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시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귀 시의 모동면 금천리와 인연이 있어 해마다 한 두 번씩 왕래를 하면서도 큰 관심 없이 지나쳐 다녔으나 일전에 문중의 대사로 인해 금천리 마을 안에 있는 육인정을 둘러보고 필자가 알고 있는 육인정과 귀 시의 홈페이지에 실린 자료를 비교해 본 결과 이견(異見)이 있어 결례를 무릅쓰고 몇 가지 소견을 나열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증(考證)보다는 고노(古老)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전설 같은 이야기로 마을유래가 홈페이지를 장식하는 사례가 허다하지만 그 마저도 자료의 빈곤으로 채워져야 할 공간을 채우지 못했을 때의 고충은 말로써 표현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필자의 의견을 홈페이지에 반영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리오니 선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금천리(송정) 300번지의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은 신창표씨(新昌表氏)의 대동보에 “광원(光遠), 을충(乙忠) 선조 외 4유정담거론정(四儒政談擧論亭)” 유허지(遺墟址)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표광원(表光遠)은 1298년(고려 충렬왕24)부터 중정대부(종3품), 표을충(表乙忠)은 1308년(고려 충렬왕34)부터 봉선대부(종4품)를 지내셨던 분들로 두 분의 묘소가 육인정 건너편 금천리 산 4-1번지에 모셔져 있고 해마다 추계묘제(秋季墓祭)를 올리고 있음은 금천리(송정)의 주민들이 인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1298년부터 1308년경에 느티나무 아래에 정담거론정(政談擧論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여섯 분의 관리 또는 선 비들이 모여 정담(政談)을 나누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송정이라는 마을과 이 느티나무가 보호수에 기록된 수령 460년(1982년 지정)보다 훨씬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고 느티나무가 식재(植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므로 아래 사항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홈페이지 자료 및 필자의 소견
ㅇ 홈페이지 : 마을소개 ⇨ 마을유래 ⇨ 번호 475 ⇨ 육인정 : 송정
ㅇ 육인정에 대한 소견
1298년(고려 충렬왕 24) 중정대부를 지낸 표광원과 1308년(고려 충렬왕 34년)에 봉선대부를 지낸 표을충 부 자와 지역의 4유(四儒)가 정담(政談)을 거론(擧論)하던 정자가 있었던 자리로 현재는 700여년의 인고를 이겨 낸 느티나무가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며 외롭게 빈터를 지키고 있다.
ㅇ 홈페이지 : 마을소개 ⇨ 마을유래 ⇨ 번호 483 ⇨ 송정
『산금 서북쪽 마을. 조선조 말 이 곳에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여러 관원이 각자 가지고 있는 관인을 소나무 에 걸어 두고 놀았다는 육인송(六印松)이 있어서 송정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은 소나무는 없고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음력 정월 15일 동신제를 지낸다.』
ㅇ 송정마을에 대한 소견
산금 서북쪽 마을. 려말(麗末) 이 곳에 정자가 있어서 관원 및 선비들 6인이 모여 관원이 관인을 나무에 걸어 두고 정담(政談)을 나누었다는 소나무가 있어 이를 육인송(六印松)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을 송 정이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소나무는 없고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음력 정월 15일 동신제를 지낸다.』
ㅇ 홈페이지 : 마을소개 ⇨ 마을유래 ⇨ 번호 507 ⇨ 보호수
『금천리 300번지 송정 마을회관 뒤에 있다. 보호수 지정번호 11-24-10-1로 1982년 10월 26일(표지석에는 1982년 9월 22일로 기록되어 있음) 지정돈 느티나무다. 수령 480년(표지석에는 460년으로 기록되어 있음) 으로 나무 높이 8m. 가슴 높이 둘레 9.0m다.』
ㅇ 보호수에 대한 소견
금천리 300번지 송정 마을회관 뒤에 있으며, 1982년 9월 22일 보호수(지정번호 11-24-10-1)로 지정된 느 티나무다. 수령 700여년으로 나무 높이 8m. 가슴 높이 둘레 9.0m의 노거수(老巨樹)로 수간(樹幹)은 지상 3m에서 네 갈래로 갈라져 중앙의 가지는 고사하고 나머지 세 가지만 살아있으나, 나무는 둥치 속이 썩어서 큰 공동(空洞)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안녕과 자손들의 번영을 위해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15일)에 동신제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