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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4일
말씀: 창39:1-3
제목: 형통한자
도로로 막 달리는데 카메라가 있어서 최대한 속도를 줄이고 달렸는데 카메라에 펵 하고 찍혔습니다. 이상하다 속도를 최대한 줄이고 달렸는데, 다시 한 번 가보자 그래서 돌아서 다시 가는데 이제는 제 규정에 맞추어서 달렸습니다. 그런데도 펵하고 사진이 찍히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고집이 있지 않습니까? 삼세판의 고집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이제는 누가 시비를 못 걸 정도로 천천히 달렸는데 또 카메라에 퍽하고 찍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카메라가 고장이 낫구나 괜히 고생했네’그러면서 갔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고지서가 날라 왔는데 교통위반고지서입니다. 그것도 석장이나 날라 왔습니다. 이게 웬일인가 하고 뜯어보니까 내역서에 과속이 아니라 ‘안전펠트 미착용’으로 고지서가 날아 온 것입니다.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이런 꼴을 당하니다.
창11:1‘온 땅이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8절‘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노아홍수 이후에 사람들이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 하나의 아름다운 장점을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에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도록 언어를 분리시켜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이 말이 통하지 않아서 흩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말이 통해야합니다. 부부와도 말이 통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아이들이 부모와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그때부터 친구들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부모와는 거리감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부부도 서로 대화가 없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흩어지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젊은 목사님이 기독교방송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분의 어머니는 칠십 둘이신데 아주 늦게 막내를 낳았습니다. 그렇다보니까 다른 친구어머니는 젊은데 자기 어머니는 늙었단 말입니다. 세대차이가 다른 부모보다 더 크게 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서로 말이 잘 안통하게 되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이 분이 서울에서 공부하고 어머니는 제주도에 계신답니다. 제주도에서 전화가 올 것 같으면 늘 하는 소리가 ‘밥 먹었냐’6.25끝 난지가 얼마인데 ‘ 밥 먹었냐’가 걱정입니다. 그리고 ‘전화비 많이 나온다 전화 끊자, 밥 꼭 챙겨 먹어라’늘 이런 식으로 전화가 오고 가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어머니께 전화가 올 때 내심, ‘막내아들아 사랑한다’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늘 ‘밥 먹었냐’이르니까 한 쪽 구석에는 늘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운 것이지요. 그런데 이 분이 단기선교를 마치고 말라리아에 걸렸을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로 밥을 재대로 못 먹고 해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답니다. 어머니 걱정 끼칠까봐 평소에는 아파도 전화하지도 않고 힘들 때 도 전화를 안 하는 편인데 그 때는 너무 힘들어서 어머니께 전화를 했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애 밥 먹었냐’그런데 그날따라 그 말을 들으니까 두 눈에 눈물이 쏟아지더랍니다. 왜냐하면 ‘애 밥 먹었냐’ 이 소리가 ‘아들아 사랑한다’이렇게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엄마가 언제나 전화할 때 ‘밥 먹었냐’하는 소리가 ‘사랑한다’하는 소리인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제야 비로소 대화가 통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의 수많은 하나님의 언어에서 ‘그 말씀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구나 이 말씀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복 주시는 말씀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니까 세상에서 하나님과 떠난 삶, 흩어진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과 통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기도 중에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우리를 고생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받은 치욕과 아픔과 고난을 너희들도 받아봐야 내 마음을 아느니라. 이런 차원에서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랑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부모가 고생을 하고 힘들게 살았는데 그 고생과 힘듦을 자식에게 그대로 물러주기를 원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모가 고생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부모가 피 눈물 흘리며 살아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 자식들을 위해서입니다. 자식들 행복하게 부모처럼 그렇게 살지 말고 축복 속에 행복하게 살게 하기위해서 고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녀에게 유산과 교훈을 물려주기 위해서 연단과 훈련을 시킬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에게 끊임없이 공부하라고 닦달하고 감시하고 야단치는 것이 자녀를 힘들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물러주는 그 재산을 관리하고 분별력 있게 잘 사용하게 하기위해서 받아야할 연단과 훈련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구원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평강과 화평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 무거운 짐인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지신 것입니다. 그 모진고통을 참아내시며 그 혹독한 수치를 감내하셨던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를 선물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축복의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그 십자가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라는 것임을 아셔야합니다. 이런 귀한 은혜를 알 때, 그 말씀이 통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비전을 가지라고 설교할 때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설교가 안 될 만큼 요셉은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도 요셉처럼 큰 꿈을 가지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미국 같은 곳은 요셉이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에 ‘철수’라는 이름만큼 흔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내 아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꿈을 크게 꾸기를 바라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 아닙니까? 그리고 여러분들도 젊었을 때 꿈을 꿀 때 요셉만큼은 다 들 꿈을 꾸지 않았습니까? 이 요셉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나 꿈을 꿀 수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는 요셉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우리는 요셉에게 집중되다 보니까 이름도 요셉이라고 짓고 기도도 요셉처럼 되게 해 달라고 기도도하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을 요셉 되게 한 분은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요셉 되게 하셨다면 우리가 요셉에게 집중해야 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요셉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꿈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형통하심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2절, 3절 23절, ‘형통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속 요셉을 묘사하면서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케 하셨다’ ‘그는 형통한 사람이다’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꿈을 이루어주시는 형통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따지고 보면 요셉보다 형통함이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요셉이 정말 형통했습니까? 16세 때 구덩이에 빠트려 놓고 ‘죽이자’고 형들이 서로 이야기합니다. 형제에 의한 인신매매가 인류 최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타국에서의 삶은 쉬운 삶이 아닙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데서 그 고독감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디발 집에서 인정을 받고 모든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됩니다. 곳간의 열쇠를 요셉이 가지고 있을 만큼 신임을 받고 이제 좀 허리 펴고 살만하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합니다. 타국에서 외롭고 고독한 삶속에서 유혹은 뿌리치고 힘든 상황임을 우리는 아셔야합니다. 군대에 있으면 부모 품을 떠나 있지 않습니까? 외박이라도 나가서 돈을 없고 시내를 배외하고 있는데 아줌마들이 ‘군인아저씨 술 한잔 합시다’그러면 그거 뿌리치기 힘듭니다. 대충 새겨서 들으세요. 이상하게 적용하지 마시고, 이처럼 요셉의 상황이 그랬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뿌리치고 나오잖습니까?
그리고 사람이라는 것은 보상심리가 다 있습니다. 무엇인가 잘 하거나 무엇인가 기특하게 헌신을 한다든지 믿음을 보였으면 보상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도 자신이 생각할 때 얼마나 우쭐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옥이었습니다. 요셉의 죄목이 무엇입니까? ‘강간미수범’입니다.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고 바로 살고 성실히 살고 해서 이 땅에 보상이 100%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직하게 살아서 더 힘든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와 통하는 것입니까? 세상과 통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통해서 요셉이 형통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는 그의 삶을 조명해 보면 요셉의 선택과 노력에 의해서 승리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신 삶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형통임을 아셔야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알고 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형통한 형통과 세상이 요구하는 형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의 방법에서 형통함이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심령이 되시길 바랍니다. 본문에서 세상적인 형통에 찌들려 있는 우리가 오늘 요셉을 통해서 정말 중요한 형통이 무엇이냐를 아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의 형통은 하나님과의 형통입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세상과의 형통도 결국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통할 때 세상과 통하게 되어있지 하나님과 통하지 않고 세상과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요셉을 통해서 세 가지 형통에 대해서 좀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형통을 묘사하는 단어를 보십시오. 2절에 형통함에 무엇이 따라옵니까?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으로입니다. 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형통함을 이야기하며 ‘ 그 주인이 여호와와 함께하심을 보며’라고 되어있습니다. 23절 여호와께서 그의 삶에 형통케하셨더라 그 앞에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하는 전제가 꼭 붙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발견됩니까? 우리의 형통은 부자 되는 것이고 성공하는 것이고, 우리 아들 실력도 없는데 40일 금식했더니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이런 것이 형통입니다. 하나님의 형통은 강간범으로 감옥에 가든지 웅덩이에 빠져 죽음을 직면하든지, 네가 이라크에서 목이 잘려 비참한 자리에 처하든지, 정직하게 살다가 사업이 폭삭 망해가지고 세상에 이런 비참한 삶을 살아가든지, 아픔의 고통이 죽음의 웅덩이에 빠지는 아픔을 당해도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이 형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얼마나 사이비형통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까? 왜 이런 것이 진정한 형통이냐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훈련과 연단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도 숫자로 계산하거나 숫자로 목회를 잘 했다 못했다 평가할 수 없습니다. 수천 명 모이고 수만 명모여도 그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거나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십 명 모인다 할지라도 그 숫자에 개의치 안이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 교회가 형통한 교회인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교회조차도 이런 사이비형통을 쫓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통의 기준이, 하나님의 복의 기준이 너무나 인본적이고, 숫자적이고 물량적입니다. 그것이 교회에서부터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외적인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인테리어가 굉장히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외형적인 것 외향적인 것이 중요한 이 시대에서 살면서 신앙이 교회의 질서와 믿음이 세상적인 측면에서 융화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흔히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머리가 되게 해 주세요’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예성이가 싹수가 있는 것 같아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사람들 앞에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몇 번 기도했더니 싸가지는 점점 없어지고 머리만 커집디다. ‘세계를 주도하는 자녀가 되게 해 주십시오.’우리가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세계’를 빼고 하는 경우가 그의 없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 이 말입니다. 물론 이런 기도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덧붙여서‘이 아이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동행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함으로 형통한 삶이 되게 해 주십시오’이런 기도가 사실 필요하고 중요하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이 퀑잡는 것이 매다, 모로 가도 서울만가면 된다 하는 결과론적인 성공 론을 외치며 그 과정이 불법과 부정을 저지르고도 성공만 하면 된다는 그런 생각이 지배적인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자녀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삶을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며 하나님이 세우는 복된 삶인가를 아셔야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함으로 내주함으로 부정을 저지를 수 없고 정직하게 행하며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형통이며 복이라는 것을 가르쳐야합니다. 남을 짓밝고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부를 축척하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은 자녀 되기를 바래야합니다.
진정으로 자녀들이 요셉과 같이 되기를 소망한다면 구덩이에 빠져 살인의 유협을 느끼고, 종으로 팔려가고, 강간미수범으로 교도소에 가더라도 하나님의 형통함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렇게 바라고 그렇게 살아야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오해하는 부분이 많은데 그 중에서 능력이라는 측면에서도 오해를 굉장히 많이 하는 부분입니다. 성경의 능력은 탁원함이라기보다는 초월성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빌4:13절‘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탁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맥을 살펴야합니다. 단어만 보면 안 됩니다. 11절을 보아야 이 능력을 이해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런 비결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사업에 쫄딱 망해도 그 망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고통과 두려움이 있겠지만 그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식당을 개업하면서 엄청난 액자 속에 말씀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하는 문구는 ‘하나님 우리 식당에 손님 안 보내주어도 괜찮습니다. 장사 안 되도 괜찮습니다. 망해도 괜찮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통은 사업이 잘 되고 자녀가 잘 되고 무쇠처럼 건강하고 이런 것을 형통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향한 관계가 파괴되지 않고 하나님께 버린 봐 되지 않고 주님이 늘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자! 잘 들어보십시오. 이런 말을 제가 하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듣느냐하는 것입니다. 혹시 이질감이 느껴지십니까? ‘말씀은 그렇게 해도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어’하는 이론적인말씀으로 들리십니까? 이 말씀이 굉장히 부담스럽습니까?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저도 세상적인 영광과 부가 여러분들에게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형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왜 알레르기반응이 생기느냐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상과 통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씀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흩어져서 하나님과 멀리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능력과 은사 면에서 탁월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여정의 삶을 살았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탁원한 능력과 은사를 자기를 위해서 전혀 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탁월함만 추구하다가 허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절략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합니다. 자꾸 탁월함만 추구하니까 교회에서 상처받고 말씀에서 상처받고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최근에 전교 일등 하는 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이유가 스트레스랍니다.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는 탁월함이 교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이 지배하는 축복된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환경에도 상처받지 않고 어떤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강간미수범으로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강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야합니다. 이런 강함은 미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연약함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마저 탁월함, 탁월함 이런 것을 강조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탁월한 사람이 교회에서 힘을 쓰면 안 됩니다. 그 질서가 세상적인 힘으로 원리로 삼으면 안 됩니다. 원래교회는 세상에서 받아주지 않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교회에는 고시합격자가 7곱명이나 되는데 세상에서 힘쓰지 못하고 낙오자들이 교회 와서 장의자에 누워 낮잠만 잔다고 질책을 하는 것입니다. 왜 교회의자가 긴 줄 아십니까? 세상에서 쪼다들이 교회 와서 잠자라고 긴 의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출세한 사람이 힘을 쓸 수 없어서 기가 죽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이곳은 쪼다들이 모여서 능력 받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세상에서 깨어지고 의지할 때 없고 힘들 때 교회 와서 새 힘 얻고 세상에 나가서 살다가 또 깨어지고 쓰러지면 또 교회 와서 새 힘을 얻고 영성으로 채워 세상에서 승리하는 그런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탁월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강조해야 되고 낮은 자가 높임을 받은 그런 곳이기에 탁월함이 자리를 붙일 수 없는 곳입니다.
세 번째 형통한 삶은 형통의 결과로 내 주위의 사람들이 유익함으로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형통은 그 형통으로 인하여 주변사람들이 받아 누려야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형통과 그리스도인의 형통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형통은 자기가 가지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과 욕심으로 나타나지만 그리스도인의 형통은 나누어주는 데 있습니다. 창39: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우리가 진짜 형통을 누리고 계시다면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형통을 누리고 있느냐를 점검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고 성장하면 그것이 어디에 영향을 끼쳐야 합니까?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영향을 끼쳐야하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 받으면 누가 좋아져야하느냐 이 말입니다. 내 이웃이 좋아져야합니다. 내 주변이 좋아져야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변해서 좋아지는데 당연히 주변이 좋아지고 칭찬이 있고 나눔이 있게 됩니다. 남자들이 문제가 많습니다. 남의 여자에게는 그렇게 신사적이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유머있고 그러면서 집에만 오면 입 꼭 다물고 짜증을 내고 때로는 구타까지 하는 이런 남자가 은혜를 받고 아내 귀중함을 알고 변화가 되었다면 누가 지금 덕을 보고 있는 것입니까? 아내 아니겠습니까? 이게 형통의 결과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 주변사람이 해택을 누려야하는데 그 은혜가 나누어져야하는데 이상하게 은혜만 받으면 아나 무인이 되고 막무간이 되고 칼날을 세워서 성도들의 조교가 되는 것입니다.
설렁탕가게 주인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심방을 가니까 그 주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손님들에게 주님대접 하듯이 대접을 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이 집 주인이 모든 것이 최고를 쓴다고 합니다. 고기 뼈도, 양념도, 김치도,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쓰는데, 왜요 주님께 대접하면서 시원찮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입니다. 뼈를 우려내면 24시간 우려내는데 색깔이 진한 흰색으로 나타나야하는데 그날따라 누른색의 국물이 우러나더라는 것입니다. 하도 이상해서 거래처에 연락을 하니까 당황하면서 뼈가 잘 못 배달되었다는 것이죠. 어떻게 합니까? 장사는 해야겠고, 뼈를 그을려면 24시간의 시간이 필요하고 장사는 지금 해야겠고 황당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뼈를 공급하는 거래처에서 하는 말이 ‘사장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지금 급하니까 오늘 하루만 이렇게 해 보세요. 커피의 프림있지 않습니까? 그프림을 타서 섞어 보세요 그러면 흰 색의 곰국물이 될 것입니다.’ 이 사장이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문을 닫고 이렇게 문밖에 이렇게 글을 쓰서 붙였습니다. ‘오늘은 재료가 좋지 못하여 하루 쉽니다.’여러분 이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통한 삶을 사니까 그 동네가 정말 좋은 진국의 설렁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동네가 형통의 결과를 누리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최초로 복음이 들어올 때 왕손의 마부가 예수를 믿었답니다. 하루는 이 마부가 왕손을 보시고 먼 길을 가고 있는데 이 마부가 너무 복음을 이 왕손에게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분으로 보면 말도 붙일 수 없는 그런 위치인데 너무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나리 예수님 믿으시죠’그랬더니 왕손이 그 소리를 듣고 거들먹거리면서 비아냥되면서 ‘애 이놈아 네가 예수를 믿으면 양반이라도 만들어 준다드냐?’그러니까 그 마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리 믿음의 도리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마부노릇을 더 잘 해야 합죠’우리가 갈등하는 것이 이것 아닙니까? 나 십일조 잘 하는데, 나 주일성수 이렇게 잘 하는데 왜 나는 맨 날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이게 우리의 불만 아닙니까? 왜 나는 쌍놈으로 살아야 되냐고, 왜 나를 양반으로 만들어주지 않느냐고 이것이 우리가 갈등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믿음의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니랍니다.
마무노릇 잘 하는 것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위치에서 우리의 삶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서 예수 잘 믿는 증거가 마부노릇 잘 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그 가정과 사업과 직장이 복을 받아 형통한 은혜가 임하는 축복이 약속되어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러는 것 아닙니까? ‘내가 보낸 곳에서 마부노릇 잘 해주어서 고맙다. 네게 잊어지지 않을 사라지지 않을 영광과 상급을 네게 주리라’ 이것 아닙니까? 아내의 자리, 남편의 자리, 직장에서의 자리, 자존심 상하고 힘들고 어렵지만 내 위치에서 마부노릇 잘 해서 자녀가 형통함을 받은 은혜와 내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가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형통이라는 것은 먼저 하나님과 통해야합니다. 하나님과 통하지 않고 먼저 세상 것과 통하려고 하니까 욕심대로 세상방식대로 살다가 영적인 삶이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서 그 분이 주시는 것이 세상적인 면에서는 망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망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에서 실패라 할지라도 그것이 실패가 아니며 세상에서 낮아짐이 진정으로 낮아짐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이야말로 채색옷을 벗어버리게 하셨습니다. 채색옷이란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귀하게 대접받고 일도 하지 않고 대우만 받는 위치를 의미합니다. 이런 옷을 벗어버리게 하시고 종의 옷을 입히시고 범죄자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왜 입니까? 세마포 옷을 입히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늘 종의 옷과 죄수의 옷만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연단하고 훈련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세상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행복한 삶, 형통한 삶, 평강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고 그 나라를 위한 삶을 누리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충만함을 채워나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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