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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정사 玉淵精舍
옥연정사 가는 길
이곳 옥연정사(玉淵精舍)를 방문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회마을에서 배를 타고 들어 갈 수 있다. 마을보존회에서 나룻배를 운영하고 있다. 다른 한 방법은 하회마을로 들어오지 말고 풍천면 사무소 맞은 편으로 난 도로를 이용하여 들어갈 수 있다. 광덕교를 지나 좌회전하여 약 500m정도 가면 화천서원과 주차장이 있다. 이 방법은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 부용대(芙蓉臺)에 이르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금은 화천서원을 지나 옥연정사의 대문채로 바로 들어오는 것이 보통이지만, 류성룡이 옥연정사에 거처하던 당시만 해도 하회마을 뱃길이 거의 유일한 접근법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대문채와 사랑채가 근접해 있는데 비하여, 옥연정사는 그 거리를 멀리 둔 것도 주로 하회마을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와 곧장 사랑채 쪽으로 출입하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고즈넉한 분위기와 기품을 지키면서 함부로 사람을 들이지 않는, 그러나 가까운 벗들은 이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옥연정사(玉淵精舍)는 1586년(선조 19)에 서애 류성룡(西涯 柳成龍)이 세운 것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그후 류성룡이 세상을 떠난 후, 조선시대에 증축된 것으로 안채 8칸, 바깥채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졌다. 류성룡은 작은 서당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늘 걱정하던 중, 탄홍(誕弘)이라는 스님이 10년 간 시주하여 옥연정사를 완공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고 하였는데, 옥연(玉淵)은 바로 정사(精舍) 앞에 흐르는 깊은 못(池)의 색조가 마치 옥(玉)과 같이 맑고도 맑아서 정사(精舍)라고 류성룡이 이름지었다. 건물의 특징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터가 넓고 평탄한 것과, 사랑채와 별당채는 남향으로, 안채와 행랑채는 동향으로 지은 것이다.
이곳 옥연정사는 1576년에 집짓기를 시작하여 그후 10년만인 1586년에 완공되었다. 서애 류성룡의 나이 45세 때이다. 집을 완공한 4년 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다. 가난하여 집 지을 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홍(誕弘)이라는 스님이 그 뜻을 알고 재정적인 도움을 주어 마침내 10년만에 완공된 것이다. 1605년 낙동강의 대홍수로 하회마을의 삼칸 초옥(草屋)을 잃고 이곳에 은거하며 징비록(懲備錄 .. 국보 제132호)을 저술하였다.
옥연정사는 문간채, 바깥채, 안채, 별당까지 두루 갖추고 있으며, 화천(花川)이 마을을 시계방향으로 휘감아 돌다가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옥소(玉沼)의 남쪽에 있다. 소(沼)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문간채는 왼편 남쪽부터 차례로 측간과 대문을 두고 오른편에 광을 3칸이나 두고 있는 '一'자형이다. 바깥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정사각형의 4칸짜리 대청의 오른쪽,왼쪽으로 1칸 반의 방을 두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8칸 겹집형식으로 부엌이 중앙에 있고, 방이 부엌을 중심으로 가로, 세로 2칸씩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별당채는 바깥채와 안채 사이에 있는데, 앞면 3칸, 측면 2칸으로 서쪽 모서리에 두 칸의 방이 있으며 나머지는 마루로 되어 있다.
서애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인정될 만큼 뛰어난 학자로 출발하여 명정치가, 전략가의 자질을 발휘하고, 은퇴 후에는 사회비평가로 그리고 문학가로서의 풍모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이상(理想)이었던 통합적 인간의 전형을 그의 생애에서, 그의 옥연정사 건축에서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다.
절벽 위 좁은 대지에 터를 잡고, 건물들 앞을 지니가는 폭 넓은 통로 양쪽에 대문을 달아서 통로를 마당으로 이용하는 수법을 이용하였다. 건물은 정사 두 동과 행랑채 2동으로 이루어졌다. 두 채의 정사(精舍)는 서로 엇갈려 있는데, 앞쪽의 것은 서애 류성룡이 사용하던 곳이고, 옆의 것은 제자들의 정사로 추정하고 있다. 안 행랑채는 앞뒤에 툇마루를 가지고 있는 두줄백이 겹집이다. 앞의 행랑채도 감시하고, 안쪽 정사(精舍) 건물의 시중도 들 수 있도록 절묘하게 구성된 건물인 것이다.
옥연서당기 玉淵書堂記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이 거처하던 가옥이었다. 이곳은 대가족의 살림과 사당이 있는 종택(종택)과는 다른 '류성룡'만의 학문과 만남의 독립공간이었다. 스스로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임진왜란을 어렵게 치른 그의 삶, 생각과 인생이 베어 있는 곳이다.
그는 탄홍스님의 도움을 받아 옥연정사를 마련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옥연서당기(玉淵書堂記)'로 남기었다. 그는 '옥연서당기'에서 ' 중년에 망령되게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 골몰하기를 20년이 되었다. 발을 들고 손을 놀릴 때마다 부딪칠 뿐이었으니, 당시에 크게 답답하고 슬퍼하면서, 이곳의 무성한 숲,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 고라니의 성품은 산야에 알맞지 성시(城市)에 맞는 동물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임진왜란과 권위적인 왕조, 권력싸움에 심한 시달림을 겪은 한 학자의 모습이 진하기만 하다.
내가 원지정사(遠志精舍)를 지은 뒤에도 한이 되는 것은 촌락이 멀지 않아 그윽한 맛을 누리기가 만족스럽지 못하여서이다. 북쪽 못을 건너서 돌벼랑 동쪽에 특이한 터를 얻었다. 그 자리는 앞에는 호수의 풍광을 안고 뒤로는 높은 언덕을 업었으며, 오른쪽은 붉은 벼랑이 치솟고, 왼쪽은 흰 모래가 띠를 두른 듯한 곳이다. 남쪽으로 바라보면 멀리 뭇 산봉우리들이 들쭉날쭉 서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읍하는 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이요.
어촌 두어 점이 나무 사이로 강물이 어리어 보일락 말락 하며, 화산(花山)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달려오다가 강에 멈추었다. 매양 달이 동쪽 산봉우리에서 떠올라 차가운 산그림자를 거꾸로 반쯤 호수에 드리우고 잔잔한 물결 하나 일어나지 않아 금빛과 구슬 그림자가 서로 머금은 듯한 풍경이야말로 유달리 즐길 만한 것이었다. 그 자리가 인가(人家)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앞에는 깊은 못이 막혀 있어 사람들이오고자 해도 배가 아니면 통할 수 없다. 그래서 배를 북쪽 강기슭에 매어 두면 손님이 와서 모래밭에 앉아 소리쳐 부른다. 오래도록 응답이 없으면 스스로 돌아가게 되니, 이것 또한 세상을 피해 그윽이 들어앉아 사는 일에 일조가 된다.
이에 내가 마음 속으로 이것을 즐겨 조그만 집을 지어서 늙도록 조용히 거처하는 곳으로 삼고자 하나, 다만 집이 가난하여 도무지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마침 산승(山僧) 탄홍(誕弘)이란 자가 그 건축을 주관하고 속백(粟帛)으로 물자를 대겠다고 자천하였다. 일을 시작한 병자년(1576년. 선조 9)으로부터 10년이 지난 병술년(1586년. 선조 19)에 겨우 완성되어 깃들고 쉴 만하게 되었다.
집 구조는 당(堂)이 2칸인데 감록(瞰綠)이라고 부르니, 왕희지(王羲之)의, ' 우러러 푸른 하늘가를 보며 (仰眺碧川際), 아래로 푸른 물 구비를 내려다 본다 (俯瞰綠水猥) '는 말에서 취하였다. 이 당의 동쪽에는 한가할 때에 거처하는 집이 2칸이 있는데 이름을 세심(洗心)이라고 지었으니, 주역 계사(繫辭) 가운데의 말뜻을 취한 것으로 혹 여기에 종사하여 만에 하나라도 이루고자 함이다. 또 재실 북쪽에 집이 3칸인데 지키는 스님을 두고 불가의 학설을 취하여 완적(玩寂)이라 하였다.
동쪽에 서재 2칸을 지어 찾아오는 친구를 대비한다는 뜻으로 원락(遠樂)이라고 하였으니, ' 먼곳으로부터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의미에서 취하였다. 이 서재에서 서쪽으로 나가 조그만 다락 2칸을 만들어 세심재(洗心齋)와 더불어 나란히 앉혔는데, 애오(愛吾)라고 이름하니, 도연명의 시에 '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함이라 (吾亦愛吾廬) '라는 말에서 취하였다. 모두 합해서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는 편약을 내걸었다. 대개 강물이 흐르다가 이곳에 이르러서는 깊은 못이 되었는데, 그 물빛이 깨끗하고 맑아 玉과 같은 까닭에 이름하였다.
사람이 진실로 그 뜻을 본받고자 한다면 구슬의 깨끗함과 못의 맑음은 모두 군자가 귀하게 여길 도이다. 내가 일찍이 옛 사람들의 말을 살펴보건데, ' 인생은 스스로 뜻에 맞는 것이 귀하지, 부귀가 어찌 귀하리오 ' 하였거니와, 내가 비루하고 옹졸하여서 평소부터 행세하기를 원하지 않은 것이 비유하자면 '미록(黴鹿)'은 성품이 산과 들에 알맞지 도시에 맞는 동물이 아니다 '라는 말과 같다.
중년에 망녕되어 벼슬길에 나아가 명성과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20여 년을 골몰하였다. 발을 들고 손을 놀릴 때마다 걸핏하면 놀라서 부딪칠 뿐이었으니, 당시에 크게 답답하고 무료하여 슬퍼할 적마다 이곳의 무성한 숲,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지금다행히 임금의 은혜를 입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오니, 벼슬살이의 영화는 귓가에 지나가는 새소리가 되었고, 아름다운 한 언덕 한골짜기의 즐거움이 깊어간다.
이때에 나의 집이 마침 이루어졌으므로 장차 문을 걸고 싹 물리쳐 쓸은 듯 깊이 방 안에 들어박혀 지내며, 산의 계곡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기도 하고 도서는 즐겨 찾아 읽을 정도로 만족하며, 성긴 밥이 앗있는 고기의 기름짐을 잊기에 족하다. 좋은 때 아름다운 경치에 정겨운 벗들이 우연히 모여들면 그들과 함께 굽이진 계곡을 거슬러 찾기도 하며 암석에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흰구름을 읊기도 하면서 호탕하게 놀아 물고기와 새들까지 모두 흠뻑 즐겁게 하면서 시름을 잊으리라. 아, 이것 또한 인생이 스스로의 뜻에 맞는 큰일이니 밖으로 달리 그 무엇을 그리워하겠는가. 내 이 말이 굳지 못할까 두려운 나머지 문득 벽에 써서 붙여 스스로를 경계한다. 병술년 늦여름, 주인 서애거사(西厓居士)는 적는다.
종송 種松
하회마을에는 특이하게도 식수목이 4곳에 있다. 한곳은 마을 한복판 삼신당(參神堂)의 한 곳인 하당(下堂)에 입향조 류종혜(柳從惠)가 심은 수령 600여 년의 느티나무이고, 다음은 형, 류운룡(柳雲龍)이 부용대가 누르는 기(氣)를 막기 위해 조성한 만송정(萬松亭), 그리고 서애 류성룡이 만년(晩年)에 옥연정사 마당에 심은 소나무, 그리고 23대 종부(宗婦)인 무안 박씨가 심었다는 충효당(忠孝堂) 만지송(萬枝松)이 그것이다.
화천(花川)이 마을을 시계 방향으로 돌다가 방향을 바꾸는 곳에 옥소(玉沼)가 있는데, 옥연정은 이 옥소의 남족에 있으므로 소(沼)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서애 류성룡은 호를 서애(西厓 ... 서쪽 벼랑)로 짓고 마을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스스로 외로운 '고라니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다.
류성룡은 위 사진의 소나무를 심고 그 소회를 '종송(種松)'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 자신이 어린 소나무를 심으면서도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자랐을 때를 보지 못할 것임을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류성룡은 이 소나무를 심은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옥연정사 앞마당에 있는 수령 450년 된 소나무가 바로 종송(種松)이다.
二十九日. 令子弟及齋僧數輩. 種松凌波臺西三四十株. 余掌讀樂天種松詩云. 如何年四十. 種此數寸枝. 得見成陰否. 人生七十稀. 今余年六十三而始種. 此可自笑. 偶作數句語爲 ....
스무아흐렛날 자제들과 재승(齋僧) 몇 사람을 시켜 / 능파대 서쪽에 소나무 삼사십 그루를 심었다 / 내 일찍이 백낙천의 ' 소나무를 심고 '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는데 / 그 시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나이 사십이 되어 몇 그루 어린 나무를 심는가 / 인생 칠십은 예부터 드물다는데 / 언제 나무가 자라 그늘을 볼 것인지 / 올해 내 나이 예순 셋인데 새삼 나무를 심었으니 / 내가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 떠오르는 감상을 재미 삼아 몇 구절 시로서 옮겨 본다.
광풍제월 光風霽月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처럼,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한 말이다.송서(宋書) 주돈이전편(周敦이傳篇)에, 북송(北松)의 시인이자 저술가인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를 존경하여 쓴 글이 있다. 정견칭. 기인품심고. 흉회쇄락. 여광풍제월 (庭堅稱. 其人品甚高. 胸懷灑落. 如光風霽月 ... 정견이 일컫기를. 그의 인품이 심히 고명하여 마음결이 시원하고 깨끗함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날의 달과 같도다 )
이곳에서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다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후사정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 .. 국보 제132호)을 저술한 역사의 현장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던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이곳 옥연정사에서 기록해 간다. 임진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런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민족적 숙원에서 ' 꾸짖을 징(懲), 삼갈 비(毖) '을 사용하여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한 것이다. '징비(懲毖)란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 豫其懲而毖後患 '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이 징비록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까지 7년 간의 기사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저자 류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저술한 것이다. 그리고 류성룡의 외손 조수익(趙壽益)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손자가 '조수익'에게 부탁하여 1647년(인조 25)에 간행하였으며, 자서(自敍 .. 자신이 쓴 서문)가 있다. 한편, 처음 간행은 1633년 아들 ' 진(袗) '이 서애집(西厓集)을간행할 때 그 속에 수록하였고, 10년 뒤 다시 16권의 '징비록'을 간행하여 이후 원본의 체재를 갖추었다는 설도 있다.
징비록의 내용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의 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대일관계에 있어서 교린사정(交隣事情)도 일부 기록하였는데, 그것은 임진왜란의 단초(端初 ... 실마리나 배경)를 소상하게 밝히기 위함이었다. '징비록'은 16권본 이외에 이본(異本)으로 일종(一種)이 있다. '근포집(芹圃集)' 과 '군문등록(軍門藤錄)'을 제외한 '징비록' 본문과 '녹후잡기(錄後雜記)'만으로 된 2권본(二券本)인데, 간행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저자 류성룡 자신이 쓴 '징비록'의 서문에 ' 매번 지난 난중(亂中)의 일을 생각하면 아닌게 아니라 황송스럽고 부끄러움에 몸둘 곳을 알지 못해왔다. 그래서 한가로운 가운데 듣고 본 바를 대략 서술하였으니, 임진년(壬辰年 .. 1592)에서 무술년(戊戌年 .. 1598)까지의 것으로 모두 약간의 분량이다. 이에 따라 장계(壯啓 .. 관찰사나 왕의 명을 맏고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왕에게 올리는 글), 소차(疎箚 ..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 문이(文移 .. 상급관청과 하급 관서 사에에 오가는 공문) 및 잡록(雜錄)을 그 뒤에 부록하였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본(異本) 2권은 내용이나 체재가 결본(缺本 ... 일부가 빠졌거나 없어진 책)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초간 '징비록'본에 자손들이 '근포집'과 '군문등록'을 빼놓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실패한 역사로부터 배우는 교훈 '징비록'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란 뒤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에 간혹 난(亂) 이전의 일까지 섞여 있는 것은 난(亂)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생각하면 임진(壬辰)의 화(禍)야말로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십 여일 동안에 세 도읍이 함락되었고, 온 나라가 모두 무너졌다. 이로 인하여 임금은 마침내 파천(罷遷)까지 했다. 그리고서도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천운이다. 또한 조종(조종)의 어질고 후한 은혜가 백성에게 굳게 맺어져서 그들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으며, 임금의 중국을 섬기는 성심이 황제를 감동시켜 명나라의 원군이 여러 번 나온 때문이었으니 그렇지않았던들 우리나라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 하노라 했으니 이것이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징비록의 짤막한 서문에서 서애 류성룡은 붓을 든 동기를 간명하게 술회하고 있다. '시경'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지나간 일을 징계(懲)하고,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毖)하노라. 이것이 바로 내가 징비록을 쓰는 연유이다.
징비록에서 가장 끔찍한 대목은 이여송 부대가 서울을 수복한 직후의 기록이다. 성 안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백에 하나도 성한 사람은 없었고 모두가 굶주리고 병들어 눈뜰고 볼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거리마다 인마(人馬)가 썩는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지나가야 했다. 선조가 10월 환도한 이후의 서울 정경은 더욱 참혹하다. ' 심지어는 부자와 부부가 서로 뜯어 먹기에 이르렀다. ( 至父子夫婦相食 ). 그리고 노천에 뒹구는 뼈만 짚단같이 늘어져 있었다 '
상식(相食)이라는 말을 일종의 수사법으로 읽어야 할 것인지,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는다 (人民相食) '는 말은 명나라 장수가 우리쪽에 보낸 치욕적인 공문에도 등장하고 있으므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도 틀린 일은 아닐 것이다.
서애 오솔길
부용대 벼랑에 난 좁은 길을 걷는다. 아래는 깎아지른 벌벽, 한 뼘의 여유도 없는 가파른 길은 그 아래 시퍼렇게 흐르는 강물 위로 현기를 일으킨다. 아우 '서애 류성룡'을 대신하여 종가(宗家)를 지킨 겸암 류성룡이 겸암정사를 오가며 걷던 길이다. 아우 류성룡의 옥연정사(玉淵精舍)가 나루 앞에 널찍한 자리에 터를 잡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겸암정사는 벼랑 위 비좁은 터에 옹색하게 들어 앉아 있다. 그러나 겸암정사는 아우의 옥연정사보다 20여 년 앞서 지어졌다. 그러나 장소 탓인가, 겸암정사(謙菴精舍)는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아 늘 적요 속에 묻혀 있다.
역사는 늘 승자(勝者)의 편이었고, 삶도 마찬가지이다. 항렬과 가족의 위계(位階) 따위와는 상관없이 힘의 균형은 부(富)와 권력(벼슬)의 크기에 비례하여 기울어진다. 형제이었지만 영의정을 지낸 아우 류성룡에 가려 하회마을에서도 겸암 류운룡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겸암 류운용이 겸암정사를 지은 것은 그가 26살 때, 나룻배로만이 마을과 이어지는 외진 이 겸암정사에서 겸암은 글을 읽었고, 7년이 지나서야 그는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아우 서애 류성룡이 벼슬에 나간 후 무려 9년 후이었으니, 입신(立身)의 순서부터 형제는 달랐던 것이다.
형제의 길
고색창연한 옥연정사의 간죽문(看竹門)을 열고 400년 전 조선시대의 동양화 속으로 성큼 발을 내딛는다. 아침밥 짓는 연기가 물안개처럼 자욱한 강 건너 하회마을에서는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만이 낭랑하다. 행여 방해가 될세라 마을을 'S'자형으로 휘감아 도는 강물도 숨을 죽이고 산 새 조차 날게를 접는다. 서애 류성룡의 체취가 오롯이 남아 있는 부용대 절벽의 오솔길에는 오직 두루미 한 마리가 흰 옷을 입은 선비처럼 우아한 날개짓을 할 뿐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3살 위의 친형인 겸암 류운룡과 학문을 논하고 형제애를 돈독히 하기 위하여 하루에도 몇 차례나 오고갔던 '서애 오솔길'은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의 깎아지른 절벽에 외줄처럼 걸려 있다. 하회마을에서 바라볼 때, 낙동강 건너 부용대의 오른쪽 기슭에 자리잡은 옥연정사와 왼쪽 기슭의 겸암정사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서애 오솔길'은 절벽을 가로 지르는 약 300m의 외길로 지층과 지층 사이에 틈새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로 아찔하다.
이 오솔길의 출발점인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586년에 완공한 유서 깊은 고건물로 임진왜란 전란사인 '징비록'은 이곳에서 저술되었다. 앞마당에는 서애 류성룡이 심었다는 잘 생긴 노송 한그루가 선비의 품성을 닮았는지 고고한 기품을 잃지 않은 채 400여년 동안 인적이 드문 옥연정사를 지키고 있다.
당시 벼슬에서 물러나 하회마을의 원지정사(遠志精舍)에 기거하던 류성룡은 거의 매일 나룻배로 낙동강 화천을 건너 부용대의 옥연정사를 찾는다. 혹은 거인의 발가락 같기도 하고, 또는 연꽃을 닮은 문파대는 낙동강에 발을 담근 거대한 너럭바위로 류성룡은 이곳의 노송 그늘 아래에 앉아 나룻배를 기다렸다고 한다. 사람 한 명 겨우 지날 정도로 좁은 오솔길은 '달관대 (達觀臺)'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에서 시작된다.
멀리 본다는 뜻의 달관대에 서면 발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낙동강이 천년의 세월을 흐르고 있고, 쪽빛 하늘을 머리에 인 벼랑 끝 소나무는 먹잇감을 찾아 맴돌고 있는 솔개와 함께 고즈넉한 풍경을 그린다. '서애 오솔길' 최고의 절경은 부용대 중간 쯤의 절벽에 걸려 있다. 비라도 피하라는 듯, 지층이 지붕처럼 돌출된 오솔길에는 야생대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씨알 굵은 도토리는 벌써 뚝뚝 떨어져 다람쥐를 유혹하고 있다. 이따금 강 건너 하회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절벽에 둥지를 튼 산새들이 어지럽게 날아오르며 화답을 한다.
류성룡은 평탄한 부용대 고갯길을 나두고 하필이면 길이 끊기면 나무뿌리가 길을 이어주고 어깨를 펼만하면 무릎높이로 자란 잡초들이 발목을 잡는 절벽의 오솔길을 즐겨 찾았을까 ? 외줄처럼 위태롭던 오솔길은 노송 가지 사이로 류운용이 세웠다는 겸암정사가 보일 때 쯤 끝나고 있다. 이른아침부터 도포자락에 이슬을 묻히며 달려온 아우는 솔향 그윽한 솔밭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겸암정사의 형을 찾아 예를 갖춘다. 그리고 형제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낙동강물이 다시 방향을 틀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곳에 자리잡은 정자에 마주 앉는다.
간죽문 看竹門
부용대(芙蓉臺) 기슭에 자리한 옥연정사의 대문은 ' 대나무를 바라보는 문 ' 즉, 간죽문(看竹門)이다. 간죽문 대문을 나서면 강 건너 하회마을을 바라보며 대나무 숲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간죽문 안쪽에 서애 류성룡의 시(詩), 간죽문 편액이 붙어 있다.
노옹파오수 老翁罷午睡 늙은이가 낮잠에서 막 깨어나
부수행곡정 負手行曲庭 뒷짐지고 뜨락을 거닐도다
행처의이란 行處意易蘭 거닐다가 기분 더욱 상쾌해지면
출문간수죽 出門看修竹 문을 나서 대나무 숲을 바라보네
적여강풍회 適與江風會 강바람이라도 불어 나부끼면
청음산빙옥 淸音散氷玉 옥이 부서지는 해맑은 소리
시유고문인 時有叩門人 더러 나를 찾는 이 있는데
망형수주객 忘形誰主客 누가 주인이고 나그네인지 몰라라
세우춘강상 細雨春江上 봄 되어 강 위에는 보슬비 내리고
전산담장석 前山淡將夕 앞산에는 그윽하게 저녁노을 지는데
불견의중인 不見意中人 마음에 그리는 사람은 볼 길 없고
매화자개락 梅花自開落 매화만이 올로 피었다 지고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