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괜찮아
김 영 희
“자, 이제 눈을 떠 봐요. 어때요? 불편하지는 않나요?” 살짝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거울 속에 한 여자랑 눈이 마주쳤다. 예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어색하고 낯설다. 긴 속눈썹까지 붙이고 진하게 화장한 얼굴이 ‘나’ 아닌 듯한 내 모습이다.
훌라댄스에 푹 빠져 사는 친한 후배가 우리 집 가까운 문화센터에 훌라댄스 강좌가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나한테도 잘 맞을 것이라고 배우기를 권했다. 몸치에 박치인 내가 춤을 배운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훌라는 하와이 전통 춤으로 꽃, 바람, 파도, 사랑, 미소 등 자연과 감정을 다양한 손과 발동작으로 표현하는 춤이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음악에 맞추어 천천히 움직이는 동작들이 부담스럽지 않고 초보자도 쉽게 따라 출 수 있는 춤이다.
문화센터에 등록하고 일주일에 2번씩 4개월을 열심히 배웠다. 그러던 중 교통사고가 났다.
오래전부터 좋지 않았던 척추 협착증이 사고로 충격이 가해져 일상생활이 불편했다. 몇 년 전부터 의사의 적극적인 권유가 있었지만 계속 미루어 왔던 헬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워낙 운동을 싫어하는 체질이라서 중도에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1개월만 등록하고 다녔다.
퇴근하는 길에 매일 헬스장으로 가서 1시간 정도 척추 근육 강화에 도움이 되는 운동을 규칙적으로 했다. 꾸준히 하다 보니 요통도 덜하고 체중 감량도 되어서 전체적인 건강 상태가 좋아졌다. 헬스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의 효과를 체감하니 재밌고 즐거웠다. 내가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 예·체능은 나에게는 넘어야 할 큰 산이었다. 음악 실기 시험으로 악기를 연주해야 하는데 너무 떨려서 연습했던 만큼 실력 발휘 못 했다. 체육 시간에는 운동이 싫어서 주번 대신 여러 차례 교실을 지켰었다. 결국 실기 점수는 언제나 학과목 평균 점수를 낮추는 주범이었다.
지금껏 피아노, 플루트, 기타, 캘리그라피 등 많은 것을 취미로 배웠지만 딱히 잘하는 것이 없었다. 운동 역시 탁구, 수영, 요가, 골프 등 다양한 스포츠에 도전해 봤지만, 좋아하거나 재미있는 종목이 없었다. 지역 도서관 강좌도 여러 강좌를 틈틈이 등록해서 수강했지만, 한 학기 수강 기간이 종강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훌라댄스 또한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만둘까 하다가 “아니지, 허리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무조건 수강 기간은 채워야지.”하는 생각에 꾸준히 참여했다. 퇴근 후 헬스와 훌라댄스 두 개의 강좌를 다 배우는 것이 시간상 무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훌라댄스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나는 무엇을 가장 좋아하고 잘할까?’
대학 입시를 앞두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점심을 먹은 후 잠깐 소화 시키고 머리도 식히려는 생각에 소설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 책의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후에야 내려놓았다.
책 읽기 좋아하고 중·고등 시절 방학 숙제로 독후감을 써 내면 종종 칭찬 받기도 했다. 일기 쓰기도 지속적으로 써 왔었기에 당연히 문과적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수필 강좌를 들으며 어쩌면 내가 이과적인 성향이 더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다른 문우님들의 글 속에 녹아 스며들어 있는 문학적 표현과 다방면의 지식이 담겨 있는 글을 접할 때마다 ‘아! 나하고는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나는 전공도 내 의지와는 다르게 이과 공부를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혈액형, 다면적성기질 검사, MBTI 등 여러 가지 자료를 가지고 타인을 알아가고 자신을 표현하는 참고로 사용되기도 한다. 어떻게 통계학적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나와 타인의 성격이나 성향을 판단할 수 있을까? 지금껏 여러 경험치로도 나는 나의 성향을 잘 모르겠다. 요즈음 나 자신에게 계속 던지는 질문이다.
진하게 화장하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6명이 한 팀이 되어 연습해 온 춤을 선보이는 무대다. 무대 뒤편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떨린다는 다른 팀원을 다독이며 파이팅을 외쳤다. 순서가 되어 무대에 오르고 보니 객석에 수많은 까만 눈들이 일제히 나만 보는 것 같았다. 4분 30초의 시간이 3배속의 찰나의 순간으로 지나갔다.
공연장에는 팀원들이 두 대의 차량으로 이동했었는데, 공연이 끝난 후에는 내가 타고 왔었던 차가 아닌 다른 팀원의 차로 내 차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타고 온 차에서 내리며 차 문을 닫는 그 순간 그때서야 머릿속을 스치는 차 열쇠의 행방. 아차! 차 열쇠를 둔 가방을 공연장으로 출발할 때 타고 왔던 차에 두고 왔는데…….
학창 시절 어떤 생각에 빠지게 되면 그 생각에 몰두하느라 일상생활 속 사소한 것들을 종종 놓친 경험이 많았다. 그때마다 ‘난 왜 이럴까?’ 고민했었다. 그나마 다행히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해서 큰 문제는 없었다. 성인이 된 후 사회생활 속에서도 업무적으로 책임 있는 일들은 실수하거나 빠뜨리지 않아서 직장 생활도 무난하게 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학생을 가르칠 때 새롭고도 중요한 것들이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실수투성이인 내가 수업하는 그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었고, 가르치면서 느낀 그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 경험으로 사람은 누구나 각기 잘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는 시간적 여유도 있고 실수의 경험이 쌓여서 요령도 생겨 실수를 덜 했었는데…….
한 손에는 꽃다발을 다른 손에는 가방과 우산을 들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늦은 밤에 택시 타고 차 열쇠를 가지러 거리를 왕복하면서 배시시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렇지 무언가 살짝 어설프고 실수해야 나지.’
지금껏 소소한 실수를 했었지만, 크게 어긋나거나 잘못된 일은 없었기에 ‘그래도 괜찮아!’ 나에게 책망이 아닌 위로를 건넨다.
이번 공연을 끝으로 훌라댄스도 접으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아니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지?” 그냥 끝까지 될 때까지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그저 춤추면 즐겁고 행복해지는데…….
춤 선이 예쁘지는 않았지만 동작을 순서에 맞게 틀리지 않고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팀원들과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 주며 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는 뿌듯함으로 가득 채운 하루였다. 딸이 들고 온 꽃다발을 안고 환하게 웃으며 딸과 함께 행복한 순간을 또 하나의 예쁜 기억으로 남겼다.
내 곁으로 살며시 다가온 가을이 소곤소곤 속삭이는 듯한 이슬비가 내리는 그 밤의 흥분과 화려한 의상을 비추던 조명의 빛이 가슴속에서 반짝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