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2-17.23-25
그때에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24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25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진정한 회개의 삶
회개悔改한다는 것은 한자 그대로 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아 고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저는 회개라는 말보다는 옛 표현인 회두回頭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회두란 글자 그대로 머리를 돌린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은 모든 죄와 세상의 것에 대한 관심을 끊고 하느님께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께로 고개를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해성사를 보고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제가 제안하는 회개의 방법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즉 나 자신을 찾아가는 삶이 바로 회개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각박한 세상의 삶을 살면서 나를 잊어가고 있습니다. 나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잊고 지낸 내 마음속 하느님을 발견할 때 비로소 그분의 은총을 느끼고 그 은총의 힘으로 내가 덧입고 있던 죄의 허물과 더러움이 씻겨 내려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례 때의 그 순간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는 곧 신앙 안에서
언제나 머문다는 뜻과 같습니다. 신앙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그러한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뵙고 그분께로 나아가는 삶,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삶입니다.
이정은 신부(살레시오회)
들꽃
‘연탄길 3’에 소개된 ‘민들레 할머니’입니다.
한 할머니가 작은 손수레에 헌 종이 박스를 한가득 싣고 고물상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한여름 무더위에 할머니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밭이랑처럼 주름진 할머니 이마에는 송글송글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길을 가던 할머니는 잠시 멈춰 서서 누군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어떤 할아버지가 있었다.
병색이 짙어 보이는 가엾은 할아버지는 길 한쪽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낡은 수레 위에는 헌 종이 박스 몇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쳐 잠든 할아버지의 손 위에는 껍질째 먹던 참외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쯧쯧 혀를 차며 자신이 주워 모은 종이 박스 한 웅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종이 박스들을 할아버지의 가벼운 수레 위에 올려놓았다.
작지만 커다란 사랑을 그렇게 남겨두고, 할머니는 민들레같이 환하게 웃으면 그 곳을 떠났다.
송정림씨는 ‘내 인생의 화양연화’(6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풍란이라는 난초가 있습니다.
풍란은 꽃씨나 포기가 바람에 날아다니다가 나무줄기나 바위에 뿌리를 내리면
그곳에서 꽃을 피우고 살아가지요.
그 꽃씨는 바람 속을 날아다니며 자신이 뿌리 내릴 곳을 찾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풍란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허공을 돌며 꽃을 피울 공간을 찾아 헤매는 존재가 아닐까요?”
이철환 작가는 민들레 할머니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들꽃은 아무 곳에나 피어나지만,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가 아니라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내고 있느냐인 것입니다.
민들레 할머니는 당신이 있는 곳에서 당신이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작지만 아름다운 민들레꽃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처지는 바람 따라 떠돌아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이 잡혀서 분위기가 뒤숭숭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미워한다면 그가 증언하던 예수님에게
다음 화살이 돌려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변두리로 돌기 시작하십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사실 유다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민족으로
‘억지로’ 인정해주는 변두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그 곳에서 대부분의 복음전파를 하였고
그분의 명성은 오히려 유다지방보다는 외국인 ‘온 시리아’에 퍼졌다고 복음은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의 중심에 가서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고 한탄하시지 않습니다.
당신 있을 수 있는 바로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하십니다.
병자를 고쳐주시고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유다의 땅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고 맙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
즉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굳이 뿌리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작년 이맘 때 일입니다
저는 입학동기 신부님이 있는 성당에서 주일 주일미사를 지내고 왔습니다.
주일미사를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어 매우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전 본당에 있던 분이 어떻게 아셨는지 제가 주례하는 미사에 와서
저에게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느낀 그 분의 표정엔
‘이제 본당이 없으니 떠돌아다니시며 미사를 하는군요.’
라는 안타까운 감정이 들어있었습니다.
물론 미사 할 때 약간 남의 집 신세지는 느낌은 있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신자들과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미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감사합니다.
자리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어떤 자리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뿐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 바람이 보내주는 곳, 그러니까 지금 있는 바로 이 자리가 ‘꽃자리’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빛이 될 수 없으면
어느 곳에서도 빛일 수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예루살렘이 아닌 가파르나움
유럽교회가 1월 6일에 기념하는 것과는 달리 북미와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교지역의 교회는
어제 주일에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냈다.
오늘 월요일부터 주님세례축일까지 한 주간의 미사전례는
본기도 몇 개와 감사송을 빼고는 어느 것도 성탄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미사성가는 성탄시기의 곡(曲)들에서 선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 공현 대축일로 성탄시기를 마감하자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 주간에 봉독되는 미사복음이 주님 성탄과 별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이번 한 주간도 분명 성탄시기에 속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자주 예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묵상하여야 한다.
한 아기가 갑자기 어른이 될 수 없듯이,
예수께서 어떠한 가정환경과 교육을 통하여 어른으로 성장하였고,
하느님 아들로서의 자의식을 키워나갔으며,
세상구원을 위한 가치관과 생활철학을 만들어갔는가
하는 점들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성에도 대단히 유익한 일이다.
비록 성서가 알려주는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보도는 단편적이지만(마태 2,23; 루카 2,39-52),
이러한 단편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의 나머지 20년간의 성장과 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이런 부분들을 우리 성장의 역사와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과 첫 전도여행에 관한 보도를 들려준다.
세례자 요한이 활동을 마친 다음 예수께서 비로소 활동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런데 요한의 활동종료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한
강제종료였다.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의 인기를 정치적 위협으로 여겨 두려워했고,
자신의 잘못된 혼인윤리관을 진언(眞言)하는 요한이 마음에 걸려 잡아 가두었기 때문이다.
(12절; 마태 14,1-5)
그전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을 떠나 세례자 요한이 활동하던 유다지방의
요르단강으로 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마태 3,13-17)
그 후 예수께서는 유다의 어느 광야에서 40일간 지내시면서 활동의 때를 기다리고 계셨다.
(마태 4,1-11)
요한이 잡혀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으로 다시 가셔서
카파르나움에서 활동을 시작하신 것이다.
왜 유다지방이 예수님의 첫 활동의 무대가 아니라 갈릴래아 지방이었을까?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카파르나움인가 하는 말이다.
우리는 먼저 마태오복음의 독자가 대부분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임을 알아야 한다.
마태오복음의 독자들이 모세의 율법과 구약의 예언서를 잘 알고 있는 유다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는 독자들에게 예수를 구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하느님의 아들로, 구약 예언의 철저한 성취자로 가르쳐 갈 의도를 가지고 복음을 썼으며,
복음서에서 자주 “이로써 주께서 예언자들을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1,22; 2,14 등)는
예언성취 도식을 사용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태오는 이사야의 예언(이사 8,23-9,1)을 요약하여
갈릴래아에서 시작되어야 할 예수님의 공생활의 이유와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14-16절)
“갈릴래아에서 올리브를 재배하는 것이 유다에서 한 아이를 기르는 것보다 쉽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갈릴래아 지방은 원래부터 비옥한 땅이었다.
여호수아기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가
이곳 갈릴래아 지방을 유산으로 받았다.(여호 19,10-16. 32-39)
그러나 이 지역이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는 이방인의 땅이 되었고 어두움이 드리운 땅이 되어 있었다.
기원전 933년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졌고, 기원전 721년 북왕조가 비옥한 땅을 차지하려는
아시리아에 의해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이곳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하느님 나라의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빛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으로 찾아왔고,
말씀과 기적은 곧 도래한 구원의 표징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첫댓글 형제님 좋은 글들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예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의 중심에 가서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고 한탄하시지 않습니다.
당신 있을 수 있는 바로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하십니다.
병자를 고쳐주시고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유다의 땅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고 맙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
즉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굳이 뿌리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
이 부분이 맘에 많이 남네요...
저도 "들꽃은 아무 곳에나 피어나지만,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않는다." 라는 구절을 계속 되뇌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