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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함께 학운동 자체방위
증 언 자 : 김춘국(남)
생년월일 : 1955. 3. 1(당시 나이 25세)
직 업 : 농가구 기술자(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5
개 요
5월 18일부터 시위에 참가하여 21일 학동 석천다리에서 무기를 지급받고 광주공원에서 총기교육을 받은 뒤 계엄군의 퇴각을 차단하기 위해 40명의 시민군과 학동 숭의실고에서 경비를 섰다. 22일 동네 청년이 포함된 80여 명의 시민군과 함께 지역방위를 하고 23일 무기를 반납했다. 그 후 6월 말 체포되어 12월 석방됐다.
시위대열에 합류하다
나는 1955년 광주시 학운동에서 5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2, 3마지기의 농사밖에 짓지 않아 많은 식구들이 살아가는 데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라곤 국민학교 문턱만 겨우 밟았을 뿐이다. 어린 시절에는 동네에 있는 무등육아원의 고아들과 함께 보내다가 조금 커서는 돈벌이를 하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막일을 했다.
1980년에는 상무대 근처에서 자취를 하면서 농가구 만드는 일을 했다. 마음을 잡고 착실하게 일하던 중 5·18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5·18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벅찼으므로 정치라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정치라는 것은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내가 정치적인 사건으로 이렇게 험난하게 살아가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5월 18일은 친구들과 담양 추월산에서 계모임을 하고 돌아왔다. 계림동을 지날 즈음 계엄군이 검문을 했으나 별일은 없었다. 상무대 근처의 자취방에 들러 학운동에 있는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타고 유동으로 오는데 계엄군이 버스를 세워 검문을 했다.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이나 가방을 든 사람은 모두 끌어내렸다. 시내 쪽으로 들어오면서 보니 시내 분위기가 무척 살벌했다. 계엄군이 젊은 사람을 무조건 몽둥이로 때리고 닥치는 대로 연행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구경을 하려다가 집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이 걱정되어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시내의 상황이 궁금해 시내로 나갔다. 시내 이곳저곳에서 시위광경을 보았다. 공수부대가 시위대열을 붸아가면서 곤봉으로 무차별 공격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치기도 했다. 나는 사람들이 공수부대의 곤봉에 머리가 깨지는 처참한 장면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올라 시위대열에 합류하여 돌을 던지며 시위를 했다.
19일은 저녁쯤에 동네 친구들과 시내로 나가 공수부대에 대항하여 시위를 했다. 그날 우리 동네에 사는 한용덕 씨가 전남대병원 로터리에서 계엄군의 대검에 찔려 의식불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동족끼리 어쩜 그럴 수가 있을까'하는 분노심이 생겼다.
20일 저녁 MBC 방송국이 불이 났다. MBC 방송국이 불에 타니까 우리는 그 옆의 금성대리점의 전자제품을 길가로 옮겼다. 시위대와 공수는 MBC 방송국 앞에서 계속해서 공방전을 벌였다. 공수가 최루탄을 쏘면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으로 맞섰다. 한번은 시위대가 공수들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밀어붙이자 공수들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위대 쪽으로 최루탄을 쏘면서 밀고 왔다. 그러자 시위대열은 도로 양쪽으로 갈라져 피신했다. 그러나 도로에 있던 금성전자대리점의 냉장고, TV 등이 바삭바삭 깨져버렸다. 공수들이 최루탄을 너무 심하게 쏘며 달려오자, 나는 전남여고 쪽으로 도망가서 다른 청년 한 명과 다시 담을 넘은 것이 하필 동명다리 밑의 하천으로 빠져버렸다. 옷이 엉망이 되자 동네 아주머니가 물을 떠다주어 대강 몸을 씻고 밤늦게 집으로 들어갔다.
무장 후 총기교육을 받고
21일은 모든 교통이 차단되고 시위차량만이 다녔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시위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길목마다 차단하고 있던 공수들은 모두 철수하여 도청 분수대 앞에 배치되어 있었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과 조선대 쪽에 약간 있을 뿐이었다. 이날은 많은 시민들이 스스로의 신변보호를 위해 공기총이나 기타 다른 호신용 무기를 휴대하고 시위에 참여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 무장으로는 공수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고 접근조차 어려웠다. 시민들 사이에서 총으로 무장하고 공수를 몰아내자는 말이 나돌았다.
점심시간쯤에 도청 앞에서 공수들이 집단발포하여 많은 시민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시민들과 함께 광주에서 일어난 잔인한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고 총을 탈취하여 무장하기 위해 시위차를 타고 나주로 향했다. 백운동을 지날 즈음 시위대가 이미 무기를 싣고 광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차는 다시 화순으로 가기 위해 학동 석천다리로 갔다. 석천다리에서는 동네 선배인 문장우 씨가 화순에서 탈취해 온 무기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문장우 선배를 보니 전쟁터에서 친형님을 보는 것처럼 기뻤다. 나는 문장우 씨에게 가정이 있으니 들어가라고 했으나 형은 오히려 나에게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결국 함께 싸우자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M1총을 지급받았으나 그 총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나중에는 카빈 소총으로 바꿨다. 실탄도 30발 정도 받았다. 그때 총을 든 사람은 광주공원에서 총기사용 교육과 전투에 대비한 훈련을 한다는 소리가 있어 나는 문장우 선배와 그곳에서 만난 김복수 등과 함께 남은 무기를 싣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광주공원에는 약 3천 정 정도의 총이 있었다. 문장우 씨 등 군대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앞에 나가 굉장히 많은 시위대들에게 총기교육을 시키고 여러 대의 벤츠 고속버스에 시민군을 태워 각 지역으로 보냈다.
공수들이 광주를 퇴각하는 것을 뻔히 쳐다보기만
계엄군이 오후 7시를 기해 화순 쪽으로 철수한다는 정보가 있어 우리는 그들을 차단하기 위해 학동으로 갔다. 또 다른 차는 전남대병원 근처에서 경계근무를 서기로 했다. 7시부터 공수들과 전투를 할 예정이어서 시민들에게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6시쯤부터는 거리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차에 탄 30-40명의 시민군들은 숭의실고(현 세라믹맨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서 도로를 보니 공수들의 사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면서 반격할 만한 은폐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옥상에서 내려왔다.
정확히 7시 5분 전에 연발로 나가는 M16 총소리가 나자 우리는 실험실 뒤로 몸을 숨겼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6대의 군용 트럭에 탄 공수부대가 완전무장을 하고 화순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이 도로 양쪽으로 계속 총을 쏘면서 지나갔기 때문에 우리는 눈으로 뻔히 쳐다보면서도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0분 정도 총을 쏘면서 계엄군은 그대로 빠져나가버렸다. 총소리가 그치자 주위에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했고 거리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시민군들은 계엄군이 빠져나가자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문장우 씨와 함께 조선대 뒷산에 계엄군이 주둔해 있는지 알아보려고 까리따스수녀원 담을 넘어 조선대 뒷산으로 갔다. 산속을 살펴보는데 꼭 어디선가 계엄군이 나타날 것만 같아 매우 불안했다. 잘못하다가는 시민군의 총에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산속에서 돌아다니지 못하고 서로 등을 기댄 채 선잠을 자다가 새벽 일찍 내려왔다.
학운동 지역방위
22일 산에서 내려와 선배와 함께 학운동 집으로 갔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야단을 치면서 다시는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총을 들고 온 우리에게 용감하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우리는 조선대 뒷산과 태봉산에 계엄군이 진주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계엄군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로 했다. 동네 선배들과 후배들이 모두 호응을 했다.
우리는 산에서 내려올 때나 시내에서 산으로 빠질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배고픈다리를 진지로 삼았다. 그리고 배고픈다리 옆의 공터에 동네 청년 30명을 포함하여 80여 명의 청년을 모았다. 다른 시위대가 무기를 가져다주어 우리는 전원이 무장을 하고 문장우 씨 지휘하에 조를 편성했다. 1조에 9명씩 9개조를 편성한 후 총기교육을 받았다. 총기 다루는 법과 수류탄 투척술, 또 암구호 등을 교육받았다.
그러고 나서 밤을 이용해 계엄군이 시내에 진입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배고픈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계엄군과의 전투를 대비했다. 배고픈다리를 기점으로 마을 야산, 건물 옥상 등 도로를 향하여 가장 총을 쏘기 쉬운 지점에 각 1개조씩 배치하여 경계근무를 섰다. 그리고 각 조의 경계반경을 정했다.
나는 4조 조장으로 수정맨션 부근에 배치되었다. 자정쯤에 수정맨션 부근을 순찰하는데 태봉산의 동굴에서 불빛이 보였다. 수정맨션과 그 동굴까지는 백여 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혼자서 불빛을 한참 따라갔으나 곧 없어져버렸다. 계엄군이 정찰나온 것이라 생각하고 총을 쏘아 문장우 씨에게 연락을 했다. 곧 문장우 씨가 달려왔다. 나는 그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또 새벽 2시경 조선대 뒷산에 있던 계엄군의 이동하는 군화발 소리가 났다. 우리 지역 방위대가 군화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계엄군 역시 총격을 가해 와 약 10여 분쯤 접전을 벌이다 조용해졌다.
그날 새벽 날이 새자 밤사이의 총격으로 부상자나 사망자가 생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 점호를 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총기도 분실되지 않았다. 배고픈다리만 계엄군의 총격으로 벌집처럼 구멍이 나 있었다.
점호를 끝낸 우리는 계엄군의 동태를 살피려고 증심사 계곡을 타고 올라갔다. 설사 계엄군이 있더라도 우리가 먼저 총을 쏘지 않는 이상 그들도 공격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약 40여 명의 대원이 양쪽을 경계하는데 태봉산 뒤에서 군인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일단 군인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배고픈다리로 내려왔다.
마을에서 아주머니들과 동네 어르신들이 밥을 가지고 왔다. 동네분들은 고생한다며 격려를 해주었다.
계엄군을 생포해 도청으로 넘기고
계속 경계근무를 서는데 김성구의 후배에게서 정보가 들어왔다. 22일 밤에 낙오된 계엄군이 김성구 집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 계엄군은 군장비를 가득 가지고 와서 상무대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냐고 하면서 밥을 먹고 그 집에서 잠까지 잤다는 것이다. 나는 알았다고 해놓고 그 계엄군이 틀림없이 배고픈다리를 통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스포츠머리를 하고 허름한 바지에 고무신을 신은 청년 하나가 그곳을 통과하려 했다. 내가 그에게 총을 들이대자 그는 깜짝 놀랐다.
"너, 군인이지?"
"아닌데요."
"다 알고 있어, 임마!"
"아닙니다. 휴가 나왔습니다."
"휴가증 내봐. 이 자식 거짓말하고 있어. 너, 어젯밤에 이 마을의 김성두 집에 들어갔지?"
그는 파랗게 질렸다. 나는 그 계엄군과 몇 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 집으로 가서 계엄군의 휴대품을 가져왔다. 베낭, 총, 워카, 실탄 1백 발, 최루탄, 수류탄 등이 있었다. 군인 한 사람의 휴대품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그가 계엄군이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나자 사람들이 모두 그 군인을 죽이자고 했다. 그러나 일부에서 지금 시민과 학생들이 많이 잡혀 있는데 군인 하나면 몇몇과 교환할 수 있다며 죽이지는 말자고 했다. 문장우 씨와 상의하여 그 군인을 도청에 인계했다.
도청에서는 총기를 회수하고 있다며 우리에게도 총기회수를 요구했다. 지역을 방위하고 있던 사람 중 일부는 반납하자고 했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반대했다.
나 역시 계엄군의 재투입에 대항하여 우리 부모형제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총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절대로 반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문장우 씨가 도청 지도부에서 타격대를 조직하고 다시 총을 나눠주니까 일단 반납하자고 설득했다.
결국 모두 무기를 반납하는 데 합의하여 총을 차에 싣고 문장우 씨와 몇 명의 대원과 함께 도청으로 가 무기를 반납했다.
태봉산에 진주한 계엄군의 동태를 살피고
무기를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 매우 피곤했으므로 잠을 잤다. 오후에 시내로 나가 궐기대회에 참가했다. 나는 몇 명의 시민군과 함께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시민궐기대회에 참가하려는 시민들을 도청 앞까지 태워다주거나 YMCA나 YWCA 앞에 있던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했다.
23일과 24일은 이렇게 보냈다.
25일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태봉산에 주둔한 계엄군에게 밥을 해다주었다. 군인들이 아주머니들에게 밥을 해달라고 한 것이다. 나는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하려고 아주머니들이 밥을 가져갈 때 옷을 농사꾼처럼 허름하게 입고 따라갔다.
태봉산 산기슭에 가보니 계엄군들은 30미터 간격으로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의 방공호를 파놓고 한 호에 7, 8명씩 약 150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완전무장한 채 총부리를 도로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계엄군들에게 어디에서 온 군인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어떤 군인은 경기도 20사단에서 왔다고 했고, 어떤 군인들은 어디서 왔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26일에는 계엄군이 곧 진압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어제 태봉산에서 완전무장한 군인들을 보니 그 소문이 사실처럼 느껴졌다. 나는 불안하기도 하고 몸이 피곤하기도 해 하루종일 집에만 있었다.
계엄군이나 죽였으면 속이 시원할 텐데
27일 군인들이 도청을 장악하자,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 혼자만 싸운 것이 아니고 광주시민 전체가 싸웠으므로 별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학운동 집에 있었다. 그런데 형사들이 문장우 씨를 찾으러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문장우 씨뿐만 아니라 광주시민 모두를 잡아가야 할텐데'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루는 형사들이 찾아왔다.
"김춘국씨 계시오."
"내 동생인데 웬일이요."
"조사할 것이 있어서 그럽니다."
"지금 없으니 다음에 와보시오."
나는 거짓말을 하여 일단 형사들을 따돌린 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동네 친구 집에 숨어 있었다. 한 달 후에 문장우 씨가 자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형사들이 나를 찾는다고 했다. 나는 어차피 한번 치러야 할 일이었고 내가 피하면 가족들을 못살게 굴 것 같아 집으로 들어갔다.
6월 말 새벽 5시에 형사들이 찾아왔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소지하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형사들은 한 달 전에 동생이라고 한 사람이 너무나 쉽게 따라나서는 것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곧바로 광주경찰서에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 이미 문장우 씨는 광주경찰서에서 보안대로 끌려가버린 상태였다. 내가 잡혔을 때 학운동 지역방위를 했던 여러 선배와 동료들도 잡혀왔다. 내 바로 윗 형도 잡혀왔다. 형은 그 당시 나를 찾으러 다니다가 술을 먹고 총으로 공포 몇 방 쐈을 뿐이었다.
생김새부터 독하게 생긴 이중호 형사가 나를 담당하여 조서를 받았다. 그는 조서받는 동안 계속해서 몽둥이로 구타를 했다.
"너, 계엄군 몇 명 죽였어."
나는 계엄군을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고 사실대로 말을 했다. 형사들은 내 말을 믿지 않고 막무가내로 닥달했다. 참다 못한 나는 욕설을 퍼부었다.
"참 더럽군. 이럴 줄 알았으면 계엄군이나 한 천 명 죽이고 왔으면 속이 시원할텐데."
그러자 조사계 형사들 20-30명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구타를 했다. 그들은 나에게 사형감이라고 공포감을 조성했다.
하루는 상무대에 있는 문장우 씨와 김복수 씨의 1차 조서가 끝났는지 광주경찰서 있는 나와 대질심문을 했다. 형사들은 문장우 씨의 조서와 내 조서를 계속 맞추게 했다. 나중에는 형사가 문장우 씨 조서를 가져왔다.
"문장우도 다 말했는데 니라고 말을 안 해야."
"문장우 씨 끝났으면 내 것도 알아서 쓰시요."
"진즉 그렇게 말하제 그랬냐?"
"그 뻔한 것인이 알아서 쓰제."
그때부터 형사들이 내 조서를 문장우 씨 조서에 맞추어 직접 썼다. 그들이 지장을 찍으라고 해서 나는 대충 조서를 읽은 후 지장을 찍었다.
형제가 함께 징역을 살아
33일간을 광주서에 있었다. 모든 포고령 위반자들이 상무대로 집결됐다. 영암에서 22명, 목포에서 27명, 광주서에서 37명이 상무대로 넘어갔다. 그때는 8월이 다 되었을 때였으므로 합동수사본부 수사가 끝나고 검찰수사가 시작되었다. 공군소령인 이차량 검사에게 불려갔다.
"어, 김춘석, 김춘국 이름로 비슷하고 주소도 같군."
"예, 바로 김춘석이 제 형입니다."
그는 형제 간에 그런다며 몽둥이로 실컫 두들겨팼다. 나는 그에게 하소연했다.
"징역을 1백 년이라도 좋고 사형도 좋소. 그러나 집에는 노부모가 계시오. 한 명이라도 나가야 벌어먹고 살 것 아니오. 나는 괜찮지만 형이라도 내주시오. 그렇지 않아도 위수술을 해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인데 여기서 죽으면 당신이 책임 질라요."
"이 새끼, 건방진 놈이네."
이렇게 검찰조서를 몇 번 받고 나서 상무대 영창에 있었다. 영창 안에 형제가 함께 감옥생활을 하니 무척 괴로웠다. 형은 건강이 좋지 않았으므로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누워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면 새파랗게 젊은 놈이 형을 불러 몽둥이로 때리려고 했다. 나는 그놈에게 말을 했다.
"한 방에서 형제가 징역사는 것도 눈물나는데 이럴 수가 있소. 때리려면 차라리 나를 때리시오."
그래서 형 대신 내가 몇 번 심하게 맞곤 했다. 강도질을 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감옥에 갇혀 나이 어린 놈들에게 맞는 것이 가장 치욕적이었다. 화장실에 가서 운 적도 있었다.
또한 그곳에서처럼 배고파본 적은 처음이었다. 군대 식기 하나에 두 사람이 먹게 했으므로 두세 숟가락 떠먹으면 없어졌다. 정말 죽지 않을 만큼의 양만 준 것이다. 참다 못한 수감자들은 정량 520그램을 달라며 항의농성을 했다. 군기과장이 시찰나올 때만 정량을 주고 평상시에는 허기만 때울 정도로 주었다.
내가 재판을 받기 전에 박병기, 박동섭, 서경기, 조성기, 윤다현, 허춘섭 등 마을 사람 몇 명이 잡혀왔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수사관들이 동네에 몰려와 쑥밭을 만들었다고 했다. 또한 마을 어르신들과 우리에게 밥을 해준 아주머니들까지 잡아다가 못살게 굴었다고 했다. 동네 사람 중에 수사관들에게 고문받고 피해 본 사람이 40명 정도가 됐다.
10월 말에 학운동 자위대팀인 문장우, 김용선, 전영준, 김복수, 내 친형 그리고 나 이렇게 6명이 재판을 받았다. 판사는 사건경위를 낭독한 후 문장우에게 15년을 선고했다. 나는 10년정도 예상했는데 5년을 선고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2년 내지 3년을 선고했다. 형은 집행유예로 그날 저녁에 석방되었다. 형이 석방되어 너무 홀가분했다.
곧바로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곳에서 배고픈 것은 해결되었으나 면회는 전혀 되지 않고 영치물도 들어오지 않는 등 재소자가 가지는 최소한의 권리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소장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했다. 그러자 교도관들은 수감자 20여 명을 보안과로 끌고 가 온몸을 묶은 채 방망이로 30대를 두들겨팼다. 그 사건 후 수감자 전체와 소장의 면담이 이루어졌고 면회허용 등 몇 가지 요구사항이 관철되었다.
약 7개월 이상의 수감생활을 하고 1980년 12월 31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
광주시민의 힘으로 5·18을 해결해야
석방 후 조선대 산하의 건설회사에 취직했으나 몇 개월밖에 근무하지 못했다. 광주서와 상무대 영창 안에서 두들겨맞은 것 때문에 하루 일을 하면 3일 정도는 쉬어야 할 정도이다. 뼈마디가 쑤시고 관절이 부어올라 오래 걷지도 못한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살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국회에서 광주문제를 해결한다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한심하기만 하다. 청문회에서 근본적인 진상이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진상을 은폐하고 왜곡시키는 것을 보면서 분노를 느꼈다. 민정당 의원들의 작태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광주문제의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공언하던 평민당 국회의원들도 광주에서 현장조사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어정쩡하니 가해자인 노태우, 민정당과 협상하려는 안이함을 보이고 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없이 몇 푼의 돈으로 해결하려는 저들에게 문제해결을 바랄 수 없다. 5·18을 겪은 광주시민이 문제를 해결을 할 힘이 있다고 본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