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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부재가 머무는 방
— 빌헬름 함메르쇼이, 《스트란드가데의 실내》
① 사람이 떠난 뒤에도 방은 남는다
상실은 언제나 사람의 모습으로만 찾아오지 않는다. 때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공간의 익숙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의자와 문은 제자리에 있고, 창가로 스며드는 빛도 어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함께 살아온 사람의 기척이 사라지는 순간, 평범했던 방은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외형은 그대로인데 그곳에 깃든 삶의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도란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일만이 아니라, 그가 사라진 자리에 고스란히 남겨진 사물과 공간을 견디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회화에서 ‘아무것도 없음’을 표현하는 일은 역설적이다. 화가가 붓을 대는 순간 화면에는 형태와 색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 공백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주인을 잃은 의자이고, 굳게 닫힌 서랍이며, 함께 바라보던 창문이고, 온기가 빠져나간 방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는 단순한 빈자리가 아니다. 있어야 할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경험이다.
이러한 부재의 감각을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포착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빌헬름 함메르쇼이(Vilhelm Hammershøi)다.
빌헬름 함메르쇼이(Vilhelm Hammershøi), 《스트란드가데의 실내(Interiør, Strandgade 30)》, 1906, 캔버스에 유채, 71 × 57.5cm, ARoS Aarhus Kunstmuseum, 덴마크.
그의 《스트란드가데의 실내》를 바라보면 고요한 방 하나가 눈앞에 펼쳐진다. 회색과 흰색을 중심으로 절제된 벽면, 나란히 이어지는 문, 단정한 가구, 그리고 실내 깊숙이 스며드는 북유럽의 빛. 극적인 사건도 없고, 통곡하는 사람도 없으며, 죽음을 암시하는 상징도 없다. 그런데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이 방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가 조금 전까지 머물다가 막 떠난 자리처럼 다가온다.
함메르쇼이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상실을 직접 그리지 않는다. 대신 사람이 머물던 공간에 남은 정적과 기다림, 말로 붙잡기 어려운 부재의 감각을 화면에 머물게 한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공간은 남는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 공간이 사라진 사람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증명한다.
함메르쇼이에게 코펜하겐의 스트란드가데 30번지는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회화의 세계였다. 그는 1891년 아내 이다 일스테드(Ida Ilsted)와 결혼한 뒤 자녀 없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실내 풍경을 반복해서 그렸다. 이다는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었지만, 전통적인 초상화의 주인공처럼 관람객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대개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있거나 창가에 서 있고, 얼굴과 표정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얼굴을 지움으로써 이다는 한 사람의 초상을 넘어, 그 방에 축적된 시간과 일상의 흔적을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 함메르쇼이는 1898년부터 1909년까지 이 아파트에 머물며 문과 창문, 가구와 빛의 미세한 변화를 반복해서 관찰했다.
특별한 사건을 그리지 않고도 삶을 그릴 수 있다는 것. 그에게 삶은 사건보다 오래 지속되는 공간의 감각에 가까웠다. 그는 평범한 방을 오래 바라보았고, 그 반복되는 응시 속에서 일상의 시간이 회화가 되었다.
② 형상이 남긴 침묵
마크 로스코가 구체적인 형상과 언어를 덜어내고 거대한 색면 속에서 침묵에 다가갔다면, 함메르쇼이는 다른 길을 택한다. 그는 인물과 사물의 형태를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문과 의자, 벽과 창문, 사람의 몸을 분명하게 남겨둔 채 그 형상 사이에 침묵을 만들어낸다.
방, 문, 가구, 빛, 그리고 사람. 모든 것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묘할 만큼 잠잠하다.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우리는 화면 앞에서 쉽게 떠나지 못한다. '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등을 돌린 사람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조금 전까지 이곳에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함메르쇼이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설명되지 않은 공간을 남겨둔다. 그리고 바로 그 빈틈 속으로 관람자의 기억과 상상이 들어간다.
사물은 제자리에 놓여 있지만, 그것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침묵 속에 잠겨 있다.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지만 무엇인가가 빠져 있는 상태. 사람이 사라졌는데 공간은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더 강하게 드러내는 상태.
함메르쇼이의 방은 바로 그 미묘한 경계에 서 있다. 이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말한 ‘있음(il y a)’을 떠올리게 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음’은 특정한 존재가 무엇인지 분명히 지시하는 존재론적 개념과는 다르다. 그것은 개별적인 사물과 주체의 의미가 사라진 뒤에도 어떤 ‘있음’ 자체가 지속되는 익명적인 상태에 가깝다. 밤의 어둠 속에서 사물의 윤곽이 사라지고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질 때, 오히려 무언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이 짙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함메르쇼이의 실내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일어난다. 구체적인 서사는 거의 침묵하고 있지만 벽과 문, 빛과 바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름 붙이기 어려운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의 실내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사건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지속되는 존재의 상태를 감각하게 하는 하나의 공간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에 오히려 무엇인가가 남아 있는 듯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기에 침묵 자체가 말을 건네는 듯하다. 그 순간 방은 배경에서 하나의 주인공으로 변한다.
③ 떠난 사람의 흔적은 사물에 남는다
상실 이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때로 거대한 슬픔의 파도가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 흩어져 있는 너무나 평범한 물건들이다. 늘 앉던 의자. 매일 열던 서랍. 손때가 묻은 컵 하나. 사람은 떠났는데 사물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킨다. 목소리는 끊겼는데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때 집은 더 이상 단순한 거처가 아니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사물 하나하나에 스며든 기억의 장소가 된다.
함메르쇼이의 그림에 비극적인 장면이나 통곡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깊은 상실감이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부재를 사건이 아니라 공간의 감각으로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처음에는 그가 머물던 방에 들어서는 것조차 힘들 수 있다. 가구들은 어제와 다름없이 놓여 있는데, 그 공간만은 이전과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빈 방이 지닌 또 다른 의미를 알아가게 된다.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 결핍과 슬픔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함께 나누었던 하루의 온기와 말 없는 교감은 사물의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제야 방은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 떠나서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함께했던 시간이 머물고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부재는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없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내 삶에 남긴 흔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1906년에 그려진 《스트란드가데의 실내》에서 문은 공간을 나누면서 동시에 다른 공간으로 이어준다. 여러 겹으로 깊어지는 방의 한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이 앉아 있다. 하얀 목덜미가 드러난 채 등을 돌리고 있는 그녀는 우리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 시선의 부재 때문에 관람자는 자신의 기억을 그 방 안으로 들여놓게 된다. 함메르쇼이는 인물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넓은 감정의 공간을 열어놓는다.
상실 이후의 삶도 어쩌면 이 문을 닮았다. 어떤 문은 영원히 닫힌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있고, 되돌릴 수 없는 이별도 있다. 그러나 모든 문이 닫힌 것은 아니다. 남겨진 삶에는 여전히 다른 방이 있고,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공간이 있다. 함메르쇼이의 방은 슬픔을 서둘러 끝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빈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채우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닫힌 문과 남겨진 사물, 벽면에 머무는 빛을 한동안 바라보라고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알게 된다. 부재는 사랑이 사라졌다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더 이상 인간의 모습으로 곁에 있을 수 없는 사랑이 기억과 사물, 그리고 삶의 습관 속에 다른 형태로 남아 있다는 것을.
④ 아직 열리지 않은 방을 향하여
함메르쇼이가 보여주는 것은 상실의 순간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상실 이후에도 묵묵히 이어지는 삶의 풍경이다. 사라진 존재를 억지로 붙잡기보다 그가 머물렀던 세계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리고 공간에 남은 흔적을 통해 함께했던 시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애도란 떠난 사람을 삶에서 지워내는 일이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새로운 삶의 내부에 조용히 자리 잡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함메르쇼이의 그림은 우리에게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벽과 바닥 위에 천천히 내려앉는 빛을 바라보며 잠시 머물라고 한다. 삶에는 다시 열리지 않을 문도 있다. 그러나 아직 열리지 않은 문도 있다. 그 너머에는 알 수 없는 미래가 있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풍경이 있다.
그러므로 상실의 방은 반드시 마침표의 공간일 필요가 없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공간과 시간, 그리고 함께 나누었던 사랑은 처음에는 부재의 아픈 증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긴 애도의 시간을 지나면서 그것들은 조금씩 다른 얼굴을 갖는다. 기억이 되고, 삶의 일부가 되고, 다시 살아갈 힘이 된다.
결국 애도의 끝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부재를 지워내는 법이 아닐지도 모른다. 부재와 함께 살아가는 법이다. 그때 빈 방은 더 이상 텅 빈 곳이 아니다. 떠난 사람의 시간이 남겨진 사람의 삶으로 천천히 건너오는 장소가 된다. 문 하나가 닫혔다고 해서 모든 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이 있다.
그리고 그 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삶을 바라본다.
🎨 작품 캡션
빌헬름 함메르쇼이(Vilhelm Hammershøi, 1864~1916)는 당대 유럽을 휩쓸던 인상주의의 화려한 색채나 아방가르드의 실험적 소동으로부터 철저히 비껴 서 있던 화가였다. 코펜하겐의 오래된 거리에 은둔하며 자신만의 고요한 세계를 구축한 그의 삶은, 그림처럼 단조롭고 절제되어 있었다. 이 고독한 예술적 여정의 중심에는 그의 아내이자 유일한 뮤즈였던 이다 일스테드가 있었다. 《스트란드가데의 실내》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아파트 내부를 그린 작품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열린 문과 등을 돌린 인물, 극도로 절제된 색조를 통해 평범한 생활 공간을 깊은 침묵과 영원한 응시의 공간으로 승화시켰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빌헬름 함마르쇼이 그림 두 점만 잘 감상하고 갑니다. 늘 편안하시길요~ 아미타불 _()_
그림 두 점이 아니라 1점! 두번째는 함메르쇼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본 디테일입니다. 늘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