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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파노라마
사무엘하의 내용은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위에 올라 신정왕국을 세우는 것이 중심주제입니다.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다”(5:4)고 말씀합니다. 사무엘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 첫 부분(1-4장)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동안 왕노릇 하는 내용이고,
㉡ 둘째 부분(5-10장)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신정왕국의 수도(首都)로 삼는 통일왕국이 수립되는 내용이고,
㉢ 셋째 부분(11-24장)은 다윗의 범죄로 인한 징벌을 당하는 내용입니다.
① 사울이 죽자 다윗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올라가라!”
㉡ “어디로 가리이까? 헤브론으로 갈지니라!”(2:1)하십니다.
㉢ “헤브론으로 가라”는 말씀은 구속사라는 맥락으로 보면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 그곳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열조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잠들어 있는 가족 묘지가 있는 “막벨라 밭 곧 헤브론”(창 23:19)이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헤브론은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 족장인 갈렙에게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고 약속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런 헤브론으로 올라가라 하심은 다윗이 언약의 정통(正統)성에 근거한 왕이라는 증표였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왕 노릇 합니다.
② 5장에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을 통일 왕국의 왕으로 추대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5:2)고 사무엘상 16:1절에서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하신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 통일왕국의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우선적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통일왕국의 수도로 삼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했다는 것은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명하신 “보여 줄 땅”이 가나안 땅이요,
㉡ 둘째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하신 곳이 바로 모리아산 곧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산 거기”가 그리스도의 모형인 성전이 세워질 자리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하신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이 되실 곳이기 때문입니다.
㉢ 모세도 죽기 전에 행한 설교에서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 가서 드리라”(신 16:5-6)고 분부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40년 동안이나 자신의 고향 기브아에서 왕 노릇했을 뿐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여부스 사람을 내어 쫓고 완전히 정복하여 수도로 삼은 것은 다윗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수도로 삼은 후에 다윗은 그때까지 방치되어 있던 궤를 아비나답의 집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운반해 안치했던 것입니다(6장). 그때 지은 것으로 인정이 되는 시편 24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시 24:7-10).
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된 것을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는 것으로, 그리고 보이는 왕은 다윗 자신이지만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③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대리자로 왕을 세우셔서 다스리시는 명실상부한 신정왕국(神政王國)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점이 “너희가 택한 왕, 구한 왕”인 사울과 하나님이 택하신 다윗의 다른 점입니다.
㉠ 신정왕국의 의미는 언약궤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에서도 밝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 수레”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들에 의해 받듦을 받으시고 섬김 받으심을 거부하셨습니다. 그것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속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받들어 섬김 받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 뒤늦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다윗은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다”(대상 15:13)하면서 이번에는 메어옵니다.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소, 양, 염소 같은 제물도 아니요, 화려한 수레도 아니요, 성전이라는 건물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찾으셔서 “함께 거하시려는” 바로 “너” 곧 형제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④ 7장은 사무엘 상하를 통틀어 핵심 장이 되는데 다윗이 왕궁에 평안히 거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황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7:2).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소원을 말합니다.
㉠ 그러나 그 날 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나단에게 임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7:6)하십니다. 그러면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에 거하셨다는 “집과 장막”이 어떻게 다른가? 집은 부동산(不動産)이지만, 장막은 신속하게 움직이는 동산(動産)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 하나님은 안식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야전군 사령관처럼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때까지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와 같은 장막에 거하시면서 구원계획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형제의 장막에 거하시면서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7:5),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주겠다”(7:11)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속사의 맥락에서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워주시겠다는 뜻은 다윗의 왕위를 폐하시지 않으시고 주권적으로 계승시켜 나가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일 죄를 범할지라도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7:15)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 미련한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집을 세워드리는 양 착각을 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묻습니다. 형제는 이 성전이 누가, 누구의 무엇을 통해서 세워주신 성전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너희 몸은,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고 말씀합니다. 이를 망각하지 않고 명심하고 있습니까?
⑥ 하나님은 다윗에게 언약을 세워주시기를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7:12)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7:13)하십니다.
㉠ 이 언약이 일차적으로는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고, 그가 성전을 건축하므로 성취됩니다만 그것은 예표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왕위에 오르실 것과, 그가 하나님이 거하실 참 성전을 건축하게 될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그러므로 다윗 언약에는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세상 나라는 “영원히 견고”하지 못합니다.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은 다니엘서에서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한 말씀으로 이어지는 “나라”인 것입니다.
㉢ 그리하여 이 언약은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시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에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다윗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그(다윗)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행 2:30-31)라고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⑦ 성전 건축 사명이 다윗에게 허락되지 않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지으리라 하심도 궁극적인 성취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것에 대한 예시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 “성전”에 대한 예언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계시되고 있는데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겔 37:24)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에서 성취될 명백한 예언인데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聖所)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6-27)고 말씀하십니다.
㉡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워주겠다”는 이 집이 육신의 장막을 입고 오실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 집은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고 확장이 되어나가다가,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 21:6).
⑧ 다윗은 왕궁에 평안히 앉아 있을 때에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워주겠다”는 황공한 말씀을 들은 후에는 보좌에서 내려와 왕궁이 아닌 여호와 앞에 나아가,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7:18)고 감복하는 것입니다. 구원계획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집을 이루어나가시는 주권적인 행사인 것입니다.
⑨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11장에서 어처구니없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다윗만의 문제(問題)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 그런데 이점에서 대두되는 질문은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삼하 7:14-15), 즉 사울은 폐하셨는데 어찌하여 다윗은 빼앗지 않는다 하시는가? 첫째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은 자가 있는가 하는 점인데 하나도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죄를 범할 때마다 폐하신다면 하나님의 나라건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점인데 다윗의 자손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시려는 계획은 무산이 되고 말 것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문제를 통해서 무엇을 계시하셨는가를 주목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입니다. 7장의 언약, 즉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주겠다”하신 주권적인 은혜가 왜 필요한지를 계시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고, 전적타락 · 전적부패 즉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을 고백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⑩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인정을 하고 자백을 합니다. 그러자 즉각적으로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12:13)합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물론 사람 앞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파렴치한 죄를 범한 다윗이, 그리고 나 자신의 죄를 “사하셨나이다”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형제는 말해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용납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짐승의 피가 죄를 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 우리는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이다” 하심으로 사건이 종결(終決)이 된 줄로 여기나 “기결(旣決)이 아닌 미결”(未決)로 보류(保留)해 두셨을 뿐이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이점이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12:14), “반드시 죽으리라”는 언급에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아이가 죽는다고 다윗의 죄가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자신보다 자식이 죽는 것을 통하여 죄의 가공스러움을 깨닫게 하시려는 도덕적인 의미와, ㉡ 궁극적으로는 우리 대신 죽으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첫 언약 때(구약시대)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히 9:15)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깨달았기에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하여, “허물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고 칭의 교리를 고백했던 것입니다.
“죄가 가려진 자”,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 1:17, 3:21)는 “의롭다고 여겨주심”입니다. 전적타락 · 전적무능 한 죄인에게는 그 허물을 사해주시고 죄를 가려주심을 받는 길 외에는 다른 가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파렴치한 타락을 통해서 영광스러운 “칭의 교리”를 계시하시다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 그러므로 11장은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집을 세워주시지 않으면, 즉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됨”(시 127:1)을 명백하게 계시해주는 장입니다. 다윗만이 “죄악 중에 출생한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자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시아언약에 해답(解答)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 이 점에서 명심해야 할 점이 있는데 다윗의 범죄로 인하여 손해를 입게 된 것이 우리아 · 밧세바, 그가 낳은 아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12:14), 곧 최대의 피해자는 신정왕국이요, 여호와의 거룩하신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12:10)고 징벌의 불가피성을 말씀하십니다.
사울의 범죄와 다윗의 범죄를 비교해 본다면 윤리적인 면에서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치 다윗이 악하고 추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메시아 언약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즉 “은혜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징벌하실 지라도 폐하시지 않음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⑪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하는 것이 나옵니다. 병행구절인 역대상 21장과 결부시켜보면 이는 다윗이 교만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점이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24:10)고 자복하는데서 드러납니다.
㉠ 그리하여 “칠년 기근, 석 달 패망, 삼 일 전염병” 중 택일하라는 징벌을 받게 되는데 다윗은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24:14)고 대답합니다. 그리하여 전염병이 임하게 되는데 이 점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손에 빠지는 것”이라 말한 것이 어찌하여 “전염병”을 택한 것이며, 전염병을 택한 것이 어찌하여 “여호와의 손에 빠지는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 그 해답이 출애굽기 30:12절에 나옵니다. “전염병이, 생명의 속전”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요, 생명의 속전(贖錢)이,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딤전 2:6)한 그리스도의 구속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 더욱 놀라운 것은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24:18)라고 장소를 지정(指定)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지시하신 모리아 산이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터(대하 3:1)요,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이 되실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⑫ 사무엘하는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4:25)고 끝맺고 있습니다.
㉠ “진노”를 그치게 한 번제와 화목제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려주실 대속제물에 대한 예표로써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고 말씀하신 대로 사무엘하는 독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인도해줌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증인이라”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그곳에서” 대속제물이 되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임할 진노가 그치게 되었다는 점을 담대히 굳세게(엡 6:20, 딛 3:8)증언하십시다.
㉡ 형제는 왕궁에 평안히 앉아서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를 궁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하고 감사와 감격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먼저입니다. 믿음의 순종은 그 후에 따라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