰락했지만 북아프리카의 가축 교역을 장악한 마르세유의 자본가들에게는 횡재로 작용했습니다.
가뭄으로 물과 초지가 사라지면서 가축들이 전멸할 위기에 처하자 내륙의 농민들은 거래상들에게
가축을 헐값에 팔아야만 했으니 양 수출이 두 배로 증가하는 사이에 밀과 보리의 수출은 절반
으로 줄어들었으니 알제리인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중요한 재산이었던 가축을 처분하였고,
내륙 농민 상당수는 도시로 이주해 유럽인, 유대인들과 격리된 장소에서 빈민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수많은 유럽인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알제리로 이주했는데 1950년대말 유럽계 이주민들의 수는 알제리
인구 1000만명중 100만명 넘게 차지했으며... 중세부터 알제리에 거주하던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프랑스
식민통치의 부역자가 되었고, 알제나 오랑등 주요 도시들은 유럽 분위기가 짙게 나타나는데, 검은 발
이라는 뜻의 피에 누아르(Pied-Noir) 라고 불리며 식민 지배시기 알제리에서 기득권을 독차지했습니다.
프랑스 극우 진영과 미국의 우파 역사가들은 프랑스가 알제리를 근대화시켰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프랑스의 인프라 투자는 피에 누아르들이 대거 정착한 식민도시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정작 알제리
현지인들은 비옥한 해안가의 옥토들을 빼앗기고 추방당한 뒤 내륙의 척박한 토지를 경작해야 했습니다.
피에 누아르들의 소득이 계속 증가하는 것과는 반대로 알제리 현지인들의 소득은 인구 증가
와 더불어 계속 감소하였으며, 피에 누아르들에게만 평등 교육이 진행되고 무슬림들을
일부러 학교 교육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우경화 정책이 시행되었으니 알제리 독립
이후에는 중학교만 졸업해도 엘리트 대우를 받거나 교사를 할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100년 넘게 지배를 받으면서 피지배층인 아랍계의 불만이 커지고 프랑스 식민 제국이 쇠락해
가면서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중심으로 8년간 프랑스와 격렬한 알제리 전쟁을
벌인 끝에 1962년 독립을 이루는데 독립 과정과 직후 프랑스군에 부역하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싸운 알제리인들은 보복으로 학살당하거나 프랑스 본토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알제리 독립 전쟁'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 민족해방 전선(FLN) 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전쟁
이니 프랑스 의회는 전쟁이 끝난지 37년 만인 1999년 6월에에 "전쟁" 이었음을 인정하였는데
석유와 가스 등 막대한 국부를 잃고, 전쟁중 프랑스 제4공화국이 붕괴되었으며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베트남) 전쟁,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과 더불어 유럽 식민지 열강의 식민지 재침입니다.
전세계적 탈식민지화 운동에서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게릴라전, 민간인에 대한 테러, 양측의 고문 자행,
프랑스군의 대테러 작전등 복잡한 성격을 보였는데... 프랑스는 알제리를 북아프리카 지리적 요충지
로 여겼으며,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 횡단정책의 발판인데, 1830년 오스만 제국령 알제리 지방
총독에게 프랑스 외교관이 부채로 뺨을 맞고 쫓겨난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알제리 정복을 결의합니다.
프랑스는 알제리 북부 지중해 바르바리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공격을 가해 오스만 제국의 지방 총독인
알제리의 술탄을 제거하고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았으니... 이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세계가
로마제국 이후 아프리카에서 도시를 넘어 지역 단위의 정복을 다시 시작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알제리는 수많은 항쟁과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나 프랑스 정부는 회유와 무력을 통해 식민지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 본토로 생각했으니 마르세유에서 지중해를 건너면 되는
가까운 땅으로 132년이 넘는 기간 기반시설에 투자를 많이 한 덕분에 해안가 대도시는 완전한
유럽식으로 만들었고 사막에 물을 끌어올려 개간해서 나무와 식물을 심어 녹림과 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알제리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했으니 프랑스 공군, 육군, 해군의 주요 군사기지와 많은 군수
물자 공장들도 알제리에 있었으며 그 유명한 프랑스 외인부대가 여기서 시작했는데...
다만 이러한 시설들은 프랑스 본국과 알제리에 정착한 프랑스인을 위주로 한
유럽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정작 알제리인들은 프랑스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절 알제리인들의 90% 가 문맹이었으며, 절대다수의 알제리인들은 프랑스 시민권
조차 받지 못했고 가난에 시달렸으며 20세기 초반부터 알제리인들이 이슬람교를 버리면 프랑스
시민권을 주었으나 조건에 응해 이슬람교를 버리는 알제리인들은 매우 적었고 비참한
현실은 알제리인들로 하여금 프랑스에 대한 반감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저절로 갖게 해주었습니다.
좌파 성향이 강한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알제리인들의 독립과 저항 의지를 없애려면
그들을 프랑스인들과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으나, 프랑스는 알제리
인들의 비참한 사정을 알면서도 우격다짐으로 무시하고 비참한 상태로 두었으니
이러한 프랑스 본국의 오만함은 알제리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만들어낸 텃밭이었습니다.
현지에 건너와 사는 피에 누아르(Pied-Noir)라고 불리는 알제리 거주 백인과 그 후손들은 알제리인
1천만명의 10분지 1인 100만명을 헤아렸는데, 샤를 드골은 "모로코와 알제리는 아프리카 대륙에
속하지도 않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에는 더더욱 속하지 않으며, 우리와 똑같은 유럽 민족의
피가 흐르는 형제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환경의 차원이 매우 다르다" 라는 충고(?)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본토가 점령되면서 프랑스 당국의 권위는 떨어졌고,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독립을 요구하는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치솟았는데, 그럼에도
자유 프랑스 당국은 구 정권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타협을 거절했으니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자 알제리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이 일시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을 외쳤습니다.
5월 1일 메이데이에 시위대가 식민당국과 충돌해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사망자 5명이 발생했으며
종전날 시위가 벌어진 곳들 중 스티프 주 “세티프” 시에서는 참극이 발생했으니 5천명에 달하는
무슬림 시위대가 프랑스인 상점가를 행진하자 경찰과 헌병대가 막아섰는데 독립을
상징하는 알제리 깃발을 빼앗으려 하는 도중에 쌍방간 총격전이 시작되어 대규모 충돌이 벌어집니다.
프랑스 경찰과 헌병대에서 일부 총상자가 발생하고, 시위대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이때 알제리 깃발을 들고 있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한 12살 소년 사르
알 부지드는 이후 알제리 독립의 상징이 되었으며, 분노한 시위대로 인해 주변 지역으로
폭동이 확산되면서..... 비무장 민간 유럽인에 대한 공격으로 102명의 유럽인이 사망했습니다.
프랑스는 반항을 무력으로 제압할 명분을 주는 기회로 여겼으니 세티프에는 계엄령이 선포
되었고, 프랑스 경찰뿐 아니라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정규군, 알제리인-튀니지인-모로코인
-세네갈인 식민지 부대에 프랑스 외인부대 까지 보복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심지어
이탈리아군 포로들까지 무장시켜서 동원되었고 백인 민간인들로 구성된 민병대까지 가담합니다.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케라타” 라는 해안 마을에는 해군 순양함 뒤게-트루앵 함이 함포사격
을 하고 내륙의 40개 마을에는 공군 급강하폭격기가 폭탄을 퍼붓는 학살을 벌였으니....
당시 인구 4천명이 넘은 마을이 알제리 깃발을 내걸었다고 프랑스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4천명 중에 겨우 3명만 살아남은 참사” 가 벌어지기도 했으니 참으로 잔혹 했습니다.
5월 16일까지 계속된 학살로 죽은 알제리인의 숫자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1,020 ~ 1,300명이라는
숫자를 공식적으로 내세웠으나 그 뒤에 이 수치는 2만명으로 늘었고 알제리인들은 45,000명은
된다고 주장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에 지원해서 나치 독일군과 싸우고 돌아온
알제리 병사들이 이 꼴을 보고 말았으니, 이들 중 다수가 FLN 에 투신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북아프리카인의 숫자는 12만
3천명임)도 속속 독립군에 가담했으니, 실전 경험을 가진 이들이 참여하면서 오합지졸이던 FLN
은 이전과 다르게 군조직을 잘 정비하고 프랑스 군경을 괴롭히게 되니,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
벤 벨라와 제2대 대통령 우아리 부메디엔은 2차대전에 참전한 프랑스 육군 부사관 출신이었습니다.
학살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프랑스에서는 알제리의 자치권을 확대하겠다고 나섰지만 고작 알제리
인구의 13% 를 차지하는 유럽계 백인과 나머지 알제리 현지인한테 같은 숫자의 의석이 배당
되도록 선거구를 조작했으며, 그나마 치러진 선거도 부정선거로 얼룩졌으니 이런 기만적인
조치에 알제리인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지만 힘으로 일어서자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1954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하고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프랑스 정부
는 알제리 독립운동을 유혈폭동으로 규정하고 NATO 에 파견된 정예 사단까지 빼내 무력 진압을 시작
하는데... 같은 시기 똑같이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던 베트남에서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군
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하자 이 사실이 알제리인들에게도 크게 자극을 주었습니다.
'국방부의 전쟁' 으로 일컬어지는 이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전력에서는 월등하게 앞섰으나 강경책으로
일관한 탓에 알제리 정치 지도자들을 끝장내버려 FLN 내부투쟁에서 군사 지도자들이 정치 지도자를
선전책 정도로 몰락시키고 득세하게 만들어 이들과의 협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정규전이 아니라
아랍제국과 소련의 지원 속에서 게릴라와 테러를 일삼는 FLN의 활동을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FLN 이 1955년 필립빌 학살을 일으켜 100여명의 프랑스 민간인을 죽이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알제리인 1천명 이상을 죽이는 보복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는데, 이 “10배 비율” 은 서양에서는
공통적인 것이니.....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에서 승리해 빼앗은 필리핀에서 독립전쟁이 일어
나자 미군이 1명 죽으면 근처 마을로 들어가 무고한 일반 청년 10명을 죽이는 것과 유사합니다!
프랑스는 학살까지 저지르면서 알제리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으니 프랑스 제3공화국(1870
~1940) 시절에 프랑스 헌법상 프랑스 본토는 유럽 프랑스와 알제리 프랑스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다른 프랑스의 식민지는 별도의 통치기구로 관리했는데
오로지 알제리만 프랑스 본토로 구성하여...... 프랑스 헌법을 적용했을 정도 였습니다.
알제리인도 보복 학살과 고문을 자행하는 것으로 맞서 사태는 악화되어 갔으며 1957년 알제 전투에서
프랑스는 수만명을 불법 체포해 3천명을 처형하는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FLN 내부 조직망을 일망타진
하는 군사적 대승을 거두었으나, 부녀자와 노인까지 체포해 고문한게 폭로되면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어 도덕적으로는 패배하게 되었고 병사와 장교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져 근무 거부, 탈영이 이어집니다.
스페인과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프랑스군의 마구잡이 학살과 진압은 전세계적으로 욕을
먹었으며..... 소련과 유고 및 쿠바등 다른 공산권 나라들이 전쟁에 끼어들 기미가 보이자
일이 커질것을 우려한 미국은 알제리 독립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가하니 알제리와 같이
프랑스 식민 통치를 겪었던 튀니지나 모로코같은 북아프리카 국가들도 프랑스를 비난합니다.
특히 튀니지는 자국에 알제리 독립운동가들의 망명과 독립운동 활동을 허용하며 사실상 알제리를 지지
했으며 이에 프랑스는 알제리 임시정부가 있는 주권국가인 튀니지를 반란군 소굴로 규정, 폭격을
감행해 알제리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튀니지인들을 사살했는데, 튀니지는 프랑스 공격과 학살에 분노
했지만 힘이 없다보니 프랑스군에 대응하지 못하는등 어쩔 방도가 없었으니 약소국 서러움인가 합니다?
독립 운동에 유화적이던 프랑스 좌파 사회당 정권의 르네 코티는 여론의 반발과 프랑스 정규군의
쿠데타 위협 속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며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니... 프랑스군도
67만 대군 중에 9만여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며 150만에 이르는 알제리인들과
6천명에 이르는 프랑스계 알제리인들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여론도 전쟁에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인도차이나(베트남) 전쟁에 징집되어 싸우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알제리에서 똑같이 전쟁을 치루면서
징병 기피자들만 늘어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랍 국가들과 소련의 압력은 가중되었으니 프랑스군
장병들 중에서 전쟁에 회의를 느낀 일부 장병들은 탈영을 하거나 심지어 FLN 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우리는 나치 SS 와 다르다!" 라며 나름 자부심을 지녔으며...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먼 훗날 우리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라고 밝혔는데... 1956년 8월 말, 프랑스군 내부에서 벌어지는 알제리인들에 대한
고문에 항의하는 뜻으로 자크 파리스 드 볼라르디에르 장군은 자진해서 군복을 벗었습니다.
1956년 5월 알제리 제8공수 연대에 징집된 노엘 파블리에르 육군 하사는 약식 처형을 앞둔
알제리인을 풀어주고 탈영해 알제리 민족해방군에 들어갔고.... 10개월후 튀니지로
넘어갔으니 1928년 3월 31일의 법 90조에 따르면, 원대 복귀 불이행은
1개월에서 1년의 구금형에 처할수 있었으니 탈영으로 두차례의 궐석 재판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조국을 배반한적이 없다는 것, 잘 알고 계시죠. 전, 배반과는 정반대로, 알제리인이 사랑한
프랑스를 그들이 미워하지 않도록 막고있습니다. 프랑스인이 다 식민주의자는 아니며, 우리 공수부대는
나치 SS 가 아니라는 증거가 바로 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옳았음이 밝혀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좌파 성향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아예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기사를 실은 신문을 발행하거나
적인 FLN 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고, 알제리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프랑스군에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된 알제리인들을 무료로 변호해 주는 변호사가 되기도 했으니,
이들은 프랑스군이나 정부로 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고 프랑스 정부의 암살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내 좌-우익간 여론이 분열되며 피해가 누적되어 갔지만 1957년의 알제 전투에서 프랑스는
다시한번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서 알제리 전쟁의 행방은 오리무중으로 치달았으니.... 이 와중에
1958년 5월, 알제리에 대해 유화적인 중도우파 플림맹 정부가 출범하자 옛날 스페인 처럼 알제리
주둔군을 시작으로 군부는 총궐기해 정부를 붕괴시키는 한편 드골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추대합니다.
드골은 즉각 이 쿠데타에 호응하여 군부의 지지, 사회당과 공산당의 갈등 등을 십분활용하여 단독 정권
을 수립하는데 성공하였으니 5월 위기라 불리는, 쿠데타와 정상적 레짐 체인지가 뒤섞인 기묘한
과정을 거쳐 제4공화국은 무너지고 1958년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제5공화국이 들어섭니다.
드골 정부는 초기에 강력한 군사작전으로 FLN 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실시하는 한편으로
협상을 제시했으나 FLN 이 호응하지 않자.... 여성 해방정책 등으로 알제리 내부 프랑스
지지 세력이 확고하다는 오판 속에서 국민투표로 승부가 가능하다고 여긴 드골이
1959년 "알제리의 운명은 알제리인이 결정한다" 는 파격적인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격렬히 반발한 군 지휘관들을 즉각 숙청한 드골은 자신의 알제리 정책을 강행하였고, 드골
에 의해 1961년 사실상 평화협정 체결이 확정되자... 하나회 처럼 군 내부 사조직인 OAS 소속
극우파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알제리에 주둔하였던 제14, 18 공수연대 외 제1 외인공수
연대를 동원해 알제리의 주요 전략거점을 수시간 동안 무력으로 장악하는 군사 반란을 일으킵니다.
반란이 번져나가자 드골 대통령이 육군 정복차림으로 방송에 나와서 반란에 동참하지 말 것을 호소했으며
반란에 참가한 3개 공수연대는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의 0.6% 에 불과했기 때문에 결국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며, 반란에 참가하였던 공수연대들은 해체되었고 지금도 그 번호가 결번으로 남아 있지만 OAS에
가입한 일부 반란군은 탈영하여 드골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하고 알제리 내에서 무차별 테러를 자행합니다.
이때 적인 프랑스군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손을 잡았으니.... 고려시대에 몽골군과
고려군이 손을 잡고 함께 진도와 제주의 삼별초를 토벌한 것이나, 1894년 11월
동학농민운동때 일본군과 고종의 명을 받은 조선군 합계 3,400명이 함께 손을 잡고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2만명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을 전멸시킨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적군이었던 프랑스군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서로 함께 손을 잡고 반란군을 진압하게
되는데 쿠데타가 실패한 이유 중에 하나는 매스컴의 발달이었으니..... 징집병
중에 다수가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 본토에서 나오는 방송을 들은
이들은 쿠데타에 동참한 장교들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여 쿠데타를 무산시켰습니다.
정권을 잡은 드골정부는 알제리에 "1. 알제리는 프랑스의 한 주가 되며 프랑스인들과
동등한 혜택을 받는다. 2. 알제리는 프랑스의 자치 공화국이 된다.
3. 알제리는 국민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된다" 제안을 내놓았고,
알제리 독립세력은 3번안을 선택하여 1962년 에비앙 합의를 통해 독립을 쟁취합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병력 340,000명 중에 141,000~ 153,000명이 전사하고 160,000
명이 부상했으며 민간인은 1천만 인구 중에 무려 210만명이 사망했다고 발표
했는데, 이는 알제리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니..... 실제로는 1945년 봉기 이후
희생자를 모두 합쳐서 인구의 15% 인 150만명 정도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군은 670,000명과 아르키(알제리계 프랑스인) 260,000명으로 이 중에 프랑스군
은 29,000명이 전사하고 65,000명이 부상했으며 아르키는 30,000~ 90,000명
이 전사했고 그외에 프랑스계 알제리 민간인 3,000~ 6,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에 정석적인(?) 진압을 시도하던 프랑스군은 FLN 의 게릴라전에 당하자 솟친 나머지 방향을
전환해 FLN 과 똑같이 암살, 테러에다가 전보다 더한 학살로 무자비하게 대응했는데 압도적
인 전력을 갖춘 프랑스군이 똑같은 전법으로 나서자.... FLN 의 활동은 급격하게 약화되었습니다.
알제리 독립 전쟁에서 여성이 대거 민족해방전선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 덕분에 알제리는 다른 보수
이슬람 국가들에 비해서 여성 인권이 진보적으로 보장받는 결과를 낳았으나... 인구 대다수인 아랍계
와 오랫동안 살아오던 이마지겐(베르베르인)들 사이의 갈등이 고민거리로 남았는데 해안지대에 살며
프랑스어를 쓰는 아랍인 상류층이 척박한 내륙에 사는 베르베르인들을 촌놈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962년 프랑스에서 독립한후 알제리에는 민족해방전선(FLN)에 의한 일당제 정권이 들어섰고, 아흐메드
벤 벨라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965년 국방장관이었던 후아리 부메디엔의 쿠데타로 쫓겨나고
부메디엔은 독재자로 집권하면서 석유를 국유화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비동맹
정책을 폈고 오일쇼크를 맞아 막대한 외화가 알제리로 들어오게 되자 경제적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
1990년 처음 열린 다당제 총선거에서 이슬람주의 정당인 이슬람해방전선(FIS)이 231석 중 188석
을 가져가는 압승을 거두었으며, 여당 FNL은 15석에 그쳐 참패하니.... 이집트처럼 이슬람
주의 정권이 집권하는걸 용납할 수 없었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을 축출하고는
FIS 를 불법화시키면서 이슬람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켜 알제리 내전(1991~2002) 이 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